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돌풍 (5)
“대공자님, 괜찮으십니까?”
“…….”
“대공자님?!”
“음? 아, 날 불렀나?”
“예. 몸은 괜찮으신지 싶어…….”
“괜찮네. 몸도 제대로 안 풀었는데 뭘.”
“그, 그러시군요.”
신모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어렸다.
연호정이 미안한 기색으로 말했다.
“내가 괜히 사고를 쳐서 자네들 입장도 말이 아니겠군. 미안하게 됐네.”
“아, 아닙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오늘은 나도 생각할 게 많아. 내일 사과주 한잔 사지.”
“사과주라니요.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신모가 고개를 숙였다.
“괜찮으시다 하니 다행입니다. 푹 쉬십시오.”
“자네도 쉬게.”
“혹시 모르니 숙소 인근에 창응대원들을 배치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려던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계라도 세우지 않으면 신모가 더 불안해할 것이다.
더는 남을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고맙네.”
“하면 이만.”
신모가 방을 나서자 연호정이 창가로 눈을 돌렸다.
정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한 연회는 반 시진도 되지 않아 취소됐다. 그래서 아직 날은 밝았다.
창밖을 보던 연호정의 눈이 시린 어둠으로 물들었다.
‘명가인가?’
사건을 봉합하기 위해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을 보여 주었지만, 그의 감각은 계속 명호림을 향해 있었다.
‘마찬가지다. 제갈이나 팽가처럼 아직 확신할 단계는 아니야. 그러나…….’
조금 섣부르지만 연호정은 자신의 직감을 믿었다. 본능을 신뢰했다.
명호림의 내공에선 강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정확히는, 가문의 흉수들이 발산하던 내공하곤 달랐다. 기질의 유사 정도만 생각하면 완전히 다른 무공이라 봐도 옳았다.
그러나 명호림의 내공은 중원 무공과는 궤를 달리했다. 마치 늑대가 양의 거죽을 뒤집어쓰고 본인을 양이라고 소개하는 듯했다.
거칠고 흉흉한 기운을 중원 정서에 맞게 잘 다듬었다고나 할까. 연성한 자의 성격에 따라 색깔도 달라지는 것이 내공이지만, 명호림의 내공은 근본적으로 중원의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쉽군. 제대로 몰아붙였다면 놈의 진짜 실력을 볼 수 있었을 텐데.’
한숨을 내쉬던 연호정이 순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데 명가가 어쩌다가 몰락했지?”
스승님께 무공을 배우고 하산한 후, 흑도를 평정하고 세상으로 눈을 돌렸을 무렵.
그때 이미 명가는 사라지고 없었다. 연가처럼 누군가에 의해서 멸문을 당한 게 아니라, 순식간에 가세(家勢)가 기울어 삼 년도 되지 않아 와해가 되어 버렸다고 했다.
연호정은 떨떠름한 얼굴로 턱을 쓰다듬었다.
“대체 어떻게?”
구주명가 정도의 가문이 몰락했다면 당시 흑도의 역사를 뒤흔들기 시작한 자신이 신경을 안 썼을 리가 없다. 정확히는 그의 귀로 명가에 대한 정보도 들어왔어야 옳았다.
한데 그는 명가에 대한 정보를 받은 게 하나도 없었다. 흑제성의 기반을 닦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기도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심하지 않나?
“누군가가 정보를 통제했나?”
흑도 사파의 정보력은 백도 정파의 정보력보다 날카롭고 빠르다.
흑제성 초기에 연호정은 정보 총책이라는 중책도 맡고 있었다. 적어도 흑도에서 정보를 가지고 노는 사람 중 연호정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설마 정파 무림에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
떨쳐 내려 해도 떨치지 못한다. 중요한 건 명가가 흉수가 맞느냐, 아니냐일 뿐인데도 자꾸 그쪽으로 생각이 흐른다.
연호정이 한참이나 그 부분에 대해 고민하던 중이었다.
“대공자님.”
문밖에서 신모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
“제갈세가의 장녀가 찾아왔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사적 친분이 있어도 확실하게 선을 긋는 신모였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들여보내.”
덜컹.
기다렸다는 듯 제갈아연이 들어왔다.
연녹색 화사한 의복에서 활동성 좋은 옷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한층 활기차 보였다.
“혼자서 뭐 해? 창가에 앉아서 말이야.”
“왜 왔어?”
제갈아연이 투덜거렸다.
“그래도 손님이 왔는데 앉으라는 말은 해 줘야 하잖아?”
“앉아.”
“차는?”
“직접 타 마셔.”
“까칠하기는.”
제갈아연이 읏차, 하는 소리를 내며 앉았다. 노곤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몸은 어때?”
“괜찮다.”
“그러네. 옆에서 걱정한 게 민망할 정도로 괜찮아 보이네. 하긴, 당가의 그 망나니를 가지고 놀 실력이라곤 생각도 못 했다구.”
제아무리 세상 물정 모른다 해도 당양선은 당가의 적장자였다. 당가가 차후 가문을 대표하게 될 장자를 만만하게 가르쳤을 리는 없다.
제갈아연은 연호정의 얼굴을 살폈다.
연호정은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표정으로 창가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연호정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어떻게 그리 강해졌는지, 왜 명호림에게 그리 집착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후우.’
내심 한숨을 쉰 그녀가 맑게 웃었다.
“나중에 뭔 일 있으면 네 뒤에 숨으면 되겠다.”
“그래서 용건은 뭐야?”
“딱딱하기가 어릴 적 아부지가 자주 들던 몽둥이 저리 가라네. 그냥 얼굴이나 보러 왔어.”
연호정이 얼굴을 찌푸렸다.
또 퉁명스러운 말이 나오나 싶어 제갈아연이 이를 갈 준비를 할 때.
“고마웠다.”
“……에엥?”
“고마웠다고.”
제갈아연이 눈을 깜빡였다.
“고맙다니? 뭐가?”
“제때 나를 변호해 준 거 말이야. 덕분에 사건을 일단락 지을 수 있었어. 네 덕이야.”
“……거, 안 어울리게 갑자기 왜 이래? 춥다, 야.”
“말꼬리 잡는 기술이 일품이더군. 제갈씨는 제갈씨야.”
“말꼬리라니? 화술(話術)이라고 해 줬으면 좋겠어.”
“세 치 혀로 입신양명을 노려 볼 수도 있겠더군.”
“칭찬이냐, 욕이냐?”
“감사다.”
“에잇, 됐어! 퉤퉤! 차라리 고맙다는 말을 하지 말든가!”
“그럼 못 들은 걸로 해.”
“싫은디?”
연호정이 고개를 돌려 버렸다. 말도 섞기 싫다는 기색이 팍팍 풍겨 나왔다.
제갈아연의 얼굴이 조금 상기되었다.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내뱉었을 뿐, 사실은 기분이 좋았다. 타인에게 쉽게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알기에 더더욱.
괜히 답답한 것 같아 위로나 해 주려고 왔는데 생각지도 못한 인사를 받았다. 굳이 언급하려 하지 않았지만, 이런 분위기라면 한마디는 해도 될 것 같았다.
“앞으로는 조금 더 신중해.”
“알았다.”
“……히히.”
“뭐냐, 그 간사한 웃음은?”
“간사하다니!”
발끈한 그녀가 이내 힘 빠진 한숨을 쉬었다.
“쳇, 나보다 강하니 한 대 쥐어박아 줄 수도 없고…… 아!”
제갈아연의 얼굴이 조금은 진지해졌다.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
“뭐냐.”
“초성루 때 있잖아. 그 뇌화방주라던 놈.”
“그놈 뭐?”
“예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 그놈에게 어떻게 상처를 입혔지?”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처를 입히는 데 특별한 방법이라도 있나? 죽일 기세로 후려친 게 전부지.”
“그게 아니라…….”
우웅.
제갈아연의 손에서 강한 내공이 피어올랐다. 동시에 연호정의 방 안에 박달나무 향이 돌기 시작했다.
“본가의 현원전단신공은 몇 안 되는 비기(秘技)라고 불리고 있어. 그리고 그놈의 복부에 내 공격이 제대로 들어갔었다고.”
굳이 내공을 싣지 않고 쳐도 복부는 위험한 부위다. 그 많은 내장이 한껏 구겨져 들어가 있으니 자칫 잘못 맞으면 행동 불능, 심하면 사망에 이를 수 있다.
“하지만 놈은 쓰러지기는커녕 아파하는 기색도 없었어. 그렇다고 그놈 내공이 나보다 몇 배 더 강한 것도 아니었잖아.”
“기의 성질 차이지.”
“응? 성질?”
연호정은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놈이 익힌 열양공(熱陽功)은 그 수준이 매우 높아. 즉, 내공 자체가 화기(火氣)를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너의 내공은 목기(木氣)를 중심으로 하고 있어.”
“……?!”
“활활 타는 모닥불에 땔감 하나 던져 봤자 불이 꺼지나? 오히려 더 강하게 타오르지.”
제갈아연은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내공의 근본 성질이 다르다곤 해도 무학의 차이가 명백한데…….”
“그놈의 무공은 단순한 잡기(雜技)가 아니야. 한때나마 천하제일을 논했던 무공이지.”
“뭐?”
“음한백류(陰寒白流)와 함께 음신(陰神)의 양대 절기로 유명했던 음화홍류(陰火紅流)가 그놈이 익힌 무공이다.”
음신? 음화홍류?
제갈아연이 눈살을 찌푸렸다.
“난 듣도 보도 못한 무공인데?”
그럴 수밖에 없다. 연호정 역시 흑제성주가 되고 나서야 음신이란 존재에 대해 알았으니까.
음신은 암살계의 제왕이었다.
흑제성주 시절의 음신은 세대교체가 된 후의 음신이라 실적이 애매했다. 하지만 전대 음신의 경우 단 한 번을 제외한, 아흔아홉 번의 암살을 전부 성공한 신화적인 존재였다.
그리고 그 한 번의 암살 실패 이후, 후계를 양성할 때까지 종적을 감추었다.
“아무리 그래도 조금의 충격도 받지 않은 건 말이…….”
“그건 너희 둘의 성취가 낮아서 그렇지.”
“아?”
“극한의 경지에 이르러도 상성을 무시하긴 어려워. 천하제일인은 있어도 절대무적(絶代無敵)은 존재할 수 없는 이유지. 하늘은 결코 독존(獨尊)을 용납하지 않으니까.”
“…….”
“뭐, 그놈은 음한백류는커녕 음화홍류의 삼 할도 전수하지 못한 것 같지만.”
“삼 할…….”
제갈아연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고작 삼 할로 그 정도란 말이지.”
“삼 할이든 십 할이든, 본인이 배운 한도 내에서 최대한 깊게 익히는 게 중요해. 그놈이나 너나 신공(神功)의 표면만 핥은 것뿐이잖아.”
“왠지 같은 부류로 엮이는 것 같아서 기분이 영 아닌걸.”
“내 알 바 아니다.”
“칫.”
제갈아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위로차, 걱정차 왔는데 괜히 기분만 싱숭생숭해졌다.
“천하제일인은 있어도 절대무적은 없다? 맞는 말이야.”
“볼일 다 봤으면 이제…….”
“근데 한 명 있지 않나?”
“뭐?”
“무림 역사상 절대무적이라 불린 자 말이야.”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림의 조사(祖師)인 달마를 말하는 거라면…….”
“아니, 달마대사 말고. 무림 최고 전성기였다던 삼백 년 전, 혈교지란(血敎之亂)을 평정했던 전설적인 무인이 있었잖아.”
“삼백 년 전? 누구?”
“몰라?”
“몰라. 당장 나 살기도 바쁜데 삼백 년 전은 무슨.”
“진짜 신기한 녀석이라니까.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귀신처럼 꿰뚫어 보는 줄 알았더니, 그 유명한 사람은 모르고 있단 말이야?”
“역사 공부 싫어한다.”
“알 만하네.”
“그래서, 그 대단한 사람이 누군데?”
이전과 다를 것 없는 어조였지만 제갈아연에게는 왠지 비꼬는 것처럼 들렸다.
그녀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들으면 너도 아차 싶을걸?”
“그러니까 누구냐고.”
“사방무제(四方武帝).”
“사방무제?”
“진짜 모르고 있었구나? 대단하다, 너도.”
“별호 한번 유치하기 짝이 없군.”
“그렇게 말하지 마. 우리 백도 무림인들에게는 달마대사보다도 높게 평가받는 사람이니까. 만약 그때 그가 혈교지란을 평정하지 못했다면 지금쯤 세상은 지옥이 됐을걸?”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세상은 지금도 충분히 지옥 같다.”
“어우, 어두워. 정말 어두운 녀석이야, 넌.”
“시끄러워.”
“어쨌든 사방무제의 실력이 역사 그대로라면, 확실히 절대무적이라 불릴 만하지 않겠어? 하나도 아니고 무려 네 가지 무공을 극한까지 익혔다고 하니까.”
“네 가지 무공?”
“응. 공방(攻防)과 회피에 있어서 천하의 어떤 무공도 따라가지 못한다고 하더라고. 거기다 음양이기(陰陽二氣)까지 다뤘다고 하던데?”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공방과 회피, 그리고 음양이기?”
“그렇다니까. 뭐, 워낙에 신격화된 사람이라 과장이 없을 순 없다고 봐. 나중에는 황금빛 용까지 부린다고 해서 황룡제(黃龍帝)라고도 불렸으니까. 내가 생각해도 그건 너무 갔지.”
“…….”
“어쨌든! 세상 너무 칙칙하게 살지 마. 살다 보면 이런저런 흥미로운 일도 많지 않겠…….”
“…….”
“정아?”
제갈아연은 당황했다.
그녀는 연호정의 멍한 표정을 처음 보았다.
‘사방무제? 황금빛 용을 부려?’
완전무결한 공방과 회피. 그리고 음양이기.
거기에 황금빛 용이라고?
“음…… 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괜한 얘기를…….”
“더 말해 봐.”
“으, 으응?”
연호정의 눈에 벼락이 쳤다.
“사방무제라는 그 사람에 대해서 자세하게 얘기해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