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46화 (46/963)

46화. 바람이 불어오다 (1)

“꺼어어억!”

거하게 트림을 하는데 입에서 영혼이라도 빠져나오는 것 같았다.

“와, 배불러! 이러다 죽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퍼먹었네.”

연지평이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아, 안 죽은 게 용한데요?”

“음? 으허허허! 이공자께서는 나를 너무 과소평가하셨구먼? 무릇 거지의 위장이란 범인(凡人)의 그것을 아득히 초월하기 마련이오. 그나마 양이 줄어서 이 정도지, 소싯적에는 돼지고기 열두 근도 너끈히 먹었소.”

연지평의 체중을 근수로 환산하면 백 근 안팎이었다. 가득상은 연지평 체중의 일 할이 넘는 양을 먹었다는 것이었다.

연지평은 몸서리를 쳤다. 사람이 밥 먹는 걸로 소름이 끼치기도 쉽지 않았다.

연호정이 손가락으로 밥그릇을 가리켰다.

“밥풀 세 개 남겼소.”

“이건 성의요, 성의.”

“싹 비우시오.”

가득상이 입맛을 다셨다.

“빡빡하시기는.”

그는 남은 밥풀까지 날름 입에 넣었다. 그렇게 배가 부른 와중에도 밥풀 하나하나를 음미하면서 먹는 게 신기했다.

“차도 드시겠소?”

“거지한테 무슨 차요. 술이라면 몰라도.”

“대낮이오만.”

“술 마시는데 밤낮을 가리시오? 성격 독특한데?”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가득상이 능글맞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이공자께서도 제법 술을 하시더구먼?”

넌더리가 난 듯 연지평이 손을 저었다.

“다음 날 얼마나 고생했는데요. 마실 때는 좋은데 마시고 나서가 문제던데요?”

“음하하하! 숙취마저 즐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주도(酒道)가 아니겠소. 이공자께서는 이제 막 첫발을 내디디신 거요.”

“그, 그런가요?”

연호정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애한테 이상한 거 가르치지 마시오.”

“이상한 거라니? 이게 왜 이상한 거야? 거 말씀 섭섭하게 하시네.”

“됐소.”

연호정이 연지평에게 말했다.

“밖에 술 좀 내어 달라고 전해 주거라. 그리고 자리 좀 비워 줬으면 한다.”

“아, 물론이죠!”

연지평은 눈치가 빨랐다. 가득상이 왔을 때부터 그가 형에게 볼일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객방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

가득상이 과장되게 주변을 훑었다.

“그나저나 가문 분위기가 상당히 싸하구먼?”

“원래 딱딱하오. 재미는 없지.”

“뭐, 연가의 가법이 무진장 살벌하다는 건 워낙 유명하니깐.”

“그렇게 유명했소?”

“거지들한테는 유명하오. 다른 가문은 모를 수도 있지.”

개방만 아는 사실이란 말이었다. 백도 정보계를 쥐고 흔드는 곳이니 이상할 건 없었다.

“근래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소? 아무리 그래도 좀 심하던데?”

“별일 없었소.”

“별일 없는데도 분위기가 이렇소? 댁 지나가니깐 다들 허리를 반으로 접던데?”

“본가 사람들이 예의 하나는 중원제일이오.”

“표정을 보니 두려워하는 기색이 생생하더구먼. 뭐 귀신 지나가는 줄 알았소이다.”

“보다시피 내가 인간이 덜됐소.”

가득상은 피식 웃어 버렸다.

“이해하시오. 하는 일이 이렇다 보니 파고드는 걸 좋아하오.”

“이해하오.”

잠시 후, 술상이 차려졌다.

확실히 가득상은 괴물이었다. 술도 따르기 전에 안주를 맛보는데, 방금까지 배부르다고 한 사람이라곤 생각하기 힘들었다.

연호정이 술병을 들었다.

“한잔 받으시오.”

“어? 뭐 하러 잔에다 받소? 그냥 그거 나 주시오.”

“…….”

가득상은 술병 하나를 잡고 수통처럼 한 모금씩 마셔 댔다.

“캬! 술 좋다! 여아홍보다 좋은 것 같은데, 이거? 오, 목이 후끈후끈해!”

“독하니까 천천히 자시오.”

“그럽시다. 할 얘기도 많으니까.”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가득상은 그 심연과도 같은 안광을 보며 생각했다.

‘역시 이 사람은…….’

달라.

가득상은 후개로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을 만나 보았다. 그중 무림을 좌우하는 거물들이 태반이었다.

신기한 것이, 연호정의 눈빛은 그 무림의 거물들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깊다는 것이다. 성품이나 무공 때문이 아니라 사람 자체가 깊었다.

‘정말이지 알 수가 없다니까.’

가득상은 몰래 연호정에 대해 알아보았다.

하지만 건질 만한 게 하나도 없었다. 연호정의 지난 생에는 특기할 만한 사항이 존재하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엄한 아버지에게 길러진 아들. 동생의 재능에 절망하여 엇나가 버린 장자.

어디서나 흔히 접할 수 있는 과거였다. 실은 그가 강호의 비밀 조직에 속해 있다든지, 가문에서 일부러 악소문을 냈다는 등의 얘기도 전혀 없었다.

말 그대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 같았다. 연호정의 변화는 너무나도 갑작스러웠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물었소?”

“음? 아, 아니오! 그냥 잘생겼다 싶어서 말이오.”

“싱겁긴.”

“싱겁다니? 거 우수 어린 눈빛만으로 천하의 온갖 처자들 방심을 휘어잡겠구먼.”

“됐고,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클클, 그럽시다.”

가득상이 깍지 낀 손을 탁자 위에 두었다.

“일단 첫 번째 부탁에 관해서 말하겠소.”

“그러시오.”

“현재 새외 무림은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소. 딱히 특기할 만한 사항이랄 것도 없지. 서장의 소뇌음사(小雷音寺)가 슬슬 봉문(封門)을 푼다고 하던데, 중원에 별 위협은 안 될 것 같소이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다른 건 없었소? 민생을 어지럽히는 사교(邪敎) 무리가 준동했다든지.”

“사교 무리? 옛날에 망한 마교(魔敎) 같은 놈들 말요?”

“뭐든.”

“그런 정황은 없었소. 어떤 의미로는 지나치게 별일이 없어서 도리어 이상할 정도요. 하긴, 잠잠해졌으니 소뇌음사 그 요상한 놈들이 이때다 싶어서 봉문을 푸는 거겠지만.”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이란 거군.’

개방의 눈은 중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만일 사소한 낌새라도 있었다면 가득상이 몰랐을 리 없다.

“바로 두 번째로 넘어갑시다.”

“좋소. 두 번째 부탁, 모용우(慕容羽)의 위치에 대해서였지?”

“그렇소.”

“전에 말했듯, 그 양반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거야 어려운 일은 아니외다.”

“말해 주시오.”

“다만 묻고 싶은 게 있소.”

가득상의 눈이 반짝였다.

“연가의 대공자가, 어찌하여 모용가주의 막냇동생을 찾는 거요?”

모용우.

당대 모용세가의 가주 모용군의 배다른 형제였다.

그것도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형제였다. 현재 모용군의 나이는 오십에 가까웠지만, 모용우는 스물아홉에 불과했다.

연호정보다 정확히 열 살이 많은 나이였다.

“나중에 말해 주겠소.”

“흠. 나중에 말해 주겠다는 뜻은, 알아서 알게 될 거란 뜻인가?”

“그럴 거요.”

가득상은 매서운 눈으로 연호정의 표정을 살폈다.

‘모르겠군.’

연호정의 표정은 무심함 그 자체였다. 뭔가를 읽으려 해도 읽을 수가 없었다.

‘저 나이에 저게 가능한가.’

눈빛, 입가의 움직임, 손짓, 자세 등등.

상대의 속내를 알아보는 방법은 많다. 하지만 연호정에겐 읽어 낼 수 있는 게 전혀 없었다.

“좋소.”

가득상이 품에서 서신을 꺼냈다. 누더기나 다름없는 옷을 입은 주제에 서신은 깨끗하고 깔끔했다.

“여기 있소.”

연호정이 서신을 받아 펼쳤다.

그의 눈이 빛났다.

“절강성?”

“강소성 바로 옆이오. 옆 동네에 있소이다.”

“해상 무역이라.”

“그렇소. 모용우는 모용세가의 절강 지부를 맡고 있으며, 지부를 통해 해상 무역을 담당하고 있소. 놀랍게도 말이오, 그 해상 무역으로 얻는 자금이 모용세가 전체 자금의 일 할을 담당한다고 하더이다.”

모용세가 정도 되는 거대 조직이 보유한 자금력의 일 할을 담당한다?

그야말로 대단한 수완이었다. 홀로 가문 전체 자금의 일 할을 벌어들이고 있다는 건 보통 상재(商材)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모용우를 조사하면서 개인적으로 많이 놀랐소. 가문에서 쉬쉬하고 있었지만, 이 모용우란 양반 보통이 아니더이다. 무재(武才)는 가주 모용군에 필적할 만하고, 특히나 덕(德)과 인품이 뛰어나 가주지재(家主至材)라 해도 부족함이 없더군.”

당연히 그렇겠지.

연호정은 모용우가 죽기 전날 밤을 기억했다. 부디 형님을 부탁한다며, 흑도의 주인에게 절까지 올린 그의 깊은 속내를 떠올렸다.

자신에게 위협이 된다는 명목으로 동생을 내쳤음에도, 동생은 형의 안위를 걱정했다. 넘치는 재능을 갖고도 항상 겸손할 줄 아는 대인(大人)이 그였다.

‘……우리와 닮았어.’

그것은 마치, 연호정과 연지평의 관계를 떠올리게 했다.

만일 자신에게도 재능이 있었다면 철저하게 연지평을 내쳤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모용군은 자신과 닮았다.

‘그렇기 때문에 모용우가 필요하다. 놈들을 막으려면 모용우가 아니어선 안 돼.’

연호정은 자신의 그릇을 잘 알고 있었다.

흑제성주가 될 수 있었던 건, 그만큼 흑도 무리가 정제되지 않은 폭력에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도 무림은 다르다.

‘나는 그림자이자 방패이며 창임과 동시에 설계자가 되어야 한다. 나 스스로 군주가 되어선 안 돼. 그럴 수도 없겠지만.’

가득상이 한숨을 쉬었다.

“모용가주는 무서운 사람이오. 권력 보존을 위해 혈육마저도 내치는 사람은 많지 않지.”

과연 그럴까?

연호정은 권력을 위해 부모 형제는 물론 친자식까지 베어 버리는 사람을 수도 없이 봐 왔다. 모용군도 정상은 아니지만, 세상엔 모용군보다도 지독한 사람이 넘쳐났다.

“어쨌든, 이렇게 두 번째 부탁까지는 완료되었소.”

“고생하셨소.”

“고생은 무슨. 덕분에 나도 몰랐던 사실을 많이 알게 됐는걸. 자, 그럼 이제 세 번째 부탁에 관한 건데…….”

가득상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말해 줄지 모르겠지만, 이번에도 질문 하나 해 봅시다.”

“…….”

“어떻게 알았소?”

“무엇이 말이오?”

“천하제일가, 구주명가가 아무도 모르게 사검(死劍)을 키우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냔 말이오.”

순간 연호정이 살기 가득한 안광을 뿜었다.

‘진짜였군.’

그렇다.

명호림과 손속을 나눈 후, 습격자들의 무공이 구주명가의 것임을 확신했다.

그것만으로 명가가 흉수라고 볼 수는 없었다. 누군가가 명가의 무공을 빼돌려 개조한 후 익혔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가득상의 말을 듣고, 이제야 진짜 확신이 들었다.

‘흉수가 명가였어.’

부르르르르.

술상이 은은하게 떨려 왔다.

연호정의 몸에서 푸른 기운이 일렁였다. 예전과는 비교 자체를 불허하는 벽라진기였다. 그 진기에 살기가 실리니 객방 안의 온도가 급전직하했다.

‘네놈들이 감히 내 아비를 죽이고 형제를 묻었으며, 연가의 터전을 불살랐단 말이지?!’

하늘을 보며 탄식하는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활짝 웃으며 자신을 믿는다는 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폭풍 같은 기세로 적들과 난전을 벌이는, 피범벅이 된 아버지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복면을 쓴 괴인의 손에 등뼈가 부러지는 동생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화아아아악!

넘실거리던 기운이 점차 불꽃처럼 격렬해졌다.

객방 안의 분위기가 생지옥처럼 변했다. 가득상의 얼굴이 대번에 창백해졌다.

“연 공자!”

“으드득.”

“연 공자! 야, 이놈 새끼야! 심장 떨어진다아아!!”

깜짝 놀란 연호정이 살기를 다스렸다.

후우우우웅.

세상을 뒤집어엎을 듯 끔찍한 살기를 발하던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가득상은 가슴에 손을 올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이 양반이 누구 죽일 일 있나? 이 사람아! 살기 좀 제대로 다스려! 나나 되니까 멀쩡하지, 무공 좀 약한 사람이었으면 피까지 토했겠다!”

빈말이 아니었다.

연호정의 영력(靈力)은 흑암제의 그것이다. 지고의 경지에 오른 고수의 살기는 그 자체로 치명적인 위력을 발한다.

“미안하오. 못난 모습을 보였소.”

“이거 뭐 무서워서 말이나 제대로 하겠어? 사람들 다 놀란 거 아니야?”

가득상이 창밖을 두리번거렸다.

천만다행히도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평온했다. 살기가 방 밖으로까지 흘러나가진 않은 것이다.

“어휴, 맹수랑 한방에 있는 것 같구먼. 지릴 뻔했네. 어? 조금 지렸나?”

“면목 없소.”

“됐어! 앞으로는 조심 좀 하쇼!”

“알겠소.”

가득상이 숨을 몰아쉬었다.

“그나저나, 그게 그렇게 화를 낼 일이오? 명가가 암중에 전력을 키운다는 사실이? 구주명가 정도 되는 무가가 아무도 모르게 무인을 양성하는 건, 크게 어색한 일은 아닌데?”

“놈들이 그 전력으로 무슨 짓을 저지르는가가 문제겠지.”

“짓?”

“후개 양반.”

“응?”

“부탁 하나 더 합시다.”

“……시벌, 의뢰비나 주든가. 뭐요, 또?”

연호정이 차갑게 말했다.

“이번 부탁은, 도의에 어긋날 수 있소.”

전쟁의 북소리가 울리면 법은 침묵한다.

연호정은 법도와 규율을 잠시 벗어던질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