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싸움의 이유 (4)
웅성웅성.
연무장 주변은 소문을 듣고 온 후기지수들과 호위무사들로 가득했다.
당연히 창응대도 있었고, 그들의 표정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대공자님!”
“어, 신 대주.”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였다.
“설명하기 복잡해. 어쨌든 그렇게 됐어.”
신모가 표정을 굳혔다.
“안 됩니다. 이 비무, 지금이라도 취소하셔야 합니다.”
“그건 안 돼.”
“대공자님! 저자는……!”
“저 짐승의 실력은 나도 잘 알아. 성격은 뭣 같아도 단단한 기도가 인상적이더군. 나름 치열하게 싸워 온 것 같아.”
감각만으로 상대의 힘을 느꼈다는 것이다.
평소라면 그 뛰어난 감각에 감탄부터 하겠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제가 직접 가서 이 비무를 취소토록 하겠습니다.”
“신 대주.”
“대공자님!”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자네가 이 비무를 취소하겠다며 난동을 부리는 건, 오히려 본가의 명예에 흠집을 내는 거라네.”
“……!”
“그래서 내가 상황이 복잡하다고 했잖아? 이왕 벌어진 일, 믿고 기다리게. 마냥 걱정만 해 주는 게 아랫사람의 덕목은 아니야.”
신모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연호정의 뜻을 왜 모르겠는가? 하지만 상대가 나빠도 너무 나빴다.
저 추성은 자신도 쉽게 상대할 자신이 없는 고수였다. 물론 ‘봉인(封印)’을 푼다면 세 합 안에 압도할 수 있지만, 세상이 아는 창응대주의 힘으로도 박빙의 대결을 벌일 만한 고수란 것이다.
연호정의 무공은 직접 봐서 알고 있지만, 추성에게는 어렵다. 그리고 추성은 연가의 대공자라고 손속에 사정을 두진 않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내가 부탁한 건?”
“예? 아, 예! 제가 보관하고 있습니다만.”
“안 가져왔군. 뭐, 됐어.”
연호정이 한옆에 세워 둔 창을 들었다. 여섯 자가 조금 넘어가는 장창(長槍)으로, 인근 대장간에서 구한 것이었다.
“창을…… 쓰시는 겁니까? 봉술로 상대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창이 더 나아.”
그때, 저 멀리서 제갈 남매와 연지평이 뛰어오는 게 보였다.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호들갑들 떨기 전에 올라가야겠군.”
파악!
그가 연무장 위로 올라갔다.
일 장이 훌쩍 넘는 거리를 단 한 걸음에 도달했다. 그것도 힘껏 뛴 게 아니라 날아오르듯 가벼운 발재간이었다.
이미 연무장 위에 올라온 추성은 팔짱을 낀 채 연호정을 보고 있었다.
“준비는 되셨소?”
“그쪽은?”
추성이 미소를 지었다. 굳이 널 상대하는데 준비씩이나 할 필요가 있겠냐는 표정이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길게 끌 것도 없겠지. 바로 시작해 볼까?”
“좋소. 한데 창술이오?”
“그래.”
추성이 눈살을 찌푸렸다.
“벽산연가의 주종은 도검(刀劍)이라고 들었는데?”
“너 하나 혼내 주는데 그런 것까지 필요하겠냐.”
도발도 이런 도발이 없었다.
츠츠츠츠.
추성의 몸에서 살벌한 기세가 피어올랐다.
웅성거리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추성이 뿜어내는 심상치 않은 기세에 놀란 것이다.
힘도 힘이지만, 기질의 사나움이 굉장했다. 마치 먹잇감을 눈앞에 둔 육식 맹수를 연상케 할 정도로.
반면 연호정은?
부웅. 부우웅.
손에 든 장창을 손가락만으로 이리저리 돌리는데 떨어진 낙엽들이 창날을 따라 휘날렸다.
‘음, 괜찮군.’
철봉과는 미세하게 균형감이 다르다.
그 ‘미세함’을 알아차렸으니 되었다. 그걸 손의 감각이 알아챈 것만으로도 이미 창술의 절반이 몸에 익은 거나 다름없었다.
휘이이잉! 타악!
점점 빠르게 회전하던 창이 탄력 있게 멈추었다.
견봉에 창을 걸친 연호정이 살짝 자세를 낮추었다.
우우우우웅.
그의 동공에서 연한 청광(靑光)이 명멸을 반복했다.
추성의 눈이 빛났다.
‘제법이군.’
진기의 안정감이 상당했다. 일류라는 평가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저 연배에 저 정도 힘은 칠대세가의 후기지수라면 당연한 것이었다.
‘결국 그 정도.’
추성의 얼굴에 옅은 실망감이 배었다.
그래도 뭐라도 있나 싶었는데 딱 거기까지였다. 그나마 자세 하나만큼은 그럴듯했다.
“시작할까.”
“좋소. 삼 초식을 양보하겠소.”
“삼 초를?”
추성이 피식 웃었다.
“대(大) 남궁세가에 새로이 창설된 전검단(戰劍團)의 단주를 상대하시는 거요. 책임을 묻겠다고 했으니, 삼 초식은 받아야 하지 않겠소?”
오만함이 가득 느껴지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말을 들은 모두가 그것을 인정했다.
물끄러미 추성을 보던 연호정이 자세를 풀었다.
추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시는 거요?”
“삼 초식이라?”
“그렇소.”
푸른빛이 명멸하던 연호정의 눈빛이 점차 무감각해졌다. 벽라진결을 놔 버린 것이다.
“뭐 하는 것이오? 비무 안 할 거요?”
“생각이 바뀌었다.”
“무슨 말이오?”
연호정이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추성이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찝찝함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스르륵.
창의 중단을 잡은 연호정이 서서히 들어 올렸다. 창날이 추성을 향하도록.
‘……?!’
순간 추성은 가슴이 따끔거리는 듯한 감각을 맛보았다.
‘살기?’
아니다.
이것은 살기가 아니라 창날에서 흘러나오는 예기였다. 대장간에서 구한 평범한 철창에서 바늘처럼 날카로운 예기가 뿜어져 나온 것이다.
그리고 추성이 창의 예기를 느낀 순간.
바로 그 순간, 연호정의 눈빛은 완전히 무(無)로 되돌아갔다.
“그 말에, 책임을 질 수 있겠나?”
“……!”
“좋다. 삼 초가 넘어가기 전에 검을 뽑으면, 그땐 죽이겠다.”
그리고, 연호정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저벅저벅.
연무장을 가로질러 추성에게 다가가는 연호정의 걸음은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지극히 평범한 보행(步行)이었다.
하지만 추성의 표정은 점점 굳어져 갔다.
‘뭐야?’
천천히, 아주 천천히.
별다른 기세도 없이 다가오는 연호정을 보며 추성은 알 수 없는 섬뜩함을 느꼈다.
‘뭔가 노림수가……?’
두 사람의 거리가 일 장으로 좁혀졌을 때.
연호정이 창을 들었다.
마치 커다란 칼을 드는 것처럼 머리 위로 들어 올린다. 창이 아니라 대도(大刀)나 도끼를 드는 것 같은 동작이었다.
이게 대체 뭐지?
연무장을 보던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창을 저렇게 다루는 걸까? 세상에 저런 창술도 있나?
그렇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순간.
쿠웅!
연호정의 발이 연무장 바닥을 찍었다.
연무장이 통째로 뒤흔들리는 것 같았다. 동시에 여섯 자 장창이 그대로 추성의 머리로 떨어졌다.
추성의 눈이 흔들렸다.
‘뭐, 뭐야?!’
무서운 속도로 찍어 내려오는 창.
충분히 피할 수 있다. 손짓 한 번으로 투로(套路)를 흐트러트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추성은 그중 무엇도 쉬이 선택하지 못했다.
‘헉!!’
순간 그는 사방을 뒤덮는 환상을 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암흑의 세상 속, 절벽 위에 홀로 선 자신을 향해 태산처럼 거대한 도끼가 떨어지는 환상.
그 크기와, 공기를 밀어젖히는 육중함과, 대지를 떨어 울리는 흉포함이 어찌나 무지막지한지 순간적으로 절망감이 전신을 엄습했다.
‘피, 피해야……!’
그때, 추성은 거대한 도끼 뒤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한 쌍의 안광을 마주했다.
그리고 그 안광이 초승달처럼 살짝 휘어져 있는 것도.
‘이이익!’
추성이 상단에서 양팔을 교차시켰다.
그리고 그 팔로 창대가 떨어졌다.
퍼어어억!
“크윽!”
추성의 무릎이 살짝 구부러졌다.
‘무겁다!!’
엄청나게 무거운 일격이었다.
이건 창술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냥 봉술도 아니었다.
도끼가 주는 흉포함과 도검이 주는 섬뜩함, 봉술이 주는 유연함과 창술이 주는 날카로움이 한데 집약된 무시무시한 일격이었다.
‘이런!’
우우우웅!
재빨리 내공을 끌어 올려 양팔로 쏟아부었다.
팔뚝에서 엄청난 고통이 느껴졌다. 그 고통이 얼마나 강한지 순간적으로 부러진 게 아닌가 착각이 일 정도였다.
하지만 연호정의 공격은 이제 시작이었다.
쾅!
진각(震脚)은 강하게 땅을 밟아 하체로 올라오는 반탄력을 통해 힘을 얻어 내는 수법.
일 보 전진과 함께 또다시 진각이었다. 한데 이번 진각은 그 전의 진각보다 훨씬 크고 울림이 넘치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이격(二擊)이 퍼부어졌다.
번쩍!
내리친 종격(縱擊) 이후, 창대의 중단을 잡아 내쏘는 자격(刺擊)이었다.
‘빠르다!’
팔의 고통을 단숨에 잊게 해 주는 속도였다. 심장을 꿰뚫을 듯 휘둘러지는 창날에 포식자의 살기가 어려 있었다.
움찔!
순간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본능적으로 검을 뽑아 내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 초식이었다. 아니, 초식도 아니고 그냥 두 번째 공격에 불과했다.
‘이익!’
추성이 재빨리 보법을 밟았다. 맨손으로 받아 내기는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파아아앙!
허공을 찌른 창격이 공기를 관통하고 저 멀리 떨어진 건물 외벽까지 닿을 듯했다.
‘……!’
옆구리에 서늘한 감각이 일었다.
살펴볼 시간도 아깝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저 창날을 피하지 못했다는 것을.
‘베였다.’
그것도 상당히 깊게 베였다. 조금만 늦었어도 창날이 내장까지 닿았을 것이다.
‘이런……!’
느슨하게 풀어졌던 마음이 대번에 긴장으로 가득 찼다. 허리가 꼿꼿해지고,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무조건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피하지 못했다. 그만큼 창격이 빨랐던 것이다.
그때 세 번째 공격이 들어왔다.
창대를 쥔 연호정의 손목이 일순 유연한 움직임을 발했다.
파바바바박!
십 수 개의 창날이 추성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한 손으로 펼쳐지는 창술. 이 역시 빨랐다. 어찌나 빠른지 창의 잔상이 보일 정도였다.
‘이……!’
더 놀라운 것은 시기와 선점이었다.
독특한 박자로 들이닥친 창날이 추성의 인지에 혼란을 주었다. 게다가 치고 들어온 위치도 절묘했다. 피할 수 없는 방위를 선점하여 내지른 창격은 마치 맹수가 아가리를 벌린 채 달려드는 것 같았다.
추성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피할 수 없다면 막아야 하는데, 창격 하나하나에 매서운 예기가 담겨 있었다. 무엇이 진짜인지 알 수 없었다.
‘죽음?!’
낯선 감각이 전신을 지배했다.
그리고 그 감각을 느낀 순간, 추성의 손은 제멋대로 움직이고야 말았다.
쩌어어엉!
연호정의 창이 우측으로 튕겨 나갔다.
“큭!”
동시에 추성의 몸도 후방 사선으로 비틀거렸다. 그의 손에는 보석 박힌 푸른 검이 들려 있었다.
검법(劍法)이었다.
검으로 받아 낸 것도 아니요, 흘려 내거나 방어를 한 것도 아니었다. 그 자신의 절기로 반격을 가해 서로의 공격을 무(無)로 되돌린 것이다.
추성의 눈이 흔들렸다.
‘죽을 뻔했다.’
진짜로 죽을 뻔했다. 이번 일격은 실로 위협적이었다. 검을 뽑아서 초식을 전개하지 않았다면, 몸에 구멍 서너 개는 뚫렸을 것이다.
대체 얼마 만에 느껴 보는 공포인가? 얼마 만에 겪어 보는 긴장인가?
“버티지 못했군.”
깜짝 놀란 추성이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견봉에 창대를 걸친 연호정이 싸늘한 눈으로 추성을 노려보고 있었다.
“말했지? 삼 초식을 버티지 못하면 죽이겠다고.”
“……!!”
“세 치 혀에서 나온 말에도 천 근의 무게감이 있음을 알려 주마.”
파아악!
연호정이 야수처럼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