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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36화 (36/963)

36화. 격(格)의 차이 (2)

연호정은 주루 일 층을 둘러보았다.

역시나 주루엔 아무도 없었다. 유독 이곳만 썰렁하다 했더니, 다 쫓아낸 모양이었다.

‘음.’

주방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내공이 없는 것으로 보아 숙수(熟手)와 점소이들 같았다.

당양선이 입술을 씰룩였다.

“왜? 놀랐냐?”

놀랐지.

연회장에서 당양선을 찍어 누른 살기는 진짜였다. 어지간한 고수라도 그 정도 살기를 쬐면 상대에게 공포를 느껴야 정상이었다.

한데도 이놈은 이곳 주루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적어도 저놈의 정신력 하나는 인정해 줘야 할 것 같았다. 창응조원들이 보고 배웠으면 싶을 정도였다.

“팔 하나로는 부족했던 모양이군.”

“뭐, 뭐라고?”

당양선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연호정은 그를 깔끔하게 무시하고 주방으로 향했다.

“이보시오.”

“헉! 예, 예!”

주방 구석에 숙수와 점소이들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연호정이 품에서 은전 열 냥을 꺼내 들었다.

“식수와 장정 서른 명 정도가 먹을 음식 좀 부탁하오. 아무거나 빨리 되는 걸로.”

“……에?”

“남은 돈은 가지시오.”

그때, 날카로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야! 이 개새끼야!”

연호정이 당양선을 돌아보았다.

콰직!

화가 났는지 탁자를 걷어차고 일어난다. 전신 가득 무서운 독기(毒氣)가 일렁였다.

“쓰레기 같은 새끼가 감히 날 무시해?”

연호정이 물었다.

“사람들 다 어디로 쫓았냐?”

당양선이 침을 뱉었다.

“알 게 뭐야, 무지렁이들.”

연회에서도 느꼈지만 확실히 당양선의 성격에는 문제가 있었다.

자신을 제외한 모두를 아래로 깔아 본다. 신분 자체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천하에서 손꼽는 명문(名門)의 장자라도 이건 심했다. 부모가 작정하고 악랄한 놈으로 키운 건 아닌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하긴.’

독과 암기를 다루는 가문이었다. 비정(非情)한 손속은 심경에 막대한 영향을 주게 되는 법. 그런 가문에서도 황태자처럼 살았으니,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복수라도 하고 싶었나?”

“복수? 웃기지 마라, 쓰레기. 이건 복수가 아니라 처형이다.”

처형이라?

우웅.

당양선의 두 눈이 자줏빛으로 물들었다. 삼양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무슨 사술을 썼는지 몰라도 이번에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사흘 밤낮을 비명만 지르다 죽게 해 주지.”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같은 칠대세가로 이름을 올린 가문의 장자를 죽이겠단다. 감수할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기분이 나빠서 죽이겠다는 것이다.

당양선의 흰자위에 핏발이 섰다.

“웃어? 감히?”

“같잖아서.”

“이, 이 새끼가!”

연호정이 주방을 둘러보았다. 숙수와 점소이들은 아직도 떨고 있었다.

“주문 안 들어갔소?”

어찌 감히 요리를 하겠는가. 그 악명 높은 사천당가의 장자가 있는데.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청소부터 해야겠군.”

부들부들 떨던 당양선이 일순 차갑게 웃었다.

“병신 같은 새끼.”

연호정은 말없이 어깨를 돌렸다. 아직 완벽하진 않지만 근육은 다 진정된 상태였다.

우우우웅.

당양선의 몸에서 더 짙은 독기가 퍼졌다.

“넌 이미 중독됐어, 병신아.”

“중독?”

“창음독(廠陰毒)을 풀어놨다. 너 같은 하수들은 느끼지도 못…….”

퍼어억!

당양선이 입을 쩍 벌렸다.

어느새 초 근거리까지 접근한 연호정이 그의 복부를 후려친 것이다.

이번 일격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어찌나 강했는지 연호정의 주먹이 당양선의 복부에 손목까지 박혔다.

“쿠웨에엑!”

그 자리에서 허물어진 당양선이 한 움큼의 피를 토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단 일격에 내장까지 다쳤다. 마지막에 힘을 빼지 않았다면 대장과 소장이 가닥가닥 끊어졌을 것이다. 진정한 단장(斷腸)의 고통 속에서 죽어 갈 뻔한 것이다.

물론 지금도 충분히 고통스러웠지만.

“커헉! 크아아악!”

복부를 감싸 쥔 당양선이 바닥을 굴렀다.

내공으로도 통제되지 않는 고통이었다. 죽일 의도가 아닌, 철저하게 고통을 줄 의도로 내친 일격이었다.

미칠 듯한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당양선은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왜?!’

창음독은 무색무취했다. 하지만 그 자체로는 별 효과가 없었다.

삼양공.

극성으로 펼친 삼양공의 독기와 결합한 순간, 상대를 통제 불능의 상태로 빠트리는 게 창음독이었다. 한데 상대는 삼양독기(三陽毒氣)를 쬐었음에도 멀쩡했다.

‘도대체 왜!!’

콰직!

당양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끄아아악!”

부목을 댄 오른팔이 다시 한번 부러져 버렸다. 연호정이 밟아서 재차 부러트린 것이다.

잔인한 공격이었다.

그때, 주루 삼 층에서 급박한 움직임이 일었다.

“머, 멈춰라!”

파아악!

일 층으로 내려온 이들은 바로 당양선을 호위해 온 독룡철편 한호명과 적주대(赤蛛隊) 일 개조였다.

당양선이 홀로 해결하겠다기에 어쩔 수 없이 최고층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래도 창음독을 뿌려 두었기에 조금은 안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격에 승부가 날 줄이야.

한호명이 외쳤다.

“당장 공자님을……!”

꾸욱.

연호정이 당양선의 목을 밟았다.

당양선의 목이 순식간에 푸르딩딩하게 변했다. 안 그래도 고통스러운 와중에 호흡도 못 하게 된 것이다.

아니, 호흡의 문제가 아니었다. 여기서 힘을 더 주면 당양선은 목이 부러져 즉사할 것이다.

한호명과 적주대원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연호정이 한호명을 가리켰다.

“너.”

“……?!”

“앞으로 와.”

한호명이 부들부들 떨었다.

연호정의 동공에 푸른 기운이 맺혔다.

꾸우욱.

“끄르륵.”

당양선의 눈이 돌아갔다. 질식해 죽기 일보 직전인 것이다.

“멈추시오! 가겠소! 갈 테니 멈추시오!”

연호정이 발에서 힘을 뺐다. 그러자 당양선이 거친 호흡을 뱉어 냈다.

한호명이 잔뜩 긴장해서 연호정 앞으로 왔다.

순간 그는 강한 유혹에 휩쓸렸다. 상대와 일 장 거리까지 가까워졌으니 기습을 가하면 당양선에게서 떨어트릴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연호정이 손을 내밀었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그 허리에 매고 있는 두툼한 철편이나 내놔.”

“……?!”

연호정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퍼억! 콰직!

“끄윽!”

당양선의 오른 다리가 부러졌다.

한호명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었다.

“주겠소! 주겠소!”

그가 서둘러 채찍을 건넸다. 탄력 있는 철을 날카로운 조각으로 나눠 박은 철편이었다.

철편을 받은 연호정이 일순 일권을 내질렀다.

퍼어엉!

“컥!”

한호명이 적주대를 향해 날아갔다.

쾌속한 일권, 절묘한 기습이었다. 한호명의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이런 상황에선 막기가 쉽지 않았다.

적주대가 날아오는 한호명을 어정쩡한 자세로 붙잡았다.

그리고 그때, 연호정이 움직였다.

치리리리링!

손에 쥔 철편이 풀어져 나오며 소름 돋는 기음을 터트렸다.

“뭐, 뭐야?”

“조심해!”

한호명을 받아 낸 세 명의 적주대원을 제외한 나머지가 제각기 품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암기를 꺼내 들려는 것이다.

연호정의 눈에 살기가 일었다.

퍼버버버벅!

바닥과 벽에 엄청난 핏자국이 번졌다.

비명도 없었다. 철편은 살아 움직이는 독사가 되어 적주대원들을 무자비하게 휘감아 쓰러트렸다.

‘헉!’

한호명의 눈이 접시만 해졌다.

휘리릭! 퍼어억! 빠각!

철편의 움직임은 상상을 초월했다.

뭘 어떻게 휘둘렀는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이게 초식인지 뭔지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저 철편 수십 개가 허공에서 꿈틀거리는 것만 같았다.

푸화아악!

적주대 일 개조가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공간이 협소해 피할 곳이 없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 대단했다.

철편처럼 다루기 힘든 기병(奇兵)을 협소한 장소에 딱 알맞게 조절하여 상대를 쓰러트리는 건 한호명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연호정의 편법(鞭法)은 무시무시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아니, 이것은 편법이 아니었다. 편법과 비슷하지만, 그보다 훨씬 잔혹한 무언가였다.

‘이, 이럴 수가!’

그게 어떤 무공이든 이 절륜한 위력 앞에서는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적주대가 암기 한번 제대로 꺼내 들기도 전에 모조리 쓰러트리다니?

신기(神技)에 이른 병기술. 그러나 연호정은 만족스럽지 않은 듯 눈살을 찌푸렸다.

‘쇠사슬이었다면 더 나았을 텐데.’

그가 가장 자신 있게 펼칠 수 있는 무공은 바로 도끼와 쇠사슬이었다. 도끼 끝을 쇠사슬로 묶어 적들을 돌파하거나, 쇠사슬 하나로 적 부대 하나를 섬멸한 적도 많았다.

‘나중에 철삭(鐵索)도 하나 구해야겠어.’

눈 깜짝할 새에 이십에 가까운 적들을 전투 불능으로 만들어 놓은 연호정은 철편을 아무렇게나 던졌다.

한호명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자신의 병기로 아군이 당했다. 그것만으로도 기가 차는데, 마치 못 만질 물건이라도 만진 듯 아무렇게나 던져 버리다니?

“이놈!”

쾅!

한호명의 손이 연호정의 등을 향해 휘둘러졌다. 이제는 상대가 연가의 자제인 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때, 연호정의 손이 당양선의 발목을 잡았다.

퍼어어억!

당양선의 눈이 커졌다. 한호명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한호명의 장(掌)이 당양선의 요추에 닿아 있었다.

우두둑.

“끄아아악!”

당양선이 그 자리에서 허물어졌다.

요추 뼈에 금이 갔다. 부러지지 않은 게 다행일까? 하지만 빨리 조치하지 않으면 평생 앉은뱅이로 살게 생겼다.

연호정이 혀를 찼다.

“아군을 때려눕힌 것도 모자라 제 주인까지 병신으로 만들려고? 하긴, 이런 놈 밑에서 굴렀으니 울화가 쌓이기도 했겠지”

“……!!”

“당가주가 이놈들 상처를 보고도 널 중용해 줬으면 좋겠군. 그간 고생 많았을 텐데.”

한호명의 얼굴이 멍해졌다.

당양선은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중얼거렸다.

“네, 네가 왜 날……?!”

퍼억!

연호정의 발길질에 당양선이 정신을 잃었다. 기절한 것이다.

한호명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기절을 시킬 필요도 없었다. 이미 넋이 나가 버렸으니까.

그 앞에 연호정이 쪼그려 앉았다.

“살고 싶은가?”

“……!”

“네가 살 방도를 알려 주지. 내 질문에 먼저 대답한다면.”

한호명이 허망한 눈으로 연호정을 보았다.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하단 말이지. 너나 네 주인 놈이나 평생 중원을 떠돈 게 아니라면, 우리가 이 길로 향할 것을 알긴 힘들었을 텐데. 합비에서 꽤 멀기도 하고.”

“……?!”

“설마 능력 좋은 정보원이라도 구한 거야? 그러기도 쉽지 않을 텐데? 작정하면 못 할 거야 없겠다만, 이 머저리 말마따나 이틀밖에 안 지났는데?”

“그, 그것은……!”

“우리, 괜히 일 어렵게 풀지 말자.”

연호정의 눈에 살기가 일었다.

“우리가 여기로 길 잡은 거, 누구한테 들었어?”

* * *

“헉! 대공자님?”

“왜?”

“오, 옷에 피가……?”

“아, 이거? 별거 아니야. 신경 쓰지 말고 이거나 받아. 양 엄청 많다. 어이쿠, 우리 이공자님은 그새 곯아떨어졌네.”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신모의 눈이 험악해졌다.

“설마, 남궁입니까?”

어제 대공자님이 왜 그리 사건을 크게 키우셨는지 뒤늦게 들은 그였다. 사람을 시켜 그런 짓을 할 정도면 이번에도 남궁현일 확률이 높았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이제는 신경 꺼도 돼.”

순간 신모는 섬뜩함을 느꼈다.

“설마…….”

“어이, 아무리 그래도 내가 그놈을 죽이기야 했겠어? 차라리 병신을 만들지.”

그게 더 끔찍한 거 아닌가?

연호정이 주루 쪽을 바라보았다.

“때로는 칼보다 혓바닥이 더 무서울 때가 있는 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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