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상대(相對)는 있어도 절대(絶對)는 없다 (2)
“음.”
모용군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석양이 지고 있었다.
“벌써 해가 지는군.”
모용연화가 인상을 찡그렸다. 종일 거처에만 박혀 있다 보니 몸이 찌뿌드드했던 것이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글쎄다.”
한 자리에서 죽치고 있은 지도 하루가 지났으니 모용연화가 이런 쓸데없는 질문을 던지는 것도 이해할 만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렸던 적이 없었던 만큼 좀이 쑤실 수밖에.
모용연화가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살았으면 좋겠네요.”
모용군이 피식 웃었다.
“당연히 그래야지. 안 그러면 하남까지 온 수고가 헛것이 되잖느냐?”
“그것도 그렇지만, 꼭 만나서 한바탕 쏘아붙여 주고 싶어요.”
모용군이 능글맞게 말했다.
“그래도 한때나마 네 낭군이 될 뻔했던 녀석 아니냐?”
연가에 사업 제시를 했을 때를 말하는 것이다.
모용연화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안 됐잖아요?”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다소 따분해하는 것 같긴 하지만, 그저 그뿐이다. 딸은 여전히 초연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모용연화는 굳이 나가지 말라 말하지 않았음에도 숙소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서지 않았다.
쓸데없는 움직임으로 개방의 시선을 분산시킬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직 손을 잡을지, 뿌리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섣부른 움직임은 절대 금물이다.
사소한 것 하나에도 대국을 염두에 둘 줄 안다. 모용군이 모용연화를 총애하는 이유였다.
“해가 지고 있으니, 우리도 슬슬 저녁을 먹자.”
“네.”
모용군이 허공에 달린 줄을 잡았다. 이것을 당기면 종이 울릴 것이고, 곧이어 점소이가 달려올 것이다.
그가 줄을 당기려 할 때였다.
‘…….’
모용군의 눈이 빛났다.
모용연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세요, 아버지?”
“피 냄새로군.”
“네?”
줄에서 손을 뗀 모용군이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귀로 한 줄기 전음이 들렸다.
[연 공자가 왔습니다.]
“……뭐라?”
모용군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이렇게 빨리?’
아니, 그 전에 청랑귀들의 공세 속에서 살아남았단 말인가? 대체 어떻게?
“아버지?”
“온다.”
“네?”
“연호정이 오고 있다는구나.”
모용연화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청랑귀를 물리쳤다고요?”
모용군은 대답하지 않았다.
당연히 물리쳤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놈들을 다 쓸어 버리지도 않고 찾아올 리는 없다.
동시에,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늘 정오에 부딪쳤다고 하지 않았던가?’
청랑귀가 한 번 목표물을 포착하고 움직이기 시작하면 빨라도 사흘에서 닷새가 걸린다고 했다. 시간을 들여 목표물을 지치게 만들고, 결정적일 때 목에 칼을 꽂는 것이다.
그야말로 늑대의 습성 그대로였다. 체력이 좋은 늑대들은 사냥감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쫓고 쫓아서 사냥을 완수하기 마련이다.
한데 반나절 만에 그 독한 놈들을 다 쓸어 버렸다고? 그것도 혼자서?
‘말도 안 되지.’
가능할 리가 없다.
설령 연호정 혼자서 청랑귀를 밀어붙였다고 한들, 남은 청랑귀들은 몸을 숨기기 위해 도주를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그들을 하나하나 잡아 죽이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개방이 도움을 주었나? 설마? 명가의 전력이라는 걸 안다면 쉽게 끼어들지 못할 텐데?’
그때였다.
훅.
모용군은 피 냄새가 한순간에 짙어졌음을 느꼈다.
쿵. 쿵.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제법 거칠었다.
모용군이 담담하게 말했다.
“들어오시게.”
끼이이익.
문이 열리고 한 청년이 들어섰다.
큰 키에 호리호리한 체구를 한 청년이었다. 눈매가 다소 날카로웠지만, 그래도 무척 잘생긴 청년이었다.
쿵!
바닥이 흔들린다.
문 옆에 사람 몸뚱이만 한 도끼를 내려놓은 청년이 숨을 몰아쉬었다.
“실례 좀 하겠소.”
청년의 몸 전체가 피투성이였다.
옷도 군데군데 찢어지거나 구멍이 났고, 드러난 살갗은 전부 피로 물들었다. 관자놀이를 가로질러 내려온 핏자국이 턱선을 지나 목까지 이어졌는데, 아직도 피가 마르지 않았다.
상처가 가득하고 호흡은 거칠었다. 난전(亂戰)을 헤쳐 온 장수(將帥)의 외양이었다.
“자네가 연가의 장자인가?”
“모용세가의 가주시오?”
“맞네.”
“맞소.”
청년,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모용군.’
놀란 눈으로 자신을 보지만, 표정 전체에 흔들리지 않는 여유가 있다.
하늘마저 불태울 거친 야망이 맑은 안광 속에 숨겨져 있다. 잘 다듬은 수염 속에 갇힌 두툼한 입술은 완고하게 다물어졌고, 각진 턱에선 단호함이 느껴졌다.
‘…….’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저 반백의 머리카락과 검은 수염이 전부 하얗게 센다면.
완벽하게 짜인 골격이 다소 줄어든 대신, 훨씬 더 깊은 눈빛과 초연함이 묻어 나오는 표정을 그려 넣는다면.
고급스러운 비단옷 대신, 새하얀 무복과 장포를 걸친다면.
‘똑같군.’
검신으로 추앙받았던 무림맹주 모용군.
흑제성주 흑암제로서 만났던 당시의 그와 똑같았다. 외양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저 특유의 빈틈없는 기도는 영락없는 모용군의 그것이었다.
연호정은 나직이 심호흡했다.
막상 이 양반을 본다고 하니 심사가 복잡했다. 실제로 그는 모용군을 좋아하는 쪽보단 싫어하는 쪽에 가까웠다.
게다가 그는, 생의 마지막에 당관을 시켜 자신을 죽인 사람이었다.
‘내가 죽으면 누가 있어 자네를 막겠는가. 지금의 정파 무림은…… 흑제성(黑帝城)을 막을 수 없어.’
‘저승에서 사죄하겠네. 함께 가세.’
위태로운 동맹이었을지언정 전우(戰友)는 전우였다. 그는 전우에게 배신당해 죽은 것이다. 당연히 모용군에 대한 감정이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
모용군을 보는 연호정의 눈빛에 서서히 한기가 가셨다.
“강소 벽산연가의 연호정이라 합니다.”
그가 절도 있게 포권했다.
“모용세가의 가주를 뵙습니다.”
모용군의 눈이 빛났다.
그는 자신을 본 연호정의 눈빛에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의 편린을 보았다. 그것은 증오 같기도 했고, 아련함 같기도 했다.
‘뭐지?’
알 수 없는 감정이다.
가문을 무너트리기 위해 세작을 심은 사람이니 화가 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증오 이면에 서린 아련함은 무엇인가?
“모용세가를 책임지는 사람일세.”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소문 자자한 광풍사(狂風獅)를 이렇게 보는군.”
“후욱.”
모용군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에 비치된 큰 탁자로 손을 뻗었다.
“저기 앉으시게.”
“그럼.”
연호정이 의자에 앉았다.
그리 많이 다치고 지쳤음에도 보행에 흔들림이 없었다. 모용군은 연호정의 강인함에 감탄했다.
“치료를 받아야 하지 않겠나? 부상이 상당히 심해 보이는데.”
“괜찮습니다.”
이 정도 상처야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입어 봤다. 이보다 더한 상처를 입은 채로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싸운 횟수가 셀 수도 없이 많다.
연호정이 빙긋 웃었다.
“그나저나, 술은 없습니까?”
“술? 그 몸에 괜찮겠는가?”
“괜찮습니다.”
“허허.”
모용군이 모용연화에게 눈치를 주었다.
모용연화가 허공의 줄을 당겼다. 잠시 후, 점소이가 오자 모용연화가 식사와 술을 시켰다.
모용군이 연호정의 맞은편에 앉았다.
“내, 이번 일로 연가주가 아닌 가주의 장자를 보게 될 줄은 몰랐구먼.”
모용군이 모용연화를 가리켰다.
“후기지수 회합에서 만난 적이 있을 걸세. 내 딸 연화일세.”
모용연화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모용연화예요. 생각보다 빨리 뵙게 되었네요.”
가만히 모용연화를 보던 연호정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말았다.
그는 모용군을 보러 온 것이지 모용연화를 보러 온 게 아니었다. 게다가 모용군을 향한 복잡한 감정을 다스리는 것도 바빴다.
모용연화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모용군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과묵한 사내로다.”
“여인과 대화하는 게 어색해서 그렇습니다. 이해해 주시길.”
“숙맥이라 이건가? 그건 또 의외일세그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모용군의 눈빛이 묘해졌다.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날카롭게 벼려져 상대를 탐색하고 있었다.
‘대단하군.’
그는 한눈에 연호정의 전력을 알아보았다.
연호정은 강하다. 지닌바 내공이나 예기가 도무지 후기지수라 부를 만한 경지가 아니었다.
‘아니, 단순히 거기서 끝이 아니겠지.’
내공도 내공이지만, 그냥 사람 자체가 강해 보였다.
부러지지 않는 강함, 천하 명장이 제련한 강철 중의 강철이다. 모용군은 연호정의 시린 기도에서, 어디서도 보기 힘든 신병(神兵)의 그림자를 엿볼 수 있었다.
모용군의 입이 저절로 열렸다.
“명가의 청랑귀는 전부 물리쳤나?”
“놈들을 청랑귀라고 부릅니까?”
“누군지도 몰랐나?”
“명가에서 보낸 것만 알았습니다.”
“허허허! 참으로 호쾌하구먼.”
모용군이 의미심장한 어조로 물었다.
“해서, 놈들은 다 잡았는가?”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모용연화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모용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세를 보니 싹 청소해 버린 줄 알았더니만, 그게 아니었단 말이지?”
“일흔 놈 중에 예순여덟 놈 잡고, 나머지 둘은 팔 한 짝씩 떼어서 명가로 배송 보냈습니다.”
“……!”
“명가주 얼굴이 제법 볼만할 것 같지 않습니까.”
모용군의 얼굴이 굳어졌다.
모용연화는 기가 차서 말했다.
“연 공자. 괜한 자존심에 거짓말하는 거라면…….”
모용군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모용연화의 입이 저절로 닫혔다.
한참 동안 연호정의 얼굴을 살피던 모용군이 입을 열었다.
“일부러 명가주를 화나게 할 작정이었다?”
“그렇습니다.”
“내 분명히 말하는데, 그건 악수(惡手)였네.”
모용연화는 내심 어처구니가 없었다.
모용군처럼 그녀 역시 연호정의 기도를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읽어 낸 것은 풍성한 내공과 잘 짜인 기도가 전부였을 뿐, 그 이상은 아니었다.
아직 완성되지 못한 그릇. 아버지인 모용군이 보는 것을 그녀는 보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리 생각하십니까?”
“쥐도 새도 모르게 섬멸했다면, 이제부터 명가주도 신중해졌을 걸세.”
“그렇겠지요.”
“그가 신중함을 발휘할 때, 바로 그때를 노려야 했네. 쓸데없이 그를 화나게 했다간 자칫 하남이 불지옥이 될 수도 있네.”
연호정은 산뜻하게 인정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허허, 지금 나와 농을 하자는 것인가?”
“제 서신은 잘 받아 보셨습니까?”
“……?”
“받아 보셨으니 지금 이 자리에 계시겠지요. 하면 묻겠습니다. 제아무리 거칠고 건방지기 짝이 없는 놈이라도, 뭘 믿고 가주께 그런 서찰을 보냈겠습니까?”
모용군의 눈이 번뜩였다.
“믿는 바가 있었다는 겐가?”
연호정이 품에서 서신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 자신의 피로 잔뜩 물든 서신은 보기에도 으스스함이 느껴졌다.
“이게 뭔가?”
“펼쳐 보십시오.”
모용군은 괜스레 불안감을 느꼈다.
그는 천천히 서신을 펼쳤다.
“……소림(少林)?!”
연호정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저는 가주께, 명가를 무너트릴 결정적인 한 수가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
“한데, 그 한 수가 제대로 먹히기 위해선 명가를 견제할 완충제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해서 믿을 만한 견제 세력을 소환하려 하는데, 어떻습니까? 제 계획이 마음에 드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