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천적(天敵) (5)
“이런! 대주님! 어서 대공자님을……!”
“기다려라.”
“예?!”
“기다려.”
“하, 하지만 대주님! 대공자님이 위험합니다!”
“어딜 봐서?”
숲속에 은신하고 있던 창응대는 전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을 전부 지켜볼 수 있었다.
신모의 눈이 빛났다.
“대공자님은 능히 저들을 상대할 수 있다.”
“그, 그렇게나 강하시단 말입니까?”
“강하시지. 하지만 그것과는 조금 달라.”
신모 역시도 확신하지 못했다. 대공자님이 어떻게 적을 상대하고 있는지. 거리도 거리거니와 적의 수가 너무 많았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했다.
‘적의 약점을 알고 계신다.’
그냥저냥 아는 수준이 아니었다.
저건 거의 파훼에 가까운 대응이었다. 발걸음 하나, 손짓 하나에 적들의 무공이 수수깡처럼 부서지고 있었다.
잡으려고 치면 어느새 공격권 밖으로 물러나 또 다른 적을 몰아치는데, 모르는 사람이 보면 미리 합이라도 맞춘 줄 알 것 같았다.
신모는 당혹스러웠다.
‘적의 무공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계신다. 어떻게 저런 게 가능하지?’
설마 대공자님은 명가 무공의 조문을 죄다 파악하고 계신단 말인가? 어떻게?
그때였다.
짹! 짹!
저 수풀 너머에서 새소리가 들렸다. 아주 미약한 내력이 담긴 새소리였다.
창응대원들의 눈이 번쩍였다.
“준비들 해라.”
우우웅.
신모의 몸 안에서 용포의 힘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신호가 오면, 곧바로 밀어 버린다.”
* * *
퍼어억!
살점과 핏물이 터져 나갔다.
‘보인다.’
빠각! 서걱!
도끼질 한 번에 말 머리와 사검의 몸통이 통째로 갈라져 날아갔다.
‘전부 보여.’
백호기가 충천하고 현무기가 드넓게 퍼져 나갔다.
사신의 무예가 시간이 지날수록 격렬해졌다. 한데 단순히 거칠기만 한 게 아니었다.
거칠고 흉포하지만, 섬세하고 유연했다. 영귀진기와 기린진기가 날뛰는 곳에서, 연호정의 무공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활짝 개화하고 있었다.
퍼억! 퍼억!
신들린 도끼질이다.
창술(槍術)과 도법(刀法), 봉술(棒術)과 난격술(亂擊術)이 하나가 되어 치명적인 위력을 발휘하는 부법(斧法)으로 재탄생되었다.
휘두르고 쳐 낸다. 부수고 박살 낸다.
파괴력 넘치는 거병의 위력을 극대화하는 무공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이이이잉!
휘몰아치는 도검, 퍼져 나가는 권장력(拳掌力)에 백호기와 현무기가 제멋대로 일어나 위력을 감소시켰다.
아니, 감소 정도가 아니라 흡수였다. 파괴력 넘치는 발경을 도끼와 주먹이 와해시켰고, 그렇게 와해된 기는 백호기와 현무기가 달라붙어 해소한 후 그대로 잡아먹었다.
연호정의 안광이 점점 진해졌다.
‘됐어!’
지치지 않는다.
적들의 기(氣)가, 발경(發勁)이, 충격파가 오히려 연호정의 진기를 더 강하게 부채질하고 있었다.
강해진 기를 담아 내친 도끼는 적들의 목을 날리고 몸통을 깨부수는 무적의 신병(神兵)으로 화했다.
파바바박!
연호정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빨라졌다.
도끼의 위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연가십삼권, 연환비연장의 발경이 쇠망치처럼 변해 사검들의 생명을 앗아 갔다.
오십 사검의 대장, 명적량은 경악했다.
“저, 저 괴물이!”
무서운 살기를 뿜어내며 사검들을 휩쓰는 연호정.
말 그대로 한 줄기 폭풍과 같았다. 서방대제 백호의 무공이 지나가면 피 보라가 솟구쳤고, 북방대제 현무의 무공이 올라오면 뼈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적(無敵)이었다. 사령의 사대신공을 익힌 명가의 무사들에게 연호정이란 존재는 재앙이나 다를 바 없었다.
퍼어어어억!
끔찍한 소리와 함께 한혈마 두 마리의 목이 하늘 높이 날아갔다. 동시에 사검 세 명의 몸통이 갈가리 찢겨 흩어졌다.
번쩍!
순간 명적량은 섬뜩함을 느꼈다.
사람 몸뚱이만 한 거병을 휘두르던 적이 자신을 포착했다. 흑백신기의 안광이 단숨에 머리통을 뚫어 버릴 것만 같았다.
파아아앙!
불길함은 적중했다.
힘으로 사검들을 밀쳐 낸 연호정이 한혈마의 등을 박차고 날아올라 명적량에게로 뛰어들었다.
‘이익!’
명적량의 손이 등 뒤에 맨 장검으로 향했다. 봉황진기가 불처럼 타올랐다.
그때였다.
콰앙!
엄청난 충격파와 함께 연호정의 몸이 후방으로 튕겨 나갔다.
콰드드득!
땅에 착지하는 순간 자세를 잡았지만, 힘의 여파가 너무 강했다. 연호정의 두 발이 기다란 고랑을 만들었다.
화아아악!
어느새 명적량의 앞에, 화신(火神)의 불꽃을 피우는 한 검사가 섰다.
“건방진 놈!”
쿠구궁!
명천이 디딘 두 발 주변 땅이 거미줄처럼 갈라지기 시작했다.
화르르륵!
타오르는 불꽃이 사위를 휩쓸었다.
‘이럴 수가!’
명적량은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어느새 봉황신공을 저만큼이나……!’
압도적이었다. 그 자신도 봉황신공을 밤낮 가리지 않고 익혔지만, 수준이 전혀 달랐다.
구주명가의 가주, 뇌화신검(雷火神劍) 명천.
벼락처럼 빠르고 불꽃처럼 강력한 검법으로 사해에 명성을 휘날린 초절정 고수가 마침내 싸움에 개입했다.
주변을 둘러보던 명천의 눈에 살기가 치솟았다. 그 잠깐의 교전으로 무려 절반이 넘는 사검들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이 무능하기 짝이 없는 것들! 도저히 가만 두고 볼 수가 없구나!”
놀랍게도 그의 분노는 연호정이 아니라 사검들에게로 향했다.
“대체 얼마나 신공 연마를 허투루 했으면 저깟 애송이에게 당하느냔 말이다!”
말도 안 되는 트집이었다.
명적량의 눈에도 보이는 걸 명천이 보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연호정의 무공은 그 자체도 강했지만, 이쪽 무공을 완벽하게 파훼하고 있었다.
즉, 사대신공의 약점을 철저하게 파고들어 물리치고 있다는 것이다. 한데 신공 연마를 허투루 했다니?
“버러지 같은 놈들! 네놈들을 믿고 천하를 도모하려 했다니, 내가 어리석었다!”
물론 명천도 사검들의 무공에 이상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연호정의 무공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도, 놈이 사대신공의 약점을 철저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것도.
하지만 인정할 수 없었다.
명가는 무림 역사상 최강이라 불리는 사방무제와 함께 혈교를 몰아낸 선조들이 세운 가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이 익힌 건, 무림 최악의 혼란기이자 전성기 시절에 한 획을 그은 무공이었다. 그런 무공이 저깟 애송이에게 파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천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콰드득.
밀린 흙을 강하게 밟고 일어난 연호정이 웃으며 명천을 바라보았다.
“이제야 납셨나?”
명천의 눈이 번뜩였다.
제법 힘을 담아 후려친 일검(一劍)이었다. 사검 정도의 고수라도 내상을 면치 못할 위력이거늘,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명천의 입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제법 한 수가 있었단 말이지.”
쩌어어엉!
명천이 든 검에서 탄력 넘치는 검명(劍鳴)이 울렸다.
중원에 흔한 패검이 아니었다. 여느 장검보다 한 자는 더 길고, 폭도 두 배는 더 널찍한 대검(大劍)이었다.
강호 무림의 검보다는 군용대검(軍用大劍)에 가까운 형태였다. 검병 역시 한 자를 넘어가는 쌍수검(雙手劍)이었다.
명천의 얼굴에 살기를 넘어 광기가 일렁였다.
“네놈의 목을 베어 연위, 그 빌어먹을 놈의 면전에 던져 줄 것이다. 소금에 절인 아들의 수급을 보고도 평정심을 유지할지 궁금하구나.”
상당한 도발이었다. 혈육에게 극심한 부채감을 품고 있는 연호정에게는 이 이상의 도발이 없었다.
‘…….’
그러나 왜일까?
생각보다 마음이 평온했다. 가문의 멸문을 사주한 진짜 원수를 앞에 두고도 그의 눈은 맑기만 했다.
후우우웅.
천천히 움직인 도끼날에 하얀 바람이 어렸다.
하늘을 올려다본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드디어 여기다.’
가문을 떠나 하남에 들어왔다. 그 이후 몇 차례나 되는 전투로 명가를 뒤흔들었다.
사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연호정에게는 너무나도 길게 느껴진 기간이었다.
‘아버지. 당신이 모르는 해묵은 원한 하나를 이 자리에서 없애 버릴 생각입니다. 모르시겠지만, 그래도 복수는 하겠습니다.’
아버지를 떠올리니 자연스레 연지평도 떠올랐다.
환한 얼굴로 주먹밥을 내밀던 동생의 하얀 손을 생각하니 눈이 부시는 듯했다.
‘평아.’
창대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앞으로도 네가 흘릴 눈물은 내가 다 받아 마셔 주마.’
과거의 아버지, 현재의 아버지.
과거의 동생, 현재의 동생.
깊은 원한으로 점철된 두 사람의 과거와 힘차게 도약하는 두 사람의 미래가 하나로 합쳐져, 비로소 연호정의 현재가 되었다.
연호정의 눈이 번쩍 뜨였다.
콰아앙!
막강한 진각과 함께 천지를 뒤흔드는 기파가 솟구쳤다.
연호정이 외쳤다.
당당한 목소리로, 무인의 투지를 담아.
“덤벼라, 명천.”
누구에게서도 보지 못했던 위풍당당한 기세였다.
명천의 얼굴이 마구 일그러졌다.
“……애송이!”
파아악!
명천이 돌진했다.
시작이다. 결투가, 혈전이, 강호가 만든 피의 채무가 지금 이 순간 두 사람의 목숨을 강요하고 있었다.
연호정의 도끼와 명천의 대검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꽈앙!
무지막지한 굉음이 대지를 뒤흔들었다.
거병과 거병의 부딪침이었다. 힘과 힘의 대결이었다.
터엉!
연호정의 몸이 후방으로 날아갔다.
어쩔 수 없는 힘의 열세였다. 명천은 초절정 고수, 연위와 같은 선상에 놓인 희대의 검객이었다. 지금의 연호정에게 그와의 정면 승부는 미친 짓이었다.
쾅! 콰앙!
하지만 연호정은 멈추지 않았다.
튕겨 나간 몸을 금세 바로잡고는 백호군림의 이 보(二步)를 밟아 나갔다.
‘뭐?!’
일격에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었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튕겨 나간 즉시 폭풍 같은 기세로 재차 달려오는데, 종전보다 배는 더 강력한 기세였다.
명천이 검을 휘둘렀다.
연호정 역시 맹격을 가했다.
쩌저저저정!
두 사람의 병장기가 맞부딪치며 화려한 불꽃을 터트렸다.
짧은 순간 몇 차례나 부딪쳤는지 모른다. 절정고수의 안력으로도 따라잡기 힘든 속도였다. 두 사람 모두 중병(重兵)을 휘두르는데도 쾌검(快劍)처럼 빠른 무공을 구사했다.
명천의 눈에 기광이 떠올랐다.
“건방진 놈!”
서걱!
연호정의 가슴에서 피가 튀었다.
제법 깊게 들어간 일검이었다. 좌측 쇄골에서 우측 복부로 내려온 사선의 검상이었다.
명천이 비릿한 미소를 지을 때였다.
콰앙!
“큭!”
명천의 몸이 주르르 뒤로 밀려났다.
반격이 불가능한 검격을 맞아 놓고도 즉각 도끼를 휘둘렀다. 방심했으면 이번 일격으로 몸통이 쪼개졌을 것이다.
“이런 미친놈이!”
쾅! 쾅!
백호군림보가 펼쳐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강력한 힘을 끌어 올리는 진각이었다. 천하의 명천도 그 호왕(虎王)의 기세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쩡! 쩌정!
기세를 받아 타오른 도끼의 위력이 점점 강해졌다.
쾅! 쾅!
또다시 전진이었다. 공격이었다.
쩌저저정! 쩌정!
위력만큼이나 속도도 증가했다. 호왕구벽세의 난폭한 힘이 벼락이 되어 내리꽂혔다.
훅!
그리고 어느새, 연호정의 움직임이 불가사의한 속도를 구현해 냈다.
콰콰콰콰쾅!
일순간 몰아치는 무공에 명천의 몸이 미친 듯이 뒤로 물러났다.
백호군림의 연환전진보(連環前進步)였다. 극한의 투기로 상대를 몰아치니, 어느새 백호기가 군림보의 비기를 끌어내고 있었다.
콰앙!
명천의 몸이 삐걱거렸다. 검병을 쥔 손에서 피가 흘렀다.
연호정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상대의 피가 그의 흉성(凶性)을 자극했다.
“명천……!”
번쩍! 콰앙!
내리찍히는 도끼질은 막았지만, 두 발이 발목까지 땅에 박혀 버렸다.
퍼억!
놀라운 광경이었다. 연호정의 주먹이 기어이 명천의 어깨를 후려쳤다.
비틀거리는 명천.
연호정의 얼굴 위로 성난 야수의 형상이 일었다.
“이 정도로 물러나지 마라! 제대로 안 하면 찢어 죽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