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상대(相對)는 있어도 절대(絶對)는 없다 (5)
잔을 채우는 연녹색 액체는 몹시 고왔다.
“녹음주(綠陰酒)라고 이름을 붙여 보았네. 자네도 알지? 아버지께서 즐겨 담으셨던 술.”
“…….”
“이 좋은 술에 이름은 왜 안 붙이셨는지, 생각해 보면 의아할 따름이야.”
“…….”
“한잔하겠는가?”
“예.”
명천이 명우산의 잔을 채워 주었다.
“이보게, 산이.”
명우산은 흠칫했다.
명천이 자신을 이름으로 부른 적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명천은 항상 공사의 구분을 두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노력한 만큼의 결과는 나오지 않았지만, 어지간하면 공석에선 상대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 관례를 깼다.
“예, 형님.”
“내 보기에 자네가 실수한 것은 없네. 다 내 실수였지.”
“…….”
“심지어 내가 한 실수를, 자네는 어떻게든 막으려 들었지. 자네 말을 따랐다면 애꿎은 병력 낭비는 없었을 게야.”
“……아닙니다.”
명천은 자신의 잔을 비웠다.
명우산은 차마 술을 마시지 못했다.
“전부 내 잘못이네. 가내 사람들이 다친 것도, 길 가다가 벼락에 맞아 죽어도, 실수로 강에 빠져 죽어도 다 가주의 책임일세.”
“…….”
“그러나 그 가주의 무거운 짐을 나눠 들어 주는 게 바로 총관이란 직책일세.”
“예, 예.”
“직계가 아닌 방계 출신인 자네를 총관직에 앉힌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어. 능력? 아닌 말로, 자네만큼 능력 좋은 사람은 직계에도 많았다네.”
“…….”
“난 자네의 책임감이 좋았네. 그리고 자네의 사상이 좋았어. 설령 가문의 수뇌부 전부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가주의 위엄을 상케 해서는 안 된다. 그리 말하는 자네에게서 진심을 느꼈네. 그래서 자네에게 총관직을 맡긴 것이야.”
명천이 술병을 들었다.
“그저 방계 출신의 명우산이었던 남자에게, 총관이라는 직함을 붙여 준 사람은 나란 말이지.”
“……송구합니다.”
“무엇이?”
“…….”
“자네가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자네를 총관직에 앉힌 사람은 나야. 잘못이 있어도 나한테 있지.”
명우산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명천의 얼굴이 점점 싸늘해졌다.
“다만 이건 좀 문제로군.”
“…….”
“청랑귀와 본가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 사람이 갑작스레 많아졌다네. 모용세가를 제외하고, 청랑귀가 본가 소속이라는 걸 아는 세력은 없었는데도 말이지.”
“…….”
“연가의 장자 놈? 그래, 불세출의 천재일 수 있지. 홀로 청랑귀를 날려 버렸다니 대단한 놈이야. 그래, 그럴 수는 있는데…….”
쾅! 째애앵!
탁자가 부서지며 술병과 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병과 잔이 산산조각이 났다.
“왜 이 소문을 막지 못했나?”
“…….”
“자네의 형이 묻고 있지 않나? 왜 막지 못했지?”
“……죄송합니다.”
명천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가 창가 옆에 놓인 도자기를 휘둘렀다.
째앵!
명우산의 머리가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다.
내공으로 피해를 막지 않았다. 명우산은 순간 눈앞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쓰러지지 않았다.
“소문에도 기선(機先)이라는 게 있는 법이야. 설마하니, 아무런 대비도 없이 마음 놓고 있었단 말인가? 청랑귀가 연호정에게 당할 일말의 가능성을, 총관인 네놈은 염두에 두지 않았단 말이냐!!”
호랑이가 포효하는 것 같았다. 명우산은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으윽.’
무시무시한 내공이었다.
명천 역시 며칠 전부터 선조의 무공을 익히기 시작했다. 그 무공을 익힌 자들에게서 아무런 부작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며칠 사이에, 내공의 양과 질이 크게 상승했다. 비어 있던 한 조각을 찾은 듯 완벽한 기파를 발산하는 그였다.
주르륵.
명우산의 코에서 피가 흘렀다. 목소리에서 흘러나온 충격파에 코점막이 다친 것이다.
“대체 네놈은 지금까지 무엇을 했지? 죄송하다는 입에 발린 소리 말고, 무엇을 했는지 말해 봐!”
“저는…….”
명우산이 입술을 깨물었다.
“암사대를 찾고 있었습니다.”
명천의 안광이 불처럼 타올랐다.
“왜? 네놈의 딸년 때문이냐?!”
“……거짓을 입에 담지 않겠습니다. 물론 제 딸 때문이기도 하지만, 혹여 그들이 암사대를 붙잡아 두고 있다면 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 왜? 암사대가 본가의 기밀을 줄줄이 읊을 것 같았느냐?”
“아, 아닙니다! 암사대는 목숨을 내려놓을지언정 기밀을 누설할 이들이 아닙니다!”
“하면!”
“만일 연호정이 암사대를 끌고 나타나는 순간, 저희가 놈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해집니다. 그래서 찾았습니다.”
명천의 눈이 깊어졌다.
보아하니 아무 생각 없이 놀고만 있었던 건 아닌 모양이다.
“해서, 암사대의 행방은?”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끝내주는군.”
“하, 하지만! 누가 개입했는지는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증거도 확보했습니다!”
명천의 눈이 빛났다.
“증거?”
“그, 그렇습니다! 개방이 개입했습니다! 확실합니다!”
“개방이 개입한 건 나도 알아. 다만 그 증거가 있어도 무엇을 할 수 있냐는 것이지.”
“압박할 수 있습니다.”
“어디를? 설마 개방을?”
명우산이 입술을 핥았다. 마른 입술이 쩍쩍 갈라져 있었다.
“그렇습니다. 개방은 의협을 기치로 내건 대방파이지요. 그들에게 의협은 일순위의 가치입니다. 하나 지금 그놈들이 한 짓은 납치, 억류와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명천이 인상을 찌푸렸다.
“고작 그따위 악소문으로 놈들을 흔들 수 있다고 보는가?”
“놈들을 흔드는 게 아니라 여론을 흔들 수 있습니다.”
“여론?”
“그렇습니다. 암사대를 억류했다는 것은, 결국 그들이 연가와 함께 이 모든 일을 저질렀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흐음.”
“방법이 어찌 되었든 결과만 좋으면 된다? 아니지요. 백도 무림은 절대 그런 식으로 운영되지 않습니다. 명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개방의 일 처리는, 필시 많은 이들의 신뢰를 저버리게 될 것입니다.”
명우산의 눈이 빛났다.
“용두방주에게 연락하십시오. 함께 죽을 생각이 아니라면 적당한 선에서 멈추라고. 본가와 연가 중, 어느 쪽이 더 감당하기 쉬울지는 용두방주도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맞는 말이다.
맞는 말이지만, 부족하다. 설령 이 계책이 들어맞는다고 해도 여전히 문제가 남아 있다.
“결국 우리가 청랑귀 등을 보유하고 있었던 걸 인정하는 꼴이야. 시간이 지나면 개방이 우리를 파고들 걸세.”
“저희에게는 믿음직한 아군이 있지 않습니까?”
“모용?”
“그렇습니다. 모용세가의 영향력은 본가를 제외하면 칠대세가의 수위를 다툽니다. 백도 무림을 아수라장으로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 감히 용두방주도 이쪽 판에 끼어들 생각을 하진 못하겠지요.”
명천이 코웃음을 쳤다.
“그래, 자네 생각대로 되면 오죽이나 좋겠나? 결국 다 말뿐이야. 상황이 자네 의도대로 흘러가기 위해선 더더욱 확실한 무기가 필요해.”
무력이 아닌 여론을 뒤흔들 만한 무언가.
세인들의 머리에, 연호정과 연관된 사건 자체를 지워 버릴 만큼 충격적인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때, 명우산의 눈이 빛났다.
“덮어씌우시지요.”
“덮어씌우자니? 무엇을?”
“연호정과 관련된 사건을 잊게 만드는 게 아니라, 아예 그를 악적(惡敵)으로 만들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건 흥미롭다.
명천은 내심 미소를 지었다. 역시 사람은 몰아붙였을 때 진가가 나오는 법이다. 명우산 역시 똑같았다.
“잘만 하면 연호정, 연가는 물론 개방까지도 눌러 버릴 수 있습니다.”
“어떻게?”
“강소성 고검방에 연락해서, 근 오 년 내에 벌어졌던 살인 사건 등 각종 중범죄를 알아 오라 하십시오. 그중 미해결 사건의 범인을 연호정에게 뒤집어씌우면 됩니다.”
매혹적인 의견이었다.
명천이 은근히 물었다.
“증거가 없는데?”
“상관없습니다. 세인들도 알다시피, 본가의 무사들은 하나같이 열혈(熱血)이지요. 일단은 연호정을 잡아 둔 뒤, 대회의권을 발동해 심문할 생각이었다고 둘러대면 지금까지의 모든 사건이 묻힐 겁니다.”
명천의 얼굴에 비로소 기분 좋은 미소가 어렸다.
“그거 괜찮군. 아주 괜찮아.”
설령 뒤늦게 사실이 아님을 밝혀져도 상관없다. 그 정도는 명가의 힘으로 충분히 무마가 가능하니까.
잘하면 강소성에 사는 양민들의 지지까지도 얻을 수 있지 않겠는가. 약간의 손해만 감수하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기책이었다.
결국은 명분이다. 강한 명분 하나만 붙들고 있다면, 나머지 사소한 것쯤은 세력이 가진 실질적인 힘으로 박살 내면 그뿐이다.
그것이 바로 명가가 커 온 방식이며, 지금껏 수많은 문파가 성장해 온 방식이기도 했다.
적어도 백도 무림은, 변절한 문파들은 그러했다.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군. 그래, 진즉 그렇게 했으면 오죽 좋았겠나.”
“송구하옵니다.”
“괜찮네. 방금 자네가 떠올린 그 기책, 그것만으로 자네의 지난 잘못은 다 없는 것이 되어 버렸어.”
“감사합니다.”
“청랑귀 건은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안고 가야겠지?”
“그건 어쩔 수 없습니다. 악인을 교화한다는 명목으로 붙잡아 두고 있었다고 둘러대시지요.”
“좋아, 그렇게 하지. 시간이 부족해. 서두르게.”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총관.”
“하문하십시오.”
명천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그럴듯한 명분은 만들었으니, 이번에야말로 진짜 연호정을 데려와야 하지 않겠나?”
“……그렇습니다. 누굴 보내실 생각이십니까?”
“청랑귀 칠십을 이긴 놈이야. 더는 놈을 후기지수 수준으로 생각하면 안 되네.”
명천이 턱을 들었다.
“명치산의 이복형제들을 보내게.”
명우산의 눈이 커졌다.
“그들은 연가를 없애는 데에 선봉장으로 쓸 이들이 아닙니까?”
“연호정, 그놈은 연가 소속이 아니라던가?”
“…….”
“보내게.”
“알겠습니다.”
가주실을 나가는 명우산의 얼굴이 밝아졌다.
살았다는 쾌감과, 이번에야말로 연호정을 잡을 수 있다는 안도감이 섞인 표정이었다.
적어도 그가 아는 그 셋은, 방계 출신 중 최강의 실력자들이니까.
그들 셋이라면 칠대세가의 가주도 손쉽게 잡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가장 먼저 선조들의 무공을 익힌 것도 그들이었다.
승산은 십 할이었다.
* * *
우우우웅.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됐다.’
열흘 전, 청랑귀와의 혈전에서 얻은 내외상이 씻은 듯이 나았다.
연가의 오대신공 중 가장 안정적이라는 벽라진결과 백호기, 현무기를 전부 가동한 결과였다. 사신무를 익히지 않았다면 회복에 스무날 이상은 걸렸을 것이다.
그가 도끼를 들고 방을 나섰다.
‘음?’
연호정인 창대를 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좋은데?’
전신 근육은 물론 신경, 관절까지 모든 게 예전보다 더 나아졌다.
사신무(四神武)는 전장의 무공이다. 싸우면 싸울수록 성장에 탄력이 붙는다. 오죽하면 적의 살기로 사신기(四神氣)를 불리겠는가.
짧은 순간, 그는 피와 살점이 튀는 생사결을 수도 없이 벌였다. 그 싸움이 백호기와 현무기의 힘을 불렸고 나아가 육체까지 발달시킨 것이다.
‘강해지려면 죽어라 싸우는 수밖에 없다는 거지. 새삼 스승님께서 사신무를 경멸했던 이유를 알 것 같군.’
그렇게 방에서 나와 장원 공터로 나왔을 때였다.
“연 공자!”
저 멀리서 가득상이 달려왔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몸이 다 나으니 기다렸다는 듯 오는군. 무슨…….”
연호정은 말을 잇지 못했다. 가득상의 얼굴에서 다급함을 읽었기 때문이다.
“큰일 났소!”
“무슨 일이오?”
“명가가 연 공자를 강소성 미해결 사건의 범죄자로 지목했소!”
“뭐?”
가득상은 명가가 낸 소문에 대해 상세하게 알려 주었다.
“지금 정주와 개봉 인근은 난리가 났소! 소문이 퍼지는 속도도 장난이 아니외다! 우리가 퍼트린 소문이 일거에 묻힐 정도요!”
“명분 만들기군.”
“뭐, 뭐라고?”
연호정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명분을 만드는 거요. 이 사건을 없앨 순 없으니, 나를 악적으로 만들어 병력을 파견한 이유를 만든 거지.”
“이런 제기랄! 그걸 누가 모르오? 문제는 소문이 퍼지는 속도란 말요! 이러다 사나흘 안에 하남 전체로……!”
“알아서 무덤을 파는군.”
“……에?”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저쪽에서 억지로 만든 명분은, 우리에게도 명분이 된다는 거요.”
“무, 무슨 말이오?”
연호정이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서 신모가 다가오고 있었다.
“신 대주. 창응대원들, 체력은 괜찮나?”
“예? 아! 물론입니다.”
“좋아, 이틀 안쪽으로 출격 준비 완료시켜.”
연호정이 도끼를 척 하니 어깨에 걸쳤다.
“명가주 얼굴 보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