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격(格)의 차이 (5)
연호정이 가문으로 돌아온 뒤, 연가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좋게 말하자면 뜨거워졌고, 나쁘게 말하자면 살벌해졌다. 그 이유는 전적으로 연호정 때문이었다.
귀가한 다음 날, 연호정은 연가의 대연무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대연무장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야외 연무장이었다. 부대 사열식이나 가내 축하연 등이 이뤄지기도 하는 만큼, 그 넓이가 굉장했다.
연호정은 그 넓은 대연무장의 테두리를 무턱대고 뛰었다.
둘레만 이백 장이 넘는 곳을 하염없이 뛴다. 오전의 수련이 그러했다.
그렇게 뜀박질로 몸을 풀고 점심을 거나하게 먹은 그는, 오후 수련으로 전력 질주와 천천히 뛰기를 반복했다.
연가의 무인들은 의아했다.
대공자님의 수련은 말 그대로 체력 훈련이었다. 체력의 중요성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단련된 무인에게는 저마다 맞는 훈련 방법이 있다.
대공자님의 무공이 부족하긴 하구나. 무인들은 그렇게 넘겨 버렸다.
다음 날.
연호정은 새벽같이 일어나 뛰었다. 한데 전날과는 달랐다.
쇠사슬이 달린 삼십 근 무게의 감견(坎肩, 조끼)을 입은 것이다.
무인들은 깜짝 놀랐다. 저 감견은 연가의 부대원들이 한 번씩 지옥 훈련을 할 때나 쓰는 훈련용 물품이었던 것이다.
그 무거운 쇠사슬을 걸친 연호정은 정오가 되기 전, 쓰러져 버렸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내공도 안 쓰고 전력 질주를 반복했으니 제아무리 단련된 사람이라도 버틸 수가 없다.
무인들은 혀를 차며 연호정을 숙소까지 옮겼다.
다음 날.
연호정은 다시 대연무장에 나타났다. 밥도 많이 먹고 푹 쉬었는지 그래도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날도 연호정은 쓰러졌다. 그래도 어제보다 이각은 더 뛴 것 같았다.
그렇게 닷새가 지났다.
연호정은 기어이 피를 토하고 쓰러져 버렸다. 제아무리 영양과 휴식을 잘 취했다 한들, 한계 이상으로 몰아붙인 훈련은 골병이 들게 하는 것이다.
무인들은 혀를 차면서도 연호정의 독기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노력 여부를 떠나, 저렇게 정신을 잃을 정도로 뛰는 것은 어지간한 독기로는 불가능했다.
열흘 뒤.
몸을 재정비한 연호정은 다시 대연무장에 나왔다. 한데 그날의 연호정은 쓰러지기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더 빨라졌고, 더 경쾌해졌다. 심지어 양팔에까지 무거운 쇠사슬을 칭칭 감았는데도 움직임이 훨씬 좋아졌다.
그날, 연호정은 처음으로 하루 훈련을 다 마칠 수 있었다. 대연무장에서 훈련하던 무인들도 연호정의 성공에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연호정의 훈련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그는 하루하루 한계를 넘어서는 훈련을 했고, 무조건 어제보다 고된 훈련 강도를 잡았다.
연호정의 독기에 감탄하면서도 단순한 수련에 내심 비웃었던 무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연호정을 경외의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한 달, 두 달을 넘어 어느새 넉 달을 훌쩍 넘은 훈련.
새해가 되고 겨울의 추위가 마지막 기승을 부릴 즈음.
연호정은 더 이상 감견과 쇠사슬을 몸에 걸치지 않았다.
“갑니다.”
“그래.”
터어엉!
경쾌한 움직임으로 접근한 양흠이 목검을 휘둘렀다.
예전보다 한층 예리해진 검격이었다. 중단을 향한 곧고 정직한 일격이었지만, 어지간한 고수라도 쉬이 받아 내기 힘들 만큼 빨랐다.
스륵.
그 쾌속한 일검이 허공을 갈랐다.
연호정은 몸을 틀며 한 걸음 움직인 게 전부였다. 그 간단한 움직임으로 검격을 피함과 동시에 반격의 기회를 잡아낸 것이다.
연호정의 주먹이 양흠의 옆구리를 노리고 파고들었다.
빠르진 않지만 너무 시기적절했다. 양흠은 곧바로 자세를 무너트려 발길질로 주먹을 튕겨 냈다.
일부러 자세를 무너트린 만큼 중심은 무너지지 않았다. 주먹을 튕긴 양흠이 곧바로 삼환각(三換脚)을 쳐 냈다.
빠른 단타 위주의 발길질이 연호정의 상체 요혈을 노렸다.
그때, 연호정의 팔꿈치가 양흠의 발바닥을 찍어 버렸다.
퍽!
“억?!”
양흠의 몸이 그대로 땅을 굴렀다.
발바닥의 용천혈(湧泉穴)이 타격을 입자 오른 다리 전체가 마비된 것 같았다. 당황한 양흠이 재빠른 움직임으로 자세를 잡았다.
움직임 하나는 무척 좋았다. 유연성과 탄력이 창응대에서도 단연 발군이었다.
하지만 이미 연호정의 손바닥은 양흠의 가슴에 닿아 있었다.
‘……!’
양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연호정이 연무장을 강하게 밟았다.
투우웅!
“컥!”
양흠의 몸이 훨훨 날아 땅에 처박혔다.
후우우웅.
낮은 자세, 내뻗은 장(掌)에서 은은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연가십삼권처럼 연가의 기본공이라 할 수 있는 연환비연장(連環飛燕掌)이었다.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졌지?”
“쿨럭! 져, 졌습니다!”
양흠이 연신 밭은기침을 뱉었다. 기침에 핏물이 조금씩 배어 나왔다.
연호정이 민망한 얼굴로 말했다.
“미안하군. 힘 조절이 아직 미숙해.”
“아, 아닙니다! 당한 제 잘못이지요.”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양흠은 불신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한데 방금 그 장법, 설마 연환비연장인가요?”
“엉.”
“헐?!”
양흠은 물론 구경 중이던 창응조 스무 명 모두가 놀랐다.
“비연장이 원래 이렇게 위력적인 무공이었습니까?”
같은 기본공이지만, 연환비연장은 연가십삼권보다는 실전적인 무공이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기본공은 기본공일 뿐, 일정 이상의 위력을 내지는 못한다. 게다가 연환비연장은 그 이름처럼 일타강격(一打强擊)이 아닌 빠르고 경쾌한 손재간으로 적을 무력화시키는 데에 중점을 둔 무공이었다.
한데 이처럼 무겁고 장중한 일격이라니? 상상도 못 했다.
연호정이 혀를 찼다.
“내 발밑을 봐.”
그가 발을 들어 보였다.
“헉!”
창응 일 조는 깜짝 놀랐다. 연호정이 진각으로 밟은 땅이 두 치나 움푹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단단한 땅이 발자국 모양으로 움푹 파여 있다. 굉장한 힘이었다.
“진각(震脚)은 남 놀래려고 밟는 게 아니야. 반탄력과 지기(地氣)를 끌어올려, 전사(轉絲)와 발출력을 강하게 만들기 위한 거지.”
“……!”
“무공의 특성이 어떻든 간에, 진각이 강하면 일격으로 적을 제압할 수 있어.”
소림(少林)의 무공이 강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소림의 진각은 그 자체로 만마(萬魔)를 제압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만큼 진각의 활용도가 뛰어나단 뜻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연호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무공은 빠르고 날랜 연환초가 아닌 무겁고 장중한 일격으로 만변(萬變)을 제압하는 특성이 있었다.
“설마 대공자님께서 그간 대연무장을 뛰셨던 것이?”
“그래, 극단적인 체력 향상 외적으로 진각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함이었다.”
두 달이 넘어갈 무렵, 연호정의 뜀뛰기에는 기이한 변화가 있었다.
어떨 때는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지만, 어떨 때는 땅에 발자국이 심하게 남았다. 깊이나 보행 간의 거리도 제멋대로였다.
무인들은 연호정의 체력이 들쭉날쭉하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그는 진각을 통해 힘의 흐름까지도 연마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단하십니다. 그게 가능한 겁니까?”
“당연히 되지. 너희는 한 번도 이런 식의 수련을 해 본 적이 없잖아? 해 보지 않았으니 믿기 힘든 것이지.”
“그럼, 저희도 대공자님처럼 수련하면 되는 겁니까?”
“우문(愚問)이다. 이 수련은 나만의 무공지로(武功之路)야. 너희는 너희에게 맞는 수련을 찾아서 해야지.”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기본은 언제나 중요한 법이야. 그러나 그 이상을 보기 위해선 자신의 수준과 성향, 무엇을 추구하는지를 파악해야 해.”
“머리 아프군요?”
“그 정도 머리도 안 쓰고 강해지려고 했어?”
“끄응.”
“이번 기회에 새겨듣도록 해. 사람은 무엇을 열망하느냐에 따라 성장 속도가 달라지는 법이다. 너희가 일(一)을 추구한다면 거기까지 성장할 것이고, 십(十)을 추구한다면 거기까지 올라가기 위해 아득바득 노력하겠지.”
“목표를 세우라는 말씀이신지요?”
“정확해. 작은 목표든 거창한 목표든, 도달할 곳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차이는 분명한 법이야.”
창응조원들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기실 이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연호정은 넉 달이 넘는 시간 동안 행동으로 그 진리를 확인시켜 주었다.
같은 말도 상황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법. 창응조는 연호정의 말에 잔잔한 충격을 받았다.
연호정이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비응대(飛鷹隊)의 대원들도 몇몇 있었다.
“너희도 마찬가지다. 거기서 만족할 생각이라면 모르지만, 그보다 더 강해지고 싶다면 목표부터 세우는 게 좋을 거야.”
그때, 비응대원 중 하나가 손을 들었다.
연호정이 턱을 들었다.
“거기.”
“인사드립니다. 비응대 삼 조(三組) 유지하(柳智夏)라고 합니다.”
생각보다 어려 보이는 외양이었다. 연호정과 비슷한 연배라고 할까. 그 나이에 비응대에 들어간 것도 충분히 대단한 일이었다.
“하나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언제든지.”
“창응대도 그렇지만 비응대 역시 본대 수련이 따로 있습니다. 부대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선 모두가 한 몸처럼 움직여야 하니까요.”
“그런데?”
“하지만 본대의 훈련은 식사와 수면 시간을 제외하곤 빽빽합니다. 오늘처럼 개인 수련 시간을 내기가 몹시 힘들지요.”
“부대 훈련에 관한 것은 대주에게 전적으로 일임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내게 말해 봤자 별 의미가 없을 텐데?”
유지하가 얼굴을 붉혔다.
“아, 예! 저는 부대 훈련 때문이 아니라, 수면 시간에 자기 계발을 할 수 있는지를 여쭤 보려고…….”
잠을 줄여서라도 개인 훈련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하루 몇 시진 자는데?”
“네 시진 수면을 취합니다.”
“넉넉하군. 잠 좀 줄여도 되겠어.”
“예에.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그럼 잠을 줄여서라도 수련하면 되잖아?”
“아…… 그것이…….”
“설마 잘 시간을 줄여서 수련하겠다는데 그걸 막는 멍청이도 있나?”
“그, 그건 아닙니다만.”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해. 네가 강해지는 게 비응대가 강해지는 길이다. 비응대가 강해지면 본가도 강해지는 거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만 넌 비응대 소속이니만큼, 과도한 수련으로 부대 훈련에 영향을 주면 안 되겠지. 그것만 조율한다면 별문제 없다고 본다.”
유지하의 얼굴이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이게 뭐 감사받을 일인가? 여하간, 열심히 하도록.”
“예!”
연호정이 양흠에게 말했다.
“저번보다 검력(劍力)이 좋아졌어. 무슨 수련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더 성장하길 바란다.”
“감사합니다.”
“그럼 난 들어간다.”
“어? 대공자님, 오늘은 더 수련 안 하십니까?”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였다.
“오늘은 나도 좀 쉬려고.”
* * *
당연히 연호정은 쉬지 않았다. 거처로 들어온 그는 거침없이 창술을 전개했다.
대연무장에서는 체력과 진각을, 거처 후원에서는 창술을 연마했다.
지난 넉 달 동안 하루도 거른 적 없던 훈련이었다. 가내 무인들은 체력 단련이 끝난 연호정이 바로 자는 줄 알았지만, 그는 한 시진이라도 창을 휘두르고 난 후에야 잠을 잤다.
‘된다.’
파바바박!
허공에 날린 장작 다섯 개에 각기 십여 개의 창격이 적중했다. 적중된 장작들은 야수의 발톱에 찢긴 것처럼 너덜너덜해졌다.
‘역시.’
양흠과 비무를 하면서 무공이 새로운 경지에 올라섰음을 깨달았다. 이제 조금만 더 연마하면 병기를 교체해도 될 것 같았다.
쿠웅!
강력한 진각과 함께 재차 창을 휘두르려던 때였다.
저 멀리서 대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대공자님. 가주님께서 부르십니다.”
“엉? 무슨 일이시길래?”
“그것은 저도…….”
연호정이 머리를 긁적였다.
“오늘은 진짜 그냥 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