83화. 바람은 끊어지지 않는다 (1)
강호야 언제나 바람 잘 날이 없었지만, 이번처럼 거대한 사건이 난 적도 드물었다.
무림공적.
백도와 흑도, 나아가 새외 무림을 가리지 않고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네 글자다.
수많은 살인마와 광인이 날뛰는 강호에서, 임시 무림맹의 이름으로 무림공적의 낙인이 찍힌 자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근 백 년 동안 무림공적으로 지명된 자는 열을 넘지 않았다.
그만큼 무림공적이란 낙인은 함부로 찍히지 않는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번 세대 무림공적으로 낙인찍힌 자는 ‘한 사람’이 아니라 한 단체였다.
구주명가.
삼백 년 전, 사방무제와 함께 혈교지란을 종식하고 중원에 뿌리를 내렸던 명가는, 무려 이백 년에 가깝도록 천하제일이란 명성을 날린 철옹성과 같은 무가였다.
그런 무가가 무림공적으로 찍혔다. 백도 무림의 최고 명문이 무림공적이 된 것은 무림사 최초였다.
물론 무림공적이 되었다고 해서 명가 소속 무사들이 전부 죽는 것은 아니었다.
무림공적이란 낙인은 그 세력의 모든 움직임을 봉쇄한다. 일단 잡아들여서 사실관계를 확인한 연후에, 합당하다고 판단되면 그때부터 확실한 무림공적이 된다.
애초에 쉬이 발동되는 명령이 아니었다. 워낙 규격 외의 특성을 지닌 만큼, 함부로 낙인을 찍지도 않는다.
다만 용의자의 도주 우려를 방지할 목적으로 무림 전역에 그 사실을 알린다.
다소 위압적인 명령이었다. 하지만 어지간한 살인마도 무림공적이 되지 않는 걸 생각하면, 그만큼 명가가 저지른 잘못이 크다는 뜻이기도 했다.
강호가 숨을 죽였다.
임시 무림맹이 열릴 정도로 큰 사안이었다. 긴 세월 천하제일의 명성을 날렸던 명문가의 추락, 강호인들의 귀추가 주목되는 일대 사건이었다.
하남 허창 구주명가 본가.
그 주변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무인이 모여들었다. 한데 그 무인들의 면면이 보통이 아니었다.
도승(道僧)의 복장을 한 승려, 도사들과 고급스러운 무복을 입은 무사들이 가득했다. 그 숫자만 얼추 오백에 가까웠다.
오백이나 되는 인원이 명가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으니,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들어갔는지는 관계자가 아니면 알 수 없었다.
모용군은 담담한 신색을 유지하며 명가로 들어갔다.
그러자 외원 안쪽을 지키는 무사 일동이 고개를 숙였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음, 수고하고 있구먼.”
시원하게 인사를 받아 준 모용군은 외원을 지나 내원으로 들어섰다.
그가 들른 곳은 내원의 한 건물이었다. 유독 큰 건각 내부엔 은은한 약향이 진동하고 있었다.
쌕…… 쌕…….
그곳에 초로의 사내가 옅은 숨을 몰아쉬며 누워 있었다.
온몸이 붕대로 칭칭 감겨 있다. 심지어 목과 얼굴에도 깊은 자상이 났는데, 아직도 상처에 붉은 기색이 가득했다.
그는 바로 명천이었다.
모용군이 혀를 찼다.
“끔찍하게도 당했군.”
대충 사건의 전말은 들었다.
강소성 연가로 향하려던 명천을 용케 알아챈 연호정과 창응대가 앞을 가로막았다고 했다. 와중에 접전이 있었고, 운이 나빴는지 명천이 이 꼴이 되었다고 했다.
“허! 새로운 신공이라? 새로운 무공을 연성 중에 당했다니, 운도 나쁘군. 안 그런가?”
모용군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각진 의자에 앉은 중년 사내가 있었다. 모용군이 들어올 때부터 숨도 못 쉬고 있던 사내, 명우산이었다.
모용군이 웃으며 말했다.
“자네들 참 너무들 했네. 선조의 무공을 캐내려고 그 많은 인부를 죽이다니. 그 수가 물경 팔백에 달한다지?”
“…….”
“어찌 그런 무도한 짓을 벌였나. 그 비밀 한 점 새어 나가는 게 뭐 그리 중요한 일이라고.”
명우산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다. 모용군이 대회의에서 터트린 가장 강력한 한 방은 바로 명가가 죄 없는 인부들을 학살한 사건이었다.
기실, 백도 무림이라도 어지간한 흠이나 비리 정도는 눈감아 주기 마련이다. 구파일방이나 칠대세가쯤 되면 더더욱.
하지만 민간인을 건드린 건 얘기가 다르다.
관부와 무림, 관림상호불침(官林相互不侵)이라는 조약이 생긴 지가 수백 년이었다. 하지만 간혹 관부가 무림의 일에 끼어들 때가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게 바로 양민들이 해를 입었을 때다.
무림인이 죄 없는 백성을 죽였다? 이는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일이었다.
명목상 무림인도 그렇지만, 밭을 일구고 사는 백성들은 제국의 신민(臣民)이자 황제(皇帝)의 소유이기도 하다. 보여 주기식으로라도 끼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무림은, 관부가 이쪽 일에 끼어드는 것을 싫어했다.
즉, 민감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애써 쉬쉬했다면 모를까, 공개적으로 논의된 이상 무림공적이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쯧쯧. 나였다면 차라리 내 그늘 아래 두었을 걸세. 평생 먹고살 수 있는 제대로 된 일자리와 함께.”
“…….”
“감시하기도 좋고, 자잘한 일에 써먹기도 좋지. 한데 자네들은 그들을 품을 생각은 하지 않고 싹 죽여 버렸군.”
“…….”
“그것도 모자라 선조의 무공이랍시고 익힌 무공이 마공(魔功)이라?”
순간 명우산의 눈이 흔들렸다.
“이것은…… 마공이 아닙니다.”
“하하! 사마기(邪魔氣)를 풀풀 풍겨야만 마공이라던가?”
“…….”
“사람의 정신을 좀먹는 무공일세. 그건 여기 누워 있는 가주와, 도주하던 장로 몇 명이 잘 증명해 주었다네.”
“…….”
“아직 잡지 못한 놈들이 몇 있네.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모용군이 넉살 좋게 침상에 걸터앉았다.
“직계든 방계든 한 식구가 아닌가? 도주한 자들은 잡히면 이유를 불문하고 참살당할 걸세. 하지만 자수하면 적어도 죽지는 않겠지.”
명우산의 눈이 깊어졌다.
“최소 뇌옥 십 년. 게다가 단전도 폐하겠지요.”
“죽는 것보다는 낫겠지. 평생 불안에 떨며 사는 것보다도 낫고.”
“…….”
“인부들을 묻을 때, 이 정도 결말도 예상하지 못했나?”
명우산은 말없이 입술만 깨물었다.
모용군의 눈이 일순 차갑게 변했다.
“제안 하나 하겠네.”
“……?”
“폐관 수련 중이던 명가의 대공자가 사라졌다는 걸 알고 있을 게야.”
명우산의 눈이 흔들렸다.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사소한 반응이었고, 만족스러운 반응이기도 했다.
“알고 있구먼. 녀석이 어디로 도망쳤는지.”
“…….”
“우리, 일 빡빡하게 하지 마세나. 그놈이 어디로 도망쳤는지 말해 준다면, 자네와 자네 딸의 형량을 낮춰주겠네.”
명우산의 안색이 돌변했다.
“내, 내 딸도 뇌옥에 갇히는 거요?”
“아닐 줄 알았는가?”
모용군이 고개를 저었다.
“상부의 명령이었대도 마공을 익힌 아이일세. 게다가 그 아이, 연가의 대공자를 죽이려 했다더군.”
“그, 그것은……!”
“자네도 알지? 연호정 그 아이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용군이 고소를 지었다.
“악에 물든 위선자들을 상대로 당당히 승부를 건 최고의 후기지수. 가문을 지키기 위해 홀로 거대 단체와 맞선 강동의 젊은 호랑이.”
“…….”
“지닌바 무공과 용맹이 너무나도 뛰어나 소패왕(小霸王) 손책(孫策)의 환생이라고까지 불리더군. 와중에 지모도 대단하여 육손(陸遜)이 환생한 것 같다고도 하네.”
모용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하지. 무공, 지모, 대담함, 실행력. 무엇 하나 범상치 않은 것이 없어. 나 또한 그처럼 뛰어난 인재는 본 적이 없다네.”
“…….”
“내 말 알겠나? 현재 연호정 그 아이는 무림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열혈의 협객이라네. 어떤 의미론, 그 혼자서 명가를 무너트린 것이나 다름이 없어.”
명우산의 입술이 터졌다.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즉, 여론은 연호정을 죽이려 했던 자들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극형에 처하자고 날뛸 걸세. 자네 딸이라고 분노한 여론의 화살을 피해 갈 수 있을성싶은가?”
“나, 나는…….”
“잘 생각하시게. 내 대회의를 주최한 사람으로서 두 사람의 형량 정도는 충분히 만져 볼 수 있다네. 잘하면 단전만 폐하는 정도로 끝날 수 있어. 수감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얘기야.”
명우산이 명천을 바라보았다.
명천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아마 정신을 차린다 한들 얼마 못 살 것이다. 의원 말로는 수명이 극단적으로 줄었다고 했으니까.
명우산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가만히 명우산을 보던 모용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흘 후, 명가의 모든 무사는 무림맹으로 이송될 걸세.”
“……!!”
“임시 맹주도 뽑겠지. 뭐,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만.”
모용군이 명우산의 어깨를 두들겼다.
“사흘간은 근처 주루에 있을 것이네.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날 찾아오게나.”
이미 마음이 흔들렸음을 안다.
그렇다면 슥 빠지는 게 좋다. 제 발로 직접 찾아와 얘기할 때야말로 정보의 가치가 있는 것이니까.
물론, 그때는 오늘 했던 약속이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편히 쉬시게.”
건각에서 나온 모용군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후, 좀 덥지만 맑구먼. 좋은 하늘이야. 하하하!”
* * *
퍼억!
“꺽.”
트림 같은 신음을 토해 낸 가득상은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인사 똑바로 안 할래?”
“크흑! 아, 또 갑자기 왜 이러세요!”
빠각!
“으아악!”
가득상이 정강이를 잡고 펄쩍펄쩍 뛰었다.
노인이 혀를 끌끌 찼다.
“그래도 제법 거지답게 가르쳤다고 생각했더니만, 엄한 데 기웃거리다가 휩쓸려서 이런 대형 사고를 쳐?”
“대형 사고라니요? 이게 왜 대형 사고예요! 훌륭한 일이지!”
“이 새끼가?”
“…….”
“한 번만 더 대들면 비 오는 날 먼지가 나도록 두들겨 맞을 줄 알아. 알간?”
가득상이 목을 움츠렸다.
사부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 게다가 기분도 영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이럴 때는 설설 기는 게 상책이었다. 가득상이 바보처럼 헤실헤실 웃었다.
“헤헤, 그냥 그렇다고요.”
“으휴, 이 병신 머저리 같은 놈을 하나뿐인 후계자라고 키웠으니. 선조들께서 지하에서 통곡을 하시겠어.”
“……근데 이게 왜 사고예요?”
“이놈 새끼야. 대가리는 왜 들고 다녀? 이번 일에 네가 끼어 있다는 걸 어지간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데, 나중에 방주가 되면 사람들이 널 어떻게 생각하겠어?”
“……협의를 잘 지키는 거지?”
“에라이, 이 미친놈아! 백도 무림인 중에 구렁이 같은 놈들이 얼마나 많은 줄 몰라? 그놈들이 피곤하기 짝이 없는 네놈과 손을 잡겠냐고!”
가득상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럼 어떻게 하라고요? 명가가 저지른 짓, 다 들으셨잖아요? 그걸 그냥 놔두라고요? 그게 개방도가 할 짓입니까?”
가득상의 목소리는 살짝 격양되어 있었다.
이립이 넘은 나이에도 열혈인 그였다. 사부한테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아닌 건 아닌 것이다.
노인이 콧방귀를 뀌었다.
“네가 도운 줄 모르게 할 생각은 못 하고?”
“……예?”
“스스로를 철저히 숨겼어야지, 이 빈대만도 못한 놈아!”
“아…….”
“아? 허! 이놈이 어째 갈수록 멍청해지누? 누가 네 허파에 바람을 잔뜩 넣었냐? 그 연호정이란 놈이냐?”
“예?”
“연호정이란 놈이 네 허파에 바람을 넣었냐고!”
가득상은 잠시 눈알을 굴리다, 냉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사부님.”
“킁! 어쨌든 그놈, 보통 놈은 아니구먼. 아직 요 근처에 있다고?”
“예. 그 인간도 보통 박살이 난 게 아니라서요.”
노인이 턱으로 관도를 가리켰다.
“소문 자자한 호랑이 낯짝이나 보자. 안내해.”
“헤헤, 옙!”
“야, 근데 왜 그놈 별호가 광풍사냐?”
“몰라요.”
“지금은 호랑이라며? 사자 다음은 호랑이야?”
“제 말이요.”
“고양잇과인가?”
“변덕이 심하긴 하더라고요.”
“너 싫어하겠네? 넌 개 같잖아.”
“…….”
“가자.”
“왈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