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79화 (79/963)

79화. 천적(天敵) (4)

모용군이 좌중을 향해 격식 있는 인사를 건네었다.

“다급하게 대회의권을 발동했는데도 이 자리에 모여 주신 각파의 좌장들께 삼가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비록 몇몇 분들께선 공사가 다망하여 오지 못하셨지만, 그분들께도 따로 감사의 서신을 보낼 것입니다.”

모인 사람들의 면면은 그야말로 화려했다.

구파일방에선 소림(少林), 무당(武當), 화산(華山), 종남(終南), 청성(靑城)의 다섯 주인이 참가했고, 칠대세가에선 모용(慕容), 제갈(諸葛), 남궁(南宮), 팽가(彭家)의 네 주인이 참가했다.

호북성 융중산 인근에서 모인 백도 무림의 수뇌부들이다. 다른 문파의 수장들은 거리가 멀거나 일이 바빠 모이지 못했지만, 단기간에 소집한 것치곤 꽤 많이 모인 것이었다.

‘그리고.’

모용군의 눈이 소림과 무당의 주인에게로 향했다.

‘저 둘이 모였으니, 구파는 전부 참가했다고 봐도 좋아.’

태산북두(泰山北斗), 북숭(北崇)의 소림.

원무선산(元武仙山), 남존(南尊)의 무당.

소위 북숭소림, 남존무당이라 칭해지는 백도 무림의 초거물들이다. 저 둘이 참가했다면 백도 무림의 수장들이 전부 모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들 많으셨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설마 모용가주께서 대회의권을 발동하실 줄 몰랐어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기실, 대회의권을 가장 많이 꺼내는 분은 용두방주시지요. 그분께서 참석하지 않으셨다니, 많이 바쁘신 모양입니다.”

허허로운 목소리로 저마다 한마디씩 건넨다.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저도 어지간한 일로는 대회의권을 꺼내지 않으려 했습니다만, 사태의 위중함이 보통이 아닌지라 부득불 꺼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모용군은 지금 사태라는 말을 입에 담았다. 그 단어가 주는 위기감이 대단했다.

소림방장이 물었다.

“아미타불(阿彌陀佛). 그리 중하고 급한 일이라면, 인사는 잠시 뒤로 미뤄 놔도 될 것 같소이다.”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말이었다. 모용군 역시 바라마지 않던 일이었다.

“좋습니다. 각파의 수장분들께서도 바쁘시니, 바로 이 건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좋소이다.”

“다만 그 전에, 이곳에 모인 분들께서는 백도 무림의 미래를 위해 큰 결심을 하셔야 한다는 걸 미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음?”

“저는 이번 일이 공식적으로 세력 해체, 즉 하나의 단체를 무림공적(武林公敵)으로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좌장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림공적, 즉 강호 무림의 공공의 적이란 뜻이다.

한 사람이 무림공적이 되면 백도 무림원 전체가 그를 잡기 위해 움직이며, 한 세력이 무림공적으로 몰리면 그 세력은 즉각 해체해야만 한다.

물론 순순히 잡혀 줄 리도, 해체할 리도 없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남는 건 파멸뿐이다. 공적으로 몰렸다는 건, 멸문(滅門)이 합당하다고 판단했다는 뜻이었다.

죽어도 할 말이 없다는 뜻. 그래서 무림공적이란 네 글자는 백도 모두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무당파의 장문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체 어떤 세력을 언급하려 함이오? 아니, 어떤 문파가 그리도 큰 죄를 지었단 말이오?”

“여기에 계신 분들은 최근, 하남 무림에 큰 변동이 생겼다는 걸 알고 계실 겁니다.”

하남에서 제법 떨어진 지역, 하북성 팽가(彭家)의 가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남 무림? 소림과 명가가 있는 그 하남 말씀이오?”

“그렇습니다.”

모용군의 눈이 반짝였다.

“제가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내용의 주축이 되는 세력은 바로 구주명가입니다.”

* * *

‘굉장하군.’

우우우우웅.

백색의 백호기가 저절로 달아올랐다. 흑색의 현무기가 파랑을 일으켰다.

츠츠츠츠.

단전에서 올라온 벽라진기가 순식간에 전신을 휘돌았다.

벽라진기의 힘으로도 두 신기(神氣)는 차분해지지 않았다. 긴장한 듯 바짝 날이 선 기운들이 연호정의 기파를 거칠게 만들고 있었다.

‘가짜라지만, 저 정도로 깊게 익히고 있을 줄이야.’

구주명가의 가주 명천.

삼십 장이나 떨어진 거리였지만, 명천을 포착하는 순간 이신기(二神氣)가 날뛰기 시작했다.

그것은 가짜를 향한 진짜의 분노였고, 가짜임에도 상상 이상으로 강력한 기운에 대한 긴장이었다.

‘주작기(朱雀氣)다. 그것도 몹시 선명해.’

그렇다. 주작기다.

하지만 주작기이되, 주작기가 아니기도 했다.

그가 아는 주작기는 말 그대로 태양(太陽)과도 같은 힘을 담고 있었다. 빛나는 화기(火氣)를 몸에 둘러 신격(神格)을 증명한 비천(飛天)의 제왕이었다.

명천이 익힌 주작기는 달랐다.

기(氣) 자체가 크게 뒤틀려 있었다. 신격을 잃고 추락한 반쪽짜리 화신(火神) 같다고나 할까. 같은 화기여도 지나치게 편협하고 위험해 보였다.

명학이란 놈과 함께 왔던 두 녀석과는 차원이 다른 기(氣).

더 깊게 익혔기에 힘은 강해도 훨씬 심한 파탄이 드러났다.

‘그러나 실력은 더할 나위 없겠지.’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좋은 상대가 되겠어.’

그리고 잘하면…….

“네놈이 연호정이라고?”

명천이 입술을 씰룩거렸다. 뭔가 단단히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겁도 없이 여기 나타나다니, 죽지 못해서 환장이라도 했느냐?”

“그러게, 오랄 때 오지 그랬어?”

“뭣이?!”

“다 들었을 텐데? 설마 그것도 안 알려 주던가? 믿음직하지 못한 부하를 부리는 모양이군.”

명천의 눈에 살기가 일었다.

번쩍!

삼십 장 거리를 격하고 쏘아진 무시무시한 안광이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베어 죽일 것만 같았다.

연호정의 눈이 번쩍였다.

‘역시.’

명천의 안광, 그 위험천만한 살기를 더듬어 본 연호정은 그가 생각보다 더 위험한 상대라는 것을 깨달았다.

문제는 그 눈빛에 실린 광기(狂氣)였다.

‘확실해. 주작기가 상단(上丹)을 침범했다.’

사신(四神)은 곧 사방(四方)을 대표하는 신수(神獸)를 뜻한다. 신수는 곧 신(神)과 동격이니, 애초에 사람의 몸에 담기 힘든 기운이었다.

약(藥)을 잘못 쓰면 독이 되는 것처럼, 사신기는 지나치게 신령스러워 오히려 사람을 해친다. 진기에 대한 완전한 이해와 점진적인 수행이 필수인 것이다.

지금 연호정이 현무와 백호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것도 전부 흑암제 때의 깨달음 덕분이다. 사신무를 완전히 숙달했으니, 점진적 수행 없이도 안전하게 운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명천은 아니었다.

명천만이 아니라 오십 명의 고수 전부가 사신무를 겉핥기로 익혔다.

애초에 뒤틀린 기운을 완전한 이해도 없이 속성으로 연성했다. 몸은 물론, 정신도 남아날 리가 없었다.

쿵!

연호정의 발이 대지를 뒤흔들었다.

“긴말 필요 없지?”

“…….”

“와라. 머리통을 쪼개 주마.”

명천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너무 화가 나서 오히려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설마하니, 네놈이 무서워서 지금껏 살려 둔 줄 아느냐?”

“오라면 올 것이지 말이 많아.”

“저놈이?!”

말하는 싸가지가 보통이 아니다.

분노가 급속도로 차오르는 와중에도 잘 됐다는 심정이었다. 안 그래도 저놈 하나 때문에 가문이 잡소문에 시달리지 않았는가.

어차피 연가를 날려 버리기 위해 가는 길이다. 이제 거리낄 것도 없었다.

명천이 버럭 소리쳤다.

“누가 가서 저 애송이를 끌고 오거라! 내 손으로 직접 머리를 뽑을 것이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인 하나가 한혈마의 등자를 박찼다.

터어엉!

하늘 높이 날아오른 신법이었다. 바람처럼 자유로우면서도 묘한 묵직함이 느껴지는 강인한 몸놀림이었다.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백호!’

쿠웅!

연호정 전면 삼 장 앞에 내려선 명로가 싸늘하게 말했다.

“감히 가주님께 그따위 망언을 지껄이다니, 사지를 부러트리겠다.”

파아악!

명로가 달려들었다.

굉장한 속도였다. 정말 한 줄기 바람이라도 된 것 같았다.

감탄이 나올 만한 신법이었지만, 연호정의 눈엔 그 신법의 빈틈과 약점이 선명하게 보였다.

쿠우웅!

명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기린조(麒麟爪)를 휘두르려는 순간, 이미 상대가 자신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기린행(麒麟行)의 사각(死角)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파고든 것이다.

콰득!

“헉!”

연호정의 왼손이 그의 손목을 휘어잡았다.

“엉망진창이군.”

그의 손에 현무기가 담겼다.

콰앙!

“크아악!”

명로의 손목이 폭발하는 화약에 휩쓸린 것처럼 산산이 터져 나갔다.

북천십이벽의 삼중귀벽(三重龜壁)을 쏟아부은 것이다. 공격적인 기운을 담고 있던 명로의 손은 그 폭발적인 반탄력을 이기지 못하고 뭉개져 버렸다.

연호정이 도끼를 쳐들었다.

“내세에선 걸음마부터 배워 와라.”

“안……!”

퍼억!

명로의 머리통을 가른 도끼가 명치까지 파고들었다.

연호정이 그대로 명로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펑!

날아간 시신이 흙바닥을 굴러가다 한혈마 앞에서 멈추었다. 멈춘 시신이 연신 움찔거렸다.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명천조차 놀라서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뭐야, 저놈?!’

그가 데려온 사검들은 하나같이 대단한 고수들이었다. 거기에 사대신공까지 익혔으니, 후기지수 수준은 한참이나 상회한다고 봐도 좋다.

사검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이들만 선별했거늘, 대체 몇 합 만에 죽어 버린 것인가?

연호정이 소매로 도끼날의 피를 닦아 내며 말했다.

“이놈들 데리고 본가로 쳐들어가면 일이 다 끝날 줄 알았어?”

“뭐, 뭐라?!”

“반응 좋군. 역시 짐작이 맞았어.”

치이이익!

도끼날에 벽라진기가 어렸다. 강력한 진기가 도끼날에 남은 피를 증발시켰다.

연호정의 눈에 무서운 살기가 어렸다.

“중첩된 과거 속에서도 끝까지 악연으로 남는구나.”

회귀 전, 명가는 연가를 멸문시켰다.

회귀 후, 멸문을 막기 위해 홀로 명가를 몰아붙였다. 하지만 그 잠깐을 참지 못하고 또 본가를 노려 병력을 파견한 것이다.

지독하게 얽힌 악연이었다. 애초에 정도 없었지만, 이 정도가 되니 정말 오만 정이 다 떨어졌다.

쾅!

그 어느 때보다도 힘찬 일 보(一步)를 밟은 연호정의 몸에서 폭발적인 살기가 피어올랐다.

“주제 모르고 날뛴 대가를, 오늘 이 자리에서 다 받아 내 주마.”

명천이 외쳤다.

“죽여 버려라!”

파바박!

사검 십여 명이 연호정을 향해 뛰어들었다.

번개처럼 날랜 몸놀림이었다. 제아무리 대단한 고수라 해도 헛숨을 삼킬 공격이었다.

연호정의 두 눈이 현무와 백호, 흑백(黑白)의 신기(神氣)를 발산했다.

‘여기!’

파라라락!

연호정의 몸이 사검들의 공격을 절묘하게 비켜 갔다.

열 명이나 되는 절정고수의 도검을 움직임 한 번으로 피해 냈다. 보는 이들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는 그들의 공격을 피한 것이 아니었다.

현무의 대체, 영귀신공.

백호의 대체, 기린신공.

두 가지 무공을 익힌 그들의 공격선을 읽고, 가장 취약한 곳을 향해 백호군림보를 내디뎠을 뿐이었다.

쾅! 쾅!

일 보 전진에 이 보 필살이다.

연호정의 도끼가 산군의 이빨을, 야수지왕의 발톱을 만들어 냈다.

퍼버버벅!

호왕구벽세에 걸린 사검 세 명의 몸이 갈가리 찢겨 나갔다.

“헉!”

“계속 공격해라!”

파바박!

남은 일곱 사검이 재차 공격에 들어갔지만, 이미 연호정은 그 자리에 없었다.

쾅! 쾅! 콰앙!

무자비한 전진이었다. 폭발적인 돌진이었다.

일곱 고수를 뒤로하고 폭풍처럼 전진하는 연호정의 눈에, 사십여 명의 고수들이 확대되듯 빨려 들어왔다.

그가 전력을 다해 도끼를 휘둘렀다.

콰르릉!

사신무장(四神武將)이 적진을 정면으로 꿰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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