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35화 (35/963)

35화. 격(格)의 차이 (1)

“그래서, 나더러 그놈을 쳐라?”

“결과적으로는 그렇지.”

“지랄하는군. 나를 이용해서 그 새끼 멱을 따라는 건데, 누가 봐도 차도살인(借刀殺人) 아냐?”

“해서 그놈을 가만 놔두시겠다?”

“…….”

“그놈은 쓰레기야. 네가 말했듯이.”

“너도 마찬가지다, 쓰레기. 너만 아니었으면…….”

“내가 아니었다면 넌 아직 패배감에 젖어 옷깃이나 씹고 있었겠지.”

“닥쳐라.”

“너희 가문은 은원이 확실하다고 하더군. 너는 그놈에게 원한이 있어. 그리고 난 네게 정보를 줄 생각이지. 간단하지 않나?”

“…….”

“어떻게 하겠나?”

“……꺼져.”

“수락한 걸로 알겠다.”

“하나만 묻자.”

“뭐지?”

“넌 그놈에게 무슨 원한이 있지?”

“원한 같은 것 없다.”

“개도 안 속을 거짓말이로군. 네 눈에서 살기가 보여. 넌 분명 그놈을 증오하고 있어. 극심하게.”

“놈이 나갈 때 연락해 주지. 하든 말든 네 선택이야. 알아서 해.”

“흥! 날 뭘 믿고 그런 얘기를 해 주는 거지? 나한텐 그놈이나 너나 똑같은 병신인데.”

“당가의 자존심만큼은 천하제일이라더군.”

“음흉한 새끼.”

“잊지 마라. 좋은 기회는 항상 지나고 나서야 그게 좋았다는 걸 깨닫게 된다는 걸.”

* * *

“으으윽! 자, 장난 아닌데요?”

연지평은 거의 죽어 가고 있었다.

인생 처음으로 숙취라는 걸 경험하는 중이다. 비틀거리는 모양새를 보니 일어나는 것도 벅차 보였다.

연호정이 혀를 찼다.

“운기해라. 좀 괜찮아질 거야.”

내공이 경지에 오르면 그 자리에서 주정(酒精)을 뽑아낼 수 있다. 다만, 아직 연지평에게는 무리였다.

“어제 대호 형이 말하기를, 내공으로 속을 다스리는 건 주당이 할 일이 아니라고 하던데요?”

“그래서 넌 무인이냐? 주당이냐?”

“운기할게요.”

“그래.”

반 시진 동안 운기를 마친 연지평의 얼굴에는 제법 생기가 엿보였다.

“확실히 낫네요.”

“해장할래?”

“하고는 싶은데…… 아직 뭘 넣기가 좀.”

“그럼 슬슬 준비하자.”

“준비요? 뭘요?”

“집 가야지.”

그러고 보니 연호정은 깔끔한 복색을 갖추고 있었다. 이미 모든 준비를 끝마친 것 같았다.

연지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같이 해산하지 않고요?”

“친분은 충분히 나눴다. 이제는 각자의 생활로 돌아가 본분에 맞는 일을 해야지. 가다가 배가 고프면 그때 적당한 곳으로 들어가자.”

“아…….”

“창응대도 준비가 끝났다.”

“그, 그러면 잠깐 인사나 하고 가요.”

“그래야지.”

연지평은 후다닥 옷을 갈아입었다. 이렇게 빨리 출발할지 몰라서였을까? 아쉬움이 진하게 드러났다.

평소라면 연지평에게 시간을 줬겠지만, 이번만큼은 연호정도 단호했다.

‘실마리를 잡았어.’

명호림과는 더 붙어 볼 것도 없다. 명가의 무공은 습격자들의 무공과 동류였다.

‘언제쯤 연락이 올까.’

가득상의 능력은 탁월하다. 용두방주 시절에도 그렇고, 후개인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책임질 것이 적어 일 처리는 더 빠를 수도 있었다.

그때까지 가문으로 돌아가 만반의 준비를 해 놓는다. 당장 무공만 해도 수습할 부분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빨리 왔으면 좋겠군.’

그렇게 연호정이 창응대를 대동하고 외원으로 향했다.

“허억! 연 형! 벌써 가시게? 아니, 아침이라도 같이 먹고 가지!”

연지평과 친해졌다고 이젠 연호정한테도 치근덕댄다.

하지만 팽대호의 얼굴에 떠오른 아쉬움은 진짜였다. 그것은 팽만호도 마찬가지였다. 참 솔직한 성격인 듯했다.

연호정이 말했다.

“연이 닿으면 언젠가 또 만날 수 있지 않겠소?”

“커흑! 말 한번 섭섭하게 하시네. 그러지 말고 끝난 뒤에 근처 주루에서 한잔합시다. 연 형이 말했잖소! 술 한 잔씩 돌린다고!”

“미안하오. 일이 바빠서.”

“허.”

팽대호가 입맛을 다셨다. 일이 바쁘다는 사람을 붙잡아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팽만호가 진지한 얼굴로 어깨를 드러냈다.

“아직 멍이 빠지지 않았소. 나중에 설욕할 기회를 꼭 주시오.”

“물론이오.”

“헛헛.”

팽대호가 팽만호의 어깨를 토닥였다. 팽만호가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어, 미안하다.”

유쾌한 형제군.

그때, 저 멀리서 제갈 남매가 연지평과 함께 뛰어왔다.

“헉헉! 뭐, 뭐야? 벌써 가려고?”

“그래.”

“왜?! 점심까지 있다가 같이 가지!”

“어차피 제갈세가와는 가는 길이 달라.”

이런 냉정한 녀석.

제갈아연의 얼굴에 아쉬움이 역력했다. 그건 제갈준도 마찬가지였다.

“연 형님. 그럼 한 시진만 있다가 같이 가시죠? 점심만 같이 먹어요.”

대화가 많지 않던 제갈준이 드물게 말을 걸었다.

제갈준은 묘하게 연호정을 어려워했다. 하지만 몇 번의 싸움을 보고 그를 동경하기도 했다. 개인적인 아쉬움으로 치면 제갈아연만큼이나 클 것이다.

연호정이 제갈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제갈준의 눈이 커졌다.

“나중에 강소에 한번 놀러 와라. 구경이나 한번 시켜 주마.”

“예, 예?”

“네 누나 빼고.”

제갈아연이 빽 소리를 질렀다.

“왜 나는 빼?!”

“넌 시끄럽잖아.”

“으으.”

부들부들 떨던 제갈아연이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꼭 가야겠어?”

“할 일이 있어.”

여전히 무심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제갈아연은 그의 표정 뒤에 도사리고 있는 진지함과 다급함을 읽었다.

“……그래, 별수 없지.”

잠시 망설이던 제갈아연이 한숨을 쉬며 품에서 비단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자, 이거 받아.”

“뭔데?”

“받으라면 좀 받아.”

연호정이 찝찝한 얼굴로 금낭을 받았다. 누가 보면 오물을 받는 줄 알겠다.

“본가의 명마패(明磨牌)야.”

“명마패?”

제갈아연이 속삭이듯 말했다.

“본가에서 얼마 전에 병기(兵器) 관련 사업을 시작했거든. 안휘 동남부 쪽에도 사업처가 있어. 그 안에 지도도 있으니까, 혹시 갈 일 있으면 가 봐.”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왜 나한테 이런 걸?”

“내 눈이 옹이구멍인 줄 알아? 창봉술은 네 진짜 무공 아니지?”

용케 그걸 알아봤다. 확실히 보통 눈치가 아니었다.

“주 무기가 뭔진 모르겠지만 시간 되면 가서 봐. 이번 여름에 들인 병기들이 하나같이 상태가 좋다고 했어.”

“나한테 이런 걸 줘도 되나?”

“네 덕분에 제갈세가의 장녀와 장남이 살았어. 이 정도면 오히려 남는 장사지. 아버지가 아시면 천금을 주려고 하실걸?”

연호정이 금낭을 품에 넣었다.

“고맙다.”

제갈아연이 미소를 지었다.

“나중에 또 보자.”

“일없다.”

“다시 만날 때는 그 말투 좀 어떻게 해 봐.”

그때였다.

“연 형! 잘 가시오!”

“평아! 나중에 강소에 들를게! 또 보자!”

“우리 집에 놀러 와라. 술 한 동이를 통째로 안겨 주마.”

팽씨 형제와 제갈 남매 뒤에서 수많은 후기지수들이 손을 흔들었다.

연호정을 보는 사람은 적었다. 그들 대부분이 연지평이 떠나는 걸 아쉬워했다. 그만큼 어제 술자리에서 큰 인상을 받은 것 같았다.

연지평이 밝은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나중에 뵈어요!”

아쉬움은 크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친분을 쌓아 두었으니 나중에 언제든 볼 수 있을 것이다.

연호정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좋군.’

연지평에게는 매력이 있었다. 저 자존심 강한 후기지수들이, 그저 어리다고 귀여워해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사람으로서의 매력을 잘 가꾸기를 연호정은 진심으로 바랐다.

연씨 형제가 등을 돌렸다.

제갈아연이 아쉬운 얼굴로 연호정의 등을 바라보았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진짜 간다고 하니 자꾸만 눈에 밟힌 것이다.

그때였다.

“참 대단한 사람이었죠, 언니?”

제갈아연이 고개를 돌렸다.

“아, 연화구나.”

모용연화였다. 제갈아연과는 다른 차분한 분위기였다.

“벽산연가가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칠대세가로 꼽히게 되었는지 알 것 같아요.”

“그러게 말이야.”

모용연화도 멀어져가는 연씨 형제를 보았다.

순수한 호의와 아쉬움을 담은 후기지수들과는 달리, 그녀의 눈에는 의미심장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다시 만나게 될까?’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그녀는 가문의 중대사 자리에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

그녀가 가주의 딸이라서가 아니었다. 그만한 능력이 있음을 증명했기 때문이었다.

‘어찌 되었든 본가가 삼켜야 할 가문인데, 미련 둘 필요는 없지.’

아버지께서 연가에게 사업을 제안한 것을 알고 있었다.

연가주가 그것을 승낙한다면 한 번은 더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부한다면…… 아마 다시 보기 힘들 것이다.

‘동업을 하든 안 하든, 연가의 미래는 정해져 있어.’

모용연화가 저 멀리 내원의 높은 건물을 힐끔거렸다.

바로 명호림의 거처였다.

“가는군.”

창가에서 외원을 내려다보던 남궁현의 눈은 서늘하기만 했다.

“진곡.”

“예, 공자님.”

“서신을 보내도록 해.”

“……명을 받듭니다.”

남궁현이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남에게는 물론 가족에게도 보여 준 적 없는 기괴한 미소였다.

“사람 잘못 건드렸다, 연호정.”

그때, 연호정이 등을 돌렸다.

‘……?!’

남궁현이 흠칫했다.

먼 거리라 표정을 식별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연호정의 눈이 정확히 이쪽을 향하고 있음은 알 수 있었다.

남궁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꼴도 보기 싫은 새끼!”

그가 거칠게 자리를 떠났다.

* * *

합비에서 벗어난 일행은 소호(巢湖)로 길을 정했다. 그곳에서 식사를 해결한 뒤 곧장 배를 타고 강소로 향할 생각인 것이다.

소호까지의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정확히는 멀지 않게 느껴졌다.

“허억! 허억!”

“후우, 괜찮느냐?”

“아, 안 괜찮아요.”

연지평은 연신 숨을 헐떡댔다. 내공심법을 익히며 호흡이 철저하게 단련된 그도 거의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공자를 호위한답시고 따라오긴 했지만, 대부분의 창응조원도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그나마 멀쩡한 사람을 꼽자면 신모 정도였다.

연호정이 웃으며 연지평을 세웠다.

“너도 아직 멀긴 했다.”

“끄으윽. 숙취 때문에 더 힘들어요.”

“아직도? 다 풀렸을 텐데?”

“이제 다 사라졌어요. 배고파 죽을 것 같아요.”

와중에 배고픔을 느끼는 것도 대단하다. 창응조원들을 보면 배고프고 자시고 일단 쓰러져 자고 싶은 듯했다.

신모가 눈을 엄하게 부라렸다.

“대열을 제대로 정비하지 못하겠는가!”

연호정이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게. 이래서야 창응대라는 이름이 울겠는데?”

신모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대공자님께 이런 말까지 듣다니, 뒷목이 다 뻐근했다.

창응조원들이 허망한 얼굴로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이렇게 사악할 수가 있나.

신모가 버럭 소리쳤다.

“감히 대공자님께 그 무슨 무례냐! 눈들 내리깔지 못해!”

무시무시한 호통이었다. 당장에라도 지쳐 쓰려지려고 하던 창응조원들이 빳빳하게 부동자세로 섰다.

연호정이 신모에게 말했다.

“너무 그러진 말게. 이런 식의 훈련은 저들도 처음일 테니.”

“힘든 훈련에 지친 건 조원들 개인의 잘못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신력이 이따위인 것은 제 잘못이 큽니다. 조원들을 대신하여 사죄드리겠습니다.”

“괜찮아. 무림인이면 저 정도 독기는 있어야지. 어쨌든 낙오한 사람은 없잖나?”

나름대로 다독이려고 한 말이지만 신모의 얼굴은 더더욱 일그러졌다. 조원들의 얼굴은 시커멓게 죽었다.

연호정은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왜일까? 미안하진 않았다.

“움직이기도 힘든 것 같군. 여기서 쉬고들 있어. 내가 먹을 것 좀 구해 올 테니까.”

“대, 대공자님. 제가…….”

“신 대주는 조원들 몸이나 봐주게. 밥 먹고 바로 출발해야 하잖나.”

그 말을 끝으로 연호정은 주루로 향했다. 뒤에서 신모의 우렁찬 호통이 들렸다.

“음, 여기가 좋겠군.”

거대한 호수를 낀 주루 주변에는 의외로 사람이 없었다. 일대에 주루가 이곳밖에 없는데도.

어쨌든 주문을 빨리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연호정은 거침없이 주루로 들어섰다.

삐걱.

주루의 문을 연 연호정은 순간 멈칫했다.

한 줄기 숨길 수 없는 살기가 머리를 강타했다.

“이틀 만인가?”

텅 빈 주루 일 층.

창가 쪽에 방만하게 앉아 있는 청년이 있었다. 오른팔은 부러졌는지 부목을 대고 있었다.

당양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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