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82화 (82/963)

82화. 천적(天敵) (7)

퍼어억!

명천의 몸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화르륵!

손에서부터 타오르던 기운이 팔목, 팔꿈치, 어깨를 넘어 순식간에 몸 전체로 번져 들었다.

쿵!

중심을 잡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는데 땅이 흔들렸다.

딱히 진각을 쓴 것도 아니요, 보법을 펼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흔들렸다.

하아아.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적당히 벌어진 입에서 허연 김이 피어올랐다.

우웅! 우우웅! 우우우웅!

맑은 살결 밑으로 투명한 붉은빛이 온몸을 휘돌았다.

치이이익!

현무기가 깜짝 놀라 신장으로 숨어들었다.

우우웅! 우웅!

몸 전체를 휘감은 붉은빛이 백호기를 만났다.

화르륵!

전혀 다른 기운인데도 왠지 모를 동질감이 느껴진다. 백호기가 일순 힘을 불리며 붉은빛을 감싸 심장으로 안착시켰다.

타닥! 타다닥! 화르륵!

피로 물든 장포의 가슴 한가운데가 동그랗게 타올랐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평소보다 훨씬 더 강하게 박동했다.

혈관을 쥐어짜는 힘이 무시무시하게 강해졌다. 한 번 짜낸 피가 찰나지간 전신을 수십 번 휘도는 듯했다.

뜨겁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체온이 상승했다. 인간의 몸으로는 버틸 수 없는 온도임에도, 붉은빛은 연호정의 체온을 더더욱 올려 놓았다.

치이이익!

연호정의 몸이 순식간에 흐려졌다. 극도로 뜨거워진 몸이 차가운 공기를 만나 수증기를 내뿜고 있기 때문이다.

명천, 그리고 사검들.

나아가 마차 뒤에 도열하고 있는 적룡군까지.

그들 모두가 연호정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움직이지 못했다.

‘……!’

당장이라도 검을 휘둘러야 한다. 지금 당장 죽여야 한다.

그들의 감정은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살의로 물든 감정 뒤에 해일처럼 짓쳐 드는 또 하나의 감정이 그들의 행동을 강제했다.

그것은 공포였다.

치이이이이익!

희뿌연 수증기 속에서 붉은 광채가 마구 명멸했다.

사아아악!

어느 순간 희뿌연 수증기가 걷히고, 그곳에는 붉은 기운에 둘러싸인 청년이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두근!

심장이 박동하는 소리가 모두의 귀에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두근! 두근!

연호정이 서서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휘이이이잉!

발밑에서부터 올라온 백색 바람이 그의 몸 전체로 번진 열기를 하늘 높이 쏘아 올렸다.

적백(赤白), 혹은 홍백(紅白)의 돌풍이었다. 태양신(太陽神)의 열기를 담은 서천(西天)의 바람이 기쁨에 울부짖었다.

“그래, 동천(東天)보다 네가 먼저 왔구나.”

주작(朱雀).

사신의 주작은 병오(丙午)의 화신(火神)으로 여름을 상징한다. 오장육부 중 심장(心臟)을 담당하며 생명력을 왕성하게 만든다.

백호는 폐장 능력을 극대화하여 강력한 체력과 근골, 막강한 회복력을 얻게 해 준다.

현무는 탁기를 뽑아내어 몸을 철저하게 보호함과 동시에 최악 중의 최선을 이끌 태세를 준비한다.

그러나 백호와 현무의 기운만으로 공방 능력과 신체 안정이 최고에 이르는 게 아니었다.

최고의 안전은 곧, 죽기 전에 죽여 생존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것이 전장의 무공이며, 살법(殺法)의 진정한 의의다.

천지간의 기를 받아들인 백호기가 주작기와 동조하며 폭발적인 출력(出力)을 만들어 낸다. 극도의 심폐(心肺) 능력 향상, 무한의 출력으로 빛살처럼 적을 불태우는 천살(天殺)의 기예를 구현해 내는 것이다.

그것이 주작이다.

죽기 전에 죽이고, 죽인 적을 또 죽인다. 사신무(四神武)의 무공 중 가장 빠르고, 가장 악랄하다.

연호정이 눈을 떴다.

훅!

명천은 순간 알 수 없는 갈증을 느꼈다.

덥다. 목이 말랐다. 몸 안의 수분이 몽땅 증발해 버린 것 같았다.

저 애송이가 눈을 떠 자신을 노려보자마자 그와 같은 느낌을 받았다.

“기다렸군.”

쿠우웅!

도끼를 든 연호정이 강인한 일 보를 밟았다.

백호군림이었다.

“금방 끝내 주지.”

명천의 얼굴이 재차 일그러졌다.

한층 더 신비로운 기도로 좌중을 압도했지만, 명천의 살기 역시 아직 죽지 않았다.

“무슨 개수작이냐!”

파아악!

명천의 육신이 사라졌다.

대단한 신법이었다. 이 정도 속도를 구현해 내는 신법은 온 무림을 뒤져도 흔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연호정의 눈엔 보였다.

명천의 움직임이, 그가 움직이기도 전에 향하는 방위가 붉은 선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가 어떤 무공으로, 어디를 노릴지까지도.

카아아아앙!

명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후방을 노린 참격을 같은 참격으로 받아친다.

엄청난 반응 속도였다. 하지만 그보다 대단한 것은 도끼에서 뿜어지는 파괴력이었다.

“어억!”

쾅!

명천의 몸이 훨훨 날아 땅에 처박혔다.

“이익!”

어떻게든 자세를 잡은 그가 재차 봉황비천검을 준비했다.

‘……?!’

명천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 뜨였다.

연호정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어디에?’

콰아앙!

“커헉!”

명천이 피를 뿜으며 옆으로 튕겨 나갔다.

퍼어억!

명천의 눈이 충혈되었다.

튕겨 나간 곳에서 나타난 연호정이 그의 복부에 주먹을 갈겼다. 주먹이 손목까지 파고들어 갔을 만큼 제대로 들어간 일격이었다.

“우웨엑!”

명천이 피를 토했다.

복부에서 타고 오르는 화기가 봉황기를 해체하며 오장육부 전체를 두들기고 지나갔다.

무시무시한 침투경이었다. 봉황기로는 막을 수가 없었다.

‘이, 이놈이 대체 어떻게?’

게다가 이 속도는 뭐란 말인가? 대체 언제 여기까지 달려온 거지?

명천이 이를 악물고 봉황수를 내쳤다.

콰앙!

애꿎은 장력이 땅을 부쉈다.

어느새 연호정은 그 자리에서 사라져 있었다. 삼 장하고도 한 자 거리, 봉황수의 피격 거리 바깥으로 벗어나 버린 것이다.

입이 떡 벌어지는 속도였다. 전투 영역 내에서만큼은 봉황비보다도 빠른 것 같았다.

“이것이 혈익휘천(血翼揮天)이다.”

신법이 아니라 보법이다.

적의 섬멸에 특화된 보법으로 폭발적인 힘을 이용, 극속(極速)으로 움직이는 걸 추구한다. 단순하지만 그만큼 빠르다. 사신의 보법 중 내공 소모가 가장 심한 보법이었다.

그리고 공격.

파아아아!

대기가 찢어지는 소리는 생각보다 훨씬 더 날카로웠다.

공기의 벽을 깨부수며 나아간 연호정이 어느새 명천의 측면에 섰다.

명천이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쩌저저저정!

두 사람의 병장기가 부딪치며 진짜 불꽃을 만들어 냈다.

‘크윽!’

명천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힘으로 압도당했다. 그리고 그 힘을 만들어 낸 것은 속도였으며, 그 속도를 가능케 한 것은 심장을 데운 주작기였다.

파아아아!!

명천의 눈에 연호정이 급속도로 확대되는 것이 보였다.

“이 개자식아!”

대검이 십자(十字)를 그렸다. 봉황비천검의 비봉십자인(飛鳳十字刃)이었다.

번쩍! 콰르릉!

십자 검기가 본인이 타고 온 마차를 완전히 부숴 버렸다.

위력적인 검공이었다. 침투한 주작기가 내공 운용을 흐트러트렸음에도 이런 무공을 구사한다. 과연 천하제일가의 가주다운 무공이었다.

‘역시 강해.’

광기에 사로잡혀도, 심리 싸움에서 밀려도, 내공 운용을 제한당해도.

그래도 명천은 강했다. 상대의 능력을 절반 이상 깎아 놓았음에도 정면 승부에서의 우위를 확신하기 어려웠다.

이것이 바로 칠대세가의 가주다. 천하제일가의 주인이었다.

그러나.

“너의 무공 역시, 종사(宗師)인 내가 거둘 것이다.”

퍼어억!

중단을 눌러 올려 친 연환비연장이었다. 명천이 피를 뿜으며 허공에 떴다.

매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던 연호정이 도끼에 주작기를 쏟아부었다.

현무는 방어기(防禦技)이고 백호는 공격기(攻擊技)다. 그렇다면 주작은 무엇인가?

즉사기(卽死技)다.

불꽃을 머금은 남천(南天)의 지배자, 화신(火神)의 재앙이 명천의 몸에 작렬했다.

퍼버버버벅!

“크아아악!”

대량의 선혈이 사방으로 튀었다.

후웅. 털썩!

명천이 땅을 굴렀다.

전신이 피투성이였다. 육 척 대부(大斧)의 참격으로 난자된 그의 몸은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죽지는 않았지만, 움직일 수도 없는 상태였다.

연호정은 당당히 섰고, 명천은 비참하게 땅을 굴렀다.

그렇게 승부가 났다.

“후욱!”

연호정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무리했다.’

명천의 검에 두 번이나 베였다. 혈맥을 파헤치고 뼈에 이를 정도로 깊은 검상이었다.

내상이 심한 상태에서 주작기를 깨웠고, 폭발적인 움직임으로 적을 제압했다. 눈앞이 핑핑 도는 기분이었다.

푸스스스.

딱 여기까지였다.

연호정의 몸에서 뿜어지던 신비로운 기파가 금세 잠잠해졌다. 삼신기(三神氣)가 흩어지고 있는 것이다.

멍하니 두 사람의 승부를 보던 사검들과 적룡군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이, 이럴 수가!”

명적량이 버럭 소리쳤다.

“뭣들 하고 있는 것이야! 당장 놈을 죽여 버려!”

“죽여라!”

사검들이 연호정을 향해 돌진했다. 후방에서 도열해 있던 적룡군 역시 도검을 뽑아 들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멈춰라!”

쾅!

한 줄기 벼락 같은 검기가 사검의 전면을 통제했다.

연호정이 고개를 들었다.

“대공자님! 괜찮으십니까?!”

연호정이 쓰게 웃었다.

“결국 봉인을 풀었군.”

화아악!

신모의 몸에서 장중한 기세가 피어올랐다.

본래 그가 갖고 있던 힘과는 완전히 다른 기운이었다. 연가 오대신공 중 하나, 용포신공의 발현이었다.

신모가 외쳤다.

“창응대는 대공자님을 보호하라!”

“존명!”

파바바박!

신들린 듯 압도적인 승부를 보여 준 연호정의 무공에 넋을 잃고 있던 그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비로소 연호정을 호위하기 위해 죽을 각오로 검을 뽑아 들었다.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안 좋은데.’

사검도 사검이지만 적룡군까지 막기는 벅찰 것이다. 아마 후방에 대기하고 있는 무인들까지 합류해도 난전(亂戰)이 벌어질 것이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 우렁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무림공적(武林公敵) 명가의 무사들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어라!”

“우아아아!”

적룡군의 후방에서 수백의 무사들이 전권으로 뛰어들었다.

놀라운 숫자였다. 하나하나가 절제된 신법을 펼치는데, 무척이나 노련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의 선두에는 가득상과 이철경이 있었다.

가득상이 재차 외쳤다.

“명가의 무사들은 모두 그 자리에서 꿇어! 너희는 무림공적으로 선포되었다!”

명적량의 얼굴에 경악이 드리워졌다.

“뭐, 뭐라고?!”

“임시 무림맹이 구주명가를 무림공적으로 선포하였다! 대항하면 너희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게 무슨 개소리냐!!”

가득상의 눈이 번뜩였다.

그가 품에서 서신을 들었다.

“구파일방, 칠대세가 수장들의 직인이 찍힌 정식 명령서다!”

“……!”

“당장 무기 내려놔! 하나라도 저항하면 이 시간 이후로 명가 소속 전원에게 추살령(追殺令)이 내려질 것이다!”

명적량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여덟 개의 매듭을 한 거지, 개방의 후개다. 그런 인간의 입에서 무림공적이라는 네 글자는 물론 추살령까지 언급되었다.

당황한 사검과 적룡군이 멍적량을 바라보았다.

‘이, 이런!’

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가득상이 입꼬리를 올렸다.

“안 내려놔?”

“……!”

“좋아, 너희 때문에 명가는 싹 목이 날아가게 생겼군.”

가득상이 이철경에게 말했다.

“이 문주! 당장 방장께 서신을 날리시오! 명가 전체에 추살령을 내리라고!”

“알겠소이다.”

명적량은 깜짝 놀랐다.

“자, 잠시만 기다리시오! 내려놓겠소! 내려놓을 테니 기다리란 말이오!”

“이 새끼야! 진작에 그랬어야지!”

가득상이 희희낙락한 얼굴로 연호정을 돌아보았다.

그가 슬쩍 엄지를 치켜세웠다.

“나 멋져?”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고생은 내가 다 했구먼, 뭘.”

“지랄하고 있네, 이 미친 인간이. 댁이 싸우고 싶다며?”

“할 말 없군.”

“낄낄낄.”

한참을 낄낄대며 웃던 가득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뭐 하는 거요?”

연호정이 도끼를 들고 일어났다. 한 걸음 옮기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좀 쉬지? 다 죽어 가는 것 같은데?”

“할 일이 남았소.”

“할 일? 뭔 할 일?”

“복수.”

“……어?”

연호정이 쓰러진 명천에게로 걸어갔다.

그의 눈빛이 포악한 살기로 물들었다.

“저놈이 내 사지를 토막 내겠다고 하더군. 생각해 보니 그 정도면 괜찮은 복수가 될 것 같아서 말이오.”

“……?!”

“미리 말하는데, 말릴 생각 마시오. 일부러 안 죽인 거니까.”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