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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33화 (33/963)

33화. 확신 (3)

명호림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긴장이 묻어 나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변에서 쉬고 있던 후기지수들도, 대련 중이던 이들도 두 사람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연호정은 뇌협 추성을 꺾으며 자신의 실력을 증명했다.

명호림은 천하제일가의 삼공자이며, 이곳의 그 누구보다도 무공을 깊게 연성했다.

그런 두 사람이 마주하자 알 수 없는 적막이 일었다.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곳에서 가장 강한 두 사람의 비무인 것이다.

당연히 주목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명호림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다소 늦기는 했소만, 추 단주와의 결투 잘 보았소.”

“고맙소.”

“굉장한 창술이더군. 연가에 그런 무공도 있었소?”

“명가에 비할 바는 아니오.”

명호림이 사람 좋게 웃었다.

“양보다는 질이 중요하지 않겠소. 한 번도 본 적 없는 신묘한 창술에 개안(開眼)했소.”

연호정 역시 마주 웃었다.

“나 역시 천하제일가의 진짜 무공을 견식해 보고 싶소.”

의미심장한 한마디였다.

명호림은 그의 속내도 모르고 웃었다.

“하하, 연 공자 성에 찰까 모르겠소.”

“겸손하시군.”

부웅.

철봉의 중간을 잡고 돌린 연호정은 이미 준비가 끝난 것 같았다.

“지저분한 자리긴 했소만, 서로 맛보기는 끝났으니 바로 본편으로 넘어갑시다.”

맛보기라 함은 바로 근거리 박투를 뜻하는 것이었다.

명호림은 어제의 박투를 떠올리며 표정을 굳혔다.

‘보통이 아니었어. 그리고 오늘도.’

추성과의 싸움에서 보여 준 수법들은 하나하나가 실전적이었다.

그러나 명호림은 흉흉한 초식 안에 숨겨진 연호정의 진짜 능력을 보았다.

‘무공이 좋아서가 아니야. 요(要)는 그 무공을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펼치냐다.’

연호정은 자신의 무기를 최적의 순간, 정확하게 구사할 줄 알았다.

그것은 누구라도 어려운 일이었다. 재능도 재능이지만 엄청난 수의 실전이 없다면 불가능한 방식이었다.

대체 이 젊은 청년은 어디서 그런 실전을 겪은 것일까?

‘게다가…….’

추성이 초반 삼 초식을 받아 낼 때.

‘그때, 분명 뭔가가 있었는데?’

알 수 없는 기세가 추성을 얽맨 것을 느꼈다.

아니, 정확히는 그런 것 같았다. 연호정이 뭔가를 한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정확히 파악하진 못했다.

‘그게 뭐든, 보이는 것 이상의 뭔가를 갖고 있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어.’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시작하시겠소?”

“좋소.”

명호림이 바닥에 떨어진 목도(木刀)를 들었다.

완만하게 휘어진 목도였다. 목검과는 달랐다.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도법(刀法)?’

그는 과거, 가문이 의문의 무리에게 침공받았을 때를 떠올렸다.

지난 생이든, 과거로 회귀한 지금이든 그때의 상황을 잊은 적이 없었다. 충격이 워낙 커서 거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분명 도객(刀客)도 있었다.’

도객만이 아니었다. 검객, 권사(拳士)는 물론 창수(槍手)도 있었다.

습격자들은 하나같이 강호에서 가장 흔하게 쓰이는 병기를 썼다. 특성이 명확한 암기나 원앙월(鴛鴦鉞), 채찍이나 철필(鐵筆)을 쓰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만약 명가가 정말로 연가를 습격한 배후 가문이라면.

그리고 그 가문의 삼공자인 명호림의 도법에서 그들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면.

진정 명가가 범인이라면, 앞으로 어떻게 움직여야 할까?

‘…….’

연호정은 상념을 지웠다.

‘명가가 아닐 수도 있어.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일부러 수련장 분위기를 조성한 것은 단순히 명호림과 겨루기 위함이 아니었다.

이들 모두와 겨뤄 보기 위함이었다. 혹시라도 자신이 놓친 게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타 가문의 무공에서 습격자들의 무공과 유사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반면 어제, 명호림의 기세에선 습격자들과 비슷한 느낌의 이질감을 느꼈다.

스슥.

명호림이 자세를 낮추었다.

“자, 나는 준비가 끝났소.”

“나 역시.”

“하면 시작합시다.”

파악!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에게 뛰어들었다.

혼신의 힘을 다한 것이 아님에도 빨랐다. 이곳에서 수련하는 누구보다도 쾌속한 보법이었다.

연호정은 거침없이 무공을 전개했다.

쐐애액!

선풍봉법이 펼쳐졌다. 바람처럼 자유롭고 부드러운 봉술이 명호림의 어깨와 옆구리를 동시에 노리고 날아들었다.

명호림의 눈이 번쩍였다.

‘강해!’

단 한 수로 알 수 있었다. 연호정의 병기술이 얼마나 대단한지.

맨손 박투 대결과는 차원이 다르다. 벽라진기를 뽑아내 휘두르는 봉술은 가벼움과 무거움이라는 상반된 성질을 동시에 담고 있었다.

명호림이 목도를 휘둘렀다.

까가가강!

훌륭한 대처였다.

쌍수도(雙手刀) 형태의 목도를 휘두르는 명호림의 움직임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묵직한 철봉의 힘을 근본부터 차단하고 있었다.

연호정의 발이 땅을 밟았다.

쿵!

강하게 올라온 반탄력이 허벅지를 타고 올라 허리에 힘을 보충했다.

파아아앙!

일순간 터져 나오는 찌르기.

허리의 회전력을 받아 내지르는 일격이 굉장히 빨랐다. 명호림은 재빨리 자세를 낮추고 목도를 상단으로 쳐 냈다.

카가각!

명호림의 눈이 흔들렸다.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목도의 표면이 봉의 찌르기에 살짝 파였다는 걸.

‘엄청난 힘!’

터엉!

철봉을 밀어 내고 후방으로 몸을 날린 명호림은 순간 깜짝 놀랐다.

쐐애액!

뒤로 물러날 줄 알았다는 듯, 어느새 연호정이 접근하고 있었다.

그 거리가 엄청나게 가까웠다. 목도를 휘두를 새가 없을 정도로.

동시에 철봉도 움직이고 있었다. 횡격(橫擊)으로 들어오는 철봉은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살짝 휘어져 있기까지 했다.

‘막을 수 없다?!’

몇 합 겨루지도 않았는데 수세에 몰렸다.

이대로 가다간 반드시 당한다. 박빙의 승부도 아니고, 실수를 한 것도 아닌데 꼴사납게 쓰러지게 생긴 것이다.

‘방심……!’

상대의 초식 운용이 대단하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이 지경까지 몰렸다. 방심했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방심. 패배. 실수.

세 개의 단어가 명호림의 자존심을 자극했다.

후욱! 카아아앙!

철봉을 잡아 휘두른 팔이 묵직해졌다.

어느새 목도가 철봉을 막고 있었다. 절대로 막을 수 없는 시기였는데도 막은 것이다.

우우우웅.

양손으로 목도를 쥔 명호림의 몸에서 은은한 금빛 기운이 일었다.

연호정의 눈이 번쩍였다.

드디어 명호림이 진짜 힘을 꺼내 든 것이다.

화아아아.

뿜어져 나오는 금빛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기질의 대단함 이전에, 진기를 이 정도로 유형화(有形化)할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었다.

‘대단해.’

가득상은 감탄을 터트렸다.

‘저만큼 선명한 기운이라면 절정고수라 해도 손색이 없어.’

터어어엉!

연호정이 뒤로 물러났다.

명호림은 곧바로 공격을 감행하려다 화들짝 놀랐다.

연호정은 그냥 물러나지 않았다. 봉 끝을 잡고 내뻗어 휘두르는데, 강력한 발경(發勁)이 가슴까지 치고 들어왔다.

채찍 끝에 달린 송곳이 날아오는 것 같았다. 단순한 내공 방출로는 막을 수가 없었다.

“합!”

콰앙!

사선으로 깔끔하게 내리친 일도(一刀)에 경력이 터져 버렸다.

후우욱!

연호정이 다시 짓쳐들어왔다. 자세를 되돌리기도 전에 공격을 해 온 것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체력이었다.

공격과 회피가 너무 빨랐다. 문제는 이런 식의 공방은 체력 소모가 극심하다는 점이었다. 아니, 그 전에 근육을 지나치게 혹사하는 전투술이었다.

실제로 연호정의 몸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근육을 한계까지 쥐어짜고 있기 때문이었다.

‘보여 줘라.’

연호정이 철봉을 휘둘렀다.

팔방을 점하며 몰아치는 봉술에 명호림이 연신 물러났다.

‘네 무공을 제대로 펼쳐 봐!’

쿵!

봉첨이 청석 바닥을 부쉈다.

바로 그때, 명호림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터어어엉!

연호정의 눈이 커졌다.

한순간 팔이 늘어난 것처럼 목도를 사선으로 내리치고 있었다.

절묘한 반격술이었다. 명호림의 반사 신경이 아니라, 무공 초식 자체가 반격에 중점을 둔 것이었다.

카앙!

재빨리 철봉을 수거해 막았지만 그 충격이 진하게 남았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명호림의 도법은 이제 시작이었다.

쿠웅!

대지를 박차고 나아가는 명호림.

구주명가의 진신무공 금라신공(金羅神功)에 이은 참마도법(斬魔刀法)이었다. 만들어진 지 한 세대가 지나지 않은, 그런데도 혈육에게만 전수되는 강력한 무공이었다.

카앙! 카가가강!

양손으로 휘두르는 도법은 장중하고 강력했다.

하지만 투로에는 큰 특색이 없었다. 단순한 것이 강하다는 진리를 대변하는 듯, 단순한 움직임에 강한 힘과 빠른 속도를 부여했다.

카가가강!

순식간에 연호정이 밀려났다. 양손으로 철봉을 돌려 가며 막고 있지만, 반격은 제대로 안 되는 모양이었다.

명호림의 눈이 번뜩였다.

한번 승기를 잡았으니 끝을 보겠다는 심정이었다. 그는 금라신공의 힘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지이이잉!

금빛 진기가 더 환하게 타올랐다.

동시에 목도에 실린 기운이 서서히 회오리쳤다.

‘……?!’

연호정이 눈을 부릅떴다.

‘이건?!’

목도의 삼격(三擊)이 날아오고 있었다.

투로(套路)도, 초식이 담고 있는 이치도 다르다. 그러나 저 칼날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기운만큼은 본 적이 있었다.

정확히는 기의 운용법을 본 기억이 있었다.

카가가강! 쿵!

강력한 일도에 철봉이 튕겨 나가 땅을 긁었다.

칼날에 담긴 진기가 제멋대로 회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회전은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연호정의 눈이, 기감이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중원 무공과는 근본부터 다른 이질감.

겉으로는 정직함과 깊이를 담은 것처럼 보이지만, 내공의 운용 방식 자체가 중원 무공과는 판이하였다.

그리고 저 무공은…….

‘장(掌)!!’

순간 연호정의 눈이 새파랗게 빛났다.

부우웅! 콰앙!

“크으윽!”

명호림의 몸이 뒤로 쭉 밀려 나갔다.

그의 눈이 흔들렸다.

‘어, 엄청난 무공!’

그는 목도를 바라보았다.

목도가 거의 다 분질러져 있었다. 금라신공을 전력으로 끌어올리지 않았다면 이번 일격으로 중상을 입었을 것이다.

명호림이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츠츠츠츠.

연호정의 몸에서 시퍼런 기운이 일렁였다. 금라신공에 뒤지지 않는 연가의 오대무공, 벽라진결이 타오르고 있었다.

양손으로 철봉을 잡고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였다. 한데 그 철봉을 잡은 자세가 이상했다.

창봉술이 아니라 마치 언월도나 커다란 도끼를 쥐고 있는 듯한 자세.

순간 명호림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진짜 무공이 아니다!’

그렇다. 지금까지 연호정이 보여 주던 박투술, 봉술은 물론 창술까지.

그 모든 것이 연호정의 진짜 무공이 아니었다. 연호정이 진신절학은 그보다 훨씬 강하고, 훨씬 폭발적인 무언가였다.

사락.

연호정이 고개를 숙인 채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인사를 하는 것 같기도 했고, 얼굴을 보여 주고 싶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비무는 이쯤으로 끝내는 것이 좋겠소.”

착각일까? 연호정의 목소리는 어딘지 조금 갈라진 것처럼 들렸다.

부러진 목도를 버린 명호림이 포권을 취했다. 포권을 쥔 그의 양손이 미미하게 떨렸다. 충격이 너무 컸던 것이다.

“많이 배웠소.”

“나 역시. 그럼.”

그 말을 끝으로 연호정은 연무장을 가로질러 내원으로 향했다. 어찌나 빠르게 걷는지 연지평도 그를 따라잡지 못했다.

내원의 숙소로 향하는 외길.

연호정의 두 눈에서 끔찍한 살기가 이글거렸다.

“……명가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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