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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34화 (34/963)

34화. 확신 (4)

당일 남궁현은 큰 연회를 열었다. 비무도 끝났으니 다들 모여서 술자리로 피로를 풀라는 의도에서였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연회에 참여하지 않았다.

연회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은 한 명 더 있었다.

바로 연호정이었다.

후기지수들은 아쉬워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이번 회합에서 연호정은 큰 화젯거리였다. 그와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러나 또한 사람들은 이해했다.

연호정은 추성과 대결한 이후 후기지수들과 무공 교류를 했고, 마지막으로 명호림과도 싸웠다.

지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휴식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후기지수 회합의 마지막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 * *

한기가 제법 깃든 밤이었다.

거처 후원에 나온 연호정은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이제 운기도 막바지에 들고 있는 것이다.

“후우.”

내쉬는 숨결에 탁한 기운이 뽑혀 나왔다.

초성루에서 마방을 죽였고 당양선을 압도했으며, 추성을 몰아쳤고 명호림과 승부를 겨루었다.

사실, 지금 연호정의 경지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벽라진결은 거의 극의(極意)에 다다를 만큼 해석이 끝난 상황이었다. 흑암제의 안목과 지식 덕에 연성 속도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빨랐다.

그래도 한계는 있었다. 적어도 아직은 강호에서 인정받을 만한 경지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가 모든 승부에서 승기를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였다.

경험.

경험에 녹아든 깨달음이 그만큼 지고(至高)하기 때문에.

충분히 연마되지 않은 내공과 몸을 대신할 만큼 그의 경지가 높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경험과 깨달음이 모든 것을 대신해 주지는 못한다.

부르르르.

운공 중이던 연호정의 어깨가 떨려 왔다.

근육 신경의 혹사 때문이었다. 머리와 본능으로는 가능한 싸움을 육체가 따라와 주지 못했다. 그것을 억지로 끌어내려 하니 몸이 망가지는 것이다.

무려 반나절이 넘도록 기본 운공이 끝나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으음.”

창백했던 연호정의 얼굴에 슬슬 핏기가 돌았다.

‘됐나.’

이제야 보수가 다 되었다. 완전히 나은 것은 아니었지만 활동하기에 무리는 없었다.

“후!”

자세를 푼 연호정이 그대로 자리에 누웠다.

‘뻐근하군.’

온몸이 욱신거렸다. 근육을 넘어 관절까지 삐걱대는 듯했다.

‘더 철저하게 단련해야 해. 지금까지의 수련으로는 모자라.’

주먹을 쥐어 보았다.

힘이 끝까지 들어가지 않았다. 아마 하루를 통째로 쉬어야 나을 모양이었다.

후우웅.

육체가 힘을 잃자 현무기가 저절로 일어났다.

신장 능력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신장 능력이 활성화되자 다른 장기의 움직임도 조금씩, 조금씩 좋아졌다.

‘이 정도면 됐어.’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현무기까지 활성화시켰으니 회복 시간도 더 빨라질 것이다.

연호정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은 몹시 맑았다. 보름달은 아니지만 달빛은 충만했고, 별빛은 신비로웠다.

누구라도 멍하게 보게 되는 멋진 광경.

그러나 하늘을 보는 연호정의 눈빛은 점점 차가워졌다.

“그래, 명가였어.”

정확히는 명가의 무공이었다.

확신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내공이나 초식의 투로는 비슷할 수 있지만, 진기의 운용법이 닮기는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내공심법에 구결과 법문이 따로 적혀 있는 이유는 전수 과정의 엄격함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진기 운용이 구 할 이상을 차지한다.

즉, 각 문파의 내공심법마다 진기 운용법은 확실한 개성을 따르고 있다는 말이다. 같은 계파가 아닌 이상 닮으려야 닮을 수가 없다.

게다가 명호림이 펼쳤던 그 도법.

단순하면서도 힘과 속도를 중시했던 그 도법.

‘그건 원래 도법이었어. 장법이 아니었다.’

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십육 년 전, 동생의 등뼈를 부러트려 버린 습격자의 강력한 장법(掌法)을.

명호림의 도법을 보고 당장 습격자의 무공을 떠올리지 못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그 장법은 원래 명호림이 구사하던 도법이었던 것이다.

‘…….’

힘이 들어가지 않던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때를 기억하니 없던 힘도 알아서 들어가는 것이다.

‘평아.’

왠지 가슴 안에서 뭔가가 울컥 올라왔다.

등뼈가 부러져 죽기 일보 직전의 상황에도 동생은 자신을 보지 않았다. 시선을 돌리면 형의 위치가 발각될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호정은 연지평의 외침을 마음으로 들었다.

‘도망가세요, 형님!’

피눈물은 과장된 표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피눈물을 흘린 사람은 병에 걸렸거나 안구를 다친 사람일 뿐이라고 비웃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 정말 슬프면 피눈물을 흘린다.

연호정이 그랬다.

얼마나 철철 쏟아 냈는지 사흘 밤낮이 지나도 벌건 눈물 자국이 지워지질 않았다. 그렇게 그의 한(恨)은 컸다.

‘다시는.’

스스스.

연호정이 누운 풀밭이 서서히 시들어 갔다. 그가 흘리는 지독한 살기가 잡초를 죽이고 있었다.

‘다시는 후회를 남기지 않겠다.’

그때였다.

“독하구먼.”

연호정이 눈이 빛났다.

벌떡 일어난 그의 눈에 한 사람이 보였다.

“아, 독하다 독해. 얼마나 무서운지 다가가지도 못하겠네. 아이고, 손이야.”

“용…….”

“……두방주는 아니고, 후개요.”

“아.”

“그나저나 그 살기부터 다스리는 게 어떻겠소? 제갈씨들이랑 함께 왔는데, 그 둘은 놀라서 먼저 숙소로 가 버렸소이다.”

연호정은 깜짝 놀랐다. 자신이 살기를 흘리고 있는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스르르.

섬뜩한 공기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가득상은 솔직하게 감탄했다.

“정말 보면 볼수록 대단하구먼. 살기는 곧 의지의 한 갈래라, 정신력이 강할수록 살기도 강해지기 마련이지.”

“…….”

“왜 그런 살기를 품고 사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 정말 대단하오.”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몸이 뻐근했지만 앉아서 맞아도 될 사람이 아니었다.

“여기까지는 어인 일로?”

“이거.”

가득상이 큼직한 보따리 두 개를 들어 보였다.

“나랑 점심 한 끼 하자고 했잖소? 한데 날름 빼먹더이다.”

“아…….”

“아? 크하핫! 그런 소리도 낼 줄 아쇼? 거 사람 보면 볼수록 매력 있어? 응?”

연호정이 야외 탁자 하나를 가리켰다.

“저기서 먹읍시다.”

“좋지. 술도 가져왔소.”

이미 상당량 마셨을 것이다. 달빛을 받은 가득상의 얼굴은 불콰해져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자리에 앉았다.

“평이는?”

“지금 한참 잘 놀고 있소이다. 형이니 알겠지만, 이공자 성격이 참 좋소. 너도나도 옆에 끼고 싶어 안달이 났더구먼.”

“그렇군.”

“자, 한 잔 받으시오.”

연호정은 정중하게 잔을 들었다.

가득상이 피식 웃었다.

“그러지 말고 편하게 받으시오. 거지 놈한테까지 예의 차릴 필요 없소이다.”

“주시오.”

“허! 고집 세단 소리 많이 듣지 않았소?”

잔을 받은 연호정이 이번엔 가득상의 잔을 채워 주었다.

가득상은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천하를 방랑하는 거지 대왕의 자유로움이 절로 느껴졌다.

“한잔합시다.”

“그럽시다.”

두 사람이 시원하게 잔을 넘겼다.

“크, 칠대세가가 돈이 많기는 많나 보오. 이게 그 유명한 소흥주라면서?”

“그런 모양이오.”

“처음 마셔 봤소. 만날 싸구려 백주만 벌컥대다가 이름난 술을 마시니 눈이 핑핑 돌아가는구먼.”

목을 긁어 가래를 모으더니 퉤! 하고 뱉어 낸다.

다리 하나를 척 하니 올리고 배를 두들기는 모습이 자유분방함의 극치였다. 하지만 그 모습이 전혀 밉지 않았다.

“몸은 괜찮소?”

“괜찮소.”

“그래 보이는군. 근육을 잔뜩 혹사하더니만 벌써 다 가라앉혔어. 굉장하오.”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근육을 혹사한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과연 젊었을 적부터 보통 안목이 아니었다.

“역시 후개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닌가 보오.”

“당연히 아무나 될 수 없지. 가장 거지 같은 놈이라야 후개가 될 수 있지.”

어감이 좀 묘하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가득상이 마주 웃었다.

“거 웃는 모습 참 보기가 좋소. 얼굴에 힘주지 말고, 그렇게 웃고 다니시오.”

“웃을 일이 생기면 자주 웃을 거요.”

“하하하! 그것도 맞는 말이오. 하면 근래 연 공자에겐 웃을 일이 별로 없었던 모양이오?”

웃음 속에 칼이 있고, 농담 속에 비수가 들었다.

연호정은 굳이 숨기려 들지 않았다.

“웃을 일 많은 놈이 이 난리 치고 다니겠소?”

“그러게나 말이오. 듣자 하니 어제는 당가의 장자 놈을 작살내 놓으셨다고?”

“그 얘기도 들었소?”

“일흔여섯 번까지 세고 그만뒀소. 너도나도 입술이 불어 터지라고 떠들어 댑디다.”

“교육 잘못 받은 놈 같았소.”

“그런 것 같더군. 하지만 너무 간 감이 있었소. 당가가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텐데.”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상관없소.”

상관없다.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인생을 포기한 것 같지는 않았다.

뭔가 더 깊은 질문을 하려던 가득상은, 이내 헤벌쭉 웃으며 잔을 들었다.

“자! 한잔 더 합시다!”

“그럽시다.”

두 사람은 연거푸 술을 마셨다.

희한한 자리였다. 가득상은 오늘 연호정을 처음 만났다.

그런데도 두 사람의 분위기는 오래 만난 친구처럼 깊고 편안했다. 굳이 노력하려 하지 않아도 알아서 그런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그렇게 반 시진이 지나갔다.

“고맙소.”

“뭐가 말이오?”

“초성루 때 말이오.”

“…….”

“루주가 그럽디다. 연가 덕분에 살았다고. 혹시라도 만나면 고맙다고 전해 달라던걸?”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언급하는 것조차 께름칙해하지는 않고?”

“호오? 어떻게 알았소?”

“그냥 그럴 것 같았소.”

“그냥이 아니지. 아무리 악인이라도 사람을 산 채로 불태워 죽였으니, 겁먹지 않을 위인이 어디 있나?”

연호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가득상은 확신했다.

‘감정이 없는 사람은 아니야.’

자신이 한 일이 어떤 일인지, 어떻게 보이는 일인지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이 청년은 자신의 신념을, 잣대를 바꾸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자신에게는 옳은 일이니까.

물끄러미 연호정을 보던 가득상이 과장되게 기지개를 켰다.

“아이고, 간만에 왕창 들이켰더니 피곤하구먼. 얼추 다 먹었으니 정리나 합시다.”

“그 전에 하나만 부탁합시다.”

가득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부탁이라? 그가 본 연호정은 누군가에게 부탁 같은 것을 할 위인이 아니었다.

흥미가 동했다.

“무슨 부탁이길래?”

“아니, 부탁이란 말은 좀 그렇군. 의뢰 좀 합시다.”

“의뢰라……. 우리야 뭐, 정보로 큰돈 만지면서 살기야 하니까. 하지만 같은 백도의 일원인데 의뢰 같은 절차가 필요하겠소? 어지간하면 알려 드릴 테니, 내용이나 말해 보쇼.”

연호정은 몇 가지를 말했다.

가득상의 얼굴이 굳어졌다.

“진심이오?”

“그렇소.”

“……첫 번째 부탁이야 들어줄 수 있소. 두 번째야 더 쉽지. 하지만 세 번째 부탁이 얼마나 어려운 건지는 알고 있소?”

“아니까 의뢰하려고 했던 거요.”

“…….”

“힘들면 관둬도 괜찮소.”

“잉? 누가 힘들대? 안 힘들어, 안 힘들어! 할 수 있소.”

“과연 개방이오.”

“다만, 궁금할 뿐이오. 의뢰비는 안 받을 테니 이유나 좀 압시다.”

연호정의 눈이 파랗게 빛났다.

달빛을 닮은 그 눈빛은 귀신의 눈알처럼 섬뜩했다.

“후개께서 제대로 파고든다면……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될 것이오.”

조사하는 과정에서 절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가득상이 씨익 웃었다.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말이로군. 거 보면 볼수록 나이답지 않게 사람을 들었다 놨다 잘해.”

“칭찬으로 듣겠소.”

“칭찬 정도가 아니오. 대체 정체가 뭐요, 당신?”

“벽산연가의 대공자, 연호정이오.”

그게 전부는 아닐 거라고 가득상은 확신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어찌 되었든 먼저 가겠소. 귀하가 요청했던 건 근시일 내로 알려 드리리다.”

“비밀 엄수는?”

“놀리는 거요? 당연한걸.”

“알겠소.”

가득상이 웃으며 몸을 돌렸다.

“내일 조심하시오. 자존심에 상처 입은 어린 맹수들이 물어뜯으려 들지도 모르니까.”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채, 가득상이 사라졌다.

연호정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달은 그곳에 있었다.

자신의 시린 눈빛과 꼭 닮은, 보름달이 되지 못한 어정쩡한 달이.

“……슬슬 달려 볼까?”

푸스스.

연호정이 밟은 땅의 잡초들이 순식간에 시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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