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바람이 향하는 곳으로 (3)
“꺼어억! 어, 잘 먹었다.”
“더, 더 드릴까요?”
“응? 아, 됐어. 과식은 몸에 안 좋아.”
철곤개(鐵棍丐)는 바닥에 수북이 쌓인 닭 뼈를 보곤 눈물을 머금어야 했다.
거지의 삶을 표방하고 있지만 무림의 문파요, 정보 업계의 대부인 개방의 자금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당연히 지부장쯤 되면 사적으로 다룰 수 있는 돈도 상당하다.
하지만 철곤개는 민생을 위해 사비를 쓴 적은 많아도 사치를 부린 적은 없었다. 그건 철곤개는 물론 개방의 거지 모두가 그럴 것이다.
그런 철곤개가 최초로 거금을 들여 닭 세 마리를 잡았다. 그것도 수탉이 아니라 암탉이었다.
그리고 그 보물들은 몽땅 후개의 뱃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엉? 근데 지부장 표정이 왜 그리 썩었남? 기분 나빠?”
“예?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치? 난 또 닭 잡은 거 아까워서 속 쓰린 건 아닌가 했네.”
닭 잡은 게 아까울 리 있나. 그저 닭 모가지 하나 남겨 주지 않고 싹 발라 먹은 후개가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한데…….”
“응?”
철곤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굴에 기름기가 좔좔 도십니다? 괜찮은 물주라도 잡으셨습니까?”
가득상이 씨익 웃었다.
가지런한 치아 사이사이에 백숙 살점이 박혀 있었다.
“아주 흥미로운 물주를 잡았지. 뭐, 가끔 위험해 보이기도 하지만.”
“설마 그 사람이 연가주는 아니지요?”
“미쳤나? 그 양반은 위험한 걸 넘어 끔찍한 사람이야. 마주하기도 벅찬 사람은 사부 빼고 첨 봤다. 눈에다 뭔 보석을 박아 놨는지 막 번쩍번쩍하더만.”
“그럼……?”
“연가주 말고, 그 양반 아들.”
“떠헉!”
철곤개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쉬었다.
“설마 광풍사(狂風獅)요?”
“뭔 사?”
“광풍사……요.”
“광풍사가 누군데?”
“연가의 대공자 말입니다.”
가득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맞긴 맞는데, 그 양반 별호 생겼어?”
“예에. 꽤 유명한데요? 두어 달 전인가? 여기 강소성까지 번졌어요.”
“호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후기지수 회합 때 연호정이 보여 줬던 무공은 충격 그 자체였다. 후기지수 중 으뜸인 것은 물론이고 뇌협 추성을 무자비하게 몰아치던 모습은 사납기 짝이 없었다.
무림은 소문에 민감하다. 하물며 그 소문을 퍼트린 것은 칠대세가의 후기지수들 아닌가.
자연스럽게 살이 덕지덕지 붙은 별호가 퍼졌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광풍사라니, 거 너무하는구먼.”
사나운 바람을 부르는 사자, 혹은 미친 바람을 일으키는 사자.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어감이 썩 좋게 들리진 않는다. 백도의 명문인 연가의 대공자의 별호로는 지나치게 과격했다.
‘하긴.’
그 출신과 환경만 빼면 딱 어울리는 별호이긴 하다. 사자인지는 모르겠지만, 반쯤 미친놈인 건 분명하니까.
“광풍사를 물주로 잡다니, 과연 후개십니다.”
“그 양반, 많이 유명한가?”
“자존심 빳빳하기로 유명한 후기지수들이 퍼트린 소문이니까요. 아마 지금쯤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을 겁니다.”
가득상이 콧방귀를 뀌었다.
“하여간 그놈의 자존심이 문제야. 구대문파를 봐라. 거기서 단련한 애들은 하나같이 다 겸손하잖아.”
“선가(仙家)의 명맥을 이었으니까요. 근데 다 겸손하지도 않던걸요?”
“칠대세가보다는 낫지. 어휴, 자네도 회합 때 봤어야 해. 애들이 자존심만 왕창 세고 하나같이 어려.”
“실제로 어리잖아요.”
“그래도 명가의 자손이잖나.”
“우물 안 개구리죠.”
“말 잘하네?”
“저 철곤갭니다, 철곤개.”
가득상이 기지개를 켰다.
“끄으응! 어쨌든 잘 먹었네. 나도 슬슬 가 봐야 할 것 같어.”
철곤개의 얼굴에 아쉬움이 깃들었다. 눈빛은 태양보다 환해졌지만.
“벌써 가십니까?”
“더 있다 갈까?”
“…….”
“은근히 사람 섭섭하게 한다니까. 아, 됐어! 나도 바빠!”
“헤헤헤.”
실실 웃던 철곤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어디 가십니까?”
“어딜 가긴 어딜 가. 미친 사자 만나러 가지. 당분간 또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게 생겼다.”
“광사가 아니라 광풍산데요.”
“알 게 뭐야. 아! 그리고…….”
가득상의 눈이 서늘해졌다.
“당분간 연가주 좀 도와드리게. 통천단이 제 역할을 못 할 테니, 조금 힘들 거야.”
* * *
부우우웅!
도끼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는 묵직하다 못해 위압감이 넘쳤다.
“후욱.”
아차 하면 호흡이 튄다. 일격의 위력이 워낙 강하고 극단적이라, 이만큼이나 체력을 끌어올렸음에도 무공 전개가 어려웠다.
하지만 괜찮다.
벽라진기는 흔치 않은 신공이다. 벽라진결의 안정감은 단순히 진기에 국한되지 않고 신체 전반에 작용한다.
더 강하게, 더 빠르게, 더 극단적으로.
한계를 넘어도 몸이 망가지지 않도록 안정적으로 잡아 주는 신공이었다. 게다가 무한한 공능의 현무기(玄武氣)까지 있으니 금세 익숙해질 것이다.
마침 슬슬 도끼를 들어 볼까 고민하는 순간 선물을 받았다. 새삼 아버지께 감사했다.
부우우웅! 사아아악!
한참 동안 거병(巨兵)을 휘두르니 전신 관절이 뽑혀 나가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땀으로 젖은 연호정의 얼굴에 단호한 빛이 어렸다.
‘백호를.’
쿵!
기세가 돌변했다.
과격하고 폭발적이었던 기세가 단숨에 웅혼하고 투지 넘치는 기세로 바뀌었다.
양손으로 쥔 도끼가 무지막지한 바람을 일으켰다.
파라라라락! 콰앙!
거대한 도끼날이 땅을 찍었다. 널찍한 부인(斧刃)이 절반이나 땅을 파고들었다.
굉장한 위력이었지만 연호정의 얼굴엔 아쉬움만이 가득했다.
“역시 안 되는군.”
백호기(白虎氣)를 생성하지 않고는 백호의 진결을 끌어내기 힘들다.
형(形)은 따올 수 있을지언정 제 위력을 살리기 힘든 것이다. 사신무의 형은 하나하나가 난해하고 깊은 무리를 담고 있어, 그에 맞는 방향기(方向氣) 없이는 위력이 살지 않았다.
‘아직은 야수창(野獸槍)으로 만족해야 하나.’
야수창법은 백호의 형(形)을 따서 단순화한 무공이었다. 덕분에 어떤 내공과도 상성이 맞지만, 그 수준은 백호의 무공보다 한참 떨어졌다.
물론 그 자체로도 일류의 무공이라 쓰기에 부족함은 없었다.
땅에 박힌 도끼를 흔들어 뽑아낸 연호정이 심호흡을 했다.
‘초조해하지 말자. 빨라야 하지만 급해서는 안 돼.’
그는 스승의 말을 떠올렸다.
‘사람들은 말한다. 욕심을 버려야 비로소 하나를 얻는다고. 그것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욕심은 의욕을 낳고, 의욕은 열정을 부채질한다. 욕심을 버린 자가 얻을 수 있는 건 오로지 퇴보뿐이다. 다만 다급함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 빠른 것과 급한 것은 달라. 그 차이를 알아야 성장에 탄력이 붙는다.’
그는 지금껏 스승님의 말씀을 하나도 잊지 않고 기억했다.
그분은 신인(神人)이셨다. 사신무(四神武)만이 아니라, 강호에 잊힌 절공들을 무수히 보유하고 계신 무신(武神)이었다.
그중 사신무가 가장 뛰어난 절학임은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그분 역시 사신무는 무(武)의 관점에서 봤을 때 가장 이상적이라는 평가를 하셨다.
다만, 그분은 사신무를 익히고 계셨음에도 그것을 탐탁지 않아 하셨다.
‘사신무는 동란의 시기, 전쟁이 끊이지 않던 지옥 같은 시절에 만들어진 무공이다. 탄생 자체가 적의 파멸을 위한 무학이란 말이다. 무(武)로서는 완벽에 가깝지만 인간 이상의 존재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래서 난 사신무를 아끼며, 동시에 혐오한다.’
스승님께선 선가(仙家)의 맥을 이으신 분이다. 인간의 육신을 벗어나 등선(登仙)을 목표로 하는 분이니 사신무를 좋게 보기 힘드셨을 것이다.
‘하긴, 스승님도 괴짜는 괴짜지.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추구하시면서도 지나치게 인간적인 분이셨어.’
생각해 보니 궁금했다.
‘지금 스승님께서는 어디에 계실까?’
바람 따라, 구름 따라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분이었다. 아마 과거에 만났던 그곳에 가도 스승님은 안 계실 것이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만나 뵐 수 있을까? 이번 생에서?’
어떻게 과거로 돌아왔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과거로 돌아왔으니, 스승님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한 번이라도 뵙고 싶구나.’
몇 년간 홍천기와 사신무를 수련시켜 주시던 스승님께서는 어느 날 훌쩍 떠나 버리셨다. 말 한마디 없이, 서신 한 장 없이.
그럴 만한 분이었다. 다만 이해는 해도 서운함은 어쩔 수 없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연이 닿으면 뵐 수 있겠지.”
그때,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 혹시 어여쁜 처자라도 숨겨 놨소?”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어여쁜 처자가 내게 눈길이나 한 번 주겠소?”
“지랄. 어디 가서 그딴 말 하지 마쇼. 놀리는 거여, 뭐여?”
“사람 몸뚱이만 한 도끼를 들고 다니는 미친놈이오. 정상적인 여인이 내게 추파를 던지겠소?”
“킬킬, 하긴 그도 그렇구먼.”
가득상이 휘파람을 불었다.
“이렇게 보니 새삼 무지막지하네. 그거 무게가 몇 근이요?”
“팔십 근은 될 거요.”
“사람 몸뚱이 잡고 휘두르는 거랑 다를 게 없네? 늙어서 뼈마디 다 아작나겠군.”
“알 바 아니오.”
“그나저나 댁은 대체 무슨 무공을 익히고 있는 거요? 아무리 봐도 연가의 무공은 아니더구먼.”
“그런 게 있소.”
“허! 젊은 사람이 뭐 그렇게 비밀이 많아?”
“가문 전체가 나서서 남을 속이려 드는 곳도 있는데 뭘.”
가득상의 눈이 깊어졌다.
모용세가를 두고 하는 말인 걸 깨달은 것이다.
“이제 슬슬 출발하셔야지?”
“그렇소.”
“심심한데 목적지까지는 같이 갑시다?”
“안 바쁘오?”
“그렇게 각 세워도 돼? 근래 내 덕 많이 본 것 같은데? 감사합니다, 하고 절을 해도 모자랄 판에 말이야.”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절은 싫고, 고맙소.”
“아, 됐어! 나중에 나도 개 같은 일 당하면 써먹어 줄 테니까 거절하지나 마쇼.”
“물론이오.”
가득상이 낄낄거렸다.
석양이 지는 시간, 고양루 뒤편 숲은 이미 어두침침했다.
“자, 갑시다.”
“그럽시다.”
그때였다.
피이이잉!
순간 가득상의 눈이 번뜩였다.
“위험!”
쩌어어엉!
널찍한 부신(斧身)에 날 선 장검이 부딪쳤다.
티이잉!
의문의 습격자가 무서운 속도로 물러나더니 재차 접근해 검을 휘둘렀다.
빠르고 격렬한 검법이었다. 내공량은 많지 않지만, 검에 실린 진기의 탄력은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연호정이 힘차게 도끼를 휘둘렀다.
쩌저저저정!
팔십 근 중병이 쾌검(快劍)처럼 움직이며 검격을 막아 냈다.
몰아치는 검격을 모조리 쳐 낸 연호정이 일순 폭풍과도 같은 일격을 휘둘렀다.
꽝!
폭음과 함께 바닥에 쌓인 나뭇가지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후우우웅.
검을 쥔 습격자가 훨훨 날아가더니 사뿐한 몸놀림으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가득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뭐여? 이공자?!”
검객, 연지평이 몸을 바로 세웠다.
그의 눈빛은 맑고 고요했다.
“역시 굉장하시네요, 형님.”
연호정이 창대를 쓰다듬었다.
“너 역시 대단했다. 그간 네 무공을 보지 못했는데, 그 짧은 사이에 이리 성장했을 줄은 몰랐어.”
“다급하게 쫓아가지 않으면 안 될 사람이 있어서요. 형이 너무 대단하면 동생도 피곤해집니다.”
스르릉.
납검한 연지평이 공손하게 손을 모았다.
“가십니까.”
“그래, 간다.”
연지평의 눈에는 서운함이나 아쉬움이 없었다. 이미 다 씻어 냈기 때문이리라.
연호정은 그런 동생의 눈빛을 보며 대견함을 느꼈다.
“말씀이라도 하고 가시지.”
“금방 돌아올 건데 뭐 하러.”
“형님답습니다.”
웃으며 연호정을 보던 연지평의 눈이 점점 흔들렸다. 감정을 추슬렀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연지평이 고개를 숙이며 절도 있게 포권했다.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형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한참이나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연지평이 몸을 바로 세웠다.
연호정과 가득상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형님이 장자는 장자인 모양입니다. 아버지처럼 냉정하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