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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69화 (69/963)

69화. 상대(相對)는 있어도 절대(絶對)는 없다 (4)

어느새 연호정의 기척이 사라졌다. 이곳을 완전히 벗어나 버린 것이다.

그때까지 한참 동안 웃음을 터트리던 모용군이 차츰 웃음을 거두었다.

그가 담담히 자신의 잔을 채웠다.

“연화야.”

“예, 아버지.”

“어떻게 보았느냐?”

모용연화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가늠이 안 되네요.”

“허허, 그럴 만도 하지.”

“하나는 확실해요. 생각보다 훨씬 무례한 사람이라는 거.”

“힘이 없으면 무례도 저지르지 못하는 법이지.”

“연호정에게 크게 감탄하신 것 같더군요.”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모용군은 연호정을 떠올렸다.

너무나도 투명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오싹함을 느끼게 하는 눈빛. 여유는 없지만 다급함도 엿보이지 않는 무심한 얼굴.

그리고, 천하제일가를 아무렇지도 않게 없애 버리겠다고 말하는 무시무시한 배짱까지.

애써 거두었던 웃음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그는 강자다. 무공이나 지모, 안목 같은 걸 떠난 문제야. 나는 그에게서 태생적인 강함을 느꼈다.”

“……그 정도인가요?”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상상도 가질 않는다. 어지간한 아수라장은 다 겪고 기어 올라왔어. 강한 천성도 경험이 주는 노회함을 이기기 힘든 법이지. 녀석은 그 두 가지를 모두 갖추었다.”

모용연화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버지가 연호정을 높게 평가한 건 알았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웃으며 연호정을 떠올리던 모용군.

그의 표정이 점차 싸늘하게 식어 갔다.

“그래서…… 위험해.”

“네?”

“위험한 녀석이다. 나는 녀석에게서, 나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푸스스스.

그가 쥐고 있던 잔이 그대로 가루가 되었다.

엄청난 내공력이었다. 무의식적으로 발현된 내력으로 옥잔을 가루로 만들었다. 내공의 화후가 상상을 초월했다.

뇌정공을 익히며 얻은 내력 증강이었다.

“기실, 농담처럼 말했지만 녀석을 보고 잠시 욕심이 일었다. 그 정도 인재라면 너와 짝을 지어 줘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어.”

모용연화의 눈이 흔들렸다.

“하지만.”

가루를 털어 낸 모용군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새하얀 달이 떠올라 있었다.

“녀석은 나와 똑같은 놈이다. 만족이라는 걸 모를 것이야. 만일 너와 혼인을 시킨다 해도, 호시탐탐 본가를 노릴 것이다.”

모용군의 눈이 깊어졌다.

“안타깝군. 본가의 성씨를 이어받았다면 진즉에 소가주로 앉혔을 것을.”

모용연화는 모용군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왜일까? 괜히 분했다. 아버지는 항상 자신을 칭찬해 주었지만, 저런 고평가를 내려 준 적은 없었다.

모용연화가 애써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본가의 사람으로 만들지 못할 인재라면, 미리 없애 버리셔야죠?”

“물론 그렇지.”

달빛을 받아서 그럴까.

모용군의 하얀 웃음은 어딘지 모르게 섬뜩했다.

“나는 천하를 거머쥘 것이다. 하면 천하는 내가 가꾸어야 할 텃밭이 되겠지. 그러나 놈은 내 텃밭에서 예쁘게 피어 줄 꽃이 될 리 없어. 그럴 바에야 미리 뿌리를 뽑아 버리는 게 낫겠지.”

한참을 달을 보던 모용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의미 있는 만남이었다. 우리도 바쁘게 되었다. 어서 가 보도록 하자.”

“네.”

* * *

“후우.”

어두운 숲속.

시린 달빛이 잘 보이는 바위에 앉은 그가 도끼를 내려놓았다.

쾅.

세워 두려고 했는데 기우뚱하더니 땅에 박혔다. 손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힘들군.”

그 망할 놈의 늑대들과 생사결을 벌인 직후에 모용군과 날 선 대화를 주고받았다. 심력 소모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우우우웅.

벽라진기를 끌어 올려 조금씩 심해지는 내상을 바로잡았다.

생각보다 피해가 컸다. 혈맥 곳곳이 찢어졌고 혈도에는 탁기가 그득했다.

연호정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위이이잉!

백호기가 열리며 농도 짙은 자연기를 흡입했다.

기(氣)는 신체를 치유해 주는 역할을 한다. 백호기로 풍성한 기를 받아 내 치료를 활발하게 하고, 현무기를 개방하여 남은 탁기를 모조리 배출해 냈다.

그렇게 반 시진이 넘도록 운기를 하니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제길, 물이나 몇 사발 들이켤걸. 왜 술을 마시자고 해서는.”

내상 때문에 속이 울렁거린다. 거기다 독주 몇 잔을 끼얹으니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

이래서 사람은 추억 따위에 홀려선 안 되는 것이다.

‘확실히 젊었을 때는 다르군.’

무림맹주 시절, 모용군은 노련한 정치가임과 동시에 만인의 지지를 받는 백도의 수장이었다.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만, 내 사람만큼은 확실하게 챙겼다. 자신의 영역 안에 있는 사람들에겐 존경받는 군주요, 능력 있는 위정자가 그였다.

‘술도 많이 마셨는데.’

광신삼교의, 정확하게는 사음교의 중원 침공으로 백도와 흑도가 최초로 손을 잡았다.

외적의 침입으로 동맹을 맺은 흑백의 수장들. 두 사람은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도 몇 번이나 술자리를 가졌었다.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비정한 삶을 살았지만, 적어도 매력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를 경계했고, 동시에 동질감도 느꼈다.

그러나 지금의 모용군은 달랐다.

야심에 불타는, 자신의 꿈을 위해선 거리낄 것 없이 모략과 살인을 일삼을 간웅(奸雄)이었다.

‘게다가 그때는 몰랐지. 모용가가 본가의 멸문에 한 축을 담당했다는 것을.’

연호정의 눈이 서늘해졌다.

추억은 추억일 뿐이다. 이번 술자리는 과거 전우를 향한 이별주(離別酒)에 불과했다.

몰랐다면 모를까, 알아 버린 이상 모용세가는 철천지원수다. 명가와 똑같은 놈들이란 말이다.

‘기대해라, 영감. 당신이 지금껏 쌓아 온 기반, 먼지 하나 남김없이 쓸어 버릴 테니까.’

한참 생각에 잠긴 와중이었다.

“후우, 다친 양반이 이 높은 산엔 왜 올라왔어? 힘들어 죽겠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여기까진 뭣 하러 오셨소?”

“오고 싶어서 온 줄 알아? 나도 편하게 앉아서 들어오는 정보나 만지작거리고 싶다고.”

나타난 사람은 가득상이었다.

“암사대는?”

“거 사람 정 무지하게 없네. 오랜만에 만났는데 인사도 없이 말이야.”

“잘 잡아 둔 모양이오.”

“당연한 거 아뇨? 한 번 한다고 한 건 끝까지 하는 남자요, 내가.”

“고생이 많았소.”

가득상이 미소를 지었다.

“연 공자도 고생 많았소. 댁이 그렇게 다친 걸 보니, 정말 어지간히 강했던 모양이군.”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피 냄새 풍기는 놈들이 다 그렇지. 강하다기보다는 워낙 독해서 말이오. 하나하나 때려잡느라고 무리 좀 했소.”

“그래도 대단하오. 혼자서 청랑귀를 잡을 만한 사람, 무림에 얼마나 되겠소?”

“엄청 많소. 안 뒤져 봐서 그렇지.”

“……말을 해도 꼭 저렇게 정떨어지게 한다니까.”

“그래서, 무슨 일로 오셨소?”

“얼레? 확실히 많이 다치긴 한 모양이네?”

“응?”

가득상이 엄지로 자신의 뒤를 가리켰다.

“보시오.”

연호정이 그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커졌다.

“가주께 직접 연락을 받았소. 사실 뭐, 나도 댁이 어떻게 버티고 있나 궁금하기도 해서 안내인 겸 같이 왔지.”

어두운 그림자에서 벗어난 백 명의 검사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선두에는 신모가 있었다.

“창응대가 대공자님을 뵙습니다!”

“대공자님을 뵙습니다!”

온 산이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목소리들 줄이게. 소문낼 일 있나?”

가득상이 코웃음을 쳤다.

“차라리 소문 좀 내는 게 낫지. 그 꼬락서니를 하고서는.”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여기는 어떻게 왔어?”

신모가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주님께서 직접 보내셨습니다. 이제부터 대공자님의 호위는 저희가 맡겠습니다.”

아버지가?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거기도 많이 바쁠 텐데, 뭐 하러 여기까지 보내신 거야.”

가득상이 핀잔을 주었다.

“이 양반아. 발바닥 부르트도록 열심히 달려온 사람들 앞에서 할 말이야, 그게? 오히려 감사한 줄 알아야지.”

“허험!”

연호정이 바위에서 내려왔다.

“어쨌든 뭐…… 오느라 고생들 했네.”

“아닙니다.”

연호정이 난처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나저나 이 많은 인원을 수용할 만한 주루를 어디서 찾나? 후개가 좀 찾아 주시면 안 되겠소?”

“하여튼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지?”

“싫으면 말고.”

“아, 됐어! 안 그래도 근처에 괜찮은 장원 하나 잡아 놨으니까 거기서 쉬쇼. 명가의 눈도 그곳까지 닿진 않을 거요.”

“고맙소.”

“퍽이나.”

가득상이 넌지시 물었다.

“그나저나, 모용가주와의 대담은 어떻게 끝났소? 나 아직도 안 믿겨, 그 양반이 하남까지 온 거.”

“잘 끝났소.”

“그게 끝이여? 더 자세하게 말해 줄 생각은?”

연호정이 피식피식 웃었다. 확실히 가득상은 말을 섞는 재미가 있다. 저절로 힘이 나게 된다고 할까.

그는 모용가주와 했던 대화를 상세하게 들려주었다.

가득상의 얼굴에 흥미가 일었다.

“권한이라…… 대회의권(大會議權)을 말하는 것이로군.”

“대회의권?”

“구파일방, 칠대세가의 주인들에게는 대회의권이라는 권한이 있소. 백도 무림의 수장들을 불러 모아 중요한 안건에 대해 토의하는 것이지.”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게 있었어?”

“그렇수다. 아, 물론 대회의권을 발동하는 일은 극히 드무오. 천하 각지에 퍼진 백도 무림의 수장들을 모으는 일이니, 만일 그 안건에 대한 답이 나오지 않을 경우, 그 책임을 전부 발의(發議)한 쪽에서 져야 하거든.”

“중요한 안건이랍시고 불렀는데 책임이라니?”

“말하자면 수장의 부재로 겪는 각파의 손해를 메우는 거요. 즉, 별거 아닌 일로 부르지 말라는 거지.”

참으로 별스러운 권한도 다 있다.

흑도 무림은 이렇지 않다. 애초에 연합 세력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연호정이 흑제성을 세우고 일인 통치를 했던 것은, 어차피 동맹을 맺어 봤자 다 뒤통수를 치기 바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모용가주는 그만한 자신이 있다는 말이로군.”

“그렇지.”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임시 무림맹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군. 한데 한 달 만에 각파의 수장들이 모이는 게 가능하오?”

“사정이 있어서 못 오는 수장들도 있소. 하지만 그런 게 없다면 무조건 와야 하오.”

흑도 무림의 체제에 익숙한 연호정에게는 제법 충격적인 제도였다.

“어쨌든, 얘기가 잘 되었다고 하니 앞으로 어떻게 할 거요?”

“쉬어야지. 당분간은.”

“그러니까, 댁이 아무런 대책도 없이 쉴 사람은 아니잖소.”

연호정이 눈을 빛냈다.

“후개도 알고 있소? 강소성 인근에 명가의 세력이 몰래 자리 잡은걸.”

가득상이 미소를 지었다.

“들었지.”

“한 달이란 시간은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오. 그동안 서서히 명가의 목을 조여 가야 하지 않겠소?”

“아마 부인하고 나설 텐데?”

“당연히 그러겠지.”

“분위기는 잡아 보겠소. 한 달을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소문이 잦아들 때, 내가 나설 것이오.”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어선(漁船)은 남의 걸 빌려도 낚시는 직접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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