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원수(怨讐), 그리고 원수(原水) (5)
츠츠츠츠!
가부좌를 튼 명천의 몸에서 불같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으음.’
명천의 얼굴에 쾌감이 어렸다.
단전에서 솟구친 붉은 기운이 순식간에 전신으로 퍼졌다. 기경팔맥(奇經八脈)을 휘도는 기운은 가히 극양(極陽)이라 말해도 손색이 없었다.
양(陽)의 극치는 곧 황제의 상징이다. 세맥소혈(細脈小穴)까지 온통 휘젓고 다니던 기운이 심장을 향해 모여드니, 그 어느 때보다도 충만해진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심장(心臟)은 곧 생명의 원천. 심장이 강하면 생명력도 강해지기 마련이다.
‘역시!’
비로소 명천은 확신했다. 선조의 무공이 곧 가문을 잡아먹던 저주의 해결법이었다는 것을.
명가의 가주만이 익힐 수 있는 무공, 명련남화공(明鍊南火功)은 그 자체로 천하일절의 신공이었다.
하지만 수명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역대 가주 중 가장 오래 산 사람이 겨우 일 갑자를 채웠을 뿐이다. 평균 수명은 지천명(智天命) 언저리였다.
명천은 이미 오십을 넘긴 나이였다. 언제 죽음이 찾아올까, 하루하루 애 닳는 심정으로 살아오길 몇 년째이던가.
‘이것으로 본가를 뒤덮은 저주도 끝이다!’
번쩍!
두 눈을 뜨니 안광이 태양처럼 이글거렸다.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생명력이 어느 때보다도 왕성해졌음을 느꼈다. 힘이 넘치니 당장에라도 칼을 휘두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가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우웅! 화르륵!
붉은 기운이 어린다 싶더니, 어느새 실제 화염이 솟구쳤다.
놀랍게도 손 전체를 뒤덮는 화염에도 손은 멀쩡했다. 충만한 기운이 육신을 완벽하게 보호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봉황염(鳳凰炎)…… 과연, 이 불꽃의 수공(手功)만으로도 능히 천하제일을 노릴 수 있겠구나.”
명천이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핫! 이제야 진정한 천하제일로서 중원을 발아래 둘 수 있으리라.”
봉황신공(鳳凰神功)은 사대신공 중 가장 강력하고 뛰어난 무공이었다. 사대신공 중 서열 일 위이며, 당연히 불세출의 괴력을 자랑한다.
일단은 봉황신공부터 익혀 생명력을 끌어올린 후, 나머지 무공들도 차근차근 익혀 볼 생각이었다. 남은 세 가지 무공은 영귀신공, 응룡신공(應龍神功), 그리고 기린신공(麒麟神功)으로 봉황보다는 한 수 처질지언정 능히 한 세대를 풍미할 무공들이었다.
명천은 사대신공 모두를 익힐 생각이었다. 전부 익혀서, 무림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최강의 무인으로 남을 생각이었다.
꿈에 부푼 명천이 한참 동안 웃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칠 때였다.
“가주님.”
명천이 담담하게 말했다.
“들어오게.”
끼익!
문이 열리고 명우산이 들어섰다.
“무슨 일이신가? 어지간한 일로는 연무(練武) 중에 건드리지 말라 하였거늘.”
“죄송합니다. 다소 급한 사안이기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급한 사안?”
명천의 눈이 번뜩였다.
“설마 연호정, 그놈과 관련된 일은 아니겠지?”
“아, 그건 아닙니다.”
“하면?”
명우산이 품에서 곱게 접힌 서신을 꺼내 들었다. 서신이 든 봉투는 황금빛으로 고급스럽게 치장되어 있었다.
명천의 눈이 빛났다.
“이건 무림맹(武林盟)의 비첩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무림맹 건물은 있어도 당대 맹주는 뽑지 않았지. 임시 맹주도 없는 판에 누가 이걸 보냈는가?”
“모용가주입니다.”
명천이 눈살을 찌푸렸다.
“모용가주가? 대체 왜?”
“한번 읽어 보시지요.”
서신을 펼친 명천의 눈에 놀라움이 일었다.
“대회의권을 발동한다고?!”
“그렇습니다.”
대회의권은 구파일방, 칠대세가의 수장들이 특정 안건을 발의할 때 쓰는 회합권이었다.
어지간해서는 대회의권을 빌어 회의를 열지 않는다. 자칫 잘못하면 천문학적인 금액을 토해 내야 하니까.
‘도대체 왜?’
고개를 갸웃거리던 명천은 문득 서신이 두 장이라는 걸 발견했다. 자신에게 온 서신은 두 장을 겹쳐 놓은 것이었다.
모용가주와 서신을 주고받을 때 항상 썼던 방법이었다.
서신의 뒷면을 세밀하게 떼어 내 읽어 본 명천은 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
명우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내용이기에 그리…….”
“하하핫! 과연 모용가주로군. 손잡지 않았을 때는 몰라도, 손을 잡은 이상 밀어줄 땐 확실하게 밀어준다 이것인가?”
“예?”
명천이 웃으며 말했다.
“연가 때문이네.”
“연가요?”
“연호정, 이 발칙한 놈을 시작으로 연가를 날려 버리자는군. 내가 놈을 흉한 악적으로 몰았으니, 이 일을 공론화하여 연가를 불살라 버리는 건 자신이 하겠다는 뜻이야.”
명우산의 얼굴이 밝아졌다.
“뜻밖의 도움이로군요.”
“그렇지. 생각지도 못한 때에, 이런 큰 도움을 주다니.”
진정 즐거운 듯 명천의 얼굴에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이 정도 우정을 보여 주는 사람이라면, 사돈으로 삼아도 괜찮지 않겠는가?”
“충분하지요.”
“내 옛날부터 모용가주의 딸, 연화 그 아이를 눈여겨보았네. 뛰어난 아이더군. 그 정도 여아라면 큰놈의 배필로 나쁘지 않겠어.”
“모용연화의 지모는 아비인 가주를 닮아 동세대 최고라 불릴 만하다고 합니다. 그 아이를 며느리로 들이신다면, 대공자에게도 좋을 겁니다.”
“그렇지.”
명천이 서신을 내려놓았다.
“이번 일이 끝나고 나서 매파를 보내 봐야겠네. 내 아들도 모용연화라면 흡족해할 것이야.”
“미리 감축드립니다.”
“허허허!”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연신 웃음을 터트렸다.
“아!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무엇을?”
“모용가주가 대회의권을 썼으니 백도 무림의 수장들이 모두 모여야 합니다. 물론, 정히 일이 바쁜 분은 못 가겠지만요.”
명천이 씨익 웃었다.
“이제야 내 모든 기운을 봉황신공으로 돌렸네. 성취를 올린 연후에, 다른 사대신공도 건드려 볼 생각일세.”
명우산이 미소를 지었다.
“산적한 업무로 부득불 불참하겠다고 연락하겠습니다.”
“그러시게나. 어차피 이번 회의를 주도한 사람은 모용가주이니 충분히 이해해 줄 걸세.”
“그럴 겁니다.”
“아, 그나저나.”
명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호정,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나? 청색당을 먹이로 줬다고 들었는데.”
“반 시진 전에 학, 휘, 헌 삼 형제에 백룡군을 딸려 보냈습니다. 넉넉잡아 내일 새벽쯤에는 연호정을 압송해 올 수 있을 것입니다.”
“크하하하!”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명천의 웃음은 끊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리는 명천을 보며 함께 미소 짓던 명우산은, 순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뭐지?’
명우산은 명찬의 헐거운 앞섶 가운데, 심장 상부 위치의 핏줄이 유독 도드라졌음을 발견했다.
‘혈관이?’
명우산이 입을 열려 할 때였다.
“자, 기분도 좋으니 자네도 이만 가서 할 일을 하시게. 나는 더 수련해야겠네.”
“예? 아, 예! 그러겠습니다.”
결국 명우산은 아무런 의문도 표하지 못하고 연무실을 나와야 했다.
거처로 가는 길.
괜한 불안감에 사로잡혔던 그는 슬쩍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음.’
그 역시 사대신공 중 하나인 기린신공(麒麟神功)을 익히고 있었다. 다행히 멀쩡했다.
명우산이 헛기침을 했다.
‘요새 걱정이 다소 과했나 보군.’
자신이 멀쩡하다면 가주도 멀쩡할 것이다. 그는 그렇게 믿었다.
그가 휘적휘적 걸으며 총관실로 들어섰다.
기린신공을 익힌 이후 예전보다 잔기침이 조금 늘었지만, 그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 * *
‘이럴 수가!’
퍼퍼펑!
태풍이라도 일으킬 듯 무지막지한 속도로 휘둘러지는 도끼에 봉황비천검(鳳凰飛天劍)의 검력이 그대로 쓸려 나가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위력이었다. 내상을 입었음이 분명한데도 거병에서 뿜어지는 경풍의 위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쩌저정!
명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창천하는 불꽃의 검날, 어떤 적이라도 쓸어 버릴 검법이 단 한 수에 무너져 버렸다. 봉황진기를 극한까지 끌어올렸는데도 밀린 것이다.
몇 걸음 밀려난 수준이 아니었다. 아예 몸이 붕 떠서 삼 장 거리를 날아갔다.
주르륵.
검병을 쥔 호구가 찢어졌다. 검법을 연마하고 오 년이 지나선 단 한 번도 호구가 찢어진 일이 없었거늘.
“크아압!”
파아악!
명휘가 물러나자 명헌이 달려들었다.
똑같이 봉황신공을 연성하고 수공(手功)인 봉황염수(鳳凰炎手)를 연마한 그였다.
나아가는 보법은 불꽃처럼 화려하고 빛살처럼 빨랐다. 봉황비(鳳凰飛)라는 경신술로 발군의 속도를 자랑하는 신법이었다.
봉황비에 이어 괴이한 장법이 터져 나왔다.
후우웅!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북흑의 도끼가 묵직하게 휘둘러지며 거대한 원을 그렸다.
쩌저저정!
“크윽!”
명헌도 마찬가지였다.
봉황염수가 제아무리 강해도 현무기로 펼치는 북천십이벽을 뚫을 수가 없었다.
본디 수기(水氣)는 화기(火氣)의 상극이라 하였다. 수신(水神)의 무공을 양강의 무공으로 뚫기 위해선 압도적인 화력이 필요한 법, 그들의 경지로는 현무를 뚫을 수 없었다.
쾅!
방어 다음은 공격이다.
괴주부동의 보법이 순식간에 백호군림보로 변화하며 강인한 전진의 힘을 끌어 올렸다.
산중대왕의 발톱은 강철도 부수는 법이다. 호왕구벽세의 사나운 힘이 명헌에게 쏟아졌다.
쩌저저저정! 퍼억!
“크아악!”
명헌이 비명을 질렀다. 도끼가 그의 좌측 상박을 찍어 버린 것이다.
잘려 나가진 않았지만 잘린 것이나 다름이 없다. 도끼날은 바깥쪽 살과 근육, 뼈를 끊어 냈다. 그저 간신히 매달려 달랑거리는 팔은 그 자체로 끔찍한 고통을 선사하고 있었다.
“이, 이놈이!”
명헌은 질린 눈으로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의 표정은, 뜻밖에도 모호했다. 그는 웃지도 않았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저 한없이 무심할 뿐이었다.
거역할 수 없는 분위기.
마치 천하제일의 무공을 익힌 사문의 존장이 서 있는 것 같았다. 지독한 고통 속에서도 명헌은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그때, 재차 명휘가 달려들었다.
“괴물 같은 놈!”
번쩍!
명헌보다 더 빠르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접근한 그가 봉황비천검을 휘둘렀다. 전력을 다한 듯 뜨거운 화기와 절제 없는 파괴력이 느껴졌다.
꽝! 우우웅.
힘이 넘치는 발걸음으로 명헌에게 달려들던 연호정의 움직임이 일순 느려졌다.
느리고, 부드럽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변화였다.
괴주부동에서 백호군림으로, 백호군림에서 다시 괴주부동으로.
전혀 다른 무공을 상황에 맞게 구현하는데, 무공의 변화 속도가 번개처럼 빠르고 자연스러웠다.
사신무의 무공들이 실전을 겪으면서 점차 몸에 붙고 있는 것이다. 당장 몇 시진 전만 해도 이런 보법 변화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전장의 무공 사신무였다. 사신무를 연성하는 자는 목숨을 걸수록 성장세가 가팔라지는 것이다.
묵직한 도끼와 가볍고 화려한 검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쩌어어엉!
명휘가 피를 토하며 물러났다.
이제는 힘에서도 밀린다. 순수한 실력에서 우위를 점한 그 둘이, 자신보다 약한 연호정 앞에서는 고양이를 만난 쥐처럼 꼼짝도 못 했다.
“그런 식으로 쓰면 안 되지.”
쿵!
연호정이 자세를 낮추었다.
“혈익휘천(血翼揮天)은 극살(極殺)의 보법이다. 신법으로 활용해 봤자 파탄만 날 뿐이야.”
“이, 이놈!”
“너희에게 그 무공은 지나치게 과분해.”
“으아아아!”
명휘와 명헌이 괴성을 지르며 뛰어들었다.
연호정의 안광이 번뜩였다.
후우웅.
어느새 그의 몸이 두 사람 사이를 통과했다.
동시에 검장(劍掌)을 내친 명휘와 명헌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
푸화아아악!
두 사람의 몸이 사선으로 쪼개졌다.
연호정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역시, 너희 정도의 힘으로는 주작기(朱雀氣)가 열리지 않는군.”
그가 고개를 들었다.
삼백의 백룡군이 경악한 눈으로 연호정을 보고 있었다.
연호정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늦은 밤, 하얀 달과 수많은 별이 쏟아질 것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쿵!
도끼를 견봉에 걸친 연호정이 고개를 내려 백룡군을 바라보았다.
“가주를 불러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