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싸움의 명분 (2)
한참이나 숲을 달린 암칠의 눈에 비로소 숲의 경계가 보였다.
‘저기만 넘으면……!’
그때였다.
“어디 가?”
“헙!”
퍼어어억!
일격에 날아간 암칠이 나무에 부딪히며 피를 토했다.
달리는 속도가 빨랐던 만큼 입은 충격도 컸다. 기습한 자가 순간 내공을 회수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심장이 터져 죽었을 것이다.
“생각보다 제법일세? 일개 대원에 불과한 것 같은데 수준이 상당해. 역시 명가는 명가다, 이건가?”
“쿨럭!”
밭은기침을 뱉어 낸 암칠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 너는 누구냐?!”
“나?”
가득상이 씨익 웃었다.
“거리의 청소부다, 이 새끼야.”
그가 발을 휘둘렀다.
빠각!
관자놀이를 맞은 암칠이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가득상이 차가운 눈으로 암칠을 내려다보았다.
“너희들 하는 짓이 참 재미있네. 난 재미있는 건 공유하는 성격이라 말이야. 중원의 모든 사람이 알았으면 좋겠네.”
사삭.
몽둥이를 든 거지 둘이 나타나 암칠을 들었다.
“어떻게 할까요, 후개?”
“뭘 어떻게 해. 잡은 놈들이랑 같이 묶어 둬.”
“근데 괜찮은 겁니까?”
“뭐가?”
“그래도 얘네 명가 소속인데…….”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럼 참아? 이 새끼들 하는 짓거리 보고도 어이쿠, 힘이 강하니 우리가 참아야지, 그 지랄 떨어?”
“……그건 아니지만요.”
“개소리 그만하고 데려가.”
“옙.”
후개가 잔뜩 화가 난 게 분명했다. 거지들은 괜히 불똥이 튈까 무서워 서둘러 암칠을 데려갔다.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서 나무를 노려보던 가득상이 한숨을 내쉬었다.
“제기랄. 그 점쟁이 더럽게 용하네. 시운(時運)이 바뀌었니, 뭐니 하면서 못 알아들을 소리나 해 대더니먼. 올해 봄부터 발바닥에 땀 나도록 뛰어다니게 생겼다더니, 딱 맞혔네.”
극도로 화가 난 건 맞지만, 단순히 감정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는 건 아니었다. 그리 단순한 사람이었다면 후개가 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시간이 없어. 세작 때와 다르지 않다. 암사대에서 연락이 오지 않으면 명가에서도 나름의 조치를 취할 거야.’
마음 같아선 이게 무슨 짓거리냐며 당장 터트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구주명가는 천하제일가다. 어설픈 증거로 몰아붙이려다간 되려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골치가 아파진다. 개방이든 연가든 여론의 뭇매를 맞을 수도 있다. 명가 역시 더 조심스레 숨어들 것이 분명했다.
더 많은 증거가 필요했다. 최소한 이쪽을 건드릴 수 없을 정도의.
“뭐, 일단 연 공자가 남은 잔당을 잡고 난 다음 고민해 봐야 할…….”
그때였다.
‘……!!’
가득상이 동쪽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숲속, 서늘한 바람을 타고 흐르는 지독한 살기가 있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살기였다. 살기의 표적이 아닌데도 거대한 맹수가 목덜미에 이빨을 들이대고 있는 듯 으슬으슬한 흉포함이 압권이었다.
“……이 자식이!”
터어엉!
개방 비전, 만리추풍(萬里秋風)의 신법을 펼치는 가득상의 얼굴에 다급함이 가득했다.
“사로잡으라고 했지, 누가 죽이라고 했냐고!!”
* * *
콰직! 쿠구구궁!
밑동부터 터져 나간 나무 한 그루가 그대로 쓰러졌다.
나무를 파괴하면서도 속도는 전혀 줄지 않았다. 거대한 도끼날이 옆구리를 노리며 날아들고 있었다.
파악!
날렵한 신법으로 날아오른 명온지가 도끼를 피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회피한 즉시 굵은 나뭇가지를 걷어찬 명온지가 연호정의 머리를 향해 장을 휘둘렀다.
살초는 아니었다. 일격에 기절을 시킬 요량으로 뻗은 장법이었다.
그때, 연호정의 철부가 불가사의한 변화를 맞이했다.
뱀처럼 꿈틀거린다 싶더니 공격 방향이 탄력적으로 전환된다. 상단으로 올려 치는 도끼날이 무시무시한 위압감을 자아냈다.
명온지의 얼굴에 다급함이 어렸다.
너무나 시기적절하게 올려 친 공격이라 손을 회수할 수가 없었다. 저 도끼날에 실린 공력은 너무 강해서 흘릴 수도 없다.
투웅!
어떻게든 몸을 틀어 장법을 회수했지만, 날카로운 도끼날은 단숨에 그녀의 팔뚝을 베어 버렸다.
후두둑!
뜨거운 핏방울이 바닥에 떨어졌다.
“큭!”
바닥에 내려선 명온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동맥을 다쳤다.’
상처가 깊었다. 핏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손으로 압박한다고 해서 멈출 출혈이 아니었다.
부우우웅!
연호정은 냉정했다. 단숨에 거리를 좁혀 공격을 가하는데, 그러다 죽어도 상관없다는 기세였다.
콰앙!
도끼가 작은 나무 하나를 산산조각 냈다.
터어어엉!
명온지가 재차 달려 나갔다.
적당히 유인해서 제압하려고 했는데, 더는 무리였다.
연호정은 그녀의 역량으로 제압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힘도 힘이지만 체력이 너무 강했다.
투둑!
혈(穴)을 눌러 강제로 혈행을 막았다.
하지만 한계가 있다. 내공 소모가 지속되면 혈이 저절로 풀릴 것이다. 그럼 출혈도 재개된다.
시간이 없었다. 상대를 잡으려다가 내가 죽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콰아아앙!
등골에 서늘한 폭음이 울렸다.
‘괴물 같은 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중병은 경병보다 내공 소모가 심할 수밖에 없다. 무거운 무게를 공력으로 지워 파괴력만 살리니, 시간이 지날수록 내공 소모가 급격하게 빨라진다.
뿐인가? 체력도 문제다.
제아무리 단련된 내공고수라도 체력을 키우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칠대세가의 가주나 구파일방 장문인 정도의 내공이 아니면 체력 문제로 떨어진 무공의 위력을 메울 방법이 없다.
그런데 저놈은 뭔가?
무한의 체력을 가지기라도 한 것처럼, 암사대원을 죄다 쓰러트리고도 저런 무공을 구사한다. 오히려 처음보다 도끼의 위력이 더 강해진 것 같았다.
쾅! 콰릉!
벼락이 내리치는 것만 같았다.
두려운 와중에도 호기심을 금할 길이 없었다. 명온지는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
두세 그루의 나무들이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아니, 박살이 났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다. 마치 온몸이 강철로 만들어진 기마병처럼 나무들을 무작위로 박살 내며 달려온다.
폭풍 같은 돌진이었다.
‘미친!’
저런 무자비한 놈과 겨뤘다니, 식은땀이 났다.
첫 만남에 상대의 기량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도 처음이었다. 도대체 어떤 무공을 익혔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잡힐까? 이럴 거면 그냥 비학(秘學)을 쓰는 게 낫지 않을까?!’
공포가 욕망을 자극했다. 당장 숨겨진 힘을 끌어내 놈을 쓰러트리고 싶었다.
‘……아니야. 아직은 안 돼. 드러내선 안 될 힘이다.’
파아아악!
명온지가 속도를 올렸다.
순간 연호정의 눈이 번쩍였다.
‘기다렸다.’
퍽!
유연한 참격으로 작은 나무 하나를 베어 올린 그가 그대로 나무를 걷어찼다.
콰앙!
화약이라도 터진 것 같았다. 엄청난 각력에 맞은 나무가 명온지의 등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헉!”
속도가 빠른 만큼 방향 전환이 쉽지 않았다. 명온지가 몸을 돌려 날아오는 나무 기둥을 막았다.
콰지지지직! 퍼억!
“커헉!”
명온지의 몸이 나무 하나를 부수고 넘어가 버렸다.
“후우.”
연호정 역시 신법을 멈추었다.
무한의 체력을 가진 것처럼 보였지만, 그 역시 사람이었다. 흑암제의 깨달음으로 공력을 운용, 체력을 보강했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딱 적당한 때에 잡았다. 후개가 지원한 거지들이 숲 전체를 에워싸고 있으니, 도주한 암사대원들도 잡았을 것이다.
연호정이 명온지를 향해 걸었다.
명온지만 잡으면 상황 종료다. 이제야 끝난 것이다.
그때였다.
퍼어어어엉!
연호정의 몸이 주르륵 뒤로 밀려났다.
화아아악!
부서진 나뭇더미 속에서 엄청난 투기가 솟구쳤다.
연호정의 눈에서 살기가 치솟았다.
‘……이 무공은?!’
푸스스스.
자리에서 일어난 명온지의 동공이 황금빛으로 빛났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녀의 양손에서 강력한 기운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소용돌이치는 기운이 서서히 전신으로 스며들었다. 이전과는 판이한 기세였다.
“어쩔 수 없지. 잡히는 것보단 죽이는 게 낫겠어.”
번쩍!
‘헉?!’
명온지가 기겁하여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서 살기의 덩어리가 날아오고 있었다.
콰앙!
야수 같은 일격이 그녀의 팔뚝을 후려쳤다.
놀랍게도 양팔을 교차해 참격을 막았다. 도끼날이 그녀의 두 팔을 두 치나 파고들었지만, 잘려 나가진 않은 것이다.
이 정도면 도검불침(刀劍不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명온지가 버럭 외쳤다.
“개자식이!”
연호정이 몸을 돌려 그녀의 가슴을 걷어찼다.
콰앙!
명온지가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엄청난 위력이었다. 종전과는 전혀 다른 공격력이었다.
명온지는 믿을 수 없었다.
‘이게 뭐야?!’
얼마 전, 명가는 조사의 무공을 얻었다.
그 무공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명가 무공의 수명 문제를 해결해 줌은 물론, 전반적인 무력 역시도 상승시켰다.
지금은 꺼내 들 때가 아니었지만, 이러다가 놈의 손에 잡히게 생겼다. 그럴 바에야 아예 죽이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비기를 개방한 것이다.
한데 놈도 달라졌다.
정확히는, 놈의 기질이 달라졌다.
파파팍!
단 세 걸음으로 거리를 좁힌 연호정이 철부를 휘둘렀다.
자비가 없는 난격(亂擊)이었다. 이전보다 더 빠르고 격렬한 도끼질에서 엄청난 살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이익!’
콰쾅! 쾅!
명온지가 양손을 휘둘러 철부를 막았다.
그러나 연호정의 공격은 더 과격해졌다. 더 빨라졌고, 더 흉포해졌다.
쾅! 콰쾅! 퍼퍽!
“헉!”
도끼를 막은 그녀의 양팔이 점차 너덜너덜해졌다.
‘이럴 수가!’
이공자의 무공도 완벽하게 막아 낸 무공이었다. 한데 연호정의 도끼질을 막지 못하고 있었다.
“으아압!”
퍼어억!
“아아악!!”
기어이 명온지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도끼날이 그녀의 오른팔을 팔꿈치부터 날려 버린 것이다.
연호정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죽일!’
가문의 흉수 중 하나가 쓰던 무공을 보았다.
가문의 현판을 부수고, 대문을 박살 낸 거한의 무공. 연가 무사들의 맹렬한 검법을 맨몸으로 막아 내며 돌진했던 금강역사의 무공.
그 무공을 보자 머리가 하얗게 변해 버렸다.
퍼어어억!
다리를 걸어 명온지를 넘어트린 연호정이 그녀의 위에 서서 도끼를 들었다.
쾅! 콰앙! 쾅!
“컥! 커헉!”
명온지의 몸이 점점 땅으로 파묻혔다.
무식한 위력의 도끼질이었다. 순식간에 상반신 전체가 피로 물들었다. 팔뚝이며 가슴, 어깨 할 것 없이 온통 도끼 자국이 났다.
명온지의 얼굴에 공포가 어렸다.
미친 살인마가 도끼로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 생애 최초로 느끼는 극심한 두려움이었다.
“머, 멈춰! 멈추라고, 이 자식아!”
쾅! 콰앙!
“쿨럭! 우웨엑!”
콰아앙! 콰아앙!
“사, 살려 줘…….”
“너희는 그러지 않았다.”
연호정이 다시 도끼를 쳐들었다.
명온지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이 괴물처럼 보였다.
“너희는 그러지 않았어.”
그때, 저 멀리서 가득상이 달려왔다.
“연 공자! 안 돼!!”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해 도끼를 내리쳤다.
콰아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