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원수(怨讐), 그리고 원수(原水) (2)
“총관님. 연호정이 청색당과 접선, 섬멸 후 남하하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그래?”
명우산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됐다.’
청색당은, 이를테면 미끼나 다를 바 없었다.
그간 보고받은 연호정의 성격상 순순히 잡혀 줄 것 같지 않았다. 싸움 없이 명가로 호송되면 그 또한 좋은 일이었다.
결국 사람들은 연호정의 무자비한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소문이 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딱 여기까지다. 청색당 하나로 연호정을 중범죄자로 만든 명우산은 더는 병력을 소모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삼형제에게 연락해라. 사람 많은 곳에서 전투를 벌이라고. 압도적인 힘으로 연호정을 잡아야 한다.”
“알겠습니다.”
명우산은 이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겨우 끝났군.’
생각해 보면 참 어이없이 당했다.
연호정은 대단한 놈이었다. 상상 이상의 무공, 상상 이상의 전투력, 상상 이상의 대응으로 명가를 당황케 했다.
한데 좀 더 생각해 보니, 오직 연호정 때문에 명가 전체가 허둥댄 건 아닌 듯했다. 주축은 연호정이지만 또 다른 무언가가 명가의 살을 깎아 먹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뭔지를 모르겠다. 알 수 없는 찝찝함이 자꾸만 뇌리를 자극한다.
‘……뭐, 이제 와선 상관없겠지.’
명우산은 평생 알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운명이라는 걸.
연호정은 그 자신의 노력과 희생으로 운명의 수레바퀴를 더 빠르게 돌아가도록 만들었다. 다만 스스로 무너지기 전에 자신의 손으로 무너트리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명우산은, 명가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나저나.”
몇 개의 서류들을 검토한 명우산은 생각에 잠겼다.
“빨라도 너무 빠른데.”
강소성의 미해결 범죄의 용의자가 연호정이란 소문을 퍼트린 건 명가다.
정당성, 명분을 얻기 위한 정보 조작이었다. 소문이 빨리 퍼지도록 조치한 것도 다 명가에서 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빨랐다.
소문이 퍼지려면 빨라도 닷새는 걸릴 텐데, 정주와 개봉 인근에서 터트린 정보가 사흘 만에 하남 전체로 퍼져 나갔다.
그 엄청난 속도에 명우산은 당황했다. 명천은 뭐가 문제냐며 핀잔을 주었지만, 의도하지 않은 일이 터졌을 땐 항상 문제가 되는 법이었다.
‘설마 개방이?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개방이 소문을 부채질했다면 사흘 만에 하남 전체가 떠들썩해질 만도 하다.
문제는 이유였다. 개방은 지금껏 연호정을 도왔다. 차라리 소문을 없애려 들었다면 모를까, 부풀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고로 개방일 확률은 낮다.
그럼 누구일까?
“……그래, 가주님 말마따나 사소한 것은 넘기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틀렸다.
그는 끝까지 그 부분에 대해 물고 늘어졌어야 했다. 해서 소문을 부풀린 조직이 어디인지, 왜 소문을 부풀렸는지 끊임없이 파고들었어야 했다.
물론 그가 알아낼 때쯤엔 이미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버린 뒤겠지만.
* * *
우우우웅.
관도를 걸어가며 연호정은 자신의 무공에 대해 생각했다.
‘벽라진결이 팔 성(八成)에 올랐다.’
가문에서 나오기 전, 육 성에 머물렀던 벽라진결이 그새 두 단계나 성장한 것이다.
이미 벽라진결에 대해선 다 알고 있다. 머리로 받아들인 깨달음을 몸에 붙이는 과정이니, 남들보다 성취가 빠를 수밖에 없다.
아무리 그래도 그 짧은 시간 두 단계나 성장할 정도는 아니었다. 오직 벽라진결만 익혔다면 이제야 칠 성(七成) 근처를 기웃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사신무 덕분이야.’
백호기, 현무기.
두 가지 기운 덕에 신체가 받아들이는 기의 총량이 늘어났다. 동시에 매 순간 탁기를 배출하여 신체를 최상의 상태로 유지했다.
개울가 같았던 기도가 강처럼 넓어졌다. 그러자 흐르는 기의 양과 질도 늘어났다.
끊임없는 선순환. 덕분에 벽라진결의 성취가 가파르게 상승 곡선을 탔다.
우우웅. 우우우웅.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발바닥에서 담청색 진기가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분위기를 휘어잡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무공을 연성 중이기도 했다.
벽라진기로 단전 외벽의 밀도를 높이는 것이다.
‘팔 성…… 그걸로는 부족해.’
빠른 성취였지만,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낀다.
명가에서 어떤 고수가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만일 초절정 고수가 튀어나오게 되면, 천하의 연호정도 막기가 버거울 수밖에 없었다.
‘하긴, 그렇게 생각하면 명가를 향해 가고 있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지.’
명가는 명실공히 천하제일가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고수를 보유했을 것이다.
‘못해도 구 성(九成)까지 올렸어야 했어. 지금이라도 올릴 수 있으면 좋으련만.’
불가능하다. 현재로서는.
물론 당장 벽라진기의 성취를 올릴 방법이 하나 있다.
‘사신기(四神氣)의 남은 두 개 중 하나의 기운만 더 불러낼 수 있다면…….’
현무를 부르고 백호를 개방했다.
이제는 굳이 생사의 격전에서 다른 사신기를 얻을 필요가 없다. 백호기와 현무기의 균형을 맞추고, 그 크기를 끝없이 불리다 보면 어느 순간 또 하나의 사신기를 불러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시간이 부족하다.
결국, 벽라진결이 팔 성인 지금 이 상태로 끝을 봐야 한다.
‘만일, 이번 싸움에서 남은 둘 중 하나를 불러낼 수 있다면.’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주작(朱雀)과 청룡(靑龍)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무엇을 얻어도 신체와 무공 전반이 크게 향상될 것이다.
게다가 불러낸다고 전부가 아니다. 사신기(四神氣)를 모두 갖추게 된다 해도 끝없는 연성이 필요하다. 사신기는 벽라진결처럼 성취를 나누지 않는, 한계 없이 깊어지는 기운이었다.
‘즉, 벽라진결부터 완성한 후 다른 오대신공들을 섭렵해야 해. 그렇게 보면 주작보다는…….’
청룡이다.
청룡기(靑龍氣)를 얻게 되면 몸은 물론 익히고 있는 신공까지 완전히 탈바꿈할 것이다. 청룡기 자체의 특성도 그러했고, 청룡의 대척점에 있는 백호를 얻은 뒤이기에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과연 그게 가능할지.’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일단은 가지고 있는 것부터 잘 쓰자.’
가장 먼저 불러온 현무기는 벽라진결과의 상호 작용으로 크게 성장했다.
반면 백호기는 아직 멀었다. 그간의 수련과 생사결로 인해 완전히 자리를 잡았지만, 현무기에 비하면 오분지 일 정도의 수준이었다.
백호부터 연련한다. 그게 순서다.
“대공자님.”
연호정이 뒤를 돌아보았다.
신모였다.
“왜?”
“이대로 괜찮으시겠습니까?”
명가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반나절만 더 지나면 명가의 영역으로 진입할 것이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왜? 긴장되나?”
“물론입니다.”
신모의 무수히 많은 장점 중 하나가 솔직함이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솔직함을 드러내도 될 시기를 알았다.
“그들은 대공자님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청색당을 보낸 것은…….”
“소문을 진실로 만들기 위해서지. 모두가 보는 앞에서 확인을 시켜 주겠다는 의도야.”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신모의 눈에서 서늘한 예기가 풍겨 나왔다.
“이제는 병력을 소모하지 않을 겁니다. 진짜를 보내오겠지요. 명가에 진입하도록 놔두지 않고, 끌고 가겠다는 의지로 고수를 보낼 것입니다.”
“내 생각도 같아.”
신모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다 알고 있다. 이 거칠고 무모하면서도 지혜로운 대공자는 상대의 수를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런데도 명가로 향하는 것은 믿는 바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공자의 호위를 자처하는 신모로서는 걱정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연호정이 툭 던지듯 말했다.
“정 그렇게 걱정이 되면 숨기고 있는 힘까지 꺼내 보지, 그래?”
순간 신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
“아니었나? 엄청난 내력을 봉인해 둔 것 같은데?”
신모는 깜짝 놀랐다.
“그,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어떻게 알긴. 보이니까 알지.”
“그게 보였다는 말씀입니까?”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어. 이번에 자네를 봤을 때, 바로 그제야 깨달았네.”
놀라움으로 가득했던 신모의 얼굴에 점차 감탄이 드러났다.
“굉장하시군요, 대공자님. 일찍이 이 힘을 꿰뚫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
“그렇습니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데 그 힘, 아주 친숙하군. 본가의 신공인가?”
“그렇습니다. 가주님께서 못난 이놈에게 용포신공(龍抱神功)을 전수해 주셨습니다.”
이번엔 연호정의 얼굴에 놀라움이 일었다.
“용포기를?”
“예.”
용포신공은 연가의 오대신공 중 하나였다.
오대신공 중 가장 안정적인 것이 벽라진결이고, 가장 곧고 날카로운 것이 검극사기라면, 용포신공은 발경(發勁)의 파괴력에서 제일로 꼽히는 무공이었다.
연호정이 희미하게 웃었다.
“앞으로 뭔 일 있으면 신 대주 뒤에 숨으면 되겠군.”
“아, 아닙니다. 천운이 닿아 영약을 취할 수 있었지만 용포신공이 아니었다면 기를 제어하지 못해 입마(入魔)에 빠졌을 겁니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요.”
“그래서 숨기고 있었군. 아직까지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어.”
“그렇습니다.”
“그래도 개방해도 되나?”
“잠시라면 괜찮습니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힘, 잘 숨겨 두도록 해. 결정적인 한 수를 굳이 적에게 알려 줄 필요는 없으니까.”
신모가 표정을 굳혔다.
“알겠습니다.”
대공자는 이 김에 끝을 볼 생각인 것 같았다.
‘막을 수 없겠구나.’
한 번 하겠다고 하는 것은 무조건 하고야 마는 사람이다. 신모가 보는 연호정은 그러했다.
그렇다면 별수 없다. 이곳에서 뼈를 묻는 한이 있더라도 대공자님을 지킬 수밖에.
그렇게 연호정 일행은 거침없이 남하했다.
중간중간 사람들이 그들을 보곤 소스라치게 놀라 달아났다. 그들의 이동 속도보다 소문이 훨씬 더 빨랐기 때문이었다.
연호정은 의연했다. 사람들의 분노한 시선에도, 두려워하는 시선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뚜벅뚜벅 갈 길을 갔다.
‘해가 지는군.’
해가 저 멀리 서쪽 산마루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붉은 석양이 세상을 비추었다. 따뜻한 허무의 색이었다.
이제 곧 밤이 찾아온다.
서늘한 바람과 고요 속, 음험한 살기가 요동치는 밤이.
‘…….’
명가의 영역에 들어가기 직전.
‘……뭐지.’
연호정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불어오는 바람에 익숙한 무언가가 묻어 나왔다. 그것은 살기이기도 했고 투기이기도 했다.
“대공자님.”
“알아.”
신모의 얼굴에 진한 긴장이 어렸다.
“대단한 고수입니다. 그것도 무려 셋입니다.”
“그렇군.”
안력을 집중해도 잘 보이지 않는 저 먼 관도 저편.
그곳에서부터 여유롭게 걸어오는 세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세 사람 뒤로 청색당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막강한 군기(軍氣)를 피우는 삼백의 무병(武兵)들도 보였다.
전투 부대, 무력 조직을 이끌고 나타난 세 명의 초고수.
순간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강하다.’
저 셋의 무공은 강하다. 그것도 그냥 강한 수준이 아니라 놀랍도록 강했다.
단순 무공의 경지라면 지금의 연호정보다도 몇 수는 위였다. 그런 고수가 무려 세 명이니,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전력이었다.
한데…….
‘왜 이렇게 익숙하지?’
연호정이 놀란 것은 상대의 강함 때문이 아니었다. 청색당을 날려 버렸으니, 이제 저 정도 고수들이 올 때도 되었다.
문제는 저들의 기도였다.
명가의 고수니, 당연히 명가의 무공을 익혔을 것이다.
그 명가의 무공이 익숙했다. 언젠가 한 번 느껴 봤던 기운이었다.
‘대체 언제?’
척.
연호정의 걸음이 처음으로 멈추었다.
“대공자님?”
“…….”
후우우웅.
바람이 낮게 깔렸다.
의아한 눈으로 연호정을 보던 신모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치이이이익!
바닥을 디딘 두 발에서부터 벽라진기가 용솟음쳤다.
한데 그 진기가 평소 같지 않았다. 신비로운 담청색 벽라진기는, 이 순간 끔찍하고도 흉흉한 푸른 광기가 되어 연호정의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휘이이이잉!!
낮게 깔린 바람 주변으로 돌풍이 불기 시작했다.
“헉!”
“으윽!”
창응대 전체가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신모가 당황하여 외쳤다.
“대공자님!”
쩌저저적! 쩌저적!
푸른 광기, 새하얀 폭풍에 이어 어두운 한기마저 밀려온다.
어둡고 서늘한 북방의 기운이었다. 삶의 끝, 세계의 종착지에서 불어오는 죽음의 기운이 연호정의 두 눈에 가득 실렸다.
크허허헝!
저 서쪽 어디에서인가 들려오는 호왕의 포효.
백호기와 현무기를 동시에 담은 도끼가 제멋대로 꿈틀거렸다.
벽라진결, 백호기, 현무기.
결이 다른 세 가지의 신기(神氣)가 동시에 일어났다.
“……조금 더 천천히 나타나 줘도 되는데.”
목소리가 떨려 왔다.
두려움인가, 환희인가.
“더 참을 수 있었어. 아니, 언제까지라도 참을 수 있었지.”
우우웅!! 우우우우웅!!
도끼가 무섭게 진동했다. 당장이라도 자신을 휘둘러달라는 듯, 진한 살기를 머금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시퍼런 광기를 머금은 동공이 선두에 선 세 고수를 꿰뚫어 보았다.
연호정은 현재를 살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과거를 훑고 있었다.
‘아버지.’
철벽같은 검으로 적의 파상공세를 끝까지 막던 아버지.
그리고 그런 아버지의 몸을 피투성이로 만든 괴검(怪劍)의 수장.
‘평아.’
적과의 교전을 피하고 가문의 미래를 위해 도주를 선택했던 동생.
그리고 그런 동생의 등뼈를 부러트렸던 괴장(怪掌)의 대장.
나아가 역사 깊은 연가의 대문을 부수고 쳐들어온, 거대한 체구의 선봉장까지.
연호정의 흰자위가 점점 붉게 물들었다.
현재와 과거,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단 하나의 감정.
그것은 철천지원수를 향한 파천(破天)의 분노였다.
콰앙!
백호의 한 걸음.
그 한 걸음으로 연호정의 몸은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콰콰콰콰쾅!
연달아 터지는 폭음이 무서운 속도로 멀어졌다.
“뭐, 뭐야?”
선두에 선 거구의 중년 사내는 깜짝 놀라 허공을 바라보았다.
오로지 백호군림보만으로 그 먼 거리를 주파한 짐승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번쩍!
석양빛을 받은 건지, 핏빛 살기를 뿌리는 건지.
화염 가득한 안광을 만천하에 뿌리는 흑암의 제왕이 흉포한 거병(巨兵)을 들어 올렸다.
“반갑네, 친구들.”
도끼가 사내의 정수리로 떨어졌다.
쐐애애액! 퍼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