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싸움의 이유 (1)
“으, 추워라. 어째 금방 싸늘해졌네. 거적때기 하나만 입고 나다니다가 얼어 죽겠어.”
몸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지만 표정은 밝았다.
“드디어 다 왔구먼!”
가득상이 거대한 장원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 안의 인기척을 살피고 있었다.
‘역시 많군.’
무수히 많은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놀라운 것은 그들 대부분이 일류라 불릴 만한 고수라는 것이다.
가득상은 설레는 표정으로 손을 비볐다.
‘역시 가문의 뒤를 이을 인재들이라 이건가? 호위무사들도 짱짱한 인간들로 보냈어.’
후기지수들의 자신감 넘치는 기(氣)보다, 은밀하면서도 예리한 호위들의 기가 더 인상적이었다. 하기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를 강호에 후계자를 보내는 것이니 고수들을 붙이는 게 당연하리라.
“자, 그럼 어디 한번 도련님, 아가씨들 낯짝이나 보러 들어갈…….”
그때였다.
“자네는?”
“뜨헉!”
가득상이 후다닥 자세를 바로잡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중년의 검사가 서 있었다. 돌을 깎아 만든 것처럼 무뚝뚝한 표정과는 달리 칼 같은 기도가 인상적이었다.
가득상이 헛기침을 했다.
‘내가 또 이런 실수를.’
이 정도 기도의 검사가 다가오는 것도 느끼지 못한다면 무인이라 할 수 없다. 한번 집중하면 주변을 완전히 잊는 그였다.
“굉장한 내공을 갈무리하고 있군. 단순한 거지는 아닌 것 같은데…… 개방(丐幇)인가?”
“그렇습니다, 광풍검 대협.”
신모가 눈을 치떴다.
“나를 아나?”
“하하, 밥 빌어먹고 사는 처지에 눈치라도 빨라야지요.”
개방의 무공은 구대문파에 필적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의 장기는 무공이 아니었다.
바로 정보였다. 개방의 정보력은 백도 무림 최고였다. 당연히 개방 소속이 되기 위해선 눈치도 빠르고 머리도 좋아야 한다.
신모가 가득상의 허리춤을 바라보았다.
‘매듭이 여덟?’
팔결의 매듭.
신모의 얼굴에 놀라움이 일었다.
“후개(後丐)?”
가득상이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허연 비듬이 우수수 떨어졌다.
“이 나이 먹도록 사부님한테 두들겨 맞는 밥버러지일 뿐입니다.”
스스로를 유쾌하게 표현했지만, 세상 누구도 개방의 후개를 무시하지 못한다.
개방은 구대문파, 칠대세가와 동등한 세력으로 평가받는 집단이었다. 단일 방파로는 문도 수가 가장 많아서 달리 십만개방(十萬丐幇)이라고도 불린다.
중원에 흩어진 모든 거지의 왕. 백도 정보계의 최고 거물.
가득상은 그런 사람의 후계자인 것이다.
신모가 포권했다.
“초면에 실례가 많았소. 개방의 후계인 줄은 미처 몰랐소이다.”
“아이고, 그리 사과하지 마세요! 천한 거지 놈한테 예의가 지나치십니다.”
무림의 거물이면서도 스스로를 천하다고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
그런 모습이 오히려 더 대단해 보였다. 비록 처음 만났지만, 신모는 가득상이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한데 아침부터 여기는 어쩐 일로……?”
“아! 아하하하! 그냥 요 근처에 일이 있어서 왔는데 마침 칠대세가 후기지수 회합을 한다지 뭡니까? 괜스레 공술이나 얻어먹을 수 있나 싶어서 기웃거리고 있었지요.”
신모의 눈이 빛났다.
개방의 후개씩이나 되는 사람이 칠대세가의 회합을 지금 알았을 리가 없다. 분명 뭔가를 알아보기 위해 왔으리라.
“미안하오. 나는 연가의 무사라 귀하를 들여보낼 자격이 없소.”
“에이, 괜찮습니다! 거지가 잔칫집 손님한테까지 폐를 끼치면 안 되지요!”
신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먼저 들어가겠소.”
“예에, 살펴 들어가십…… 어라?”
가득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데 그 보따리는 뭡니까요?”
“아, 이건…….”
신모가 헛기침을 했다.
“본가 대공자님의 심부름이오.”
“심부름이요? 어떤 심부름이길래 그렇게 묵직…….”
“그럼 이만.”
“예? 아, 예! 들어가십쇼!”
신모가 장원으로 들어갔다.
가득상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대공자 연호정.”
초성루에서 방화를 지른 악적을 산 채로 불태워 죽인 자. 한때는 호부 밑의 견자라고 소문이 자자했던 벽산연가의 장자.
신모가 창응대주라는 것도, 초성루에서 큰 활약을 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연히 만난 그에게도 연호정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어차피 말해 주지도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원래 이런 건 직접 만나서 살살 긁어 보는 맛이지.’
아, 기대돼.
가득상이 닫힌 문을 쾅쾅 두들겼다.
“이보쇼들! 거 잔치라도 벌어진 거요? 아침나절부터 냄새 죽이는구먼! 남는 거 있으면 나도 좀 얻어먹읍시다!”
* * *
“후욱!”
잔뜩 땀을 흘린 연호정이 철봉을 아무렇게나 던졌다.
새벽 일찍 일어나서 진시(辰時) 말인 지금까지 쉴 새 없이 철봉을 휘둘렀다.
‘선풍봉(旋風棒)은 이 정도면 됐어. 창(槍)으로 넘어가도 되겠군.’
신체가 아직 기대만큼 여물지는 않았지만, 창봉술의 기본은 확실하게 몸에 익었다. 봉술을 익히며 창술까지도 넘보고 있었지만, 실제 창날이 달린 창을 직접 휘두르는 건 또 다른 일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빠른 진전이었다. 현무를 익히며 무공의 섬세함이 살아나니, 몸에 익는 시간도 배는 더 빨라졌다.
‘창이라…… 역시 건너뛰어선 안 되겠지.’
그의 진짜 병기는 바로 무게만 수십 근이 넘는 거대한 도끼였다.
그 도끼를 수족처럼 다루기 위해선 창술을 달인의 경지까지 익혀야만 했다. 현무기(玄武氣)가 하루하루 깊어지고 있으니, 창술 역시 금세 몸에 익을 것이다.
‘병기도 병기지만 사신기(四神氣)를 전부 일깨우는 것도 중요해. 이왕이면 백호(白虎)부터.’
사신무의 현무가 완전한 방어에 특화되었다면, 백호는 물러섬이 없는 공격에 특화되어 있다. 임전(臨戰)과 전진에 있어 백호만 한 무공도 없었다.
사신무를 생각하니, 문득 사방무제라는 자에 대해서도 생각이 미쳤다.
‘공방과 회피에 완전무결한 무공, 거기에 황금빛 용을 부린다?’
연호정이 심각한 얼굴로 턱을 쓰다듬었다.
‘공방과 회피를 수준급으로 끌어올린 무공은 많아. 하지만 황금빛 용이라는 부분이 걸려.’
만약 사방무제라는 자가 진정 사신무(四神武)의 전인이라면?
‘황룡기(黃龍氣)까지 넘봤다는 건데.’
황룡기는 사신무의 극의(極意)였다.
세상에 절대무적은 없다고 생각하는 그였지만, 절대무적에 한없이 가까운 무공이 황룡기라고 생각했다. 흑암제 시절의 연호정도 입문에 들지 못했을 만큼 난도가 높은 오의(奧義)였다.
‘황룡기를 뽑아낼 정도의 무공이라면 누구와 싸워도 지지 않을 자신은 있어. 적어도 이번 생에서만큼은…….’
이번만큼은 결코 이전과 같은 후회를 남기지 않으리라.
연호정은 사방무제에 대한 생각을 애써 잊었다. 사신무의 계승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제갈아연을 달달 볶았지만, 지금은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과거를 알아볼 때가 아니었다.
찬물로 수욕을 마치고 나온 연호정은 문득 방 안의 인기척을 느꼈다.
“평이냐?”
“예, 형님.”
연지평이 웃으며 연호정을 맞이했다.
“씻고 오셨어요?”
“그래.”
“식사 안 하셨죠? 같이 하러 가요.”
“그러자.”
방을 나온 연씨 형제가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으로 가는 동안 형제는 말이 없었다. 연호정이야 원래 말수가 많지 않으니 그럴 수 있지만, 연지평의 성격을 생각하면 의외였다.
연호정이 연지평을 힐끔거렸다.
연지평의 표정은 밝았다. 하지만 두 눈은 예리하게 주변을 훑고 있었다.
“무슨 생각 하냐?”
“예?”
“무슨 생각 하냐고.”
“아, 아니에요.”
물끄러미 연지평을 보던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주변 신경 쓸 것 없다.”
“예?”
“어제의 일 때문에 긴장할 필요 없다는 얘기야.”
“아…….”
연지평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혹시나 해서요.”
“미안하다. 괜히 나 때문에 걱정만 많았겠다.”
“아니에요, 형님. 어제의 일은 당가의 장자 때문에 벌어진 일이에요. 형님께서 잘못한 건 없습니다.”
연지평의 표정은 제법 진지했다.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명가의 삼공자와 한판 붙은 것은…….”
“하하, 거기까지는 생각 안 하려고요.”
“엉?”
생각을 안 하다니? 이건 또 무슨 말이야?
연지평이 입맛을 다셨다.
“여기까지 오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정말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했다고요. 세상은 제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고, 그만큼 위험하기도 하더군요.”
맞는 말이지.
“하지만 형님은 달랐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본가의 법도와는 맞지 않았지만, 형님께는 강한 자신과 뚜렷한 신념이 있었습니다.”
연호정의 눈빛이 묘해졌다.
연가의 법도와는 맞지 않다고 자신 있게 얘기한다. 그만큼 가문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저는 형님만큼 머리가 좋진 않은 것 같아요. 하지만 이것 하나는 알고 있습니다. 형님이 본가에 해가 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으리라는 것.”
“…….”
“형님의 일 처리 방식이 옳은지, 그른지는 나중에 생각하려고요. 다만 제가 형님을 믿고 있고, 형님 역시 흔들리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그거죠.”
연지평이 미소를 지었다.
열다섯 소년의 미소답지 않은 강인함이 묻어 나왔다.
“그래도 형님 무공이 그렇게 강하신 줄은 몰랐어요. 앞으로 형님한테 배워야 할 것 같던걸요?”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그렇지 않다. 오히려 자신이 연지평에게 배워야 할 것 같았다.
평생 가문의 가르침대로 살아온 동생. 그러나 동생은 형의 파격적인 언행에 당황했을지언정, 형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진 않았다.
이곳까지 오며 고민은 충분했으니, 이제는 형을 믿고 가겠다는 그 마음.
‘이 녀석에게 이런 면도 있었나.’
강하다.
어쩌면 동생은 강인한 천성을 타고난 건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동안은 그것을 보여 줄 필요가 없었던 것뿐인지도.
“근데 왜 그렇게 주변을 살피냐?”
“형님이 그러셨잖아요. 절간에도 살인마가 나고 뒷골목에서도 성자가 나는 게 강호라고.”
“음.”
“혹시 아나요? 어제 일로 누가 형님한테 해코지라도 할지.”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누가 해코지하려 한들, 네 실력으로 되겠냐?”
“이거 왜 이러세요? 형님만큼은 아니어도 저도 나름대로 괜찮아요.”
나이를 생각하면 괜찮은 수준이 아니라 굉장한 수준이라고 봐야 한다.
연호정이 연지평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으갸갸갹!”
“괜히 힘 빼지 말고 마음 편히 가져라. 혹시라도 무슨 일이 터지면 내가 막을 테니까.”
“머리 다 헝클어져요!”
“그러라고 하는 거야, 인마.”
연호정의 말투가 미묘하게 바뀌었다.
과거로 돌아와 가문 안에 있을 때의 말투가 딱 이랬다. 그러나 세상에 나온 이후, 동생을 대하는 그의 모습은 형이 아니라 아버지와 비슷했다.
연지평 말마따나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동생을 지키기 위해 자연스레 마흔여섯 먹은 흑제성주의 모습이 나온 듯했다.
그러나 연지평은 약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확인하자 연호정은 연지평을 가문에서처럼 대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오늘 아침밥은 뭐라더냐?”
“저도 모르겠는데요? 근데 냄새가 딱 동파육이에요.”
“아침부터 고기 밥상이라니, 역시 돈이 썩어들 나는구먼.”
그렇게 연씨 형제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식당에 도착했을 때였다.
“꺼어어억! 와, 이제 나도 나이를 먹었나? 고작 요거 먹었다고 배가 다 부르네!”
식당 문을 박차고 배를 두들기며 나오는 거지 하나가 있었다.
놀랍게도 거지가 들어왔는데 그를 보는 후기지수들의 눈빛에는 한 점의 경멸도 없었다. 떨떠름함은 엿보였지만.
연호정의 안광이 빛을 발했다.
‘거지? 개방인가? 매듭은…… 팔결?’
그가 거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거지도 연호정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순간 연호정은 과거의 환상을 보았다.
더러운 반백의 수염을 연신 쓰다듬으면서도 호탕한 웃음을 멈추지 않았던 호걸. 흑제성주인 자신의 진짜 정체를 알면서도 백도 무림에 퍼트리지 않은 자.
사음교의 병력을 몰아붙이는 데에 큰 도움을 준 개방의 총책임자이며, 흑도의 제왕인 자신을 백도 무림의 수뇌부들과 똑같이 대해 준 몇 안 되는 호인.
연호정은 거지의 얼굴 위로 과거의 기억을 덧씌웠다.
지저분하고 시커먼 수염이 조금 더 길어지고, 반쯤 하얗게 물든다면?
눈가와 입가에 주름이 더 깊어지고, 산발한 머리카락을 질끈 동여맨다면?
매듭이 여덟 개에서 아홉 개로 늘고, 허리춤에는 취옥(翠玉)이 박힌 멋들어진 단봉(短棒)을 매고 있다면?
“가득상 용두방주(龍頭幇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