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천적(天敵) (1)
“뭐? 그게 사실이야?”
“미, 믿을 수 없게도 사실입니다. 어제저녁부터 이어진 싸움이 오늘 아침까지 지속되었다고 하는데, 지금껏 그 누구도 연 공자를 이기지 못했다고 합니다.”
가득상이 입을 뻐끔거렸다.
“아니, 그게 말이 되나? 명가주가 바보도 아니고, 적당히 상대할 만한 놈들을 보냈을 리가 없잖아?”
비호개가 침을 삼켰다.
“당장 어제만 해도 명학, 명휘, 명헌 세 고수를 파견했다고 합니다.”
“엉?! 그게 누구야? 들은 것 같기도 한데…….”
“저도 이번에 조사하면서 알았습니다. 명가의 방계 쪽 고수들인데, 그들 삼 형제가 합공하면 구파일방의 최고 장로급도 제압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그 정도 고수라고?”
“최소로 봤을 때 그 정도랍니다. 오이각(汚耳閣)에서 내놓은 분석이니 틀림없어요.”
“허어…….”
가득상이 고개를 저었다.
“이건 뭐 꿈을 꾸는 것 같군.”
그는 연호정의 무공을 알고 있었다.
물론, 자신에게 보여 주지 않은 무공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무공일 뿐, 실력과는 다른 문제였다.
연호정은 강자다. 열아홉 나이, 약관에도 이르지 못한 연배로 어지간한 절정고수를 손쉽게 몰아붙이는 능력자였다.
그 정도 재능이면 능히 쌍룡삼봉(雙龍三鳳)에 준하는 수준이다. 아니, 단순 재능만 보면 그 이상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천재(天才)라 불리기에 부족함은 없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대기(大器)일 뿐이었다. 중원 천지에 연호정보다 강한 무인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다.
한데 상대하고 있단다. 명가의 고수들을.
‘이 양반아,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본래 연호정이 맡은 역할은 미끼였다.
말 그대로 시간을 끄는 것이다. 그 화려하기 짝이 없는 화술로, 수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명가의 무도함과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그 자리에서 버티는 것이 일차 계획이었다.
이차 계획이 바로 자신이었다. 명가가 힘으로 연호정을 끌고 가려고 하면, 그때 개방의 후개인 자신이 나서서 연호정의 무고함을 토로하려 했던 것이다.
그걸 위해서 지금껏 밤을 새워서 정보를 모으지 않았던가. 연호정을 변호하기 위한 정보가 아니라, 그간 명가가 벌인 불법적인 일들을 모은 정보였다.
물론 그 정도론 명가에 타격을 주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시간은 벌 수 있다.
언제까지? 대회의가 열릴 때까지.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명가에 집중된 그 시간 동안, 개방과 연이 있는 하남의 문파들을 끌어모아서 명가를 압박하려 했다.
‘이 계획의 핵심은 명가를 몰아붙이는 게 아니야. 명가를 주춤케 한 연후, 소문의 출처를 파헤치기 위한 시간 벌이기도 하다.’
복잡한 듯하지만 전혀 복잡할 것 없다. 연호정의 능력과 개방의 정보력이라면 충분히 완성할 수 있는 그림이었다.
근데 그걸 연호정이 망쳤다.
“미친 인간 같으니라고. 절대 싸우지 말라고 누누이 말했거늘.”
“저…… 후개.”
“왜!”
“더 심각한 거 말해 드릴까요?”
가득상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이것보다 더 심각한 게 있어?!”
비호개가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하고 있답니다.”
“똑바로 말해! 다 들리게!”
“여, 연 공자가요. 가주를 불러오라고 배짱을 부리고 있답니다.”
“뭐?”
“아까운 부하들 낭비하지 말고, 직접 모습을 드러내라고 압박 중이랍니다.”
“……!”
“이게 참, 무슨 무모한 짓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정도로 했으면 차라리 뒤로 빠지는 게 낫지 싶은데……. 게다가 명가가 보낸 고수들을 족족 장작 패듯이…….”
“그게 아니지.”
“예?”
가득상의 눈이 번뜩였다.
“와중에 잘하고 있군.”
“자, 잘하고 있다고요? 천하제일세가의 가주더러 직접 오라고 하는 게 잘하는 겁니까?”
“잘하는 거지. 하남 전체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으니까.”
비록 서신 한 장 주고받지 못했지만.
가득상은 연호정이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지 단박에 깨우칠 수 있었다.
‘대회의가 벌어지기 전까지 명가의 비리를 최대한 캐내라는 뜻이다.’
하남 전체의 시선이 집중된다? 그 시선에는 구주명가도 끼어 있다.
구주명가는 천하제일이라는 간판을 얻은 후, 최초로 한 사람에게 시험당하고 있었다. 그것도 연로한 노고수가 아닌, 약관에도 이르지 못한 파릇파릇한 청년에게.
울화통이 터질 것이다.
하남 전체의 시선이 쏠려 있으니 암살자를 보낼 수도 없고, 자신의 무죄를 증명할 게 뻔하니 그냥 죽일 수도 없다.
아니, 애초에 칠대세가의 장자니 죽이는 건 무리가 있다. 부하 혹은 방계 쪽 핏줄이 죽는 것과 직계 혈육이 죽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니까.
“혹시 모르니까 지금이라도 암사대를 풀어 줄까요?”
“미쳤냐?! 그럼 명가가 연 공자를 죽일 명분이 생기는 거잖아!”
“아…….”
“암사대는 대회의가 열리고 나서 풀어 줘야 해. 지금 우리가 할 일은 명가가 저지른 비리를 캐내는 거다.”
어차피 결정적인 한 방은 모용세가가 터트려 줄 것이다. 그전까지 자신은 명가가 연호정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하나씩, 하나씩 명가 측 비리를 터트려 주면 된다.
“아, 그리고 말씀드리지 않은 것 하나가 더 있습니다!”
“한 방에 보고해라 쫌! 뭔데?!”
“이철경이 떴답니다.”
가득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철경? 그 이철경?”
“그렇습니다.”
이철경은 소림의 속가제자 중 최강의 명성을 자랑하는 고수였다.
속가제자면서 천하무적 소림의 절정 무공을 몇 개나 전수한, 말하자면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난 고수였다. 그의 연배는 가득상과 비슷하지만, 무공은 벌써 구파 장로급에 도달했다고 알려졌다.
쌍룡삼봉이, 그로 인해 삼룡삼봉(三龍三鳳)으로 변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게 세인들의 생각이었다. 실제로 몇몇 지방에선 이철경을 껴서 삼룡삼봉이라 부르기도 했다.
게다가 그는 이립을 갓 넘긴 나이로 벌써 금강권문(金剛拳門)이라는 문파를 이끌고 있었다.
금강권문은 소림의 속가문파 중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문파다. 하남에서도 그 영향력이 막강했다.
“그 양반이 갑자기 왜?”
“갑자기라뇨. 명가에게는 초유의 사태이고, 하남 무림 역사를 봤을 때도 흔치 않은 사건입니다. 당연히 움직일 만하죠.”
“그렇긴 한데…… 아니, 지금 그 양반 어디에 있는데?”
“연 공자 일행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주루에서 봤다고 합니다.”
“그으래?”
가득상이 씨익 웃었다.
“이거 생각보다 일이 쉽게 흘러갈 수도 있겠다.”
“네?”
“너! 지금 당장 하남, 호북, 강소, 안휘, 절강에 있는 거지들한테 싹 전해! 명가와 관련된 사업체나 조직이 있으면 무조건 털어 보라고!”
“아, 알겠습니다! 그럼 후개는요?”
“나는 그 미친놈한테 간다!”
가득상이 발바닥에 낀 때가 몇 겹이나 벗겨질 만큼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을 때.
강소성 벽산연가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침중함 그 자체였다.
“……사정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창밖을 바라보는 연위는 미동도 없었다.
철곤개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당연한가.’
제아무리 철담의 사내라도 자식의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당장 움직일 수가 없다. 그는 가주였다. 아닌 말로 이 시국에 명가가 미친 척 강소를 쑤시고 들어오면 연가는 풍비박산 날 수도 있었다.
그런 걸 떠나, 이미 창응대를 보내지 않았는가. 거기서 가주가 또 한 번 움직이는 것은 가문의 격(格)을 떨어트리는 일이다.
그렇다고 큰아들의 위기를 두고 볼 수도 없을 테니, 그야말로 미칠 노릇일 것이다.
그때, 연위가 입을 열었다.
“지부장.”
“예, 가주님.”
“모용가주가 구파일방, 칠대세가의 수장들에게 지급으로 서신을 보냈네. 대회의권을 열 생각이라더군.”
철곤개의 눈이 빛났다.
“벌써 도착했군요.”
“오늘 아침 도착했다네.”
“가실 생각이십니까?”
연위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창밖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이다.
“가지 않을 생각이네.”
“…….”
“지금 내가 움직이면 호정이 흔들려. 이럴 때는 그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상책일세.”
철곤개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일었다.
연위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선 대회의고, 뭐고 한달음에 달려가고 싶을 것이다.
“자네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네.”
“말씀하십시오.”
연위가 몸을 돌렸다. 언제나 봤던 무심한 표정 그대로였다.
“이걸 받게.”
그가 내민 서신은 제법 두툼했다.
서신을 받아 든 철곤개가 의아한 눈으로 연위를 보았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내 무역상을 통해 따로 알아본 것일세.”
“무역상이요?”
“그래.”
“음…… 제가 봐도 됩니까?”
“보게.”
철곤개가 서신을 펼쳤다.
순간 그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 뜨였다.
“기실, 나는 명가가 망하든 말든 상관없네. 다만 그들이 선을 넘어 우리의 터전에 욕심을 냈으니, 경고 정도로 마무리한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네.”
“꿀꺽.”
“그러나, 내 아들이 죽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일세. 나는 가주이기 전에 애비로서, 아들의 복수를 하지 않을 수 없다네.”
“……!”
“피가 강을 이룰 걸세. 상관없는 이들도 많이 죽어 나가겠지. 나는 내 아들이 안전하기를 바라거니와, 죄 없는 이들을 죽이고 싶은 생각도 없다네.”
“…….”
“하니 이것을 명가에 지급으로 보내도록 하게.”
“가, 가주님. 이걸 명가에 보내면, 오히려 명가의 칼은 가주님을 향할 것입니다.”
“그렇겠지.”
“이 정도로는 명가를 무너트릴 순 없습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려지게 되면 명가는 천하제일이란 이름을 내려놓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보내라는 걸세.”
“차, 차라리 이것을 모용가주에게 보내 대회의에서 순차적으로 터트리는 것이…….”
순간 연위의 눈이 무시무시한 광채를 뿜었다.
“명가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보다!”
“……?!”
“나는 내 아들의 목숨이 더 중요하네.”
“가주님.”
“자식인데도 한 번을 제대로 보듬어 주지 못했어. 그런 녀석이 어느새 훌쩍 커서 세상에 나가, 애비가 책임져야 할 일을 홀로 감당하며 싸우고 있네.”
“…….”
“명가주 앞으로 보내게. 지급으로. 중간에 다른 곳으로 새선 안 될 걸세.”
“……알겠습니다.”
“소리쳐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죄송하지요. 대악(大惡)을 처단하는 데에 눈이 멀어 가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미안하다는 말을 쉽게 하는 사람이 아님을 안다. 그만큼 초조해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잘 부탁하겠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흘 내로 도착할 겁니다.”
철곤개가 서둘러 가주실을 나섰다.
연위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맑군.”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빌어먹을 정도로 맑았다. 어찌나 맑았는지 천라(天羅)의 검법으로 모조리 갈가리 찢어발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조금만 참거라. 조금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