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천적(天敵) (6)
연호정의 기세는 막강했다.
지이잉! 지이이잉!
한계까지 달아오른 백호기가 도끼날에 한가득 맺혀 있었다. 강철 본연의 색 위로 백색의 광채가 덧씌워지니, 그야말로 천장(天將)이 휘두르는 신병(神兵)처럼 보였다.
콰아앙!
명천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말도 안 돼.’
대검의 검날에 잔존하는 연호정의 기가 검기(劍氣)에 침투하여 검력 자체를 저하시키고 있었다.
명천이 소리쳤다.
“이놈! 이게 무슨 마공(魔功)이냐!”
“마공?”
연호정이 코웃음을 쳤다.
“마공은 네가 익힌 게 마공이겠지!”
콰콰쾅!
다시 한번 질주였다. 백호군림보, 연환전진의 폭풍 같은 돌진이 도끼의 무게감을 몇 배나 증폭시켰다.
꽈앙!
명천의 허벅지가 부풀어 올랐다.
이번 일격은 실로 무거웠다. 태산의 무게에 짓눌린 듯, 전신 근육이 당장이라도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명천의 눈가에 불그죽죽한 살기가 번졌다.
퍼어엉!
연호정의 몸이 주춤했다. 명천의 장력에 일격을 허용한 것이다.
일격필살의 공격을 마치 연환격처럼 풀어낸 그였다. 그만큼 기세가 출중했지만, 한 번 주춤하니 기파 전체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쾅!
명천이 거칠게 땅을 밟았다.
“감, 히.”
한 글자, 한 글자 띄어 말하는 목소리에 불길한 광기가 이글거렸다.
“천한 애송이 주제에 이 나를!”
몰아치는 공격이 워낙에 쉴 틈이 없었다. 게다가 상대의 진기엔 자꾸만 내공을 흩어 내는 기묘한 공능이 있었다.
그래서 개방하지 못했다. 새로이 얻은 힘을.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명천은 비로소 봉황신공(鳳凰神功)을 최대치로 개방할 시간을 얻었다.
콰앙!
들불처럼 타오르는 기세가 연호정의 몸뚱이를 그대로 집어삼킬 듯했다.
화르르륵!
실로 엄청난 기세였다. 치솟는 분노로 지닌바 힘을 모조리 발산하는 그였다.
무서운 화기가 사방팔방으로 번졌다. 기세가 어찌나 거센지, 살아남은 사검들도 십 장 밖으로 물러날 정도였다.
푸르르륵!
명천과 가까이 있던, 다리가 부러져 꿈틀대던 한혈마가 혀를 빼물고 죽어 버렸다. 코앞에서 터진 화기와 살기에 정신적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래, 그렇지.”
죽어 버린 한혈마를 내려다보던 명천이 광기 어린 미소를 베어 물었다.
“목을 자르는 건 언제라도 할 수 있지. 팔다리를 베어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꼬락서니 정도는 봐야 화가 풀리겠구나.”
봉황신공이 해방되며 품고 있던 살기와 광기마저도 정도를 넘어가 버린 것 같았다.
흉악한 살기를 줄줄 흘리는 명천의 얼굴은 가히 마인(魔人)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심지어 내뿜는 화기 자체도 무척이나 음습하고 어두웠다.
내공은 의념에 따라 일어나고 생성된다. 화기가 그리도 음산한 것은, 그만큼 그의 정신이 피폐해졌음을 뜻했다.
연호정이 현무기를 끌어 올렸다.
치이이익!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역시 강하군.’
현무기를 끌어 올리며 자연스럽게 북천십이벽까지 세운 그였다. 한데 공격을 받지 않았음에도 내공 방패의 표면이 마구 들끓고 있었다. 명천이 발산하는 화기가 그만큼 지독했던 것이다.
‘하지만…….’
위이이잉!
연호정의 두 눈이 명천의 내부를 꿰뚫어 보았다.
‘저 정도라면.’
단전에서 올라온 붉은 기운이 심장에서 용암처럼 들끓고 있었다.
정도를 벗어난 힘이다. 타 기운과 균형을 맞추지도 않은 채로 심장에 저 거대한 기가 몰렸으니, 반드시 자멸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한 줄기 붉은 실이 목과 인중을 가로질러 미간에 닿아 있었다. 주작기가 상단을 침범한 것이다.
심각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당장 죽지는 않는다.
그것이 연호정을 기쁘게 했다. 가짜 주작공(朱雀功)으로 자멸을 하는 것은 그도 원치 않았다.
후웅.
연호정이 부드럽고도 무거운 일 보를 밟았다.
땅을 밟았는데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마치 물이 스며드는 듯 조용하고 부드러웠다.
절대방어의 비술, 괴주부동(怪柱不動)의 보법이었다.
“뭐 해? 시간 아깝게.”
연호정이 손을 까딱였다.
“덤벼.”
콰아앙!
까딱거리던 손과 팔이 그대로 뒤로 튕겨 나갔다.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어느새 명천이 코앞까지 도달한 것이다.
‘빨라!’
엄청난 속도였다. 일순간 시야에서 완전히 놓쳐 버렸을 정도였다.
명천이 대검을 휘둘렀다.
쩌저저저정! 치이이익!
과연 현무기는 대단했다.
눈으로 보이지도 않는 쾌검을 어떻게든 막아 내고 있었다. 게다가 물은 불의 상극이다. 화기를 만난 현무기는 무섭도록 기질을 늘렸다.
후웅! 쿠우웅!
거인의 일격이었다. 도끼가 명천을 반으로 쪼갰다.
‘없다?!’
하지만 그것은 잔상에 불과했을 뿐이다. 도끼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갈랐다.
그럼 명천은?
퍼어엉!
연호정이 왈칵 피를 토했다.
등 전체가 불에 타는 듯 뜨거웠다. 무시무시한 힘을 자랑하는 장력, 봉황염수(鳳凰炎手)였다.
사검이 펼치는 봉황수와는 차원이 다른 위력이었다. 강력한 현무기로도 침투하는 화기를 제압하지 못할 정도였다.
연호정이 다시 괴주부동을 밟았다.
후우우우웅!
그의 몸 주변으로 육각 귀갑의 형태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동시에 명천의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콰콰콰쾅! 퍼어어엉!
빠르다.
빠르고 위력적이었다. 속도에서 나오는 힘을 그대로 검 끝에 실어 공격하는데, 그 무게감이 엄청났다.
울컥!
연호정은 또 한 번 피를 토했다.
상극(相剋)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이 정도 위력의 주작기라면 현무기로도 잡을 수 없다. 그저 북천십이벽으로 쏟아지는 공격을 막는 것, 할 수 있는 거라곤 그것뿐이었다.
쾅! 콰르르릉! 퍼어엉!
공격이 멈추질 않았다.
무한의 체력을 얻은 듯, 시간이 지날수록 더더욱 격렬한 공격을 이어 가고 있다.
주작기 덕분이었다. 백호기는 폐장 능력을 극대화하여 체력과 골육을 성장시키지만, 주작기는 심장에 머무르며 생명력 자체를 끌어올린다.
그래서 이런 공격이 가능한 것이다. 자신의 목숨마저도 검 끝에 담아 휘두르는, 뒤가 없는 공격을 퍼부을 수 있는 것이다.
콰콰쾅!
피를 토하고 또 토했다.
축적되는 내상이 순식간에 연호정을 죽음의 늪으로 인도했다.
북천십이벽을 펼쳤지만, 어떤 초식을 어떻게 펼치는지도 몰랐다. 그저 무의식적으로 사신무를 구현하고 있었다. 살기 위함이었다.
‘아니, 그게 아니야.’
살기 위해서 공격을 막는다?
아니다.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흑도 역사상 최초로 흑도대종사의 칭호를 받은 흑암제는 결코 그런 인물이 아닌 것이다.
콰앙!
현무기가 통째로 흔들렸다. 연호정의 몸도 같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후우우우웅.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명천의 공격이 눈에 보였다. 보인다 해도 피할 순 없을 것 같았지만, 일단은 보였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고무적인 성과였다.
푸화아아악!
가슴에 또 다른 검상이 새겨졌다.
이번에도 깊었다. 거의 뼈까지 가를 뻔한 일격이었다. 타오르는 화기에 익어 피는 나지 않았지만, 고통은 더 심했다.
그 고통이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보았다. 보였다.’
화르르륵!
검을 쥐지 않은 좌장(左掌)이 짓쳐 들어왔다. 불꽃 같은 일격이었다.
콰앙!
연호정은 또 한 번 피를 토했다.
이러다 진짜로 죽겠다. 다시 한번 이런 일격을 허용하면 틀림없이 황천행이다.
후욱!
연호정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시야에 들어왔던 명천의 몸이 사라졌다. 번개 같은 신법이었다. 어디로 갔는지 추적할 수 없었다.
‘……?!’
그때였다. 한 줄기 화염이 그의 뇌리를 관통한 것은.
‘신법?’
아니다.
사신무(四神武)의 무공에 신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적을 상대하는 무공 초식과 보법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렇다. 신법은 없다.
그럼 지금 명천이 구사하는 신법은 무엇인가?
‘혈익휘천(血翼揮天)!!’
번쩍!
주작의 날갯짓, 천공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주작의 움직임이 연호정의 깨달음을 실체로 구현해 냈다.
명천이 광소를 터트렸다.
“쓰러지거라!”
콰아앙!
폭음과 함께 땅이 갈라졌다.
더욱 크게 웃음을 터트리려던 명천은, 순간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어?’
봉황염수를 내지른 좌장.
그 좌장이 피로 물든 손과 맞닿아 있었다.
화르륵!
붉은 기운이 타올랐다.
명천의 봉황기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작지만 훨씬 밝고 순수한, 진짜 불꽃다운 불꽃이 마침내 연호정의 손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화아아악.
상체를 수그린 연호정이 서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순간 명천은 알 수 없는 섬뜩함을 느꼈다.
상대, 연가의 장자 놈의 두 눈.
그 눈에서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순수한 화염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찾았다.”
심장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생사의 간극 속에서 주작기(朱雀氣)까지 부활한 것이다.
* * *
“이제 진입해야 하지 않겠소?”
“…….”
“후개?”
그때 거센 폭음이 울려 퍼졌다.
콰앙!
이토록 멀리 떨어졌는데도 귀청이 찢어질 듯하다. 격전지 한복판에 있었다면 내공을 있는 대로 써서 고막을 보호해야 했을 것이다.
가득상의 눈이 깊어졌다.
‘연 공자.’
그는 연호정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뭐라고?!’
‘…….’
‘이 양반 이거 미쳤나? 당신, 명천을 뭘로 보는 거요? 명천은 천하제일가의 가주요, 가주! 최소로 잡아도 댁 아버지와 동수(同手)라고!’
‘알고 있소.’
‘모르는 것 같은데? 사람이 미쳐도 곱게 미쳐야지, 어떻게 명천이랑 싸울 생각을 해! 명가 쪽 무사 몇 없앴다고 명천을 쉽게 보는 거요?!’
‘그럴 리가 없잖소.’
‘그럼 대체 왜! 당신이라도 명천을 이길 순 없단 말이오!’
‘이길 수 있소.’
‘……!!’
‘명천보다 아래인 고수는 버겁소. 하지만 명천은 이길 수 있소.’
‘이게 도대체 뭔 말 같지도 않은…….’
‘게다가 이번이 마지막이오.’
‘마지막이라니?’
‘내 부모 형제를 죽이러 가는 흉수의 우두머리를 잡을 기회.’
‘…….’
‘당신을 믿으라 했소? 난 당신을 믿소. 그러니 당신도 날 믿어 주시오.’
‘……제길.’
‘난 절대 지지 않소.’
가득상은 연호정의 얼굴에서 형용할 수 없는 한(恨)과 측량키 어려운 분노를 보았다.
쌓이고 또 쌓여서 녹지도, 깨지지도 않는 묵은 감정이었다. 그 감정을 풀 방법은 원하는 적을 쓰러트리는 것밖에 없을 것이다.
‘염병,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분하긴 하겠지만, 실질적으로 지금껏 연가가 피해를 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정도 한과 분노를 쌓을 일이 아니란 말이다.
하지만 가득상은 연호정을 말릴 수 없었다.
그 음울하고 불같은 감정을 에워싼 초조함과 기대감을 보았기 때문이다. 마치 평생을 기다려 온 사람처럼, 그의 눈은 복잡한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후개.”
“지금 들어가면…….”
가득상이 마른 입술을 핥았다.
“지금 들어가면 난전이 벌어지게 되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싸움이 끝난 후, 남은 잔당을 포위하는 것이 나을 것 같수다.”
“하지만 저대로 가면 연 공자가 위험하오!”
“지가 이길 수 있다잖소.”
“뭐, 뭐라고?”
“믿읍시다. 내가 이 문주와 소림 속가문파 두 곳을 더 부른 건 저들과 싸우기 위함이 아니오. 저들을 옴짝달싹도 못 하게 만들기 위함이지.”
“그렇긴 하지만…….”
“피는 충분히 많이 흘렸소. 쓸데없는 희생을 만들지 맙시다.”
그때였다.
푸르르륵.
하늘 높은 곳에서 시커먼 새가 무서운 속도로 내려왔다.
가득상의 눈이 빛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손을 뻗었다.
파다닥!
멋들어진 날갯짓과 함께 가득상의 팔목에 앉은 새는 놀랍게도 까마귀였다.
가득상이 서둘러 까마귀의 발목에 매인 서신을 펼쳐 보았다.
이철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에게서 온 서신이오?”
“……됐다.”
“으응?”
가득상이 주먹을 움켜쥐며 씨익 웃었다.
그의 얼굴에는 지난 피로와 후련함이 드리워져 있었다.
“무림공적 선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