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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44화 (44/963)

44화. 규율의 허점 (4)

강윤의 얼굴이 붉어졌다.

“저를 대주 자리에서 끌어내겠다는 뜻입니까?”

“다행으로 생각해야지?”

연호정이 주먹을 들어 올렸다.

우우우우웅.

그의 주먹에서 강렬한 진기가 피어올랐다.

재차 입을 열려던 강윤은 순간 깜짝 놀랐다.

‘이럴 수가?!’

연호정의 주먹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실로 대단했다. 얼마나 대단하냐면, 비응대주인 자신의 내공을 훌쩍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마음 같아선 팔다리를 분질러 쫓아내고 싶지만, 주먹질도 그만한 가치가 있는 놈에게 하는 법이다.”

“……!”

“너 같은 놈한테는 주먹질도 아까워.”

연호정이 유지하를 돌아보았다.

유지하가 화들짝 놀랐다.

“내 말이 말 같지 않나?”

“죄, 죄송합니다!”

연호정의 눈빛은 엄청나게 살벌했다. 유지하의 발이 저절로 움직였다.

강윤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일을 크게 만드시는군요.”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지 마라. 너 같은 놈 때문에 커질 일이 아니야. 나는 너보다, 너를 그 자리에 앉히고도 안심한 윗사람들이 더 이해가 안 간다.”

연호정이 싸늘하게 웃었다.

“네가 그렇게 죽고 못 사는 법도대로 처리하려고 하는 거야. 입 다물고 대기나 하고 있어.”

“……아무리 대공자님이라도 저를 대주 자리에서 내려오게 하진 못합니다.”

“그래서 바로 쳐 죽이지 않고 법인각주를 불렀잖아? 그리고 말했지? 대기나 하라고. 할 말은 다 한 것 같은데 더는 주절거릴 필요 없다고 봐.”

강윤이 입술을 깨물었다.

“저는 연가를 위했을 뿐입니다!”

“나도 본가를 위해서 널 파직시키려는 거다.”

“작은 조직이 모여 큰 조직을 이루는 법입니다! 조직은 법과 규율로 다스리지 않으면 흩어지기 마련! 완성도 있는 조직력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희생은 감수해야 하는 게 이치입니다!”

“쓰레기 같은 놈.”

“뭐,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 희생을, 부대원의 귀감이 되어야 할 너는 왜 안 지고 사는 거냐?”

“……!!”

“넌 스스로에겐 유연하면서 남에게만 가혹한 전형적인 소인배다. 너 같은 놈이 대주직을 맡고 있으니 비응대의 성적이 그렇게 지지부진한 거야.”

연호정이 고개를 돌렸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가 보는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연호정은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어차피 법인각주를 부른 이상, 아버지한테도 얘기가 들어갈 겁니다. 이만 모습을 드러내십시오.”

그때였다.

스르르륵.

강윤과 비응 삼 조가 깜짝 놀랐다.

어느새 대연무장 무기 창고 옆, 그늘진 곳에서 한 명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큰 키에 탄탄한 체격. 그러나 눈을 제외한 부분이 전부 가려지는 복면을 써서 생김새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눈매를 봤을 때, 얼추 마흔 언저리로 보였다.

사내가 입을 열었다.

“알고 계셨소?”

“몰랐습니다. 하지만 조금 전에 아주 잠깐 기(氣)가 흔들리더군요.”

“대단하오.”

“별거 아닙니다.”

연호정이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왕전입니까?”

“그렇소.”

강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왕전이라면 가주인 연위의 최측근 호위무사를 뜻함이었다. 대대로 연가주의 호위를 담당하는 자를, 사람들은 호군(護君)이라 불렀더랬다.

왕전이 바로 당대 호군이었다. 그의 실력은 가주인 연위를 제외하곤 가내 최고라 할 만했다.

“하실 말씀이라도?”

왕전이 고개를 저었다.

대공자의 말에도 고개만 젓고 만다. 예법에 어긋나 보이지만, 호군은 그래도 된다. 오직 가주의 명만을 듣는 특별한 자가 호군이었다.

“가서 아버지께 전해 주십시오. 오늘 일 좀 치를 것 같다고.”

말없이 연호정을 주시하던 왕전이 말했다.

“궁금한 게 있소.”

“말씀하십시오.”

“만일 법인각주가 비응대주의 죄를 묻지 않는다면 어쩔 생각이오?”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연호정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강 대주를 납치해서 다시는 사람 구실 못 하게 만드는 수밖에.”

왕전의 눈에 기광이 떠올랐다.

강윤 역시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연호정을 보았다.

“마음 같아선 법인각주고 나발이고 다 뒤집어엎어 버리고 싶지만, 나는 가주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런 멍청한 놈들 때문에 가문에 실망하는 것도 사람 된 도리는 아니잖습니까?”

“…….”

“대답이 되었습니까?”

왕전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호정이 손으로 비응 삼 조를 가리켰다.

“아버지더러 근처에 의방 좀 알아봐 달라고도 부탁해 주십시오. 애들 상태가 말이 아닙니다.”

“알고 계셨소?”

“오늘에서야 알았습니다. 저 역시 지나치게 무관심했으니, 제 책임도 큽니다.”

왕전의 눈빛이 묘해졌다.

가만히 연호정을 주시하던 왕전이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다.

“비응대주는 중벌을 받게 될 것이오.”

강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연가 최고의 고수 중 하나라는 호군이 직접 한 말이다. 막연하게 느꼈던 위기감이 이제야 피부로 와닿고 있었다.

“대체…… 대체 왜?!”

“아직도 모르겠나?”

연호정이 비응 삼 조의 조원들을 보며 말했다.

“너의 획일화된 훈련으로 조원들의 골육이 심하게 상했다.”

“뭐, 뭐라고?!”

“그런 것도 모르고 있었으면서 조직이니, 부대니 떠들어 댄 거냐?”

강윤이 당황하여 비응 삼 조를 보았다.

그들은 입술을 깨물곤 강윤의 시선을 외면했다.

“네가 무능력하다는 뜻이 바로 거기에 있다. 네놈이 부대 훈련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만, 대원들의 혈맥은 정상이 아니야. 다친 후 제대로 치료조차 받지 못한 채 훈련에 들어간 것이다.”

“……!”

“부대원 개개인의 몸 상태도 파악하지 못하는 너 따위가 무슨 대주냐?”

강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고대 삼국 시대에도 부대 전력 유지를 위해 다친 병사는 훈련에 참여시키지 않았다. 한데 그는 부대원 개개인의 성향과 건강에 지나치게 무신경했던 것이다.

그런 주제에, 잘 시간에 수련한 것을 두고 명령 불복종이란 명목하에 고문에 가까운 벌을 내렸다.

대주 실격이었다.

잠시 후, 법인각주가 대연무장에 도착했다.

“대공자님?!”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올 사람들이 아직 많습니다.”

“그, 그게 무슨 말이오?”

연호정이 강윤을 쏘아보았다.

강윤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퍼렇게 질려 있었다.

“연대 책임 좋아하지?”

그날, 연무장엔 연가를 이루는 거의 모든 부대와 조직이 모여들었다.

연호정은 그날 강윤의 무능력함을 모두가 듣는 자리에서 알렸다.

강윤도 사람이었다. 애초에 그 자신도 자신의 부대 운영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걸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다만 자신만 편한 길을 택했을 뿐.

그 사실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낱낱이 퍼트리니, 제아무리 철면피라도 버틸 수가 없었다. 강윤은 결국 법인각주의 싸늘한 눈초리를 받곤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연호정은 강윤의 잘못만을 탓하지 않았다.

강윤을 가르친 자, 강윤과 함께 배웠던 이들을 모조리 불러냈다. 그러고는 그들 조직 하나하나에, 비응대와 같은 일이 없었는지 면밀하게 조사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오히려 비응대보다 더 막장인 조직들이 무려 세 곳이나 발각되었다. 심지어 그중 한 조직에선 사소한 일로 부대원을 죽여 묻어 버린 곳도 있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사태였다. 부대원 전체가 그 사실을 묻기 위해 입을 다물고 있었으니, 실종 처리로 무마될 수 있었던 것이다.

법인각주도, 뒤늦게 상황을 들은 연위도 가내에 이런 일이 생겼을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후 닷새가 넘도록 연가의 분위기는 터지기 직전의 폭탄처럼 살벌했다.

악행에 가담한 자, 부정부패를 저지른 자, 암암리에 그것을 도운 자들이 모조리 색출되었다. 그들은 연가의 법도대로 철저하게 벌을 받았다.

강윤도 마찬가지였다.

강윤의 죄는 기실 중범죄라 할 만한 건 아니었다. 다만 부대 운영이 미숙했고, 부대원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것, 즉 무능과 불통 문제가 컸다.

그러나 그가 했던 발언은 더 큰 문제였다.

왕전이 전했는지, 비응 삼 조의 조원들이 전한 건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법인각은 강윤의 무능력보다 대공자에게 보인 언행을 훨씬 큰 문제로 보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다. 강윤의 언행은 실상 하극상이나 진배없었다.

연가의 법도는 지엄하다. 한 조직의 장에게 그만한 권한을 주는 만큼, 큰 책임을 져야 했다.

비응대주씩이나 되는 자가 가문의 대공자에게 하극상을 저질렀으니, 이는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법인각은 강윤의 내공을 전폐하고 뇌옥 십 년 형을 선고했다.

과하다면 과한 형이었다. 그만큼 법인각에서도 이번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게 죄를 지은 자들을 향한 연가의 냉정한 철퇴가 휘둘러졌다.

* * *

“정녕 과하다고 생각하느냐?”

“예.”

“듣기로 법인각주가 전(前) 비응대주에게 제대로 된 죄를 묻지 않을 경우, 너 스스로 그를 치죄하겠다고 말했다지?”

“그렇습니다.”

“하면 왜 지금의 형이 과하다는 것이냐?”

“법인각주가 강윤에게 죄를 묻지 않았다면, 이는 본가 자체가 썩었다는 뜻입니다. 굳이 강윤이 아니라 법인각주부터 모조리 때려잡아야 할 일이지요.”

“…….”

“그러나 법인각주는 강윤에게 죄를 물었습니다. 죄명은 무능력과 하극상이었지요.”

“그렇다.”

“무능력도 그렇지만, 특히 하극상은 큰 죄입니다. 전시 상황이라면 그 자리에서 참해도 모자랄 만한 중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 그래서 내공 전폐와 뇌옥 십 년 형을 내린 것이다. 이유인즉, 높은 자리에 앉은 자에게는 그만한 책임이 있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야.”

“옳은 말씀입니다만, 그래도 과합니다.”

“이유를 말해 보아라.”

“연대 책임이랄 것까진 없지만, 결국 강윤을 그 자리에 앉힌 것은 연가입니다.”

“…….”

“결국에는 우리 식구였습니다. 아버지께선 지금도 그를 식구라 생각하실는지 모르겠지만요.”

“해서, 형을 조금만 낮춰 주자?”

“강윤은 가법(家法)에 명시된 형보다 더 심한 형을 받았습니다. 낮춰 주자는 것이 아니라, 법도대로 할 거라면 투명하고 명확히 하자는 것입니다.”

연호정이 씁쓸하게 웃었다.

“결국 강윤도 본가의 가법을 제멋대로 해석하여 그 사달을 낸 것 아니었습니까?”

“…….”

“법에 유연함을 두지 않으실 거라면, 더 과격하게 처리해서도 안 됩니다. 필시 많은 이들에게 혼란을 줄 겁니다.”

“정녕 그리 생각하느냐?”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다른 조직은 몰라도, 본가는 그래야 한다고 봅니다.”

연위가 연지평을 돌아보았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설마 자신에게까지 질문이 돌아올 줄은 몰랐던 연지평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굳이 강 대주가 아니더라도…… 한 사람의 인생이 걸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음.”

“규율을 어겼다면, 그에 맞는 벌을 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살짝 망설이던 연지평이 말을 이었다.

“본가가 벽산(碧山)의 가문이라 불리는 것은, 정명하고 청렴결백한 일 처리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기실, 이번 강윤의 판결은 나 역시 과하다고 생각한다.”

연지평이 의아한 눈으로 연위를 보았다. 과하다고 생각하셨다면 직접 형을 조정하시면 될 일인데, 왜 자신들을 불렀는지 의아했기 때문이다.

연위가 연호정에게 물었다.

“괜찮겠느냐?”

“예? 뭐가요?”

“하극상은 때에 따라 죄의 가감 폭이 큰 죄다. 너는 하극상의 대상이 된 윗사람이니, 원한다면 강윤을 죽일 수도 있다.”

“그렇지요.”

“한데 형을 낮춰 주라고 하는구나. 바로 그 부분이 괜찮냐고 묻는 것이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괜찮습니다. 뭐, 저도 놈의 속을 박박 긁었으니까요. 칼 안 뽑은 것만도 어딥니까?”

“칼을 뽑았다면 즉참감이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연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의 얼굴은 금세 무뚝뚝해졌다.

“좋다. 이번 일은 너희 말대로 하겠다.”

연지평은 내심 깜짝 놀랐다. 반면 연호정은 담담한 얼굴로 연위의 말을 들었다.

“호정.”

“예, 아버지.”

“고생했다.”

연호정이 웃으며 일어났다.

“이런 일로 고생 안 하게 해 주십시오. 힘들어 죽겠어요.”

연지평이 당황해서 연호정의 팔을 흔들었다.

연위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앞으로 신경 쓰마.”

연지평의 입이 쩍 벌어졌다.

“하면,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내일은 무엇을 할 것이냐?”

“하던 대로 해야지요.”

“그 독한 수련을 또 시작할 참이냐?”

“이젠 수련 방법을 좀 바꿔 보려고요.”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후개가 오기 전에 한번 들르거라. 무공을 봐주마. 지평, 너도.”

연씨 형제가 가주실을 나섰다.

연위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형제가 하하하 웃음을 터트리며 숙소로 향하고 있었다.

연위의 눈에 언뜻 아쉬움이 남았다.

그 아쉬움의 대상은 역시나 연호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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