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벽산의 장자 (1)
“가주님. 개방에서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모시게.”
잠시 후, 가주실로 철곤개가 들어왔다.
평소 능글맞기로 유명한 철곤개도 감히 연가의 가주 앞에서 능청을 떨 수는 없었다.
“철곤개입니다. 이렇게 뵙기는 처음인 듯싶습니다.”
얼마나 안 씻었는지 얼굴에서 땟물이 줄줄 흐를 지경이었다. 그래도 연위의 표정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연위일세. 반갑네.”
짤막한 인사에 강력한 위엄이 느껴졌다.
철곤개는 괜스레 목이 따끔거리는 것을 느꼈다.
‘어마어마하구먼.’
마치 한 자루 신검(神劍)을 보는 듯했다. 느껴지는 위압감이 엄청났다.
‘판관검(判官劍). 십 년 뒤에는 성천십삼좌에 오를 만한 검사라더니, 세인들의 말이 과장이 아닌 것 같아.’
일갈단해(一喝斷海), 철검주악(鐵劍走惡).
한 번 소리를 질러 바다를 가르고, 강철 같은 검법으로 악을 쫓아낸다.
연가주 연위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오늘 보니 그 무서운 별호에 어떠한 과장도 없어 보였다.
“일이 있어 금방 가야 하니, 그간 조사했던 것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연위의 눈이 반짝였다.
한 달은커녕 보름도 채 지나지 않은 판국이었다. 한데도 철곤개는 뭔가를 알아낸 것 같았다.
“그러시게.”
“이걸 봐 주십시오.”
누더기 같은 품속에서 고이 접은 서신을 꺼내 공손히 올린다.
행색은 상거지가 따로 없는데 가지고 온 서신은 무척이나 고급스러웠다.
서신을 펼친 연위의 눈이 빛났다.
“절강까지 조사하고 드리려 했는데, 시간이 촉박한 듯하여 강소성만 추려 먼저 드렸습니다.”
“여기 적힌 세력이?”
“그렇습니다. 전부 명가와 손을 잡고 있습니다. 오른쪽에 적힌 세력일수록 명가와의 연관성이 높습니다.”
빠르게 서신을 훑은 연위의 눈에 기광이 어렸다.
“고검방(古劍房)?!”
“익숙한 세력이지요?”
“설마 여기도 명가와 손을 잡은 겐가?”
“정확히는, 손을 잡았다기보다는 명가에게 돈을 많이 받은 모양입니다. 연가의 동태를 보고하고 있다는 정황이 발견되었습니다.”
연위는 내심 허탈한 것을 느꼈다.
고검방은 연가와 거래를 하는 곳이었다. 가내 무사들이 쓰는 무기 중 절반 이상이 고검방에서 제작된 것이었다.
‘본가는 어느새 이렇게, 조용하게 무너져 가고 있었던 것이로군.’
철곤개가 입을 열었다.
“해서, 직접 여쭐까 싶어서 왔습니다.”
“무슨 말씀이신가.”
“절강에도 분명 명가와 관련된 끄나풀들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조사해 봐야 큰 의미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리 생각하지?”
“모용세가가 먼저 절강에 손을 뻗었기 때문입니다.”
“…….”
“실제로 절강 지부에서 해상 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벌어들이고 있습니다. 제아무리 명가라도 절강을 쑤시려 들진 않을 겁니다.”
“그렇군.”
“예, 그들까지 조사하는 것보다는 당장 강소성의 세력들을 추려 더 깊숙하게 파고드는 게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직접 왔습니다.”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생각이 옳네.”
“그럼, 바로 시작할까요?”
“그 전에.”
연위가 품에서 서신을 건넸다.
“아들놈에게 보내 주게.”
“아, 대공자에게 말입니까?”
“그렇다네. 수고를 끼쳐 미안하네.”
“하하! 괜찮습니다. 어차피 제가 일하는 것도 아닌걸요.”
품에 서신을 쑤셔 넣은 철곤개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저…… 혹시.”
“밥이라면 미리 말해 두었네. 객당으로 가면 안내해 줄 걸세.”
철곤개가 입맛을 다셨다. 이 양반이 진짜 날 거지로 아나.
“그게 아니고요. 혹시 대공자에게 따로 서신은 받으셨습니까?”
“하남에 도착했다는 것 외에 달리 받은 건 없네.”
“아…….”
철곤개는 진심으로 당황하고 있었다. 제 아버지한테는 말하지 않았단 말인가? 이거 너무한 거 아냐?
연위의 눈이 번뜩였다.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인가?”
“예? 아, 그건 아닌데…….”
“…….”
“……어쩔 수 없군요. 말씀드리겠습니다.”
철곤개가 연신 헛기침을 하며 현재 연호정의 상황을 전했다.
연위의 눈이 흔들렸다.
“명가를?!”
“예, 그렇습니다. 그래서 모용세가까지 끌어들였습니다.”
연위는 기가 차는 것을 느꼈다.
자신에게 말하지 않은 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다. 워낙 정신이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 발상 자체가 어이가 없었다. 모용세가와 손을 잡고 명가를 치다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전략이란 말인가?
‘이런.’
생각해 보면 이건 무척이나 심각한 문제다. 자칫 잘못하면 가문과 가문끼리 전쟁이 날 수도 있는 상황이 아니던가!
“공연히 모용가주를 자극한다면…….”
“에, 저도 그런 걱정을 했는데 말입니다.”
“음?”
“진짜로 오고 있답니다.”
“……?!”
“모용가주 모용군, 정말로 호남에서 출발했다고 합니다.”
철곤개는 얘기를 조금 더 자세히 풀어 주었다.
그간 연호정이 겪었던 일에 대한 정보는 전부 개방에 넘어간 상태였다. 함께 움직이고 있는 사람이 후개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으음.”
연위의 눈이 빛났다.
“그래, 이리 자세하게 들으니 호정이 무엇을 노리는지 알겠군.”
물론 상세하게는 알 수 없었다.
당장 명가가 배후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도 모르는 판국이었다. 그런 녀석이 이제는 명가의 첩보 조직까지도 사로잡았단다.
그 대목을 들었을 땐, 순간이나마 눈앞이 아찔했다. 그 거친 성질머리 때문에 드디어 일을 치나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련의 상황을 듣고 나니, 연호정이 어떻게 명가를 상대할 생각인지는 알 수 있었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명가를 끌어들이고 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많이 위험할 겁니다.”
철곤개가 아차 싶어 말을 덧붙였다.
“물론 개방에서 고수를 파견해 주위를 에워싸고 있으니 별문제는 없을 겁니다.”
“알았네.”
“예?”
“알았다고 했네.”
“아…… 예에.”
“수고했네. 객당에 들러 밥이나 한술 뜨고 가게나.”
철곤개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금방 간다고 했지만, 밥까지 차려 줬다는데 거부할 리가 없었다.
“그, 그럼 염치 불고하고 한 끼 하고 가겠습니다. 허험!”
그렇게 철곤개가 자리를 떴다.
연위가 즉시 신모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가주님.”
“현재 가외로 나간 창응조가 얼마나 되나?”
“창응조 전원 가내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래?”
“예.”
신모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한데 어떤 일로 그러시는지……?”
“하남으로 가게.”
연위의 눈이 서늘해졌다.
“창응대 전원 하남으로 가서 호정을 지키게. 필요하다면 자네의 봉인(封印)을 풀어도 되네.”
* * *
웅성웅성.
하남 개봉(開封)은 역사적인 고도였다.
성도인 정주(鄭州)와도 가까운 만큼 유동 인구가 엄청났다. 낮에는 낮대로 사람이 많았고, 밤에는 밤대로 사람이 많았다.
그렇게 저잣거리를 걷던 사람들은, 한참 웃고 떠들면서도 힐끔힐끔 한 곳을 바라보았다.
“음, 이거 얼마요?”
“……두, 두 냥이요.”
“두 냥? 이게?”
“네, 네!”
“그렇게 싸다고?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아…….”
“너무 싸게 팔면 이문이 안 남잖소. 자, 여기 다섯 냥 드릴 테니 그것까지 주시오.”
“헛! 가, 감사합니다!”
웃으며 먹을거리를 사 들고 걸어가는 청년.
자유롭게 풀어헤친 머리카락. 깔끔하게 차려입은 옷이 인상적이었다. 키는 컸지만 체격이나 복식이나 문사(文士)처럼 보이는 잘생긴 청년이었다.
한데 그 청년이 어깨에 걸치고 있는 게 심상치가 않았다.
‘저거 도끼지?!’
‘그러게. 도끼가 맞기는 한데…….’
‘세상에, 내 저렇게 큰 도끼는 또 처음 보는구먼! 전쟁터에서도 못 쓸 것 같은데.’
‘사람이 들 수나 있는 건가?’
‘얼굴색 하나 안 변하는데? 대체 힘이 얼마나 좋은 거야?’
청년이 보란 듯이 어깨에 걸친 것은 거대한 도끼였다.
도검(刀劍)도 아니고 창(槍)도 아니다. 무려 도끼다. 도낀데 그 크기가 엄청났다.
도낏자루를 창대로 만들었는데 그 창대 길이만 육 척에, 두께도 상당했다. 특히나 도끼날이 압권인데 어지간한 성인 남성 어깨너비의 두 배는 됨직했다.
거의 사람 상체만 한 크기였다. 압도적인 크기요, 위압감이었다. 전혀 안 그럴 것 같은 사람이 드니 오히려 더 위풍당당해 보였다.
개봉은 유동 인구가 많은 만큼 무림인들도 많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림인을 봐도 딱히 겁을 먹거나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청년은 달랐다. 사람의 시선을 잡아끌 수밖에 없는 외양이었다.
연호정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짐작은 했지만 정말 튀긴 튀는 모양이었다.
‘흑도와는 다르군.’
흑도 뒷골목에선 별의별 무기를 들고 다니는 놈들 천지다. 개중에는 거대한 전도(剪刀, 가위)를 들고 다니는 놈도 있고, 검을 열 자루씩 차고 다니는 미친놈도 있었다.
물론 흑도나 백도나 중원 전역에 분포해 있지만, 하남은 소림과 명가가 자리 잡은 곳이었다. 흑도 무림인이 발을 붙일 구석이 없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의 시선이 새삼스러웠다.
‘적당히 둘러봤으니 빠져야겠군.’
상구에서 출발한 지 사흘 만에 개봉에 도착했다. 개봉에서도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나흘을 보냈다. 당연히 명가에서도 이쪽을 포착했다.
‘하나, 둘…… 여섯.’
어제부터 자신을 보는 ‘눈’의 존재를 느꼈다.
그 눈이 하나, 둘 늘어나더니 지금은 여섯이나 되었다. 그리고 여섯에서 더는 늘어나지 않았다.
‘솥은 다 데웠고.’
먹을거리를 챙겨 든 그가 개봉 중심거리를 벗어나 한적한 대숲을 거닐었다.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곳을 고르려니 숲밖에 없었다. 그나마 대숲이라 경치 하나는 좋았다.
사박.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저 멀리 뒤에서 댓잎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에 스친 것인지 사람 몸에 스친 건지 모호한 소리였다.
‘붙었군.’
절제된 보행이었다. 성숙한 단련미가 돋보였다. 암사대와는 전혀 다르면서도 묘하게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암사대…….’
연호정은 명온지를 떠올렸다.
가문의 대문을 부순 금강역사의 무공, 그 무공을 익힌 명온지.
‘저놈들 중에도 그 무공을 익힌 놈이 있을까.’
전신을 단단하게 만든 무공. 전신을 철갑처럼 단단하게 만들어 강인한 방어력과 신력(神力)을 끌어내는 그 무공.
‘이왕이면 한 번 더…… 음?’
문득 드는 생각에 연호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데 묘하군.’
그는 명온지가 그 무공을 꺼내 든 순간 눈이 돌아가 버렸다. 거침없이 살수를 개방한 것도 그만큼 화가 났기 때문이었다.
한데 왜일까?
마음이 진정된 지금, 당시 명온지의 무공을 떠올려보니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과거 가문을 멸문시키러 온 금강역사의 무공이라서?
딱히 그렇다기보다는 이상한 감이 있었다.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점점 사라져 가는 꿈의 기억처럼.
왠지 모를 익숙함을 전해 주는 명온지의 무공이 연호정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
생각에 잠겼던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적이 코앞에 있는데 무슨 여유냐?’
대숲 안으로 들어간 그가 커다란 바위를 발견했다.
쿵!
도끼를 내려놓은 그가 바위에 앉아 주먹밥을 먹기 시작했다.
잘 만든 주먹밥이었다. 간도 적절해서 먹기가 아주 좋았다.
주먹밥을 먹으니 문득 연지평이 떠올랐다.
‘배고프시죠? 많이 드세요. 제가 내일 또 가져올게요.’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이놈아. 형은 먼 타지에 와서 파락호들과 드잡이질 중인데 너는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냐?”
그렇게 농담조로 말하고 싶었다. 아마 이 말을 들은 연지평은 시무룩해져서 발끝으로 땅만 툭툭 차겠지.
동생을 떠올리니 아버지의 얼굴도 생각이 났다.
엄하기만 한 얼굴 너머에 느껴지는 진한 애정.
‘세상이 내 아들을 마두라 부른다면, 그 세상이란 놈을 내 검 아래 둘 것이다.’
‘아버지.’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흑암제 시절에는 느껴 보지 못한 기분이었다. 그때는 전우(戰友)는 있었지만, 가족은 없었으니까.
지금은 달랐다. 흑도의 뒷골목이 아닌, 수십 년을 그리워했던 가문이 있다. 돌아갈 곳이 생기니 마음이 든든했다.
가족을 떠올리며 미소 짓던 연호정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첫 끼다.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려.”
터어엉! 툭!
어느새 손에 쥐고 있던 주먹밥이 사라져 버렸다. 화살 한 대가 날아와 주먹밥을 떨어트린 것이다.
연호정이 투덜거렸다.
“이놈의 주먹밥은 항상 수난이군.”
바위 밑으로 내려온 그가 전면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곳에 열 명의 사내들이 서 있었다.
중앙에 선 중년 사내가 물었다.
“네가 연호정이냐?”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내가 벽산연가의 장자 연호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