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벽산의 장자 (4)
“뭐, 뭐라고?!”
명천의 얼굴이 충격으로 일그러졌다.
“강림이가?!”
“그렇습니다.”
“상태는, 상태는 어떻다고 하던가?”
명우산(明祐山)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외상이 지독합니다. 본가 의원들의 조치가 빠르지 않았다면…….”
“이, 이런!”
“다행히 고비는 넘겼습니다만, 정신을 차리려면 석 달 열흘은 걸릴 거랍니다. 정신을 차려도 제 기량을 회복하려면 족히 이삼 년은 걸릴 것 같다고 합니다.”
쾅!
주먹으로 후려친 벽이 움푹 들어갔다.
명천의 얼굴에 살기가 일었다.
“대체 명치산 그놈은 강림이가 당하는 동안 뭣 하고 있었던 게야!”
“그것이…….”
명우산이 입술을 깨물었다.
“죽었답니다.”
“……죽어? 명치산이?”
“호명전의 무사들은 전원 중상이고 명치산은 일대일 겨룸에서 패배했다고 합니다.”
잔뜩 흥분했던 명천의 얼굴이 조금씩 냉정을 되찾았다.
일이 커지자 오히려 이성을 되찾는다. 그것이 바로 명가의 가주였다.
“연가의 자식에게 보낸 것, 분명하겠지?”
“그렇습니다.”
“그래, 암사대의 실종을 추궁키 위해 보냈지. 필요하다면 무력을 써서라도 데려오라고.”
정확히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쓰러트린 후 데려오라고 하였다. 정황상 암사대의 실종에 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연호정뿐이니까.
“그렇습니다.”
“한데 명치산이 죽고 호명전의 무사들도 다쳐서 왔다고?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명우산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사실 믿기 힘든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그는 명천이 명치산을 보낸다 했을 때 과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드러난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명치산은 방계 중에서도 아주 쓸 만한 녀석이었네. 작년에 직접 그 무공을 보았지. 청백무병 중에서 명치산보다 실력이 좋은 무사는 열 명도 되지 않네.”
절정고수 중에서도 그 실력이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고수란 말이었다. 아닌 말로, 명가 소속이 아니었다면 어지간한 문파의 주인이 되어도 부족함이 없을 실력이었다.
“설마 연가주의 자식 놈이 그렇게 강하다는 건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연호정은 약관에도 이르지 못한 청년이었다. 제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타고났다 해도 정도라는 게 있는 법이었다.
물론, 세상에는 정말 하늘이 내린 천재들이 있었다.
소위 쌍룡삼봉(雙龍三鳳)이라 불리는 이들이 그런 이들이었다. 후기지수라 하기엔 다섯 모두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였지만, 젊은 층에서 가장 강한 고수를 꼽으라면 그 다섯이 꼽힌다.
쌍룡삼봉은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천재들이었다. 말하자면 공인된 차기 성천십삼좌라고 해야 할까. 그중 몇몇은 이미 대문파의 수장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은 무공을 연성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쌍룡 중 하나가 바로 명가의 대공자이자 명천의 장자였다.
“어쩌면 연호정이란 아이가 쌍룡에 비견될 만한…….”
“허튼소리.”
명천이 고개를 저었다.
“쌍룡삼봉은 천재 중의 천재일세. 거기에 내 아들이 끼어 있어서 이러는 게 아니야. 그 녀석들은 재능만으로는 성천십삼좌보다도 뛰어날 걸세.”
“…….”
“십삼좌만 해도 역사에 쉬이 찾아보기 힘든 재능이라 했네. 그런 십삼좌를 뛰어넘는 재능의 소유자들이 쌍룡삼봉이야. 한데 약관에도 이르지 못한 녀석이 벌써 그들과 비견된다?”
“…….”
“설령, 멸망한 마교의 마공을 익혔다 해도 불가능하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명우산 역시 명천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하지만 결과가 너무 충격적이었다. 쌍룡삼봉 정도의 무공이 아니라면 그 많은 고수를 전부 물리칠 순 없을 것이다.
명천의 눈이 빛났다.
“방수가 있겠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럼 문제가 하나 남는다.
“정보원들의 말에 의하면, 연호정을 도운 방수의 흔적은 없었다고 합니다. 철저하게 홀로 행동했다고…….”
“그럼 정보원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고수가 그놈을 호위하고 있었겠지.”
명우산이 입을 다물었다. 명천은 연호정의 실력을 절대 인정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연호정이 쌍룡삼봉을 능가하는 중원제일의 천재라는 가설보다, 그를 호위하는 뛰어난 고수가 있다는 게 더 설득력이 있었다.
‘게다가 놈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호부견자 소리를 듣던 놈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확신을 해도 될 것 같았다.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뭘 어떻게 하나?”
명천의 눈이 차가워졌다.
“내 자식이 크게 다쳐서 왔네. 그놈은 물론 삼족을 멸해도 분이 풀릴까 말까야.”
“…….”
“자네도 내 마음과 같을 거라 생각하네.”
명우산은 침묵했다.
기실, 초조함은 명천보다도 그가 더 심했다.
명온지는 그의 무수히 많은 자식 중 하나였다. 하지만 가장 아끼는 자식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런 아이가 실종되어 버렸다. 명천 앞에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근래 잠을 못 자고 있었다.
더하여 명강림이 초주검이 되어서 돌아왔고, 명치산은 개봉에서 죽었다.
마음 같아선 직접 연호정에게 찾아가고 싶었다.
“하면, 누굴 보내시겠습니까?”
“감히 저항할 엄두도 못 낼 놈들로 보내야겠지.”
“그럼……?”
“청랑(靑狼)을 풀게.”
순간 명우산은 머리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가주님.”
“내 말대로 하게.”
“그, 그렇지만 세인들의 이목도 신경을 써야 합니다. 청랑은 너무 위험한 선택이 아닌지요?”
명천이 불같이 화를 냈다.
“지금 가주의 자식을 그 지경으로 만든 흉수를 잡는데 남의 이목을 신경 쓰라 말하는 겐가!”
“…….”
“구주명가가 어떤 가문인가! 저 무도한 혈교 놈들을 몰아낸 평화 공신들이 세운 가문이야! 선조들의 피땀을 들이 삼키며 천하제일의 명성을 얻은 최고의 가문이란 말일세!”
워낙 감정 표현에 솔직한 그였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건 본 적이 없었다.
자식이 다쳐서 왔기 때문이다. 뉘라서 화내지 않으랴.
“곧 강소성도 우리 손으로 떨어질 걸세. 강소성을 잡으면 절강성도 잡을 수 있어. 육해(陸海)를 다 손에 쥐면 천하제일가(天下第一家)를 넘어 천하제일세(天下第一勢)가 될 수도 있네.”
명천이 오만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천하의 패권을 거머쥐게 될 우리가 세인들의 눈 따위 두려워해선 안 되네.”
“…….”
“당장 청랑을 풀게.”
“명을 받듭니다.”
가주실에서 나온 명우산은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과연 이대로 괜찮은가.’
명천의 분노를 이해한다. 청랑을 풀라는 명령도, 사실 크게 보면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다.
그런데도 불안했다.
마치 빠져나올 수 없는 늪에 한 발을 내디딘 것 같았다. 더 들어가기 전에 빠져나와야 하는데, 남은 한 발마저 내디뎌 버린 듯했다.
‘그저 기우이기를.’
명우산이 어느 건물로 들어갔다.
번쩍!
조금의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내부.
그곳에서 수십 쌍의 푸른 안광이 돋아났다.
명우산이 담담하게 말했다.
“제법 사나운 사냥감일세. 자네들이 나서 줘야겠네.”
* * *
비호개(飛虎丐)는 긴장이 극에 달했음을 체감했다.
처음에는 자신이 왜 긴장하는지 몰랐다. 이유 없는 긴장에 요새 몸이 허해졌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제야 알겠다. 자신이 왜 긴장했는지.
우우웅.
가부좌를 틀고 앉은 연호정의 몸에서 은은한 백색 기류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 하얀 기운이 일렁이며 묘한 형상을 만들었다. 호랑이인지 사자인지 모를 형상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괜히 거북해서 슬쩍 옆으로 다섯 걸음 걸었다.
그러자 반투명한 야수 형상의 고개도 돌아갔다.
‘허!’
대체 저게 뭐지? 사술인가?
물론 그럴 리는 없었다. 벽산연가의 대공자가 사술 따위 뭐 하러 익히겠는가.
다만 불편했다. 그리고 신기했다.
도대체 무슨 무공을 익히고 있는 거지?
“후욱.”
연호정의 호흡이 커졌다.
번쩍!
동시에 그의 눈이 뜨였다.
비호개는 순간 기분이 몽롱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보는 연호정의 눈빛이 무척이나 신비로웠던 것이다.
뭔가 몽환적이라고 해야 할까. 설마 남정네 눈을 보고서 정신을 못 차릴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개방에서 오셨소?”
“예? 아! 그렇습니다.”
“서신을 주시오.”
“예에. 여기…….”
서신을 받아 펼친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혼났군.”
서신은 아버지한테서 온 것이었다.
두 장이 왔는데, 쓴 시간이 다른 것 같았다. 필치와 내용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감정의 차이가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야.’
적의 적은 친구다. 하니 공동의 목표를 위해 잠시 연합을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그러나 일 처리가 너무 과격하다고 혼이 났다. 그 내용에는 자식에 대한 걱정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다만 다행인 건, 아버지가 자신의 방식을 지지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으셨겠지.’
이미 판을 벌여 놨는데 그만할 수도 없다. 여기서 멈추면 더 큰 일이 벌어진다.
‘죄송합니다. 연락을 주고받으면 시기를 놓칠 수도 있어서요.’
아마 그 부분까지도 이해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서신에 별 얘기가 없는 것일 터였다.
연호정이 담담하게 말했다.
“고생하셨소. 이만 가 보셔도 되오.”
“예?”
비호개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
“더 시키실 건 없으십니까? 서신을 전해 달라든지, 아니면 상황 보고라든지…….”
“없소.”
“아…… 예.”
비호개가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저는 먼저 가 보겠습니다.”
“고생했소. 아!”
꼭 이런다니까.
비호개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최대한 호의적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무엇을 시키시겠습니까?”
“암암리에 날 호위하는 개방도들을 전부 물려 주시오.”
“……?!”
“후개에게 내가 직접 그리하라 시켰다고 하면 알아들을 것이오. 걱정하지 말고 다 물리시오.”
비호개의 얼굴이 굳어졌다.
“알고 계셨습니까?”
“그렇소.”
“그들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서 깔아 둔 고수들입니다. 개방 내에서도 내로라하는 실력자들이니 연 공자님의 안위에도…….”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이번 계획은 무너지게 되오.”
“예?”
“그들은 개방이 나를 도와주고 있다고 생각하지, 나와 개방이 손을 잡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소. 그 차이는 생각보다 크지.”
“…….”
“제법 실력 있는 자들을 물리쳤으니, 이번에는 더욱 확실한 자들을 보낼 것이오. 그 정도 실력자들이라면 개방도의 은신도 알아차릴 가능성이 크오.”
“……그렇군요.”
비호개가 한숨을 쉬었다.
“알겠습니다. 바로 물리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소.”
“그리고 연 공자님.”
“말씀하시오.”
비호개가 포권했다.
“그간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저희 모두가 연 공자님을 응원하고 있습니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연호정이 웃으며 답했다.
“그 말은 저 쪽에게 해 줘야지.”
* * *
닷새 후.
“허! 하남도 오랜만에 와 보는구먼.”
장중하고 고풍스러운 건물을 둘러보는 모용군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기실, 하남도 나름 탐이 나는 동네야. 소림이 자리 잡지 않았다면 진즉에 이곳을 공략해 보려 들었을 텐데. 그렇지 아니하냐?”
“맞아요.”
모용연화 역시 활짝 웃고 있었다.
“하남에는 소림과 명가가 있지요. 가히 중원의 중심이라 불릴 만해요. 설령 소림과 명가, 둘 모두가 사라진대도 사람들은 하남을 성역(聖域)처럼 여길 거예요.”
“그렇겠지.”
“그래서 더더욱 탐이 나네요.”
모용군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네 욕심이 나보다 더하구나.”
“욕심이 많아야 성공하지요.”
“허허, 네 말이 옳다. 총관과 함께 가문을 맡겨야 하나 고민했거늘, 잘 데려온 것 같구나. 이 모용군의 자식이니 그 정도 배포는 있어야지.”
“호호.”
모용군이 저 멀리 우뚝 선 산을 바라보았다.
숭산(崇山), 천년소림이 똬리를 튼 성산이었다.
“돌아갈 땐 숭산의 절경이나 구경해 보도록 하자.”
“좋아요.”
짝!
모용군이 손뼉을 쳤다.
“자, 그럼 패기만만한 젊은이를 만나러 가 보도록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