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32화 (32/963)

32화. 확신 (2)

남궁현의 몸이 굳어졌다. 그것은 좌중도 마찬가지였다.

남궁현은 자신의 잘못을 고백한 것만으로도 체면이 크게 상했다. 당분간 얼굴을 들고 다니기도 힘들 것이다.

그러나 연호정이 이 사과를 받아 주지 않으면 진짜 사건이 커진다. 이제부터는 체면 이전에 자존심 문제가 되는 것이다.

연호정이 빙긋 웃었다.

해사한 그의 웃음은 너무나도 밝아 보였다.

“알다시피 나는 무(武)를 좋아하는 사람이오.”

뜬금없이 이게 무슨 말인가?

“잘못을 고백한 것까지는 좋은데, 마무리가 너무 텁텁하지 않소?”

명호림의 눈이 흔들렸다.

“……설마, 남궁 아우와도 비무를 할 생각이오?”

싸늘한 정적 아래,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곳에서 연호정의 실력을 못 본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연호정의 무공은 강하다. 단순히 후기지수 수준이 아니라, 당장 강호에 나가도 통할 만한 실력자인 것이다.

그의 창끝이 남궁현에게 향하게 된다면 남궁현은 결코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전쟁이다. 남궁세가는 이번 일을 절대 묵과하지 않을 것이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추성과의 비무는 무인과 무인의 자존심이 걸린 대결이었소. 그러나 남궁 공자가 사과한 이상, 더는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소.”

“하면?”

연호정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들 알다시피 후기지수 회합은 말이 회합이지 친목 도모에 가깝지 않소?”

“그렇소만?”

“술 한 잔에 우정을 나누는 것도 좋지만, 진정 서로를 알아 가는 데에는 손을 나누는 것만큼 좋은 게 없지.”

“……!”

“어떤 일이든 교류와 자기반성이 있어야 성장하는 법이오. 무공도 같소. 진정 친목 도모를 하고 싶다면, 우리 무인답게 해 봅시다.”

부웅!

연호정이 아무렇게나 창을 던졌다.

놀랍게도 그 대상은 연지평이었다.

타아악!

연지평은 솜씨 좋게 창을 받아 냈다.

모두의 얼굴에 감탄이 일었다.

연지평은 이 모임에서 가장 어렸다. 그런데도 제법 빠르게 날아온 창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냈다.

연호정이 연무장에서 내려왔다.

“팽 소협.”

“응? 어? 아? 나, 나 말이오?”

“내 동생의 재능은 본가 제일이오. 하지만 아직 어린 것도 사실이지. 동생에게 한 수 가르침을 내려 주시겠소?”

“으이잉?!”

연호정이 연지평을 바라보았다.

연지평도 얼떨떨하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형의 눈빛을 본 연지평은 빙긋 웃어 보였다.

‘형님은 정말 능구렁이 같군요.’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냐. 이왕 이렇게 된 거, 많이 배워라.’

연지평이 팽대호를 향해 절도 있게 포권했다.

“벽산연가의 연지평입니다. 팽 형에게 한 수 지도를 청해도 되겠습니까?”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연호정과 연지평을 보던 팽대호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와하하하! 내 두 손, 두 발 다 들었소이다! 연가 사람들은 다 이렇소?”

“나만 별종이오. 아버지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날 가만두질 않으실 것이오.”

“크하하하! 좋소! 안 그래도 연 형 덕에 손이 근질근질하던 참이오!”

“살살해 주시오.”

“살살하긴! 우리 연 동생 한 수를 보니 살살했다간 내가 당하게 생겼는데!”

팽대호가 등을 돌려 외쳤다.

“야! 만호야!”

“왜 불러.”

“너도 쪽팔리게 가만히 있지 말고, 연 형한테 몇 수 배우다 와라!”

“……연 형 실력 봤잖아? 개처럼 두들겨 맞을 것 같은데.”

“새끼야, 그것도 다 배움이야!”

“어험!”

팽만호가 어슬렁거리며 연호정 앞으로 다가왔다.

“살살해 주시겠소?”

“배울 만큼은 아파 봅시다.”

“아, 젠장.”

연호정이 의아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눈을 끔뻑였다.

연호정은 피식 웃고는 팽만호를 끌고 연무장 구석으로 갔다.

그걸로 끝이었다.

아무 말 없이 등을 돌리는 그 모습은 후기지수들의 혈기를 엄청나게 자극했다.

쉴 테면 쉬어라, 알아서들 해라 따위의 말도 없지만, 이미 연호정의 표정이 다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러고도 너희가 무림인이냐는.

가슴이 부글부글 끓었다. 분노가 아니라 호승심이 들끓고 있는 것이다.

그때, 명호림이 말했다.

“생각해 보면, 연 공자의 말도 일리가 있구먼.”

어색해진 분위기를 단번에 휘어잡는 목소리였다.

“친목 도모도 좋지만 우리는 무림인 아닌가? 칼 한 자루에 목숨을 거는. 생각해 보면 이런 기회도 흔치 않아.”

등 돌려 걸어가는 연호정의 눈이 무섭게 번뜩였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명호림이 유쾌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자, 누가 명가의 무공을 받아 볼 텐가?”

그때, 모용연화가 나섰다.

“예전부터 명가의 무공이 궁금했어요. 이번 기회에 견식해 봐도 될까요?”

“나야 영광이지.”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연씨 형제와 팽씨 형제를 시작으로 명호림, 모용연화까지 나서니 다른 후기지수들도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연호정과 추성의 호쾌한 싸움을 보면서 이미 잔뜩 흥분해 있던 그들이었다. 가만히 있기에는 달아오른 이 기분에게 너무 미안했다.

“허험! 뭐, 조금 갑작스럽기는 하지만…….”

“어쩌겠어? 다들 그러겠다는데. 근데 안 그래도 손이 근질근질하긴 했지. 며칠 동안 워낙 푹 쉬어서 말이야.”

“그렇지? 가문에 있을 때는 이렇게 오래 쉬어 본 적이 없는데.”

“제갈 소저! 나랑 한번 붙어 봅시다!”

“어허, 제갈 소저는 나랑…….”

“모용가의 꼬마. 이 누님한테 가르침 좀 받으련?”

“저 꼬마 아니거든요? 근데 누나 강해요?”

침묵 가득했던 외원이 서서히 활기를 찾았다.

처음은 어색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나서기 부끄러워하는 사람들도 판이 벌어지고 분위기가 달아오르면 이유를 생각하지 않게 된다.

이윽고 외원 전체가 후기지수들의 수련장이 되었다.

각자 상대를 잡은 이들은 진지하게 손을 나눴고, 짝이 없는 사람은 운공조식으로 내공을 수련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배웠다 싶으면, 서로 짝을 바꿔 가며 비무를 벌였다.

툭 하고 던진 불씨 하나가 온산을 태우는 것처럼, 뜬금없이 장원 전체에 기합성과 파공성이 울렸다.

가득상이 묘한 얼굴로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은 연무장 구석에서 팽만호를 상대하고 있었다. 표정과 몸짓을 보면 진심으로 상대해 주는 것 같았다.

“참 모를 사람이네.”

후기지수들은 물론 호위무사들도 조금 전의 일을 잊은 모양이었다. 그리 살벌했던 승부를 더는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보아하니 뭔가 원하는 게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가득상이 머리를 긁적였다.

‘허! 혼자서 이 많은 사람의 기분을 좌우해?’

보통 수완이 아니다. 무공과 언변은 물론, 본인이 원하는 분위기로 끌고 가는 능력이 탁월했다.

한데 그것이 밉지 않았다. 억지로 상대를 휘두르는 게 아니라, 알아서 행동하게끔 유도하기 때문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에엥?”

가득상이 옆을 바라보았다.

제갈준이 거기에 있었다.

“제갈세가의 제갈준입니다.”

“아! 알지, 알지.”

“후개 선배님의 무공은 놀라운 수준이더군요. 실례가 안 된다면, 한 수 가르침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가득상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제갈준의 제안에 놀랍게도 자신 역시 손이 근질근질해진 것이다. 결국 자신도 이 분위기에 휩쓸린 셈이었다.

가득상은 그 사실을 거지답게 인정했다.

“좋수다! 우리도 즐겁게 놀아 봅시다!”

“감사합니다!”

모두가 깊은 열정으로 서로의 무를 겨루는 자리.

그 자리에 남궁현은 없었다.

* * *

쾅!

거처로 돌아온 남궁현이 주먹으로 벽을 뚫었다.

“헉헉!”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 표정은 무섭게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화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남궁현이 벽을 향해 마구 주먹질했다.

“으아아!”

퍽! 퍽! 퍽!

너무 화가 나서 내공도 제대로 담지 못했다. 그의 두 주먹이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다.

‘이런 치욕이라니.’

이십 년이 넘도록 살면서 이런 굴욕은 처음이었다.

냉철한 이성과 뛰어난 재능으로 향후 남궁세가의 기둥이 될 거란 평가를 받으며 자랐다. 대공자인 형이 있지만, 그는 자신의 재능이 형에 비해 모자란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오죽하면 아버지도 자신에게 이번 일을 맡겨 주었겠는가. 그만큼 자신을 믿은 것이다.

한데 이게 뭔가? 연호정의 콧대를 누르기는커녕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망신을 당했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남궁상화가 일으킨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나섰지만, 자신이 한 행위도 몹시 치졸했다.

지금이야 분위기에 휩쓸려 너도나도 수련 중이지만, 수련이 끝나면 누구라도 이 사실을 외부에 알릴 것이다.

남궁현의 얼굴이 더더욱 빨갛게 물들었다. 사람들이 뒤에서 속닥거리는 걸 상상하니 머리가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이 쳐 죽일……!”

너무 화가 나서 남궁상화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것! 사고 치지 말라고 보냈더니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놔? 개 같은!”

남궁상화만 아니었다면 자신이 이런 망신을 당할 이유도 없었다.

연호정이 동생 얘기를 괜히 꺼낸 게 아니었다. 놈은 남궁상화의 패악질을 볼모 삼아 자신을 협박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미친 새끼!’

연호정도 미친놈이었다. 그 일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꺼내면 연가도 고달파질 것이 분명했다. 남궁세가는 이 치욕을 절대 잊지 않을 테니까.

다만 그놈의 눈빛은 진짜였다. 정말로 다 죽자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나섰고, 결과는 최악이었다.

“죽여 버리겠어. 반드시 죽인다!”

살기 가득한 음성이었다.

인생 최초로 굴욕을 안겨 준 놈. 남궁현은 진심으로 연호정을 죽이고 싶었다.

‘대체 왜 그런 놈에게 아연이가?’

놈에 대해 생각하니 제갈아연이 떠올랐다.

‘……!!’

남궁현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자신을 향한 제갈아연의 실망스러운 눈빛을.

활활 타오르던 분노가 다시 한번 출렁거렸다.

제갈아연은 자신을 그렇게 봐선 안 됐다. 차라리 안타까워했으면 모를까, 그따위 눈으로 자신을 보면 안 된다.

“씹어먹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 상황도, 연호정도, 심지어 제갈아연조차도 지금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참 거친 숨을 몰아쉬던 남궁현이 외쳤다.

“진곡!”

잠시 후, 검사 한 명이 들어왔다. 추성과 함께 온 호위대 중 최고 고참이었다.

“부르셨습니까.”

“…….”

“이공자님?”

남궁현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을 본 진곡은 흠칫했다.

“당가 놈, 지금 어디에서 치료받고 있지?”

* * *

“잘 배웠습니다!”

“나도 잘 배웠네. 대단하구먼, 팽가의 도법도. 과연 하북의 패자라 불릴 만해.”

“크하하! 아직 절반도 제대로 못 익혔습니다. 나중에 또 부탁드립니다!”

“그럼세. 근데 자네…… 괜찮나?”

“제가 몸 하나는 튼튼합니다!”

“그 어깨에 멍 자국, 그거 철봉으로 맞은 건가?”

“……자자, 먼저 가 보겠습니다!”

팽대호가 줄행랑치듯 다른 사람을 찾았다.

명호림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힘들군.’

간만에 타류 무공 몇 종을 상대하니 어깨가 다 뻐근했다.

‘얼추 다 돌았나?’

그때였다.

“기다리고 있었소.”

명호림이 고개를 돌렸다.

견봉에 철봉을 걸친 연호정이 싸늘한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당신이 마지막이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