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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38화 (38/963)

38화. 격(格)의 차이 (4)

연호정 일행은 이십 일 만에 가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그들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가문으로 돌아오는 길을 신법 수련과 체력 단련으로 대신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그 말도 안 되는 이동을 주도한 건 연호정이었다. 사범 역할은 신모가 대신해 주었다.

그렇게 가문에 도착한 일행은 모두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쉴 수 없었다. 연호정과 연지평은 가주실로 불려 갔고, 창응대는 하필 훈련 시간이라 귀환 소속을 밟자마자 훈련에 돌입했기 때문이었다.

본래 가외 임무 후 돌아오는 날은 모든 일정이 취소되기 마련이었지만 신모는 봐주지 않았다. 안 그래도 훈련 강도를 높이려 했는데 오히려 잘된 일이라며 채찍질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날 하루, 합비에 다녀왔던 창응조는 지옥을 맛봐야 했다.

* * *

연위는 가주실로 들어온 형제를 보며 눈을 치떴다.

후욱.

쌀쌀한 날씨인데도 땀 냄새가 훅하고 끼쳐 들었다.

땀에 찌든 냄새가 아니라 방금 막 흘린 생생한 땀내였다. 게다가 의복을 보니 하루 이틀 그런 게 아닌 모양이었다.

“다녀왔습니다.”

“다녀왔어요, 아버지.”

연위는 잠시지간 말을 잇지 못했다.

아들들의 꼬락서니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자식 대하는 심정이 이럴까.

잠시 후, 연위가 입을 열었다.

“일어들 나라.”

두 사람이 일어났다.

연위의 눈이 반짝였다.

연호정의 얼굴은 담담했다. 반면 연지평의 얼굴은 홀쭉해졌다. 원래 군살은 없었지만, 누가 봐도 고생한 티가 역력했다.

“자세한 사정은 네 형에게 들을 터이니, 평이는 이만 들어가서 쉬거라.”

“아…… 감사합니다.”

감사하단다. 평소 연지평의 성격을 생각하면 헛웃음이 나올 만한 반응이었다.

그렇게 연지평이 나가자 가주실엔 두 부자만 남았다.

“앉거라.”

“예.”

연호정이 자리에 앉았다.

부자는 말이 없었다. 총관 태경이 차를 타올 때까지.

“목 좀 축이거라.”

“예.”

연호정이 찻잔을 들었다.

연위의 눈이 빛났다. 찻잔을 드는 연호정의 양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음을 본 것이다.

차로 몇 번이나 목을 축인 연호정이 그제야 살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연위가 물었다.

“꼬락서니가 그게 뭐냐?”

“오면서 수련 좀 했습니다.”

“수련? 어떤?”

연호정은 집으로 오는 길까지 했던 수련 내용을 차분히 말해 주었다.

연위의 눈이 흔들렸다.

“그리 독한 훈련을 평이와 같이 하고 왔단 말이냐?”

“아닙니다.”

“하면?”

“신 대주와 창응조 전부가 같이 했습니다.”

“……네가 주도했다고?”

“그렇습니다.”

이런 독한 놈.

연위는 저도 모르게 그리 말할 뻔했다. 천하의 연위가 무의식적으로 그리 반응할 정도로 훈련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훈련은 단순했다. 그저 뛰는 것이었다.

문제는 어떻게 뛰느냐였다.

일정한 속도로 뛰어오는 것은, 적당히 체력만 받쳐 주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얼마나 오래 뛰느냐의 문제일 뿐, 뛰는 것 자체가 어려운 건 아니니까.

하지만 반 각마다 속도를 바꾸면서 뛰는 건 문제가 다르다.

반 각 동안 전력 질주를 하다가, 다시 반 각이 지나면 천천히 뛴다. 그러다 다시 반 각이 지나면 전력 질주를 하고, 다시 반 각이 지나면 속도를 늦춘다.

첫날 훈련이 그랬단다. 그렇게 하루가 지날 때마다 전력 질주하는 시간을 반 각씩 늘렸다고 한다.

그런 짓을 집으로 오는 내내 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평탄한 대로가 아니라 산길로 돌아왔단다.

‘그중 열흘은 내공 없이?!’

아무리 식사 때는 쉬고, 하루 네 시진 이상 수면을 취했다지만 너무 혹독한 훈련이 아닌가.

그나마 어릴 적부터 단련된 몸들이고 내공까지 익혀서 다행이지, 아무나 따라 하다가는 위험할 수도 있는 훈련이었다.

“휴식과 영양 보충은 확실하게 했습니다.”

“근육도 근육이지만 관절이 다쳤을 수도 있다.”

“제 몸 상태도 관조하지 못하는 실력이라고 보지 않았습니다.”

“지나친 수련은 내상까지 유발할 수 있다.”

“그래서 운공할 시간은 남겨 두었습니다.”

독해도 이렇게 독할 수가 없다. 기실, 연위도 저런 훈련을 해 본 적이 있었지만 이십 일 동안 지속한 적은 없었다.

‘그래도…….’

연위는 연호정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도를 읽었다.

이전에는 완벽하게 갈무리했던 기운이 제멋대로 흘러나온다. 체력이나 내공이 한계에 달했다는 뜻이었다.

‘스무날 만에 이 정도. 엄청나게 많은 것을 얻었군.’

지나친 훈련량에 놀랐을 뿐, 연위는 아들의 말을 믿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된 훈련이었다는 걸 아들 스스로가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공의 질이 집을 떠났을 때보다 훨씬 더 선명하고 웅장해졌다. 예전과 비교하면 도무지 같은 사람의 기(氣)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변화였다.

단순한 참오로는 절대 이렇게 될 수 없다. 지독한 육체 단련이, 육체에 깃든 기의 성질까지도 바꿔 버린 것이다.

‘기(氣)는 끊임없이 몸을 생성한다. 무너지기 직전까지 혹사한 후, 대량의 영양 섭취와 휴식 그리고 진기(眞氣)로 변화를 촉진한 것이야.’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되었든 고생이 많았다.”

“아닙니다. 이제 시작인걸요.”

“……음?”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숨길 수 없는 피로가 묻어 나왔지만, 그 이상의 보람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이런 수련은 심(心), 신(身), 기(氣)의 한계를 느낄 때까지 지속할 겁니다. 물론 그만큼 잘 쉬어 줘야겠지만 말이지요.”

“마음을 독하게 먹었구나.”

“목숨 걸고 단련해도 언제 극의(極意)에 닿을지 모릅니다. 아직 멀어도 한참 멀었어요.”

“……그래?”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비로소.

이제야 비로소 연위는 아들의 변화를 사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합비로 떠나기 전, 아들의 변화는 어딘지 모르게 위화감이 강했다. 뜬금없이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아 신경도 많이 쓰였다.

하지만 오늘부로.

저 깊이 있는 웃음과 맑은 눈을 본 지금, 연위는 아들의 변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어쩌면 내 아집이 첫째의 변화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것일는지도 모르지.’

아들은 어른이 되었다.

나이가 찬 성인이라서가 아니라, 세상을 보는 눈과 마음이 어른이 되었다.

연위가 의자에 등을 묻었다.

“회합은 어땠느냐?”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큰 것을 알아냈습니다, 아버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지만 그는 침묵했다. 아직 아버지한테 알릴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냥 그랬습니다.”

“사람은 많이 사귀었느냐?”

“깊게는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호감을 느낀 이들이 몇 있긴 한 모양이었다.

연위가 품에서 잘 접은 서신을 꺼내 건넸다.

“이게 뭡니까?”

“읽어 봐라.”

연호정이 서신을 펼쳤다.

잠시 후, 그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음…… 그렇게까지 거창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나라도 이런 서신을 보낼 것이다. 그게 부모 마음이다.”

“언제 온 겁니까?”

“오늘 아침에 왔다.”

연호정이 헛기침을 했다.

“그 계집애도 입이 참 가볍구먼.”

서신은 바로 제갈세가의 가주에게서 온 것이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가주가 직접 전한 것이다.

서신이 온 시기를 생각하면 아마 회합 전에 사실을 알린 모양이었다.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아닙니다. 이런 걸로 뭐.”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연위는 아들이 기특했다.

사람을 살렸는데도 그것을 자랑하지 않고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예전보다 훨씬 거칠어졌지만, 그만큼 사람의 도리를 깨우쳐 가고 있는 것 같았다. 연위는 아들의 이런 변화가 몹시 달가웠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남궁세가와 꽤 지독하게 얽혔다고 들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얘기는 나올 줄 알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자세한 상황을 듣고 싶다.”

연호정은 회합 때 있었던 일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물론 명호림과 관련된 일은 발설하지 않았다. 그 얘기를 빼도 상황을 알려 드리기에 부족함은 없었다.

“그랬구나.”

연위는 연호정이 최대한 객관적으로 설명했음을 알았다.

“남궁의 이공자가…… 그랬단 말이지.”

“예.”

연위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눈빛을 본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등허리에서부터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아버지의 저런 차가운 눈빛은 처음 보았다.

“참으로 쉽지가 않군. 단순히 악연으로 얽혔다고 보기엔, 그쪽에서 과히 너무하긴 했구나.”

“어지간하면 얽히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다만, 당가의 장자 놈과 손잡은 건 좀 심했다고 봅니다.”

“당연히 심하다. 약관이 넘은 나이라고 들었거늘, 어찌 그런 못된 술책을 배웠을꼬.”

연호정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랜만에 뵈어서 그런 걸까? 왠지 아버지의 감정 표현이 예전보다 더 솔직해지신 것 같았다.

“잘했다.”

“예?”

연호정을 보는 연위의 눈은 맑았다. 특유의 엄한 기색은 여전했지만, 단단한 얼음 한 겹이 떨어져 나간 것 같다고 할까.

“때로는 소문이 칼보다 더 치명적일 수 있는 법이다. 흥분해서 찾아가 난동을 피우지 않고, 지혜롭게 잘 대처했구나.”

“아, 예.”

아버지는 모를 것이다. 당가의 장자 놈과 수하들을 반쯤 죽여 놓은걸.

한호명이 철저하게 숨겼기 때문이었다. 그게 알려지면 정말 폭탄이 터질 것이다.

“그러나, 소문의 무서움을 저쪽에서도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무슨 말씀입니까?”

“남궁세가 측에서 본가에게 사과했다.”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사과했다고요?”

“그렇다. 가주가 직접 사과했지.”

“그럴 리가…….”

“제 딸내미가 저지른 짓도 고백했다.”

순간 연호정이 탄성을 질렀다.

“이런 능구렁이 같은.”

연위의 눈이 빛났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겠느냐?”

“딸내미를 버리고 아들 체면을 살려 준 거 아닙니까? 아들이 저지른 짓을 남궁세가와 상관없는 개인사로 처리해 버렸어요.”

연위는 속으로 감탄을 터트렸다.

몇 마디 말만 듣고 즉석해서 조합, 상황을 유추했다.

이건 머리가 똑똑하다고 다 되는 게 아니었다. 세상 돌아가는 흐름을 읽을 줄 알아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

“허, 끝까지 꾹꾹 숨길 줄 알았더니 체면 좀 깎고 사건을 봉합해 버렸습니다. 남궁가주의 처세가 보통이 아닌데요?”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들의 성장을, 아들의 안목을.

“그래서, 네 생각은 어떠하냐?”

“무엇이 말입니까?”

“남궁세가의 사과에 대한 답변을 아직 하지 않았다. 너라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 같으냐?”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고민할 것 있겠습니까? 좀 얄밉긴 하지만, 그런 머리 아픈 일에 신경 쓰는 것도 시간 아까운 짓입니다.”

“이 사과를 받자?”

“차라리 남궁가주를 흔들 수 있다면 모를까, 이공자의 개인 원한으로 그랬다는데 별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동생 일로 그랬다잖습니까.”

“너는 화가 나지 않느냐?”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강호를 살며 목숨의 위협을 한두 번 받겠습니까? 차라리 여기서 사과를 받고, 연가의 명성을 높이는 일이 더 이득입니다.”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연호정은 더는 남궁세가 ‘따위’에게 신경 쓸 생각이 없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연호정의 속내를 모르는 연위는, 아들이 내린 결론에 미안함과 기특함을 동시에 느꼈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자를 용서한다? 스물도 되지 않은 청년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데 그것을 용서함은 물론, 가문의 미래까지 생각하고 있다. 그것이 기특했고, 또한 미안했다.

“좋다. 네 말대로 하자.”

“예, 알겠습니다.”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면, 이만 돌아가서 씻어도 되겠습니까?”

“그래.”

연호정이 고개를 꾸벅 숙이곤 몸을 돌렸다.

연위는 문을 열고 나가려는 아들을 저도 모르게 불렀다.

“호정아.”

“예?”

연위는 잠시 말이 없었다.

의아함에 연호정의 고개가 어깨까지 닿을 무렵.

“고생했다.”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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