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벽산의 장자 (2)
명치산(明致山)은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허.’
대숲에 스치는 바람이 연호정의 옷깃을 흔들었다.
마치 그 바람에 흩어질 것만 같다. 허허로운 기운이 전신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걸물이군.’
듣기로 아직 약관에도 이르지 못한 나이라 하였다.
한데 분위기가 아주 묘했다. 열 명이나 되는 고수들을 앞에 세워 두고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듯했다.
게다가 저 자세는?
‘자유로워.’
가만히 서 있을 뿐인데도 어디로든 달려 나갈 수 있을 듯했다.
신법의 경지가 뛰어나 보이지 않는데도 그렇다. 그런 신비로운 기질을 지닌 청년이었다.
명치산은 솔직하게 감탄했다.
“연가가 기어이 사고를 쳤군. 이만한 인재를 키워 냈단 말인가?”
연호정이 담담하게 물었다.
“명가에서 왔나?”
생각보다 목소리가 낮고 부드러웠다. 성정이 거칠다고 들었는데, 목소리만 듣고 보면 전혀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
“생각보다 늦었군.”
“늦었다라…… 우리가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뜻인가?”
“모르기가 힘들지. 하남 땅에서 명가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이 있던가?”
“뭐라? 하하!”
명치산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대담한 놈이다. 오만한 놈이었다.
한데도 저 자신감이 싫지 않았다. 명가 내에선 저런 톡톡 튀는 무인들이 없었다.
명치산이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명가에서 파견한 무사들을 앞에 두고도 그리 담담할 수 있는 배짱이 놀랍구나. 마음에 들었다.”
“난 사내놈 안 좋아한다.”
“언변도 좋군. 나는 평생 칼질만 해 온 몸이라, 자네 같은 달변을 보면 부럽다네.”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강해.’
절정고수다.
하지만 평범한 절정고수가 아니었다. 뇌협 추성은 말할 것도 없고, 암사대주라 했던 명온지와도 비교할 수 없었다.
평생 칼질만 해 왔다? 그 말에 믿음이 갔다.
후배에게 이런 말을 들었음에도 전혀 화를 내지 않는다. 저 여유는 강자의 여유였다.
‘이거 까딱하면 위험할 수 있겠군.’
그래서 좋다.
첫 상대로 이런 남자를 만나다니, 실로 운이 좋았다.
“내 소개를 하지. 나는 명가의 청백무병(淸白武兵) 소속 명치산이라 하네.”
청백무병.
구주명가에서 직책을 갖지 않은, 오로지 무공만 연마하는 무인 집단을 뜻한다.
전투 부대 소속도 아니요, 가내 업무에 동원되지도 않는다. 평생 아무런 직책도 갖지 않는 대신, 명령이 떨어지면 해당 임무에 투입되는 이들이었다.
말하자면 해결사였다. 다만, 평범한 해결사는 아니었다.
헤아릴 수 없는 명씨(明氏) 핏줄, 그중 방계가 많이 속한 집단이 바로 청백무병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호명전(護明殿)에서 나왔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무슨 조직인지 모르겠군.”
“허허, 몰라도 괜찮다네. 굳이 자네가 알 필요는 없어.”
알 필요는 없지만, 경계는 할 만했다.
명치산은 강자다. 하지만 그가 데려온 아홉 명의 무인들도 충분한 강자들이었다. 실제 전투 능력은 모르겠지만, 하나하나가 암사대원들보다 두세 수 이상의 무공을 소유하고 있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 어쩐 일로?”
“자네가 말하지 않았나? 찾아올 줄 알았다고. 그리 생각한 이유가 있을 텐데?”
“암사대?”
순간 명치산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암사대라…… 명온지, 그 아이가 부대명까지 술술 불던가?”
“묻기도 전에 불더구먼.”
“그럴 리가 없지. 그 아이, 어중간하게 훈련받은 아이가 아니거든.”
“도끼로 사정없이 찍어 대니 죽고 싶지 않았는지 다 불더군.”
명치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연호정의 말에서 진실을 읽었다. 연호정은 지금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설마?’
그리고 도끼로 찍었다는 말도 마음에 걸렸다.
명치산의 목소리가 살짝 가라앉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암사대는 어디에 있는가?”
“죽이자고 찾아온 놈들, 살려서 보냈을까?”
죽이자고 찾아왔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들은 결코 널 죽일 생각이 없었다.”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으면서 왜 그리 단정하나?”
“말장난은 그쯤 해 두는 게 좋아. 다시 묻겠다. 암사대는 어디에 있느냐?”
“명씨들은 하나같이 이해력이 별로군. 그 계집도 그러더니.”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뭉클뭉클.
신비로운 기도는 어디로 갔는지, 은은한 담청색 기류가 살벌한 투기를 발산했다.
“죽고 죽이는 생사전(生死戰)이었다. 봐줄 이유는 없었어.”
“……다 죽였단 말이냐?”
“그럼 내가 죽을까?”
“이놈! 똑바로 말해라! 진정 암사대를 죽였냐 물었다!”
투웅!
발치에 걸친 도끼를 들어 올린 연호정의 눈빛이 서늘하게 바뀌었다.
“죽였다.”
화악!
명치산의 몸에서 지독한 살기가 뿜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호명전 소속 무사들의 몸에서도 살벌한 살기가 일었다.
진심 어린 살기였다. 당장이라도 연호정을 찢어 죽일 기세였다.
명치산이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데려오란 명령을 받았지만, 네 상태에 대해선 별말이 없었지.”
“…….”
“사지 하나 날아갈 생각은 해야 할 것이다.”
츠츠츠.
꽉 짜인 투기가 점차 살기로 바뀌었다.
연호정이 무색투명한 웃음을 지었다.
“그런 말랑말랑한 다짐으로 되겠나?”
명치산이 소리쳤다.
“잡아 꿇리도록!”
순간 끝에 선 무사가 번개처럼 각궁(角弓)을 꺼내 들었다.
쉬이익! 티이이잉!
화살을 걸고 시위를 당기는 일련의 속도가 번개처럼 빨랐다. 번쩍! 하는 순간 이미 화살은 쏘아지고 있었다.
화살이 노리는 곳은 연호정의 허벅지였다. 움직임부터 봉쇄하겠다는 의도였다.
텅!
궁수의 눈이 흔들렸다.
“화살 좋은 놈으로 쓰는군. 돈도 많아.”
화살이 연호정의 손에 잡혀 있었다. 당연히 허벅지를 노리는 줄 알았다는 듯 너무도 자연스럽게 잡아챘다.
연호정의 눈이 차가워졌다.
“덕분에 밥도 못 먹었다, 망할 자식.”
쿵!
강하게 땅을 밟은 그가 화살을 날렸다.
피잉! 퍽!
“큭!”
궁수가 어깨를 잡고 비틀거렸다. 좌측 어깨에 화살이 박힌 것이다.
활로 쏘는 것보다도 더 빠른 속도였다. 마치 암기술(暗器術)이라도 익힌 것 같았다.
명치산의 안광이 형형해졌다.
‘빠르다!’
궁술을 연마한 고수는 신법이 빠르다. 거리를 벌려 활을 날려야 하니 당연했다.
그런 궁수가 제대로 반응조차 못 하고 화살에 맞았다. 본능적으로 상체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가슴에 박혔을 것이다.
“전력을 다해라!”
타다다닥!
여덟 명의 고수들이 연호정을 향해 뛰어들었다.
암사대보다 더 빠르고 공격적인 보법이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제각기 병장기를 휘두르는데, 물 샐 틈 없이 완벽한 합공이었다.
연호정이 도끼를 휘둘렀다.
쩌저저정!
일곱 자루의 병장기가 튕겨 나갔다. 하지만 한 자루 도(刀)가 기어이 풍압을 갈라 오며 연호정의 어깨에 상처를 남겼다.
연호정의 몸이 선풍(旋風)처럼 휘돌았다.
빠각!
도객이 훨훨 날이 땅에 처박혔다. 연가의 고공각(拷空脚)에 맞은 것이다.
“쿨럭!”
다시 일어나려던 도객은 한 움큼 피를 토하더니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렸다.
명치산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일격에?!’
호명전의 무사들은 기본적으로 외공(外功)도 내공 못지않게 단련한다. 위험한 순간 몸을 던져서라도 적의 검을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 단단한 몸뚱이를 가진 무사가 각법 일격에 쓰러져 버렸다.
‘침투경!’
파아악!
연호정이 달려들었다.
기다렸다는 듯 남은 일곱 무사도 병장기를 휘두르며 그를 압박했다.
‘달라.’
확실히 암사대원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들이 승냥이였다면, 이들은 늑대였다. 하나하나가 제각기 확실하게 담당하는 방위와 투로가 있었다.
일격만 들어가도 전력을 낮출 수 있다. 그런 의도로 짜인 대형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초반부터 전력을 다할 수밖에.
콰앙!
화살을 날렸을 때보다 더 강한 진각이었다.
연호정이 도끼를 풍차처럼 휘둘렀다.
쩌저저정! 콰앙!
압도적인 위용이었다.
도끼날에 맞은 병장기들이 하나같이 이가 빠지거나 부러졌다.
제아무리 잘 만든 병기라도 중량의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 하물며 연호정의 내공으로 경도까지 높인 도끼였다.
파아악! 퍼어억!
주먹에 맞은 무사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티이이잉! 쾅!
도끼 면으로 휘둘러 병장기와 함께 가슴팍을 후려쳤다. 훨훨 날아간 무사가 대나무 십여 개를 부수고 쓰러졌다.
캉! 카가가강!
와중에 돋보이는 검격을 구사하는 자가 있었다. 빠르고 경쾌한 검으로 공격해 오는 걸 창대로 막았다.
멈추지 않은 연환검, 창대로 공격을 막던 연호정이 상단으로 각법을 시전했다.
빠각!
관자놀이를 맞은 검사가 그 자리에서 허물어졌다.
명치산의 눈이 흔들렸다.
‘강하다!’
연호정은 강자였다.
무공도 무공이지만 전투력 자체가 강했다.
‘흐름을……? 아니, 그게 아니야.’
퍼어억!
무사 하나가 재차 허물어졌다. 맞붙은 것도 아니고, 접근하는 와중에 튕겨 나간 창대 끝에 가격당해 쓰러진 것이다.
‘저놈, 약점을 읽는다.’
진형의 약점을 한눈에 꿰뚫어 보고 있다. 어디가 취약한지, 누굴 공략해야 하는지, 다음 동작을 어떻게 취해야 하는지까지 전부 알고 있었다.
명치산은 저도 모르게 감탄을 터트렸다.
‘천부의 재능이다. 맞붙어 깨부수는 게 아니라 철저하게 약점을 공략해 쓰러트린단 말이지?’
아무리 봐도 무골(武骨)은 아니었다. 골격 자체가 무공을 익히기에 적합한 몸이 아닌 것이다.
한데 누구보다도 잘 싸운다.
그간 수없이 많은 무인을 만났지만 저처럼 효율적으로 싸우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서슴없이 약점을 공략하면서도, 정면 승부를 할 때는 포악한 짐승처럼 달려들어 쓰러트려 버린다.
무도가(武道家)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투사(鬪士)도 아니었다.
전사(戰士)다. 철저하게 이기는 싸움만 하는 놈이며, 어떻게 해야 이길지를 아는 놈이었다.
명치산이 땅을 박찼다.
투우웅!
연호정의 눈이 번쩍였다.
그가 남은 무사의 발을 걸어 쓰러트리곤 그대로 도끼 면으로 올려 쳤다.
퍼어억!
턱과 이빨, 갈비뼈가 우수수 깨진 채로 날아간다. 정확하게 명치산이 접근하는 쪽이었다.
후우웅.
명치산의 손이 무사의 멱살을 잡아 뒤로 돌렸다.
그리고 그 앞에, 어느새 연호정이 도착해 있었다.
“기다렸다.”
“이놈!”
명치산의 요대에서 한 자루 묵직한 박도(朴刀)가 뽑혀 나왔다.
쩌어어어엉!
쇠와 쇠가 부딪친 공명음이 대숲 전체를 휩쓸었다.
시작부터 전력 승부였다. 명치산의 폭발적인 도격(刀擊)에 연호정이 서너 걸음 뒤로 물러났다.
명치산의 눈에 살광이 번뜩였다.
상대에게 감탄했지만, 감탄은 감탄일 뿐이었다. 놈은 암사대를, 나아가 조카인 명온지를 죽인 놈이었다.
용서할 수 없었다.
타악!
거리를 좁히는 보법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전신에 탄력이 넘쳤다. 호명전의 무사들과는 차원이 다른 움직임이었다.
연호정이 도끼를 휘둘렀다.
쩌저정! 쩌엉!
굉장한 무공이었다.
팔십 근 무게의 도끼를 하나하나 쳐 내는데, 칼날에 흠 하나 나지 않았다. 막강한 내공으로 보호되는 칼날은 연호정의 도끼 이상의 흉기가 되었다.
두 사람의 병장기가 화려하게 충돌했다.
쩌저저저저정!
엄청난 속도로 부딪친다. 호쾌하기 짝이 없는 정면 승부였다.
서걱!
연호정의 가슴에서 피가 튀었다.
그 무거운 중병을 튕겨 내곤, 짧은 순간 칼을 회전시켜 기어이 베어 내고야 말았다. 상처는 얕았지만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드는 일격이었다.
퍼펑!
아래에서 올려 치는 연가십삼권의 주먹이 무릎에 막혔다.
거친 공격만큼이나 방어도 뛰어났다. 공방일체의 무공이었다. 공략하기가 만만치 않은 무인이었다.
‘그래.’
퍼억!
각법을 피하지 못한 연호정의 입에서 피가 튀었다.
피를 토하면서도 연호정의 눈은 끝까지 명치산을 쫓았다.
‘이놈이라면.’
부우웅! 빠각!
명치산도 주춤했다. 연호정의 탄력적인 각법에 상체가 삐걱거린 것이다.
순식간에 집중력이 극에 이르렀다. 자칫 잘못하면 당할 수 있는 상대 앞에서, 연호정의 의지는 칼날처럼 날카로워졌다.
‘이놈이라면 가능해.’
우우우우우웅!
은은한 담청색 진기 속, 북방의 어두운 기가 일렁였다.
현무기였다. 하지만 북천십이벽을 펼치기 위해 끌어 올린 기가 아니었다.
이미 준비되어 있던 무예. 준비되어 있던 진기(眞氣).
그 기운이 현무기의 인도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놈이라면 불러낼 수 있어.’
명치산의 칼날이 무자비하게 휘둘러졌다.
부우웅! 쐐애액!
무시무시한 칼바람이 쏘아졌다. 거리를 격하고 날아드는 도풍(刀風)이었다. 막지 못하면 도끼와 함께 오른팔이 통째로 날아갈 것이다.
연호정의 눈이 일순 하얗게 물들었다.
‘바람.’
그때, 세상이 느려졌다.
흔들리는 댓잎이 물결치듯 느려졌다. 명치산의 동작이 진흙에 빠진 것처럼 답답해 보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 보일 리 없는 칼날의 바람이 새하얀 빛으로 보였다.
연호정의 허벅지 근육이 확 부풀었다.
콰아앙!
대지를 찍어 내는 진각이 마치 호랑이의 포효를 닮았다. 도끼를 쥔 양팔의 근육이 성난 황소처럼 부풀었다.
‘나와라!’
화아아악!
하얀 바람이 그의 폐장(肺臟)으로 몰려들었다.
차갑고도 서늘한 백색의 기운이, 일순 빛살처럼 전신 신경으로 뻗어 나갔다.
연호정의 입이 절로 열렸다.
크허헝!!
산중대왕의 포효와 함께 그의 도끼가 불가사의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