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격(格)의 차이 (3)
“가느냐?”
“네.”
“……그래, 나중에 보자.”
고개를 꾸벅 숙이곤 등을 돌린 제갈 남매.
그들을 바라보는 남궁현의 얼굴은 잔뜩 굳어져 있었다. 자신을 보는 제갈아연의 눈빛이 유독 딱딱한 것을 본 것이다.
‘빌어먹을.’
이게 다 연호정 때문이었다. 연호정 앞에서 망신만 당하지 않았어도 제갈아연이 자신을 저리 보진 않았을 것이다.
이번 회합은 여러모로 상처만 남긴 회합이었다. 그 상처가 너무 깊어서 이성을 상실할 정도로.
제갈아연의 눈빛을 떠올린 남궁현은 이를 바득 갈았다.
‘내 손으로 죽이고 싶었거늘.’
아쉬웠지만 나름대로 통쾌하기도 했다.
당가의 독은 그 종류가 상상을 초월한다. 인지하기도 전에 죽이는 독한 놈부터 몸을 마비시키는 것, 철저하게 고통만 주는 것, 신체에 장애를 일으키는 것까지 수도 없다고 했다.
남궁현은 연호정의 실력을 보았다.
분하지만 연호정의 무공은 인정할 만했다. 추성을 그렇게 압도하는 것은 자신이라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개 같은 놈! 뭔가 술수가 있었겠지.’
초반 삼 초식을 받아 낼 때의 추성의 움직임은 너무나도 어설펐다. 아마 추성이 상대를 봐주려다가 뜻밖의 실력에 당황하다가 실수한 것이 분명했다.
깨어나면 한번 물어나 볼 것이다. 대체 왜 그리 방심했는지.
‘생각해 보니 그때도 기습이었군.’
연호정이 당양선을 제압했을 때도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긴 게 아니었다.
하나하나 열거해 보니 참으로 비겁한 놈이 아닌가. 사람들은 결과를 보지 과정을 보지 않았다. 그래서 연호정을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쓰레기 같은 자식. 알량한 실력으로 잘도…….”
사람은 극단적인 상황일수록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되는 법.
인생 최초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그는 그 똑똑한 머리를 제대로 쓰지 못했다.
“명 형은?”
“먼저 가셨습니다.”
“인사도 없이?”
남궁현이 얼굴을 찌푸렸다.
‘이것들이.’
마음에 안 든다. 정말이지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다.
“정리는 끝났느냐?”
“아직입니다. 곧 끝날 것 같습니다.”
남궁현이 버럭 소리쳤다.
“곧 있으면 해가 지지 않느냐! 어서 마무리 짓거라!”
“예, 예!”
하인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그렇게 이각 만에 일을 마무리한 남궁현이 장원을 나섰다.
합비에서 남궁세가가 위치한 황산(黃山) 인근까지 가려면 시간이 오래 걸렸다.
사람들은 종종 의아해한다. 안휘제일의 세력인 남궁세가가 성도인 합비가 아닌 황산에 자리를 잡은 이유를.
하지만 그건 결과론적인 의문이었다. 남궁의 조사가 최초로 터를 잡을 때는, 남궁세가의 세(勢)가 이렇게 크질 않았다.
물론 지금은 달랐다. 남궁세가의 눈은 안휘 곳곳에 박혀 있었고, 성도인 합비는 말할 것도 없었다.
“미리 마차를 받아 왔습니다. 오르시지요.”
심지어 남궁의 문인(門人)이 안휘 내에서 이동할 때는 최고급 마차와 배가 제공되었다. 안휘에서 생업에 종사하는 모두가 남궁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소국(小國)의 왕족이나 다를 바 없는 특권이었다.
그렇게 남궁현은 닷새 만에 강을 건너 황산 인근, 남궁세가의 영역권 안으로 들어섰다.
‘뭐지?’
대로를 걷는 남궁현은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수많은 사람이 자신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놀랄 일은 아니었다. 호위무사들이 ‘남궁(南宮)’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거대한 깃발 서너 개를 들고 있으니까.
평소에도 사람들의 시선을 많이 받던 그였지만, 오늘은 달랐다. 힐끔거리면서 뭔가 속닥거리는데, 그 모습이 호의적이질 못했다.
남궁현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기분이 언짢았던 것이다.
그렇게 일행이 남궁세가에 도달했을 때.
“현이냐?”
“아, 숙부님.”
남궁세가의 외원 당주 남궁대산이 급박한 기색으로 다가왔다.
남궁현은 점점 불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무슨 일 있습니까?”
남궁대산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예?”
남궁대산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네가 사천당문의 장자에게 연가의 대공자를 죽이라고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를 썼다면서!”
순간 남궁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너무 놀랐을까? 남궁현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그, 그걸 어떻……?!”
남궁대산의 눈이 깊어졌다.
“너……? 정말이었구나.”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남궁현은 입을 합 다물었다.
하지만 이미 들을 사람은 다 들은 후였다. 아니, 남궁현이 부인했다고 해도 이미 사건은 벌어졌다.
“이미 소문이 안휘를 넘어 다른 지역까지 일파만파로 퍼졌다. 단순 소문이라기에는 출처도 명확하고 증인도 확실해.”
“마, 말도 안 되는!”
“어서 가주실로 들거라!”
스윽. 스윽.
화선지 위를 가로지르는 붓놀림은 신중하면서도 거침이 없었다.
난(蘭)을 치는 남궁인의 손놀림에는 장인 정신이 깃들어 있었다. 먹의 짙고 연한 정도까지 완벽하게 계산하여 난을 치는 모습은 이미 경지에 달해 있었다.
남궁현은 입 안이 바싹 타는 걸 느꼈다.
아버지는 벌써 한 시진 째 난을 그리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지, 무려 스무 장이 넘는 화선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음, 이제야 좀 봐 줄 만하군.”
화선지를 들어 살살 젓는 남궁인의 얼굴에 흡족한 빛이 어렸다.
바람에 먹을 말리며, 비로소 남궁인의 입이 열렸다.
“사실이냐?”
한 시진 만에 묻는 말은 몹시 직설적이었다.
남궁현은 침을 삼켰다. 아버지의 평온한 어조 속에 깃든 은은한 분노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이런 모습은 자주 봐 왔었다. 하지만 그 대상이 자신이 될 줄은 몰랐다.
처음으로 받아 보는 아버지의 분노. 남궁현은 위축되는 자신을 느꼈다.
“그렇습니다.”
어차피 거짓말은 통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니, 거짓말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남궁인의 눈이 깊어졌다.
실망의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후기지수 회합에 널 보낸 것은 본가에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다. 굳이 첫째가 아니더라도 너 이상으로 영명한 아이들은 많아.”
가슴을 후비는 말이었다. 남궁현이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런데도 난 널 보냈다. 네가 원했기 때문이야. 물론, 내가 널 인정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
“사람이 사람에게 인정받기는 어렵다. 그러나 실망은 순간이지. 너도 모르진 않을 것이다.”
남궁인은 그제야 아들에게로 눈을 돌렸다.
“연가와의 일을 풀어 보겠다는 너의 뜻이 가상했다. 네가 무리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보냈건만, 칼까지 뽑아 들 줄은 몰랐구나.”
“…….”
“사람을 잘 쓰면 용인술(用人術)이라 칭송받지만, 못 쓰면 협잡이 되는 법이다. 용인까지는 아니더라도 제 이름 석 자 정도는 지울 역량이라 보았거늘, 내 눈이 틀린 것이냐?”
주르륵.
남궁현의 입술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문 것이다.
남궁인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나는 나의 안목을 믿는다. 내 핏줄인 네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했을 리가 없어. 그렇다면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
“이유는 셋 중 하나겠지. 너의 평정을 흐트러트릴 만한 일이 생겼거나, 아니면 연호정이란 아이의 술책이 너를 압도했거나.”
“……!”
“그도 아니면, 둘 다이거나.”
남궁현의 눈에 핏발이 섰다.
설령 술책이라도 연호정이 자신보다 낫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남궁인은 아들의 흔들림을 보았다. 분노와 실망으로 가득했던 그의 눈에 은근한 안쓰러움이 어렸다.
“제갈가의 장녀 때문이더냐?”
깜짝 놀란 남궁현이 아버지를 보았다.
남궁인이 말했다.
“무슨 일이 생겼는가 싶어, 그곳에서 벌어졌던 일을 소상히 들었다.”
“…….”
“제갈가의 장녀가 그리도 마음에 들더냐?”
“저, 저는…….”
“……역시 그랬군.”
남궁인의 눈에 엄한 기색이 어렸다.
“사내가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이 여색(女色)이라 하였다. 평생을 경계하고 또 경계하라 했거늘, 고작 그 마음 하나 다스리지 못해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느냐?”
“……죄송합니다.”
남궁인이 혀를 찼다.
“내, 제갈가주에게 매파를 보냈다.”
“예?!”
“비록 장자는 아니지만 너 역시 어디 가서 모자란다는 소리를 듣는 아이가 아니다. 제갈가 역시 장자가 가문을 이을 터, 딸 정도는 받아 낼 수 있겠지.”
“아, 아버지.”
남궁현은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호되게 질책하면서도 아들을 위해 매파를 보냈단다. 그만큼 아버지는 자신을 위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너의 아비이기 전에 가주다. 그간 네가 가문에 이바지한 걸 생각하여, 이번 실수는 눈감아 주겠다.”
“감사합니다.”
“큰 기대는 하지 말거라. 제갈가의 장녀는 너를 연마시켜 줄 마도석(磨刀石)에 불과하다. 그 아이는 내 며느리가 아니라 너의 처(妻)일 뿐이다.”
냉정한 말이었다. 자식의 처를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을 몹시 담담하게 했다.
하지만 남궁현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잔뜩 상기된 아들의 얼굴을 보며 남궁인은 다시 한번 혀를 찼다.
“이만 돌아가거라.”
남궁현이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의 마음 한편을 들여다본 그는 이미 평정을 되찾고 있었다. 상기된 표정과 달리, 그의 눈빛은 이전의 냉철함을 되찾았다.
남궁인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저 눈빛을 보고 싶었다.
“하면 이번 일은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십니까?”
“왜? 직접 나설 생각이냐?”
“…….”
“너는 이번 일에서 빠지거라. 한 번 실패한 일을 물고 늘어지는 것만큼 꼴불견도 없다.”
“하지만 아버지.”
“또한.”
남궁인의 얼굴이 무심해졌다.
“연호정이란 아이의 문무(文武)가 대단하다고 들었다. 내 일간의 사정을 들어 보기만 해도, 연호정이란 아이는 네가 감당할 만한 상대가 아니더구나.”
남궁현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상처 입은 자존심이 다시 한번 움찔했다.
그러나 그는 금세 표정을 바로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버지 앞이었다. 더는 못난 모습을 보여 줄 수 없었다.
남궁인의 얼굴에 비로소 흡족한 빛이 어렸다.
“상대를 바로 보는 것이야말로 발전의 시작이지. 너는 이제야 한 발을 뗀 것이다.”
“한 번은 졌습니다. 하지만 두 번은 지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안다. 그래도 이번 일에서 빠지거라. 당분간은 심신을 갈고닦도록 해라.”
이렇게까지 말씀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다.
남궁현이 허리를 굽혔다.
“알겠습니다. 하면 소자, 이만 들어가겠습니다.”
“먼 길에 고생 많았다. 오늘은 푹 쉬거라.”
그렇게 아들을 보낸 남궁인이 의자에 등을 묻었다.
“이제 갓 약관(弱冠)을 넘긴 나이, 혈기는 어쩔 수 없지.”
확실히 형만 한 아우는 없는 것 같았다. 첫째는 저 나이 때 저러지 않았으니까.
그뿐만이 아니었다. 첫째는 심성만큼이나 무공에 대한 재능도 뛰어났다. 자신이 삼십 줄에 깨달았던 경지를 스물도 되지 않아 깨우쳤으니 재능에 관해선 말할 필요가 없었다.
아마 첫째가 폐관에서 나오면 세상이 놀랄 것이다.
남궁인이 입을 열었다.
“천 총관.”
잠시 후, 단단한 체격의 중년 사내가 가주실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가주님.”
남궁인이 창가를 바라보았다.
진한 노을빛이 유달리 아름다웠다.
“이 정도면 솥은 충분히 달궜네.”
“…….”
“상화가 저지른 일, 다 알리도록 하게.”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모양새는 사나워도 봉합은 해야지. 조금 전에 보니, 천방지축 어린 딸년보다는 제법 성숙한 티라도 내는 아들이 더 낫구먼.”
“……알겠습니다.”
남궁인의 눈이 노을빛을 받아 붉게 물들었다.
“벽산연가라…… 무공만 특출난 가문에 불과한 줄 알았거늘, 가주나 그 아들이나 보통이 아니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