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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74화 (74/963)

74화. 원수(怨讐), 그리고 원수(原水) (4)

아직 깨달은 바를 몸에 전부 붙이지 못한 지금의 연호정은 명학보다 확실히 아래였다.

그러나.

연호정에겐 이 승부를 뒤집을 능력이 있었다. 실력 차는 있어도, 그 차이를 메울 만큼의 경험과 깨달음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승한 살기로 정면 승부를 고집했지만,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전술을 바꾸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현무기(玄武氣)가 반응한 것은.

우우우웅.

내상으로 인해 치솟은 탁기가 무서운 속도로 배출되었다.

혈도의 미세한 손상에서도 탁기는 솟는다. 그러한 탁기는 내공 연마에 차질을 주고, 심하면 내공의 질까지 하락시키는 원인이 된다.

연호정은 크기를 키운 현무기로 한순간에 탁기를 싹 배출해 버렸다. 그것만으로도 내상이 점점 회복되는 것을 느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찰나지간 명학의 권법 투로(套路)가 떠올랐다.

짧지만 부드러운 움직임. 최소의 움직임으로 최대치의 힘을 끌어 올린 권공(拳功)이었다.

하지만 그 투로는 공격보다는 방어에 있어서 더 특출난 위력을 발휘할 것이 분명했다.

이유인즉.

‘북천십이벽!’

그렇다.

명학의 영귀신공은 색이 다를 뿐, 현무공과 결을 같이 했다.

놀라운 사실이었다. 너무 의외라서 살기와 분노마저 싹 날아가 버렸을 정도였다.

순간 연호정은 회합 때 제갈아연이 해 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구주명가의 역사는 충분히 길어. 하지만 너희 가문을 제외한 오대세가만큼은 아니야. 명가를 세운 선조들은 삼백 년 전, 사방무제를 도와 혈교지란(血敎之亂)을 종식하는 데에 일조했다고 해. 명가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된 거지.’

사방무제, 그리고 혈교지란.

연호정은 제갈아연의 또 다른 말을 떠올렸다.

‘어쨌든 사방무제의 실력이 역사 그대로라면 확실히 절대무적이라 불릴 만하지 않겠어? 하나도 아니고, 무려 네 가지 무공을 극한까지 익혔다고 하니까.’

확신은 없다.

하지만 연호정은 사방무제라는 사람이 사신무의 후예일 거라 짐작했다.

‘나중에는 황금빛 용까지 부린다고 해서 황룡제(黃龍帝)라고도 불렸으니까. 내가 생각해도 그건 너무 갔지.’

공방과 회피, 반격에 능한 네 가지 무공.

그리고 황금빛 용.

사신무의 후예일 확률이 높다. 아니, 이 정도면 그가 사신무의 후예라는 걸 확신해도 될 정도다.

그리고 명가의 선조들은 사방무제를 도와 혈교지란이 종식하는 데 일조하였다.

‘설마 사방무제란 인간이, 명가의 선조들에게 무공 일부를 전수한 건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명가의 선조들이 사방무제의 무공을 탈취한 건 아닌가 싶었지만, 그럴 확률은 무(無)에 가까웠다.

사신무의 비기인 황룡기(黃龍氣), 즉 황룡신왕공(黃龍神王功)을 완성한 자는 누구도 이길 수 없다.

황룡기를 생성한 자는 존재 자체가 천재지변급의 재해나 다름없다. 승부도 사람을 상대로나 가능한 것이지, 자연재해와 멱살잡이를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즉, 명가는 사방무제의 방계(傍系)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순간 연호정은 또 하나 깨달았다.

발경의 묘리, 정공(正功)이지만 중원의 무공과는 궤를 달리하는 묘한 색채의 기운.

제아무리 상단전이 거대해졌다 한들 도망치기 바빴던 당시에, 흉수들의 무공 특성 하나하나를 기억하긴 힘들다.

그런데도 연호정은 그들의 내공 색과 발경 특성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떻게?

‘닮았기 때문이야.’

연호정의 눈이 충혈되었다.

벽라진기가 가라앉고 현무기가 전신을 장악했다. 그러자 명학의 육신에 둘러쳐진 진기의 색이 즉각 포착되었다.

‘색은 달라. 하지만 결은 같다.’

명학의 권공 발경을 떠올렸다.

북천십이벽의 발경과는 전혀 달랐다. 하지만 방어 시, 내공 방패를 생성해 적에게 피해를 주는 반탄경력(反彈勁力)에서 공통점이 많았다.

즉, 명학의 권법은 북천십이벽의 반탄력을 이용해 공격력을 취한 권법이다. 그만큼 방어에 있어 손해를 봤겠지만.

‘이럴 수가. 내가 이걸 모르고 있었다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설마하니 자신이 익힌 무공의 편린이 철천지원수들에게 전수되었을 것이라고는 누구도 상상하기 어렵다. 제아무리 연호정이라도 익숙함은 느꼈을지언정, 연관성을 느끼긴 힘들었다.

지금처럼, 직접 부딪치기 전까지는.

연호정은 왠지 모를 허망함을 느꼈다.

‘스승님께서 전수해 주신 무공이, 사신무가 내 가문을 해친 흉수들의 무공과 일맥(一脈)이라고……?’

기가 막혔다.

과거로 회귀한 후, 이렇게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연호정은 아주 잠깐이지만, 백호기와 현무기를 뿌리까지 뜯어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랬었어. 그래서 내가…….’

모든 것이 맞아떨어진다.

명치산, 청백무병과 싸우기 전 그는 명온지의 무공을 떠올리며 알 수 없는 기시감을 느꼈다.

그녀의 무공이 현무공의 특성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명온지의 경지가 너무나도 낮아, 현무 특유의 수기(水氣)와 무거움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애초에 현무기를 완전히 체득했다면 명온지는 일초지적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신무…… 사신무!’

“현무공? 그건 또 무슨 개소리냐!”

연호정이 멍한 눈으로 명학을 바라보았다.

명학의 입술을 비틀었다.

“뭐냐, 그 표정은? 흥! 내 무공을 보고 넋이 나갔느냐?”

“…….”

“말이 없군. 좋다, 이제 끝내 주마.”

쿵!

명학이 강한 진각과 함께 접근했다.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괴주부동(怪柱不動)은 그렇게 쓰면 안 되는 무공이야.’

심지어 보법까지도 닮았다. 북천십이벽을 통해 공격력을 살린 권법처럼, 저 보법도 괴주부동의 보행을 따와 백호군림보처럼 전진형으로 만든 것이다.

“카아압!”

기합과 함께 명학의 주먹이 연호정의 가슴으로 향했다.

치명적인 일격이다. 내공 없이 받아 내면 흉골부터 척추까지 그대로 으스러질 일격이었다.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쾅!

“헉!”

감당하기 힘든 충격에 명학은 다섯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

위이이잉.

도끼를 내려놓은 연호정이 양손을 펼치고 있었다. 펼친 양손 사방으로 육각 귀갑의 형태가 떠올라 있었다.

북천십이벽, 진무대제중벽(眞武大帝重壁)의 초식이었다.

진무대제(眞武大帝)는 곧 현천상제(玄天上帝)이고, 현천상제는 곧 현무(玄武)를 신격화한 존재다. 이 초식의 방어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초식명만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명학이 튕겨 나간 건, 단순히 진무대제중벽의 반탄력이 강해서가 아니었다.

“다시.”

치이이익!

시커먼 연기와 함께 육각 귀갑의 반투명한 내공 방패가 사라져 버렸다.

연호정이 손을 까딱였다.

“다시 와 봐.”

명학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개자식이!”

콰앙!

이번에야말로 전력을 다한다. 이번 일격으로 죽어도 상관없다.

명학의 공격은 그 자신의 살의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폭발적인 보법에 이은 영귀신권 최후의 초식이 펼쳐졌다.

십 장 밖으로 물러났던 명휘와 명헌이 소리쳤다.

“형님!”

“죽이지 마시오!”

거대한 주먹이 그대로 연호정의 가슴을 후려쳤다.

콰앙!

폭음이 울렸다.

주먹으로 화약을 터트린 것만 같았다. 무식하기 짝이 없는 위력이었다.

콰지직.

연호정의 발이 디딘 땅을 다섯 치나 파고들었다.

‘……!!’

명학의 얼굴에 경악이 드리워졌다.

그의 주먹은 연호정의 가슴에 닿아 있었다. 그리고 그 팔을 연호정의 양손이 잡고 있었다.

연호정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괜찮군.”

연호정의 얼굴이 더 창백해졌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내상은 피할 수 없었지만, 뼈가 부러지는 것은 막아 냈다.

북천십이벽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호왕구벽세도 아니었다.

주먹에 가격당하기 전, 휘몰아치는 경력을 북천십이벽 초식의 역순으로 짚어 모조리 파훼해 날려 버린 것이다.

파괴력 넘치는 경력이 몽땅 소멸했으니 제 위력이 나올 리가 없다. 근육과 단련된 주먹은 벽라진기로 보호했다.

“어, 어떻게?!”

명학이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어떻게…… 파훼한 것이냐?!”

“이렇게.”

연호정의 상체에 현무기가 일렁였다.

츠츠츠츠츠.

뭉클거리며 일어난 현무기가 그의 어깨를 넘어 양손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의 양손에 맴돌던 현무기가 일순 명학의 팔로 침투했다.

“헉!”

깜짝 놀란 명학이 주먹을 빼려 했다.

하지만 주먹이 빠지지 않았다. 이 애송이 놈의 악력이 무서운 속도로 강해졌다. 아무리 애를 써도 팔을 뺄 수가 없었다.

“이놈!”

퍼억!

붙잡히지 않은 반대쪽 주먹에 연호정의 고개가 돌아갔다. 입가가 찢어져서 피가 터졌다.

명학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뭐, 뭐야 이게?!’

내공이 실리지 않은 주먹으로도 통나무를 부수는 그였다. 광대, 턱뼈 죄다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연호정은 멀쩡했다. 입꼬리가 찢어져 피가 나는 정도, 그것이 전부였다.

비현실적인 광경을 목도한 명학은 순간 섬뜩한 깨달음을 얻었다.

‘놈은 점점 강해지는데 나는 약해지고 있다?’

그때,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현무는 북흑(北黑)이며 겨울이다. 계해(癸亥)의 수신(水神)으로서 물을 관장한다.”

“……?!”

“지류(支流)는 본류(本流)로 흘러들어 오는 법. 그것이 물이다. 세상에 퍼진 무수히 많은 방계의 힘은 곧 종가(宗家)로 귀결된다.”

“무, 무슨 헛소리냐?!”

“청룡(靑龍), 백호(白虎), 주작(朱雀), 현무(玄武). 이는 곧 용랑(龍浪), 호흉(虎凶), 비살(飛殺), 괴벽(怪壁)으로 불린다. 현무는 괴벽, 즉 완전한 방어와 무적의 방패를 상징한다.”

연호정의 눈에 위엄이 깃들었다.

그 눈을 보며 명학은, 믿을 수 없게도 위축되는 자신을 느꼈다.

“완전(完全)에 이른 철벽의 무공을 그따위로 헐겁게 개조했으니, 가까운 시일 내에 기가 역류하여 원정(原精)이 깨질 것이다. 이유인즉, 사신무에선 기(氣)와 술(術)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

“수명을 깎아서 무공을 구현하다니. 개세의 신공(神功)을 반쪽짜리 마공(魔功)으로 만들었구나.”

명학의 입이 쩍 벌어졌다.

수명을 깎다니? 이는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이 아닌가.

치이이익!

연호정의 두 눈이 완전한 어둠으로 물들었다.

“너의 모든 것, 종사(宗師)인 내가 거두어 가리라.”

우두두둑!

“크아악!”

명학이 무릎을 꿇었다. 연호정의 악력에 두꺼운 팔뚝이 으스러져 버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콸콸콸!

명학이 입을 쩍 벌렸다.

영귀의 기운이 연호정의 손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굽이치는 강물처럼 무서운 속도로 떠내려가는데,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었다.

명학의 얼굴에 공포가 어렸다.

수십 년을 연성한 내공, 그리고 얼마 전 영귀신공을 익히며 그 내공을 영귀진기(靈龜眞氣)로 탈바꿈시켰다.

그 기운이 몽땅 상대에게 넘어가고 있었다. 너무나도 쉽게, 너무나도 부드럽게.

‘설마 흡정(吸精)……?!’

치이이이익!

모든 진기가 연호정에게로 빨려 들어갔다. 빨려 들어간 영귀진기 중 불순물인 대부분은 날아가고, 얼마 안 되는 순수한 현무기가 연호정의 신장(腎臟)으로 스며들었다.

턱!

연호정이 한 손으로 명학의 얼굴을 잡았다.

명학은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진기가 빠져나가며 근력까지 잃었기 때문이다.

멀리서 이곳을 지켜보던 명휘와 명헌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다.

“형님?!”

“뭐, 뭐 하시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는 어딘지 모르게 멍하면서도 위엄으로 가득했다.

“네 동생들이냐?”

“쿨럭.”

“네 동생들은 어떤 가짜를 익혔는지 궁금하구나. 곧 네놈이 있는 곳으로 보내 주지.”

“사, 살려…….”

“잘 가거라.”

콰지지직!

명학의 두개골이 그대로 으스러졌다.

“헉!”

“이, 이놈이?!”

파아아악!

명휘와 명헌이 엄청난 기세로 돌진했다.

연호정의 안광이 번뜩였다.

반응조차 쉽지 않은 속도였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보였다. 저 둘이 어떤 무공을 익혔는지. 사신무 중 무엇을 기반으로 개조된 무공인지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쩌어어어엉!

한 줄기 매서운 참격과 불꽃 같은 장력이 연호정을 밀쳤다. 찰나지간 도끼를 들어 창대로 막지 않았다면 그대로 죽었을 것이다.

푸스스스.

창대에서 허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엄청난 살기요, 무시무시한 살공(殺功)이었다. 칼질 한 번에 만살(萬殺)의 기운이 깃들고, 손짓 한 번에 천 명의 피를 뿌린다.

연호정이 고개를 들었다.

북흑의 안광 속, 태양 같은 힘이 고개를 들었다.

“……주작(朱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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