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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57화 (57/963)

57화. 싸움의 명분 (1)

명온지는 당황했다.

‘저게 뭐지?’

우웅! 우웅! 우웅!

명멸을 반복하는 반투명한 청색 기운이 귀갑(龜甲)을 관통하는 뱀의 형상을 이루었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기(氣)의 밀도가 강하면 내공을 발출할 때 육안으로 그 색(色)이 보이기 마련이지만, 저 형상은 뭔가가 달랐다.

‘의념!’

그렇다. 저것은 단순한 기가 아니었다. 기가 강인하게 단련된 의념을 따라 형상화된 광경이었다.

명온지는 순수하게 놀랐다. 기가 의념에 따라 형태를 구현하는 건 절정고수의 수준으로는 불가능에 가깝다.

“너…… 정체가 뭐냐?!”

그때였다.

“카앗! 개자식이!”

명도의 몸에서 은은한 금광이 번져 나왔다.

명온지의 눈이 흔들렸다.

“명도! 안 돼!”

파아악!

분노에 눈이 뒤집힌 그가 연호정에게 달려들었다.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퍼억!

명도의 주먹이 연호정의 손바닥에 막혔다.

‘상당하군.’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권력(拳力)이 제법이었다. 손에 현무기를 담아 손쉽게 막았지만, 굵직한 나무도 산산조각을 낼 위력이었다.

우두둑.

명도의 눈가가 씰룩였다. 주먹을 휘감아 오는 손가락이 당장이라도 주먹을 부술 것 같았다. 엄청난 악력이었다.

“이놈!”

투우웅!

손바닥으로 하박을 쳐 주먹을 빼낸 그가 미친 듯이 주먹을 휘둘렀다.

파바바박!

명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펼치는 무공은 구주명가의 철쇄팔권(鐵鎖八拳)이었다.

산타(散打)인 철쇄박을 개량한 무공으로, 연타로 상대방을 몰아붙이는 강력한 권법이었다.

놀랍게도 그 권법을, 연호정은 한 손으로만 전부 쳐 내고 있었다.

“삼공자 놈이 썼던 무공하고 닮았군.”

파아악! 우두둑!

명도의 눈이 충혈되었다. 열여섯 번의 주먹질을 모조리 쳐 낸 연호정이 귀신처럼 손목을 잡아챈 것이다.

‘큭!’

팔목이 휘어진다. 이내 몸 전체가 오른쪽으로 휘어졌다.

악력이 너무 강해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아니, 빠져나오기는커녕 점점 조여 오는 힘에 팔뚝이 부러질 것 같았다.

우두두둑!

“크아아악!”

연호정이 완전히 팔을 부숴 버릴 생각을 하던 그때.

번쩍!

어느새 사방으로 퍼진 검객들이 검법을 전개했다. 이전보다 한층 더 신중한 기색이지만, 검날의 예리함은 여전했다.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퍼억!

연호정의 발이 명도의 아랫배에 박혔다. 명도가 입을 쩍 벌리며 무릎을 꿇었다.

바로 그때, 암사대원들의 검이 지척까지 다다랐다.

쿠웅!

자세를 낮춘 그가 명도를 휘둘렀다.

‘헉!’

사람 팔을 잡고 물건처럼 휘두를 줄은 몰랐다. 그것도 엄청난 속도였다.

놀란 암사대원들이 검을 회수했다.

연호정이 명도를 놓았다. 날아간 명도를 암사대원 셋이 받아 냈다.

명온지의 눈이 번뜩였다.

‘지금!’

터어엉!

순식간에 연호정에게로 치고 들어갔다. 그 속도가 날래기 그지없었다.

동시에 연호정의 몸이 안개처럼 흐려졌다.

‘헉!’

명온지는 기겁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연호정 역시 자신에게 돌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의 접근 속도가 상상을 초월했다. 박차고 나아가는 순간, 이미 연호정이 반 장 거리 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콰앙!

명온지의 몸이 뒤로 훨훨 날아갔다.

충격은 크지 않았다. 그녀의 무공은 이화접목의 수법에 치중된 무공이었다. 어지간한 공격으로는 충격을 줄 수 없었다.

다만 명온지가 놀란 건 연호정의 힘이 아닌 공격 그 자체에 있었다.

‘몸통 박치기?’

이런 막무가내 돌진으로 사람 하나를 날려 버리다니?

‘무슨 힘이……?’

그뿐만이 아니었다.

터어엉!

명온지를 날려 버리곤 다시 몸을 돌려 가장 끝의 암사대원을 향해 돌진하는데, 그 움직임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연호정.

그가 마침내 거대한 도끼를 휘둘렀다.

쩌어어엉!

일격에 검이 부러져 버렸다.

당황한 암사대원이 검을 놓고 권박을 펼치려 했다.

펑!

“컥!”

암사대원이 그 자리에서 허물어졌다. 어깨에서 터진 충격파에 뼈가 부러진 것이다.

연가의 무공 연환비연장이었다. 거병을 휘두르며 무너진 자세로 어떻게 구사했는지는 보고도 알 수가 없었다.

“잡아!”

사삭!

연호정에게 뛰어드는 암사대원들의 움직임은 부드럽고 민첩했다. 그리 빨리 이동하는데도 발소리가 나지 않았다.

재차 몰려드는 암사대원들.

명온지는 후방에서 진기를 모았다. 결정적인 순간을 노리는 것이다.

그때였다.

‘……!!’

힐끔 자신을 보는 연호정의 눈빛에 명온지의 안색이 돌변했다.

‘저놈……?’

부우웅! 퍼엉!

검을 부러트린 일격은 전력이 아니었다.

모두가 달려드는 그곳에서 무자비한 속도로 도끼를 휘두르는데, 원형으로 퍼지는 충격파에 암사대원들이 접근을 못 하고 있었다.

‘전술을 알고 있어?!’

파아악!

그뿐만이 아니었다.

모두를 주춤하게 한 후, 거리가 적당히 떨어진 암사대원에게 돌진해 도끼를 찔렀다.

도끼는 휘둘러 쪼개는 병기다. 창처럼 찌르는 병기가 아니란 말이다. 그러나 무게가 팔십 근에 달하는 중병이니, 그 자체로 무시무시한 공격이 되었다.

콰직!

암사대원은 비명도 못 지르고 피를 뿜으며 날아갔다. 도끼의 무게로 봤을 때, 갈비뼈 서너 대는 부러졌을 것이다. 그대로 목숨을 잃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 일격으로 인해 빈틈이 드러났다. 암사대원들이 연호정의 등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연호정의 눈이 시퍼런 광채를 뿜었다.

쩌저저저정!

마치 태풍이 불어닥치는 것 같았다.

한 번의 휘두름으로 열 자루의 검이 수수깡처럼 부러졌다.

명온지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이럴 수가!’

상상을 초월하는 무공, 압도적인 위력이었다.

보통 명문가의 자제나 수준 높은 무인들은 도끼를 잘 쓰지 않았다. 외양도 외양이지만 한 자루 검으로도 얼마든지 묵직한 공격을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거병이나 중병을 쓰는 무림인치고 실력 있는 자는 흔치 않았다. 무공 조금 익힌 산적 정도나 다루는 병기라고 할까.

한데 연호정은 달랐다.

퍼억! 퍼어억!

내리찍어 짓눌러 압박하고, 창대로 밀어쳐 날려 버린다. 창처럼 찔러서 뼈를 부러트리고, 사이사이 권박(拳撲)을 날려 쓰러트린다.

도끼의 무게 중심을 자유자재로 변화시키는 것은 물론, 필요하다면 권각(拳脚)까지 날린다. 도끼날로 찍어 죽이는 게 아니라, 널찍한 도끼 면으로 후려쳐서 전투 불능으로 만든다.

그야말로 돌풍이다.

연호정 스스로가 거대한 용권풍이 된 것 같다. 홀린 듯 덤벼들던 암사대원들은 연호정의 거병술(巨兵術)에 추풍낙엽처럼 날아가 쓰러졌다.

‘익!’

빈틈이 보인다 싶어 뛰어들려던 명온지는 순간 움찔했다.

움직이려는 순간, 연호정의 눈이 자신을 향했다.

몇 번이나 그랬는지 모른다. 마치 이쪽의 전술을 다 꿰뚫어 보고 있는 듯했다.

‘정체가 뭐야, 이놈?!’

그때였다.

“개새끼!”

파아앙!

명도가 귀신 같은 표정을 지으며 돌진했다.

“찢어 죽인다!”

연호정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암사대원 하나를 주먹으로 날려 버린 그가 도끼에 벽라진기를 퍼부었다.

우우우웅!

도끼날에 선명한 청색 기류가 피어올랐다.

명온지가 외쳤다.

“명도!!”

연호정의 도끼가 벼락처럼 움직였다.

퍼어어억!

명도의 몸이 사선으로 갈라졌다.

철퍽!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날아간 상반신이 나무에 부딪혀 땅으로 떨어졌다.

쿵.

상체를 잃은 하체가 걸음을 옮기려는 듯 기우뚱하더니 이내 쓰러졌다.

푸화아악!

대량의 선혈이 뿜어졌다. 갈라진 몸통에서 내장이 흘러나와 땅 위로 흩어졌다.

“……!!”

정적이 일었다.

연호정이 인상을 찡그렸다.

‘별수 없지.’

이왕이면 죽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진심으로 죽일 각오로 덤비는 놈을 봐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명온지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너……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콰앙!

암사대원 하나가 허공을 날아가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걸쳐졌다.

이제 남은 암사대원은 하나였다. 명온지까지 치면 암사대에서 남은 전력은 둘뿐이었다.

견봉에 척 하니 도끼를 걸친 연호정이 차갑게 말했다.

“이차전 들어가야지?”

츠츠츠.

명온지의 눈에도 기어이 살기가 일었다.

연호정은 건너선 안 될 강을 건너 버렸다. 전투 불능 정도라면 모를까 사람을 죽였다. 그것도 명가의 혈육을 끔찍하게 죽인 것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명온지는 암사대주로서 사고했다.

‘강하다. 그 무공을 쓰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고서야 정면 승부는 무리야.’

하지만 이곳은 숲이었다. 모닥불 주변은 나무가 없었지만, 삼 장 거리만 더 벌어져도 나무들이 빽빽하다.

명온지는 판단을 내렸다.

“암칠(暗七)! 남은 다섯과 접선해서 지부로 가!”

파아아악!

남은 대원이 서쪽으로 향했다.

동시에 명온지의 몸에서 금광이 피어올랐다. 명도가 뿜어냈던 진기보다 훨씬 수준 높은 기운이었다.

쿠웅!

그녀는 강한 진각과 함께 일장(一掌)을 내뻗었다.

쾅!

폭음과 함께 연호정의 소매가 찢겨 날아갔다.

굉장한 위력이었다. 명도의 권박보다 몇 차원 높은 수준의 무공이었다.

터어엉!

명온지가 달려들었다.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역시 빠르군.’

암사대의 전술은 간단하면서도 효율적이었다.

암사대 전원이 달려들어 목표물을 제압한다. 하지만 제압하지 못할 실력이라면, 신경을 분산시켜 틈을 만든다. 바로 그때, 명온지가 기습하는 형식이었다.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전술이다. 명온지의 부드러운 표정과 기도 때문에 더더욱 효과가 크다.

그러나 명온지 개인으로 보면, 여러 사람과 손발을 맞추는 것보다 일대일 싸움에서 더 대단한 기량을 선보인다.

그 사실은 몇 차례 부딪침으로 증명되었다.

퍼퍼펑! 쩌엉!

빨랐다.

공작처럼 우아한 동작으로 벼락처럼 빠른 권장(拳掌)을 날리는데 일격, 일격이 필살의 위력을 담고 있었다.

연호정이 양손으로 창대를 쥐었다.

쾅! 콰앙!

빠르기는 연호정의 도끼도 마찬가지였다.

폭풍처럼 가하는 맹타(猛打)는 그 자체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했다. 더 대단한 것은, 저 큰 병기를 휘두르는 데도 빈틈이 없다는 점이었다.

퍼엉!

‘흡!’

비틀거리던 명온지의 등이 나무에 부딪혔다.

‘뚫다니!’

그녀의 왼손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철부 일격을 흘리려 했지만, 워낙 파괴력 넘치는 공력이 깃들어서 상처를 입은 것이다.

흘려 넘길 만한 공격이 아니었다. 공격에 있어서만큼은 자신보다 한 수 위의 기량을 갖고 있었다.

“치잇!”

명온지가 숲속으로 뛰어들었다.

연호정은 그대로 명온지의 뒤를 쫓았다.

명온지의 눈이 반짝였다.

‘그래, 쫓아와라.’

탁 트인 곳에선 밀렸지만, 울창한 숲속이라면 다르다.

저 철부는 무겁기만 한 게 아니라 길기도 했다. 중병이자 장병이다. 사방에 나무가 빽빽한 숲속에선 제 위력을 발휘하기 어려울 것이다.

심지어 상대는 암사대를 쓰러트리며 체력도 깎아 먹었다. 승부의 추가 기울기 충분한 싸움이었다.

터어엉!

삼십여 장을 들어온 명온지는 그제야 등을 돌렸다. 주위의 가장 큰 나무 뒤에서 기습을 가할 작정인 것이다.

‘미련한 놈! 여기서 끝을 내 주…….’

순간 명온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화아아악!

나무 때문에 차단된 시야.

그러나 나무 좌우로 시퍼런 기운이 뇌전처럼 번져 나오는 게 보였다.

콰앙!

거대한 나무가 화포에 맞은 것처럼 터져 나갔다.

그리고 그 사이로 거대한 철부를 치켜든 연호정이 무시무시한 안광을 터트리며 등장했다.

“네가 선택한 전술이 고작 이거냐?”

“……?!”

“그 대가리로 첩보는 개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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