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상대(相對)는 있어도 절대(絶對)는 없다 (1)
서신 두 장을 번갈아 가며 읽던 모용군이 고개를 저었다.
“배포 한번 좋군.”
“무슨 일이에요?”
“자칫 하남까지 마실 나온 게 쓸모없는 일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네?”
모용군이 모용연화에게 서신을 보여 주었다.
모용연화의 눈이 흔들렸다.
“청랑귀(靑狼鬼)를?!”
모용군이 입맛을 다셨다.
“명가주가 작정을 했구나.”
“아무리 그래도 청랑귀 전원을 보내다니요?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텐데요?”
“있다.”
“네?”
“명가주의 자식 사랑은 제법 끔찍한 편이지. 둘째가 초주검이 되어서 돌아왔는데 눈이 안 돌아갈 리가 있겠느냐?”
“하긴, 그것도 그러네요.”
모용연화가 당장 그 이유를 떠올리지 못한 이유는 하나였다.
모용군은 그런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설령 자식이 죽어도 전력을 보존하는 사람이 그였다.
그리고 그녀 역시 아버지의 생각이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자식 하나 때문에 가문의 전력을 불태울 순 없는 노릇이다.
“연호정도 이걸 알고 있을까요?”
모용군이 고개를 저었다.
“알든 모르든 중요하지 않다.”
“청랑귀가 무서운 집단이라는 건 알아요. 한데 정확한 전력을 모르겠어요. 정말 그 정도로 대단한가요?”
“그들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다.”
“그럴 상대만 만났을 가능성도 있잖아요?”
“그럴 리도 없거니와, 만약 그렇다면 더 문제다. 연호정을 감당할 만한 상대라고 생각해서 몰려온 것이니까.”
“……!”
모용군의 얼굴에 흥미가 일었다.
“와중에, 이 녀석의 반응도 재미있지 않느냐?”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만용 같군요.”
“만용이라고 볼 수 있지. 하지만 단순한 만용으로 보이진 않아.”
“네?”
“이미 내가 정주에 왔음을 알고 있는데도 청소 한 번 더 하고 오겠다고 한다. 설령 상대를 감당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어도 이러기는 쉽지 않다.”
그건 그렇다.
쉬운 길이 있는데 굳이 돌아갈 필요는 없다. 어려운 길이라고 항상 옳은 길은 아니었다.
“명분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참으로 지혜롭고도 과격한 놈이 아니더냐. 모순된 속성을 동시에 품고 있으니, 실로 보통 놈은 아니다.”
모용연화가 한숨을 쉬었다.
“하나는 확실하네요.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성격이라는 거.”
“하하하!”
“청랑귀라…… 듣기로 거의 암살자에 가까운 집단이라고 들었어요.”
“애매한 놈들이지.”
“네?”
“무공만 보자면 그들 중 누구도 너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중 일류는 있지만, 초일류는 없지.”
모용연화가 아미를 찌푸렸다.
“그런데 고작 다섯으로 형산검협을 잡았다고요? 청성파의 장로와도 동수를 이룬 고수를요?”
“무공이 강하다고 살인에 능할 것이라 보느냐?”
“네?”
“무공이 뛰어난 자는 타인을 손쉽게 죽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살인의 전문가라는 말은 아니다.”
모용연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머리로는 알고 있다. 그러나 체감한 적은 없었다.
강호는, 세상은 어떤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삼류의 칼로도 일류의 목이 달아난다는 말이 심심치 않게 나도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그녀는 지금껏 진짜 살인마(殺人魔)를 만난 적이 없었다. 그들이 얼마나 사람을 효율적으로 죽이는지, 사람을 죽이기 위해 어디까지 악랄해질 수 있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실감이 가질 않았다. 고작 다섯이서 형산검협을 잡았다고? 그게 말이 되나?
“청랑귀는 목표물을 죽이기 위해, 목표물이 있는 지역 하나를 통째로 없애 버리기도 한다.”
“……네?”
“마을에 있다면 마을을 불태울 것이요, 숲에 있다면 숲 전체를 불태운다. 목표 대상이 협의가 넘치는 자라면 눈앞에서 어린아이를 찢어 죽이거나 여염집 아낙을 납치해 강간도 서슴지 않는다.”
“……!”
“상대의 심리를 뒤흔들고 난 연후에 작업에 들어간단 말이다. 그래서 먼저 접촉한 후 전술을 짜지. 술에 독을 타는 건 예삿일이고, 양민들의 가족을 납치해 자살 특공을 보내기도 한다.”
모용연화의 얼굴에 질린 빛이 떠올랐다.
“악마로군요.”
“악마 같은 놈들이지. 그래서 그들이 강한 것이다. 목적을 위해서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 수 있는 놈들이니까.”
“지금껏 그런 짓을 하고도 무사했다고요?”
“명가가 뒤를 봐주었으니까.”
모용군의 얼굴에 흥미가 일었다.
“명가가 뒤를 봐주기 전까지는 철저하게 숨어 다녔지. 그만큼 은신술도 뛰어나고, 잡기도 힘든 놈들이야.”
모용연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다섯으로 형산검협을 어떻게 잡았는지 이제야 이해가 간다. 그런 지저분한 방식이라면, 나름대로 대협 소리를 듣던 형산검협은 눈이 뒤집혔으리라.
모용군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구대문파의 장로급 고수도 버티지 못한 지옥 같은 전략. 말하자면 실력 이전에 정신력 싸움이라는 것이다.”
“……과연 연호정이 이겨 낼 수 있을까요?”
“이길 확률은 낮지. 대개 무림인들은 전략, 전술보다는 개인의 무력을 더 신봉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이겨 낸다면…….”
모용군의 얼굴에 언뜻 서늘한 빛이 감돌았다.
“이 나조차도 놈을 경계해야 하겠지.”
* * *
오랜만에 맛난 음식에 술도 양껏 들이켠 연호정은 다음날 정오가 되어서야 일어났다.
“으다다다!”
이미 주기(酒氣)는 전부 배출한 뒤였다. 그래서일까? 심리적인 충족감도 대단했고 몸도 완전히 풀린 것 같았다.
이래서 휴식이 중요한 법이다. 연호정은 단 하루의 휴식으로 그간의 피로를 날려 버릴 수 있었다.
“슬슬 준비해 볼까.”
침상에 가부좌를 틀고 가볍게 운공을 마쳤다. 운공이 끝난 후 측간에 들러 볼일을 봤고, 다시 거처로 들어와선 어젯밤 싸 온 주먹밥과 죽통에 넣은 돼지고기 찜을 전부 먹었다.
그야말로 상쾌한 시작이다.
수통 두 개까지 허리춤에 매단 그가 몸을 풀었다.
“어디 보자, 일단은…….”
몸을 다 푼 그가 품에 넣어 둔 비수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 역시 어젯밤 거처에 들어오기 전, 점소이에게 부탁해 근처 철방에서 가져온 물건이었다.
물론 한 자루가 아니었다. 그의 품에는 손에 든 한 자루를 제외한 열아홉 자루의 비수가 들어 있었다.
“제법 비싼 값을 지불했는데 질이 별로 좋지 않군.”
연호정이 혀를 찼다.
하긴, 비수로 칼싸움을 벌일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이 정도면 그럭저럭 버틸 수 있겠다.
연호정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화창한 날씨였다. 더 바랄 게 없을 정도로 날이 좋았다.
이런 좋은 날에 미친 살인귀들이랑 드잡이질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 우울해진다.
번쩍!
창밖 너머, 우뚝 선 건각에서 빛이 반짝였다.
연호정이 머리를 긁적이며 비수에 벽라진기를 불어넣었다.
우우웅.
“해지기 전에 끝낼 수 있으려나.”
그가 아랫배에 힘을 주곤 온몸을 휘돌렸다.
쐐애애액! 퍼억!
번뜩이는 빛이 사라졌다.
동시에 저 멀리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한 놈은 잡았고.”
도끼를 든 연호정이 그대로 창가에 발을 올렸다.
돈은 침상에 얹어 두었다. 잔금이 좀 아깝지만, 그렇다고 주루 본각에 들를 수는 없다. 자칫 잘못하면 애꿎은 사람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청소 시작해 볼까!”
터어엉!
연호정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단번에 맞은편 건물 꼭대기로 오른 그가 사방을 둘러보았다.
‘제법이군.’
한 명을 죽였으니, 적들의 시선이 온통 자신에게 집중되어야 옳다.
그런데도 딱히 살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수십 개의 시선은 느껴졌지만, 그중 살기를 품은 눈빛은 없었다.
고도로 연마된 놈들이다. 전문적인 살인 교육을 받은 게 확실했다.
‘이 정도는 해야지.’
터어엉!
지붕을 박찬 그가 몇 개의 건물 위를 순식간에 지나쳤다.
보법보다 성취는 낮지만, 신법 역시 상당히 뛰어나다고 할 만하다. 소위 신법의 대가(大家)들처럼 엄청난 속도는 내지 못해도, 지구력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내공의 효율적인 운용 방식이 여느 고수와 차원을 달리하기 때문이었다.
터엉! 터어엉!
건물과 건물 사이를 건너뛰는 데도 전혀 위험해 보이지 않는다.
무거운 거병을 휘두르며 얻은 균형감각은 이미 절정고수 수준을 한참이나 상회한다. 거기에 백호기를 얻으며 신체 전반의 능력이 크게 상승했고, 내공 역시 질적, 양적 향상을 이루었다.
작정하고 도주한다 치면 누구라도 쉽게 뒤쫓지 못할 것이다.
한참이나 달려 나가던 연호정은 순간 미세한 살기를 느꼈다.
파아앙!
화살처럼 날아든 비수가 장사치의 미간에 정확히 박혔다.
양민으로 위장한 적이었다. 아주 약간의 살기가 드러나면 즉각 대응할 만큼 감각이 예민해졌다.
연호정은 속도를 올렸다.
파앙! 퍼억! 파앙! 퍼억!
십 리를 달리는 동안 총 여섯 명을 죽였다. 죽은 적들은 본인이 왜,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고 죽었을 것이다.
한참이나 달리던 연호정이 눈을 빛냈다.
‘저기면 되겠군.’
야트막한 돌산 앞에 낡은 관제묘(關帝廟)가 보였다.
그 안으로 들어가려던 연호정은 순간 불길한 감각을 느꼈다. 그 불길함은 관제묘에서부터 나오고 있었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살기는 느껴지는데 인기척은 없다. 즉, 적 외에 누구도 숨어 있지 않다는 뜻이었다.
휘이이잉!
도끼에 백색 바람이 휘몰아쳤다.
하늘 높이 뛰어오른 연호정이 관제묘 좌측으로 내려서자마자 호왕구벽세를 펼쳤다.
콰앙!
거병에서 뿜어지는 무지막지한 경풍(勁風)이 관제묘의 낡은 벽과 기둥을 그대로 박살 내 버렸다.
푸화아악!
대량의 선혈이 튀었다. 안에 숨어 있던 적 둘이 즉사한 것이다.
하지만 하나가 살았다.
촤악!
놀라운 공격이었다.
부서지는 벽, 비단 자락처럼 펼쳐진 핏물을 뚫고 단창이 날아왔다. 기습을 당한 와중에도 적의 시야를 가린 절묘한 공격을 해 온 것이다.
티이잉!
날아온 단창이 도끼에 맞아 튕겨 나갔다.
선풍각을 펼치듯 몸을 휘돌린 연호정이 부서져 떨어지는 큼직한 벽돌을 걷어찼다.
투우웅! 퍼억!
두개골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벽돌에 머리가 날아간 것이다.
연호정이 속도를 올렸다.
터엉! 터어엉!
순식간에 돌산 꼭대기로 올라가는 그였다.
돌산을 타고 올라가던 연호정은 중간중간 암벽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쿵! 쿵! 쿵!
벽라진기를 듬뿍 담은 권력(拳力)이 무려 열두 번이나 암벽을 쳤다. 어느 한 곳을 친 것이 아니라, 갈지(之)자로 올라가며 여러 군데를 두드린 것이다.
그 많은 내공을 담아 쳤지만 암벽에 흠집은 나지 않았다. 등을 돌리고 있기에 적들은 그 광경을 보지 못했다.
파아아악!
날렵한 몸놀림으로 암벽 위로 올라선 연호정이 몸을 돌렸다.
그의 눈에 삼십여 명의 무사들이 보였다.
하나같이 어두운 청색 무복을 입었다. 남녀가 골고루 섞였으며 심지어 나이도 천차만별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어제 본 여인, 낭포(狼咆)가 있었다.
낭포의 눈은 심각하게 굳어져 있었다.
“너, 정체가 뭐냐?”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누군지도 모르고 죽이려 했어?”
“벽산연가의 장자라고 들었는데?”
“맞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낭포의 눈에 흉포한 살기가 어렸다.
“정파 샌님이, 그것도 강호 경험도 없는 애송이가 우릴 이렇게 능숙하게 상대한다고? 씨도 안 먹힐 개소리를.”
“그건 너흴 보낸 명가한테 따져야지.”
“……!”
웃으며 그들을 내려다보던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형산검협, 그 양반도 참 순해 빠진 양반이지? 이런 무능한 놈들 손에 유명을 달리했으니, 칼날 위를 걷는 삶이란 참으로 허망한 거야.”
물끄러미 연호정을 올려다보던 낭포가 소리쳤다.
“독라(毒羅)!”
퍼퍼퍼펑!
청랑귀 전체가 독탄을 터트렸다.
시퍼런 독연이 퍼지는 속도가 놀랍도록 빨랐다. 연호정의 신법보다는 확실하게 빨랐다.
연호정은 빠른 속도로 올라오는 독연을 내려다보았다. 저 독연 속에서, 놈들은 이차 공격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어디로 움직이는지를 지켜보면서.
연호정이 웃으며 도끼를 들었다. 그는 청랑귀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흑제성의 암살조에 비하면 너희는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수준밖에 안 돼.”
그가 힘차게 도끼를 내리찍었다. 호왕구벽세의 모든 초식이 연달아서 퍼부어졌다.
쾅! 콰쾅! 콰콰쾅! 쿠구구궁!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으로 내부 곳곳이 부서졌던 암벽이 통째로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