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49화 (49/963)

49화. 바람이 불어오다 (4)

다음 날.

“가주님.”

“들어오게.”

가주실로 들어온 태경이 서류를 내밀었다.

“어젯밤에 정리한 서류입니다. 예산은 이 정도로 잡아 두면 될 것 같습니다.”

연위가 빠르게 서류를 훑었다.

“음, 고생했네.”

“아닙니다.”

“이만 가 보게.”

태경은 잠시 망설였다.

“저, 가주님.”

“할 말 있나?”

연위의 눈빛은 평소와 변함없이 무심했다.

태경이 헛기침을 했다.

“그, 모용세가와의 사업 연수 건 말입니다.”

“그 부분에 관해서는 아직 고민 중일세.”

“아, 예! 물론 심사숙고는 하셔야겠지만요.”

연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놈이 오늘따라 왜 이리 말이 긴가 싶은 얼굴이었다.

평소 모습 그대로였다. 태경이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다름이 아니오라…….”

“말씀하시게.”

태경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사람을 바꾸는 건 어떻습니까?”

“무슨 말인가?”

“그, 모용연화라는 처자 말고 다른 사람을 알아보시는 건 어떤가 싶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연위가 대놓고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런 생각을 했나?”

“그것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용연화는 너무 뛰어난 재녀 같아서 말입니다. 아! 물론 대공자님을 낮게 보는 것은 아니고, 혹시라도 그 처자가 다른 마음을 먹게 되면 어쩌나 싶어서 말입니다.”

“다른 마음?”

“예.”

태경이 결심을 굳힌 듯 말했다.

“모용연화는 모용가주가 인정한 인재입니다. 아마 어렸을 적부터 칭찬만 받고 자랐을 것입니다. 자칫 오만한 성정일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습니다. 그 나이에 가문의 대소사에 관여할 정도라 하니, 오죽하겠습니까.”

“음.”

“대공자 역시 모용연화에 비해 부족하지 않은 인재입니다. 다만 재능이 출중한 부인보다는, 마음을 편케 해 주는 부인이 대공자에게 더 어울리지 않나 싶습니다.”

연위가 서늘한 눈으로 태경을 보았다.

“모용연화란 아이를 언급한 것은 자네였네. 한데 왜 이제 와 말을 바꾸는 것이지?”

태경이 멋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 자연스러운 표정 변화에 연위의 눈매가 조금 더 살벌해졌다.

“제가 하나를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그럴 리야 없겠지만, 혹여 모용가주께서 이 혼사를 거절하면 어찌합니까?”

“……?”

“서로 체면 상하기 이전에, 모용가주 입장에서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공적인 일이니 이해는 해도, 아끼는 딸을 내놓으라고 하는 셈이니 불쾌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요.”

“모용가주의 그릇이 그리 작은 사람이라면, 애초에 사업 연수는 하지 않는 게 좋겠지.”

“물론 그렇습니다. 다만 본격적으로 세를 불림에 있어, 잡음은 적을수록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으음.”

“본가를 위해서도, 대공자를 위해서도 그것이 좋을 듯하여 드리는 말씀입니다. 며칠 전, 충분히 생각지 않고 섣불리 말씀드렸던 점 사죄드립니다.”

태경이 은근한 눈으로 연위를 보았다.

연위의 표정은 여전히 삭막했다. 하지만 그는 연위의 눈빛이 미세하게 달라졌음을 알아차렸다.

‘법도니, 정의니 해도 본인 아들의 혼사이니 냉정해지긴 힘들겠지.’

고심하던 연위가 입을 열었다.

“태 총관.”

“예, 가주님.”

“하나 물어볼 것이 있네.”

태경은 내심 긴장했다. 그는 그런 자신의 마음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그는 그런 인물이었다. 속내를 숨겨야 할 때와 솔직하게 드러내야 할 때를 아는 사람이었다.

“이번 모용세가와의 사업 연수, 정녕 하는 게 좋을 듯한가?”

태경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연위의 표정을 해석할 줄 몰랐다. 눈치 빠르기로는 누구 못지않은 그조차 읽기 힘들 만큼 무심했기 때문이다.

이번만큼은 달랐다. 연위는 지금 심란해하고 있었다.

태경의 입이 저절로 열렸다.

“전에도 말씀드렸듯, 저는 찬성입니다. 돈은 곧 힘입니다. 힘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평화에 일조할 수도, 민심을 어지럽힐 수도 있지요.”

“…….”

“감히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지금껏 모셔 온 가주님께서는 힘을 누구보다도 정의롭게 쓰시는 분입니다. 더 많은 자금으로 민생 안전에 힘쓴다면, 다른 문파들도 발 벗고 도울 것입니다.”

연위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태경의 눈이 반짝였다.

‘그리 큰 고민이었단 말이지?’

그는 연위가 한숨을 쉬는 것을 두 번째로 보았다. 첫 번째는 연씨 형제 사이가 크게 틀어진 오 년 전이었다.

‘본인 대(代)에서 가장 큰 사건이랄 수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가.’

문득 연위의 얼굴 위로 연호정의 얼굴이 떠올랐다.

‘생각해 보니 묘하군.’

태경은 어젯밤, 자신을 찾아온 연호정의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거만한 자세. 미소를 지으면서도 두 눈엔 숨길 수 없는 야망을 두른 그 모습.

‘연호정은 연지평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한데 근래에는 달라졌지. 설마 그것이 앞날을 위한 포석이었단 말인가?’

어제 모습을 보니 충분히 그럴 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나이에 그런 생각을 하기도 쉽지 않다? 절대 그렇지 않다.

모용세가는 어미 배에서 나온 순간부터 치열한 권력 다툼을 시작한다. 누가 부추겨서가 아니라, 그것이 모용씨의 핏줄임을 증명하는 천성이었다.

유일하게 그 천성을 비켜 간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모용우.’

그는 천성이 선한 사람이었다. 모용세가보다는 연가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연지평과 닮았다.

‘재미있는 우연이군.’

장자는 점점 모용씨처럼 변해 가고, 모용가에서 괴인 취급 받는 사람은 연씨 성을 받은 사람처럼 행동한다.

“그렇단 말이지.”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의자에 등을 묻은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게 하지.”

태경의 눈빛이 바뀌었다.

“모용세가와 손을 잡으시겠습니까?”

“기실, 손을 잡아서 해가 될 건 없겠지. 서로 부족한 부분을 잘 채워 줄 수 있다면.”

“그렇습니다. 강호의 세도가로서 위세를 떨치고 있지만, 그들 역시 백도(白道)입니다. 최소한의 선은 지킬 것입니다.”

“모용세가를 믿지는 않네. 다만 나를 믿을 뿐일세.”

“설령 모용세가에서 농간을 부린다 한들, 가주님의 혜안(慧眼)을 벗어나지는 못할 것입니다.”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세가에 서신을 넣게. 일간 날을 잡자고.”

태경의 눈이 커졌다.

“제가 직접 넣습니까?”

“이번 고민은 길었네. 내 딴에는 신중했지만, 그들이 보기에는 아닐 수도 있겠지.”

“아, 예.”

연위가 태경을 바라보았다.

“자네 말에도 일리가 있네. 굳이 잡음을 일으킬 필요는 없어. 다만 나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싶지 않으니, 양가의 연수에 득이 되도록 자네가 잘 써서 보내게.”

태경이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서신 작성 후 검토를 받으러 오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연위가 고개를 돌렸다.

그런 간지러운 서신은 보기도 싫다는 듯한 기색이었다. 태경의 안광이 형형하게 빛났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부드럽게 써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아! 대공자의 혼처가 될 쪽은 어떻게……?”

“모용연화가 아니어도 괜찮네.”

“알겠습니다.”

태경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문으로 향했다.

그때, 연위가 입을 열었다.

“태 총관.”

태경이 몸을 돌렸다.

연위의 뒷모습이 보였다. 창가 쪽으로 향한 모습에서 묘한 심란함이 엿보였다.

“고생했네.”

“하핫! 아닙니다.”

“아니, 이번에는 자네 덕이 컸어. 앞으로도 의견이 있으면 주저치 말고 얘기해 주게.”

“물론입니다.”

“이만 가 보시게.”

“그럼 이만.”

태경이 가주실을 나섰다.

그는 볼 수 없었다. 연위의 눈에서 북풍한설이 휘몰아치고 있는 것을.

“이것을 통천단(通天團)에 보내게. 지급(至急)일세.”

“예!”

통천단은 연가와 거래를 맺고 있는 정보 조직이었다. 지급으로 전해 달라 했으니, 곧장 모용가로 날아갈 것이다.

통천단원에게 서신을 전한 태경이 크게 기지개를 켰다.

그간의 피로가 싹 사라지는 듯했다. 날은 아직 추웠지만, 오늘따라 하늘이 유독 맑았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태경의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이제야 끝이 났군.’

어차피 연가는 망한다.

요(要)는 ‘이쪽’에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였다. 천만다행히도 가주가 사업 연수를 승인했으니, 연가의 영역을 잡아먹기도 쉬워졌다.

태경은 새삼 모용연화에게 감탄했다.

‘혼약이라…… 자칫 잘못하면 잡소문에 시달릴 수도 있는데, 그걸 추진했단 말이지? 여장부가 따로 없다니까.’

이번 혼인 얘기는 모용연화가 직접 발의한 사안이었다.

물론 그녀는 연호정과 혼인할 마음이 없었다. 다만 그 정도 제안은 해야 연가주의 마음을 흔들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아쉽군. 남자로 태어났다면 벌써 소가주로 임명되었을 터인데.’

또 모른다. 가주님께서 모용연화에게 가문을 맡길는지도.

이유인즉, 가주님께선 더 큰 곳을 바라보고 계시기 때문이었다. 그분은 자신의 꿈을 가문에서 끝낼 생각이 없었다.

‘천하(天下)라! 사내로 태어났다면, 그 정도 꿈은 있어야지.’

그리고, 그런 가주님 옆에서 천하를 바라볼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웃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태경은 문득 든 생각에 문지기를 불렀다.

“대공자님께선 어디 계시느냐?”

“이공자님과 함께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식사를 하신다고…….”

“알았다. 이만 가 보거라.”

“예.”

태경은 대놓고 눈살을 찌푸렸다.

“속도 좋군. 그런 면에서는 연화 아가씨보다 더한 것 같아.”

* * *

그날 밤.

자정이 넘은 시각, 태경의 거처에 연호정이 찾아왔다.

“오셨습니까?”

“음.”

“땀을 많이 흘리셨군요.”

“어떻게 성장한 무공인데. 시간 날 때마다 수련을 해야지 않겠소?”

다른 건 몰라도 저 독기만큼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태경 역시 몇 번이나 연호정의 수련을 본 적이 있었다. 한 번도 그런 식으로 단련해 본 적은 없지만, 언뜻 봐도 독하지 않으면 소화해 내기 힘든 수련이란 건 알 수 있었다.

사람이 왜 이리 달라졌나 싶었건만, 어제부로 이해가 되었다.

‘가주가 되고 싶어 안달이 났군. 하긴, 그럴 만도 하지.’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동생의 재능 때문에 망가질 대로 망가졌던 인생이다. 어떤 기연을 얻었는지 모르겠지만, 기회를 얻었으면 마땅히 인생을 걸어야 옳다.

다름 아닌 판관검의 핏줄이니, 한없이 못나기도 힘들 테지.

“용정(龍井)입니다. 향이 좋지요?”

“허! 용정이라니? 이 귀한 것을 어디서 구했소?”

“하하! 그간 모은 돈으로 어떻게 구해 봤습니다. 가주님께 드릴 생각이었거든요.”

가주에게 줄 차를 당신에게 준다.

말하자면 신뢰의 표시다. 연호정이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내, 예전부터 그대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지.”

“하하하! 과분한 평가십니다. 저는 일개 서생에 불과한 것을요.”

“한 가문을 좌지우지하는 사람더러 일개 서생이라니?”

뼈가 있는 말이지만, 태경은 연호정의 목소리에 깃든 의미심장함을 읽지 못했다.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저도 중한 일을 해 볼 생각입니다. 대공자님 곁에서 말이지요.”

“드디어 결단을 내리셨구먼?”

“하하!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나도 잘 부탁하네.”

쪼르르륵.

태경의 눈빛이 바뀌었다.

찻잔을 쥔 연호정이 용정차를 바닥에 쏟아붓고 있었다.

“잡스러운 승냥이 떼를 때려잡을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벌렁벌렁하지 뭔가? 자네가 큰 역할을 해 줬으면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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