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원수(怨讐), 그리고 원수(原水) (3)
“대공자님!”
신모의 얼굴에 다급함이 일었다.
천지가 뒤흔들리는 진각을 딛고, 일순 폭풍처럼 돌진한 연호정은 어느새 적진의 선봉에 도달했다.
무지막지한 속도였다. 신법이 아니라 보법으로 거리를 좁히다니, 낭비도 그런 낭비가 없었다.
문제는 연호정의 살기였다.
신모는 이전에 한 번 저 살기를 본 적이 있었다. 뇌협 추성을 몰아칠 때의 기세가 딱 지금과 같았다.
하지만 그 농도에선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때의 살기가 미풍이라면 지금의 살기는 광풍이다. 그때의 살기가 모닥불이라면 지금의 살기는 태산도 불사를 만한 화염이었다.
‘위험해!’
어찌 저런 살기를 피워 내는지는 모른다. 중요한 것은 자칫 대공자님께서 허무하게 잡힐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대공자님을 지켜라!”
파아악!
신모를 주축으로 한 창응대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정신없이 달려 나가던 신모는 문득 땅에 남은 족적을 보았다. 연호정이 밟고 나아간 진각의 흔적이었다.
‘이런 흔적이?!’
엉망진창이다.
발자국 모양으로 찍힌 것이 아니라 수백 근 바위가 떨어진 듯 사방으로 금이 갔다. 작정하고 땅을 부술 요량으로 내공을 퍼부은 것 같았다.
냉정함이라곤 손톱만큼도 엿보이지 않는 족적. 그 살벌하기 그지없는 흔적이 연호정의 심리 상태를 고스란히 보여 주고 있었다.
‘위험!’
터어엉! 터어어엉!
혼신의 힘을 다해 거리를 좁힌 신모의 눈에 비로소 연호정의 뒷모습이 확실하게 보였다.
‘헉!’
신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콰콰쾅!
화약이 폭발하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놀란 신모는 저도 모르게 신법을 멈추었다.
퍽! 퍼억! 쾅!
그의 발끝 세 치 앞의 땅에 실금이 번졌다.
신모의 힘이 아니었다. 튕겨 나온 무형의 충격파로 인해 생긴 흔적이었다.
“모두 멈춰라! 접근해선 안 돼!”
창응대가 서둘러 신법을 멈추었다.
신모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이럴 수가?!”
* * *
금강역사를 연상케 하는 거한 위.
하늘 높이 날아올라 도끼를 휘두르기 직전, 연호정은 생각했다.
과연 이래도 될까?
상대는 고수였다. 깨달음의 벽을 넘어 초절정의 영역에 도달한 고수는 아닐지라도, 그 밑의 영역에선 능히 선두를 다툴 만한 고수였다.
이 거한만이 아니었다. 삼 장 뒤에서 놀란 눈으로 자신을 보는 두 명의 고수도 비슷했다.
이들 셋이면 칠대세가의 가주는 무리라도 구파일방의 대표급 장로는 잡을 수 있겠다.
자신은 그런 이들을 향해 돌진한 것이다.
‘한꺼번에 상대할 순 없다. 철저하게 한 놈을 노린다. 신 대주를 지금 쓸 수는 없어. 다행히 이들은 날 죽일 생각이 없다.’
찰나의 순간 주변 정황과 현실, 미래를 모조리 읽어 낸다.
수없이 많은 경우의 수. 철천지원수를 보며 폭발하는 살기를 다스리지 못했지만, 그는 헤아릴 수 없는 아수라장을 겪어 온 백전노장(百戰老將)이었다.
읽는다. 계산하고 도출한다. 도출한 답을 검토하고, 검토한 답을 상황에 끼워 맞춘다.
불같은 감정과 냉철한 이성의 연계.
그는 연호정으로서 화를 냈고, 흑암제로서 도끼를 휘둘렀다.
퍼억!
거한, 명학(明鶴)은 깜짝 놀랐다.
‘뭐?!’
극한까지 압축된 근육과 명가 선조의 무공, 영귀신공(靈龜神功)을 익힌 그였다.
영귀신공은 선조께서 남긴 사대신공(四大神功) 중 하나로, 극에 이르면 금강불괴(金剛不壞)를 이루는 영험한 신공이었다.
암사대주 명운지가 익힌 무공이 바로 영귀신공이었다. 그리고 명학은, 명운지보다 훨씬 높은 경지를 이루었다. 본래 익히고 있었던 무공의 깊이가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 영귀신공의 영귀갑(靈龜鉀)으로 강철처럼 단단해진 팔에 도끼가 찍혔다.
도끼날이 한 치를 넘게 파고들었다. 제아무리 중병이라지만 영귀갑의 반탄력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위력이었다.
“이놈이!”
후욱!
명학의 주먹이 허공을 찢었다.
무식하게 큰 주먹이었다. 다 뻗지도 않았는데 대기가 요동치는 것 같았다.
피할 수 없는 일격. 연호정의 안광이 북방의 암흑을 품었다.
콰앙!
‘헉!’
명학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자의가 아닌 타의에서였다. 내지른 주먹이 깨질 것처럼 아팠다.
“뭐야, 이놈?!”
터억!
땅에 내려선 연호정, 그런 그의 몸 주변으로 반투명한 육각 문양의 귀갑이 떠올랐다.
위이이잉!
연호정의 어깨 위로 뱀과 닮은 괴수가 승천하듯 꿈틀거렸다.
현무의 기예, 북천십이벽이었다. 절대방어로 이름 높은 기술이며, 극에 이르면 내공 방패만으로 화포를 튕겨 낸다는 절기였다.
명학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네놈은 대체 뭐……?!”
파아악!
굳이 들어 줄 필요가 없다. 연호정이 경쾌한 몸놀림으로 접근했다.
백호군림보가 아닌데도 빠르다. 한순간에 거리를 좁히는 능력 하나만큼은 명학 이상이었다.
놀란 명학이 쌍권을 휘둘렀다.
부웅! 부웅!
무거운 권법이었다. 그만큼 위력적인 권법이었다.
하지만 중공(重功)이라 한다면 연호정이라고 못 할 것도 없다. 팔십 근 중병으로 일격필살의 묘리를 살린 것이 연호정의 무공이었다.
그가 야수창법, 아니 야수살부(野獸殺斧)를 휘둘렀다.
쩌저저정!
좌측 주먹이 튕겨 나가고, 우측 주먹이 휘어져 내려와 땅을 부쉈다.
명학의 얼굴에 또 한 번 놀라움이 일었다.
자신이 펼친 것은 영귀신권(靈龜神拳)이었다.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지만, 어지간한 고수도 한 방에 전투 불능으로 만들 위력이었다.
그 주먹이 막힌 것이다. 바위도 날려 버리는 일격이.
쉬이익! 퍼억!
대전 기둥 같은 다리가 연호정의 철부를 후려쳤다. 연호정의 몸이 주르륵 밀려났다.
명학의 입매가 미세하게 떨렸다.
각법으로 내뻗은 다리에 상당한 통증이 일었다. 반탄력 때문이었다.
쿵!
자세를 바로잡은 명학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네놈은 뭐냐? 감히 명가를 상대…… 음?”
갑작스레 습격을 감행해서 몰랐는데, 가만히 보니 이놈이 그놈이 맞는 것 같았다.
“네놈이 연호정이란 애송이냐?”
연호정이 차갑게 대꾸했다.
“너희가 전부냐?”
“……허!”
명학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이런 정신 나간 놈을 봤나? 우리를 알고 있음에도 득달같이 달려와 도끼를 휘둘러?”
웃음에서 여유가 묻어 나온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라긴 했지만, 삼 장 뒤에서 뒷짐을 지고 있는 두 고수 역시 여유로운 기색이었다.
명학의 눈에 살기가 일었다.
“차라리 잘 되었다. 팔다리를 분질러 본가로 호송해 주마.”
팔다리를 분지른다.
수도 없이 많이 들어 본 말이었다. 너무 많이 들어서 식상해질 정도의 폭언이었다.
츠츠츠츠.
연호정은 스스로가 섬뜩해질 정도로 불같은 살기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이놈이다.’
이놈이 맞다. 확실하다.
같은 무공을 익혀서가 아니었다. 오래된 기억이었지만, 연호정은 상대의 기질을 정확히 기억했다.
확실했다. 이놈도, 그리고 이놈 뒤에서 뒷짐을 지고 선 두 놈도 연가가 침공당할 때 선봉의 역할을 했던 놈들이었다.
부르르르.
도끼가 떨려 왔다. 차가운 이성을 무시한 분노가 도끼에 무서운 힘을 불어넣었다.
명학의 얼굴이 굳어졌다.
“살기 한번 지독하구나. 흑도의 개백정도 그런 살기를 뿜지는 못할 것이다. 과연 사람 죽이길 예삿일로 아는 악인답다.”
“……사람 죽이기를 예삿일로 안다?”
연호정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너희한테는 그래도 되지.”
번쩍! 번쩍!
불그죽죽한 살기로 희번덕거리는 안광이 명학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명학이 뒤로 손을 뻗었다.
“내가 잡을 테니 쉬고들 있어.”
요대에 장검을 찬 중년 사내가 말했다.
“조심하시오, 형님. 그놈, 보통 사나운 짐승이 아니외다.”
“그래 봐야 짐승이지.”
쿠웅!
명학이 힘차게 발을 내디뎠다.
강인한 진각이었다. 연호정의 진각 못지않은 힘이었다.
“오너라.”
당당하다.
성품이 어찌 되었든, 승부에 임하는 무인의 자세만큼은 명문의 무사답게 위풍당당했다.
연호정은 그의 당당함이 싫었다.
가문을 위한다는 명목하에 죄 없는 세력을 묻어 버렸던, 복면까지 뒤집어쓰고 개백정처럼 사람을 때려죽인 저놈의 당당함이 역겨웠다.
도끼를 견봉에 걸친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너, 이름이 뭐냐?”
“개백정답게 말버릇도 없구나. 그래, 내가 바로 명학이라고 하는 어르신이다. 본가 뇌옥에 처박혀 널 잡아넣은 어르신 이름이나 곱씹고 있거라.”
“명학…… 명학…….”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해 두마.”
“잡설은 그만. 이제 오…….”
쾅!
단숨에 거리를 좁힌 연호정이 도끼를 휘둘렀다.
벼락같은 일격이었다. 종전과는 완전히 다른 속도였다.
그럼에도 명학은 당황하지 않았다. 창봉이 휘어질 정도로 빠르게 날아드는 도끼를 향해 일권(一拳)을 내지를 뿐이었다.
쩌어어엉!
쇠끼리 부딪쳐 공명하는 소리가 터졌다.
‘이놈은 대체…….’
이번에도 명학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처음 부딪침에서도 느꼈지만 보통 힘이 아니었다. 힘으론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그조차 전신 근육을 바짝 긴장시켜야 할 정도의 괴력이었다.
연호정이 폭풍 같은 공격을 퍼부었다.
쩌저저정! 쩌어엉!
빠르고 강했다.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것 같지만 하나하나가 일격필살이요, 맥을 끊고 후속타를 예방하는 공격이었다.
저렇게 크고 무거운 거병을 이렇게 빠르고 섬세하게 운용하는 고수가 또 있었던가?
쾅!
연호정이 울컥 피를 토했다.
도끼날을 후려친 주먹에서부터 흘러들어온 경력이 순식간에 내부를 뒤흔들었다.
강권(强拳) 속에 유경(柔勁)이 있다. 작정하고 펼치니 부딪치는 것만으로 내상을 입는다.
그러나 연호정 역시 물러섬이 없었다.
백호기가 치솟아 무한 전진의 전투 보법을 구현했다.
꽝! 꽝! 꽝!
힘, 그리고 힘이다.
짧은 거리를 치고 나간 연호정이 마침내 호왕구벽세를 펼쳤다.
‘……!’
명학의 안색이 돌변했다.
종전과는 차원이 다른 공격력이었다. 도끼날에 맞기도 전에 피부가 갈라지는 것 같았다. 살벌한 기세였다.
적당한 힘으로 받아 낼 공격이 아니다. 명학은 영귀신공을 있는 대로 끌어 올렸다.
콰르릉! 쾅!
도끼와 주먹이 부딪치며 엄청난 충격파를 일으켰다.
퍼져 나가는 경파가 사위를 휩쓸었다. 명휘(明輝), 명헌(明獻) 두 고수는 물론 삼백의 백룡군(白龍軍) 전체가 뒤로 물러났다.
자칫 휩쓸렸다가는 내상을 입을 수도 있다. 실력이 떨어지는 자라면 충격파에 맞아 사경을 헤맬 수도 있겠다. 그 정도로 위력적인 충돌이었다.
두 사람이 연신 부딪쳤다.
콰르르릉!
힘과 힘의 대결, 내공과 내공의 대결이었다.
명학은 강했다. 날래진 않았지만, 몸 전체가 무기였다. 팔십 근 도끼를 튕겨 내는 외공과 일권에 바위도 날려 버릴 위력을 갖춘 권사(拳士)였다.
연호정 역시 마찬가지. 겉보기와 달리 그의 완력은 타고난 것이었다. 힘으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콰콰쾅! 퍼억!
연호정이 또 한 차례 피를 토했다.
빠각!
명학의 몸이 주춤했다.
“으음.”
연계기로 가슴에 일격을 먹이려 했는데, 휘어져 올라온 도끼가 허벅지를 후려쳤다.
그 일격이 어찌나 강했는지 그대로 넘어질 뻔했다. 오른쪽 허벅지가 퉁퉁 부어올랐다.
명학이 이를 갈았다.
“애송이가 보자 보자 하니까!”
치이이익!
명학의 기파가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쳤다.
기파의 압력만으로도 버텨 내기가 쉽지 않을 정도였다. 영귀신공을 극성까지 터트려 전력을 끌어내는 것이다.
무시무시한 무공. 명학의 진짜 실력이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는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까무러칠 정도의 기세였다.
그때였다.
“너…….”
연호정의 얼굴에 의아함이 담겼다.
안색은 창백하고 입가는 피범벅이 된 채였다.
명학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지?’
우우웅. 우우우웅.
당장에라도 공격을 퍼부으려던 명학은 순간 괴이한 감각을 느꼈다.
‘저놈의 기(氣)가 왜……?’
츠츠츠츠.
연호정의 몸에서 흑색 기운이 치솟았다.
놀랍게도 내상을 입기 전보다 기질이 더 강해졌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놀란 건 연호정도 마찬가지였다.
“너, 대체 무슨 무공을 익힌 거냐?”
“뭐라 하는 것인가!”
연호정이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가짜 현무공(玄武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