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규율의 허점 (2)
가주실로 들어온 연위는 곧장 업무를 시작했다.
하지만 서류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조금 전, 아들이 했던 말이 뇌리에서 잊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뜻은 달라도 제 마음은 언제나 이곳에 있습니다.’
연위의 눈이 깊어졌다.
뜻이 다르다 함은, 진정 아들의 눈이 천하를 향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참으로 어렵구려, 부인.’
지평을 낳고 얼마 되지 않아 죽은 아내가 떠올랐다.
‘먼저 간 당신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두 아들을 멋지게 키우고 싶었소. 하나, 한 가문의 수장이라는 핑계로 자식을 엄하게만 대했소.’
연위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연호정에게 호되게 호통치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그때 연호정의 나이는 고작 여섯이었다. 봄날의 나비를 보고 웃을 나이에, 아비의 호통과 수련으로 하루하루를 보낸 것이다.
당시 연위는 깨달았다. 나날이 수척해지는 큰아들을 보며, 자신의 방식에 문제가 있었음을.
그래서 둘째를 가르칠 땐 절대 다그치지 않았다. 말수가 적은 자신을 무서워했지만, 그래도 연지평은 착하게 잘 컸다.
그러나 연호정은 달랐다.
둘째의 재능을 질투한 연호정은 어느새 엇나가 버렸다. 무공 수련은 내팽개치고, 주루를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연위는 그런 아들을 차마 질책할 수 없었다. 아들을 그리 키운 것은 자신이기 때문이었다. 무공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려 줬어야 할 자신이 도리어 아들의 눈을 편협하게 만든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연위는 또 하나를 깨달았다.
엇나가기 시작했을 때, 바로 그때 잡았어야 했다. 즉, 자신은 다독여 줘야 할 때 질책했고 잡아 줬어야 할 때 방관해 버린 것이다.
나는 실패자다.
연위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항상 첫째를 볼 낯이 없었다.
‘한데 부인. 그런 호정이 지금은 사내답게 커 가고 있소.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여기까지 성장했소.’
아들이 변화했을 때, 연위는 내심 기쁨을 금치 못했다. 자신이 해 준 게 하나도 없는데도 아들은 불현듯 무언가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다소 과격했지만, 아들의 멋진 성장에 하루하루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살았다.
그러나 그리 멋지게 성장한 아들은 연가의 주인이 될 생각이 없단다.
‘생각해 보니 그럴 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려.’
연위는 씁쓸했다.
‘누구를 탓하겠소? 다 내가 못난 탓이오. 내가 호정에게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면, 호정도 밖으로 돌려 하지 않았을 것이오.’
이미 지나 버린 일이다. 연위는 아들의 마음을 바꿀 수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연위가 창가를 바라보았다.
거처로 향하는 아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참으로 늠름해 보였다.
“……그래, 마음만은 이곳에 있다고 하니 다행이구나.”
그거면 됐다. 못난 아비 밑에서 컸음에도 마음만은 가문에 둔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연위는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길 얼마.
“가주님. 총관입니다.”
“들어오시게.”
문이 열리고 태경이 들어왔다.
“어이쿠, 날이 아직 춥긴 합니다.”
“그렇구먼.”
“어떻게, 대공자와 비무는 잘 끝내셨습니까?”
연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괜히 무안해진 태경이 품에서 서신을 꺼내 들었다.
“여기, 전에 말씀하신 것 갖고 왔습니다.”
“주게.”
서신을 펼쳐 본 연위의 눈이 깊어졌다.
“참으로 끈질기군.”
“모용세가가 아직 포기하지 않은 것입니까?”
연위가 태경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태경도 눈치가 빨랐다. 조금은 경박스럽지만 종종 보여 주는 지혜와 빠른 일 처리는 연가의 총관으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문득 드는 생각에 연위가 물었다.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모용세가 건 말씀입니까?”
“그렇다네.”
가주가 이런 큰 업무에 관해 생각을 물어보는 일은 흔치 않았다.
태경은 즉각 대답했다.
“손을 잡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유는?”
“모용세가는 본가와 함께 칠대세가로 꼽히는 가문입니다. 그런 가문과 손을 잡고 사업을 확장하게 된다면, 더 많은 부(富)를 축적할 수 있겠지요.”
“…….”
“아, 물론 가주님께서 재물에 큰 관심이 없으신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나 매해 수해를 입는 이들을 위해 천금을 쓰시잖습니까?”
“더 많은 부를 쌓으면, 더 많은 민생을 살릴 수 있다?”
“그렇습니다.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돈은 필수 불가결입니다.”
태경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연위는 고민했다. 아들 일은 아들 일이고, 사업은 사업이었다. 민생 안전에 더 많은 기여를 할 수 있다면 모용가와 손을 잡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다만.
“혹, 모용세가가 다른 마음을 품을 가능성 때문에 그러시는지요?”
“칠대세가는 구파일방과 달라. 정도(正道)를 걷지만, 세도가(勢道家)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하려 하지. 대부분 세를 불리기 위해 혈안이 된 이들일세.”
“음.”
잠시 고민한 태경이 손뼉을 쳤다.
“아! 그럼 이런 방법은 어떻습니까?”
“……?”
“모용세가 당대 가주의 딸에 대해 들어 보셨습니까? 무재(武才)는 물론 지모(智謀)가 뛰어나고, 성품도 몹시 곱다고 하더군요.”
“모용연화라는 아이?”
“알고 계셨습니까?”
같은 칠대세가의 자녀들 이름이야 당연히 알고 있다.
“한데 그 아이가 왜?”
“모용가의 딸과 대공자님을 혼인시키는 것은 어떻습니까?”
연위의 눈이 번뜩였다.
“혼인이라?”
“그렇습니다. 기실, 사업 하나 때문에 혼사를 추진하는 것이 좀 과해 보일 수는 있습니다만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지요. 이번 사업을 계기로 두 가문이 함께 나아간다면, 앞으로 민생에 더 많은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연위는 고개를 저었다.
“인륜지대사일세. 이런 일로 혼인까지 시킬 생각은 없네.”
가문 간의 협력을 위해 혼사를 잡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연위는 굳이 그럴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가주님, 대공자에게도 좋은 일일 수 있습니다.”
“호정에게?”
“예. 근래 대공자는 많이 변했지요. 하지만 가주님께서 대공자에게 가문을 물려주실 때, 곁에서 도움이 되어 줄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
“모용가의 재녀라면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있을 겁니다.”
태경은 모른다. 연호정이 가주라는 지위에 흥미가 없다는 것을.
고개를 저으려던 연위는 문득 연호정을 떠올렸다.
‘……천하에 뜻을 두었다?’
연호정의 변화는 급격했다.
물론 연호정이 다시 예전처럼 변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래도 연호정의 나이는 열아홉이었다. 아직 세상에 대해 알기 힘든 나이란 것이다.
아들의 꿈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들의 곁에서 든든한 지원을 해 줄 사람이 있는 것도 확실히 나쁘지는 않다.
골똘히 고민하던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생각해 봄세.”
“말이 나와서 말인데,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알고 있네.”
태경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괜히 주제넘게 나섰지요?”
“물어본 것은 나일세. 괜찮네.”
“아, 예.”
“이만 가 보게.”
“예에, 그럼.”
태경이 나가고 연위는 고민에 빠졌다.
“혼인이라?”
* * *
거처로 들어온 연호정은 그대로 침상에 몸을 눕혔다.
“소가주?”
설마 아버지께서 자신을 소가주로 임명할 생각이 있으신 줄은 몰랐다.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사람 일이란 게 참 알다가도 모르겠군.’
기실, 이전 생에서도 소가주가 되고 싶진 않았다. 다만 자신이 아니라 동생을 소가주로 세운다는 말을 듣고는 열등감이 폭발했을 뿐이었다.
지금은 달랐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었다. 거친 흑도 패거리를 규합하고 정예화시키는 건 가능하지만, 백도의 가문을 이끄는 것은 무리였다.
당연히 동생에게 소가주직을 맡기실 줄 알았다. 변화된 자신의 모습이 워낙 거칠기에, 더더욱 그리 생각했다.
‘가주로서 너의 역량을 시험해 보고 싶었거늘, 아비로서 너의 뜻이 가문에 묶여 있지 않음을 알고 답답해하다니.’
연호정은 눈을 감았다.
‘죄송합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생각하신 것 같다. 비록 과격하지만, 언제고 자신과 같은 길을 걷게 될 거라고. 핏줄은 속이지 못하는 법이라고.
그러나 틀렸다.
그는 아버지의 핏줄이지만, 핏줄마저 결딴내는 지옥 같은 삶을 살아왔다.
그런 자신이 연가의 주인이 되는 것은 모두에게 불행이었다.
‘그리고, 제게는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가문을 멸문한 흉수.
당면한 과제가 너무 크고 벅찼다. 그것을 알아보고 대비하는 것만 해도 머리가 쪼개질 지경이었다.
그뿐인가?
‘삼교(三敎)의 준동도 막아야 해.’
후기지수 회합에 참여하며 큰 것을 깨달았다.
지금 세상은 과거의 역사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이유인즉, 자신이 과거와는 다르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삼교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이 예정보다 늦게 나타날 수도, 더 빠르게 나타날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중원에 스며들어 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삼교, 특히 사음교(邪淫敎)는 타협 따위 하지 않아. 그 맹목적인 증오는 거의 신앙에 비견될 만했다. 그런 놈들을 막기 위해선 흑백(黑白) 양도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해.’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연호정이 머리를 긁적였다.
간만에 앞날을 생각하려 하니 머리에서 쥐가 나는 것 같았다. 물론 나름의 계획은 세워 놨지만.
‘보름 후, 후개가 오면 그때부터 시작이다. 그때까지는 최대한 나 스스로에게만 집중하자.’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정말 오늘은 쉬어야 할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대연무장으로 나온 연호정은 묘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훈련이 장난 같으냐?”
“아닙니다!”
“한데 왜 말을 안 듣지?”
“죄송합니다!”
“분명히 말했다. 식사부터 휴식까지, 전부 철저하게 계산된 거라고.”
“…….”
“반항이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아닙니다!”
“아니면? 나를 못 믿기라도 하는 것인가?”
“아, 아닙니다!”
한 사내가 비응대 일 개조를 세워 둔 채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비응대주?’
과거로 돌아온 첫날, 조사동에 몰래 들어온 연지평과 주먹밥을 회수해 간 비응대주 강윤이었다.
강윤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너희보다 강하다. 너희가 밟고 있는 그 경지를 십수 년 전에 돌파했다는 뜻이다. 너희가 어떻게 수련해야 하는지를 하나하나 다 꿰뚫고 있어.”
“…….”
“그런 내가 직접 짠 일정이거늘, 왜 따르지 않는 거냐? 강해지고 싶지 않은 거냐?”
“죄송합니다!”
“아니면 튀고 싶었나? 그도 아니면 수면 시간이 너무 많았던 건가? 힘이 막 솟구치나?”
“아닙니다!”
상대를 철저하게 무너트린다.
강윤은 속된 말로 부하들을 갈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이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철저한 계산하에 짠 일정에서 벗어난 것. 그것 자체가 중대한 규율 위반이다. 각오들은 됐겠지?”
“…….”
“왜 대답이 없지? 귀머거리인가?”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강윤이 콧방귀를 뀌었다.
“연대 책임이다. 너희는 오늘 자정까지 비응검법(飛鷹劍法)을 수련한다. 식사와 휴식은 없다. 잠도 안 자고 수련할 체력이 있으니, 이 정도는 충분히 소화할 수 있겠지?”
“…….”
“왜 대답이 없나? 하기 싫나?”
“아, 아닙니다!”
“지금부터 시작한다. 수련용 철심목검(鐵心木劍) 가져와.”
비응대원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철심목검은 무게가 열 근이 넘는 수련용 검이었다. 그런 검을 들고 휴식도 없이 온종일 휘두르다니?
“뭣들 하고 있어! 당장 움직이지 못해!”
그때였다.
“멈춰.”
강윤이 뒤를 돌아보았다.
연호정이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건 뭐 삼류 건달도 아니고, 가지가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