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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47화 (47/963)

47화. 바람이 불어오다 (2)

파파파팡!

힘차게 쥔 주먹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연달아 터트렸다.

내공 없는 권법 수련이 아니었다. 강인한 내력이 깃든 주먹은 그 자체로 흉기나 다를 바 없었다. 절정고수의 권법, 일권에 통나무를 뚫고 바위를 깨부술 위력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무자비한 권법 수련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탄력을 받는 듯, 권속(拳速)이 더욱 빨라졌다.

티이잉!

한참 권법 수련을 하던 연호정이 땅에 떨어진 창을 발치에 걸어 올렸다.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창을 쥔 그가 무서운 기세로 창을 휘둘렀다.

퍼퍼펑!

장창이 불을 뿜었다.

창은 중병이며 장병이다. 강인한 일격을 뻗기는 쉬워도 연환기(連環技)를 펼치기는 힘든 것이다.

그러나 연호정의 창술은 달랐다. 뭘 어떻게 휘둘렀는지 폭발적인 일격을 수도 없이 몰아치는데, 공격과 공격 사이의 간격이 몹시 좁았다.

그렇게 한참이나 창을 휘두르던 연호정이 창대를 거꾸로 쥐곤 그대로 날려 버렸다.

퍼어어억!

창이 굵은 통나무를 관통하고 땅에 박혔다.

무시무시한 위력이었다.

“허억, 허억.”

호흡이 망가질 정도로 격한 수련이었다.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던 연호정의 몸에 진한 청색 기운이 아른거렸다.

가팔랐던 호흡이 금세 정상으로 돌아왔다. 진기로 산소 공급을 용이하게 했다 해도 지나치게 빠른 속도였다.

“후우.”

평평한 바닥에 주저앉은 연호정.

그런 그에게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련은 끝났느냐?”

연호정이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아버지가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오셨습니까?”

“수련이라기보다는 분풀이에 가까워 보인다.”

“…….”

“흐트러진 호흡을 그리 빨리 정상으로 만드는 건 몹시 어렵지. 극단적인 신체 단련이 효과가 있는 것 같다.”

“그렇군요.”

달빛 좋은 밤이었다.

환한 월광이 쏟아지는 밤, 연위는 연호정의 옆에 가서 앉았다.

“이제 어엿한 고수로구나. 절정고수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겠어.”

“감사합니다.”

목소리에 진심이 담기지 않았다. 고작 이 정도로 기뻐하기엔 다가올 미래가 지나치게 끔찍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위는 아들의 경지에 순수한 놀라움을 표했다.

열아홉 나이에 가문의 무력 조직 수장보다도 높은 경지.

제아무리 수준 높은 무공을 익혔대도 불가해(不可解)한 성장 속도였다. 당대 칠대세가의 후기지수 중 연호정과 같은 연배에 이만한 무공을 쌓은 이가 존재하기나 할까.

소림(少林)이나 무당(武當), 화산(華山)을 제외하면 구파일방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반년 전의 실력을 생각하면, 성장 속도만큼은 무림사(武林史)를 뒤져도 찾기 힘들다.

그런 놀라운 위업을 달성했음에도 아들은 만족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정도로는 한참 멀었다는 기색이었다.

자신이 이룩한 경지가, 성장이, 실력이 얼마나 뛰어난 건지 모르지 않을 것임에도.

연위가 지나가는 어조로 말했다.

“심란한 일이라도 있는 것이냐?”

연호정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 일은 없다고, 단순한 수련의 일환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기분에 아버지께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과하더구나.”

“예?”

“네 살기 말이다.”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느끼셨습니까.”

“그조차 느끼지 못해서야 어디 연가의 가주라 하겠느냐.”

연호정은 끊임없이 살기를 조절하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살기를 흘릴지언정, 무차별로 발산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연위는 연위였다. 가주실에서 객당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면 기감의 예민함이 상상을 초월했다.

“널 그리도 화나게 하는 것이 대체 무엇이냐?”

연호정이 연위를 바라보았다.

달빛을 받은 연위의 얼굴은 평소와 달리 조금은 인자해 보였다.

순간 연호정은 울컥했다.

‘본가를 노리는 놈들이 있습니다.’

말하고 싶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모든 사실을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버지는 타인에게 무관심한 듯하면서도 일거수일투족을 살필 만큼 섬세하다. 어떻게 알았는지부터 왜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는지, 진정 그게 사실인지 다 알아보려 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럴 순 없다. 역사대로라면 명가의 습격은 일 년이 채 남지 않았다. 어쩌면 더 빨라질지도 모른다.

“그저 답답해서 그럽니다.”

“무엇이?”

“여러모로요.”

연위는 잠시 침묵했다.

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아들을 보니, 굳이 꺼낼 필요가 없는 말 같았다.

연위가 품에서 서책 하나를 꺼내 연호정에게 전해 주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받아라.”

서책 겉면에는 아무런 글자도 쓰여 있지 않았다.

호기심에 책을 펼쳐 본 연호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연위가 말했다.

“필사본(筆寫本)이다. 다 익히면 태워 없애 버리도록 하거라.”

“이것을 어찌 저에게……?”

“네 무공을 보며, 너에게 무엇이 부족한 건지를 생각해 보았다.”

자신의 무공을 생각해 주셨단다. 절대 그럴 것 같지 않은 분이 그랬다고 하니, 마음이 묘했다.

“네 무공은 후속타를 상정하지 않는 일격필살이다. 적어도 기세는 그렇지. 단련의 여지는 남아 있다만, 네 강인한 체력은 그 폭발적인 공격력을 만들어 주는 자양분이 되었다.”

“…….”

“하지만 보아라. 조금 전 너의 호흡은 심하게 망가져 버렸다. 이유인즉, 네가 펼치는 무공들이 워낙 체력 소모가 심하기 때문이야.”

“그렇습니다.”

“앞으로 훨씬 더 나아지겠지. 하지만 나아지기까지가 문제다. 그렇다고 회피에 능한 보법을 건네주자니, 네 성향상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 같더구나.”

제대로 보았다.

연호정은 필요하다면 도주, 은폐, 회피 등 무엇이라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면, 어떻게든 몰아붙여 적을 쓰러트리려 했다.

성향 자체가 물러섬이 없다는 말이다. 죽임을 당하기 전에 죽여 생존을 도모하는 전장의 무공, 그것이 연호정의 무공이었다.

“그래서 그걸 준비했다.”

연호정이 첫 장에 쓰인 세 글자를 바라보았다.

반룡장(反龍掌).

보름 전, 아버지와 비무할 때 아버지께서 쓰셨던 반격형 무공이었다. 일타의 위력도 대단하지만 반격 시에 진가를 드러내는 연가의 주력 무공 중 하나였다.

“강호는 무섭다. 상대의 상태를 봐주면서 싸우지 않아.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만, 일류도 삼류의 칼에 죽을 수 있는 곳이 무림 아니더냐.”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알고 계셨습니까?”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몰랐다. 방금까지는.”

“…….”

“언제 전해 줄까 고민하고 있었다. 조금 늦은 듯하지만 너의 오성이라면 이른 시일 내에 실전에 쓸 수 있을 것이다.”

비급을 쥔 연호정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기실, 연위의 걱정은 기우였다. 연호정에게는 사신무가 있기 때문이다.

현무가 완전한 방어를 담당하고, 백호가 물러섬이 없는 공격을 담당한다면 청룡(靑龍)은 회피와 반격을 담당한다.

현무는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면 크게 쓸 일이 없지만, 청룡은 아니었다. 청룡의 기예는 연호정의 극단적인 성향을 탄탄하게 보조해 주는 쓰임새 많은 무공이었다.

‘…….’

그러나, 사신무가 제아무리 뛰어난 절학이라 한들 아버지가 건네주신 마음보다 귀할까.

“감사히 받겠습니다.”

연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 떠날 생각이냐?”

그렇다.

연호정은 가문을 나설 생각이었다.

가문에만 있다가는 명가의 침공을 막기 힘들다. 무엇이든 직접 보고 확인한 연후에 싸우는 것, 그것이 연호정이 살아오며 체득한 싸움의 방법이었다.

“별일 없다면 내일 떠날 생각입니다.”

“내일…… 내일이라.”

연위가 눈을 감았다.

아버지께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연호정은 알지 못했다.

잠시 후, 연위가 말했다.

“따라오너라.”

* * *

연위는 뜻밖에도 연호정을 가문 밖으로 데려나갔다.

저잣거리는 잠잠했다.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이니 당연했다. 늦은 시간까지 술을 파는 주루 몇 곳을 제외하곤 어둡기만 했다.

고양루를 돌아 강에서 제법 떨어진 곳으로 향한 부자가 도착한 곳은 작은 대장간이었다.

땅! 땅! 땅!

자정이 넘은 시간인데도 망치를 두들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오 장 거리나 떨어져 있음에도 전해지는 열기가 대단했다.

연위가 입을 열었다.

“편 노인. 나, 연위요.”

팅!

망치 소리가 멈추었다.

잠시 후, 대장간에서 허연 수염을 기른 노인이 걸어 나왔다.

키는 작지만 체구가 몹시 단단했다.

추운 날씨임에도 웃통을 벗고 있었다. 덕분에 굴강한 어깨와 굵직한 흉통이 전부 드러났다.

“오셨는가?”

까랑까랑한 음성에 사나운 말투를 예상했는데, 뜻밖에도 차분한 목소리였다.

“늦은 시간에 와서 죄송하오.”

“죄송할 게 뭐가 있누. 그나저나, 옆에 그 젊은이는?”

“내 큰아들이오.”

연위가 연호정에게 말했다.

“인사드리거라. 편일강(便一鋼) 신공(神工)이시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연호정이 절도 있게 포권했다.

“연호정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노인이 미소를 지었다. 평생 불과 철을 다루면서 살았음에도 표정은 봄바람처럼 따뜻했다.

“누가 자네 아들 아니랄까 봐 눈빛이 아주 매섭군. 젊은 시절 자네를 보는 듯하네.”

“내가 그랬소?”

“베일까 무서워 가까이 다가가기도 힘들었더랬지. 그래도 자네는 아들에 비하면 양반이야. 자네가 보검이었다면, 아들은 신검(神劍)일세. 날이 바짝 서 있구먼.”

연위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편일강은 뜻밖이라는 듯 연위를 보았다. 그는 지금껏 연위가 미소 비슷한 표정을 짓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자네도 나이가 들긴 들었나 보이.”

“그런 모양이오.”

편일강이 연호정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한데 신기하구먼. 눈빛은 판박이인데 분위기는 판이해. 자네 아들인데도 정(靜)적이지가 않네.”

“…….”

“검은 아니고, 도끼인가?”

연호정의 눈이 번쩍였다.

편일강은 무인이 아니다. 내공은 익혔지만, 그것은 양생술 정도에 불과할 뿐이었다. 한데도 한눈에 연호정의 주력 병기를 알아보았다.

‘대단하구나.’

무슨 일이든 장인의 경지에 오르면 세상을 보는 안목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좋은 장인은 무인의 벗이다. 한눈에 연호정의 기질을 알아본 것만으로도 편일강의 실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면 보름 전에 주문했던 것이?”

“그렇소.”

“허허, 오늘 의외의 모습을 많이 보는군. 마땅히 가문을 이어야 할 장자에게 검을 쥐여 주지 않았단 말인가?”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해서, 아직 멀었소?”

“그럴 리가. 이틀 전에 다 끝났네. 새로 만든 것도 아니고, 기존의 것을 손만 본 정도니까.”

“주시오.”

“기다리게.”

잠시 후, 편일강이 한 자루 병기를 들고 왔다.

병기를 본 연호정의 눈이 커졌다.

“무겁긴 무겁구먼. 이런 걸 쥐고 휘두른단 말이지? 어린 나이에 굉장한 무공을 쌓은 모양이야.”

쿵!

대지로 전달되는 울림이 굉장했다.

그것은 한 자루의 도끼였다. 도끼는 도낀데, 그 크기가 엄청났다.

육 척 길이의 굵은 창대에, 성인 남성 상체만 한 도끼날을 달아 놓은 전부(戰斧)였다. 생전에 연호정이 썼던 도끼와 거의 유사한 모양새요, 크기였다.

연위가 말했다.

“잡아 보아라.”

연호정이 홀린 듯 창대를 잡아 들었다.

팔 전체로 전달되는 무게가 굉장했다.

‘무겁다. 무겁지만…….’

손에 휘감기는 느낌이 아주 좋았다. 일치감이라고 해야 할까? 쥐고 휘두르기에 더할 나위 없었다.

연호정이 연위를 바라보았다.

“대저 중병(重兵)은 여느 도검(刀劍)보다 다루는 이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네 무공이 지나치게 극단적이니, 반드시 써야 할 순간이 아니면 휘두르지 말거라.”

연위가 편일강에게 목례했다.

“고생하셨소.”

“허허, 고생이랄 것도 없네. 아들 선물인 줄 알았다면 검수라도 한 번 더 했을 것을.”

연호정이 떨리는 눈으로 연위를 바라보았다.

연위가 몸을 돌렸다.

“가자.”

먼저 걸어가는 연위의 뒷모습을 보던 연호정이 편일강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편일강이 웃으며 말했다.

“아주 튼튼한 놈이니 어지간해선 망가질 일도 없을 걸세. 부디 잘 쓰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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