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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23화 (23/963)

23화. 돌풍 (3)

명호림이 주먹을 쥐었다.

퍼석!

조각난 잔이 그대로 가루가 되었다.

외공(外功)으로 손을 연마했다고 가능한 행위가 아니었다. 내공을 발산하여 유리 파편을 가루로 만드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

“실수라?”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명호림의 얼굴에 흥미가 일었다.

“자네는?”

“상대하던 사람한테 집중해.”

“뭐라?”

명호림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재미있는 청년이군. 자네, 혹시 강소 벽산의 사람이 아닌가?”

연호정은 대답 없이 새 잔을 가져와 술을 따랐다. 그러고는 천천히 술을 마셨다. 심지어 한쪽 다리를 턱 하니 세워 놓았는데, 그 모습이 기방을 제집 드나들 듯하는 한량이 따로 없었다.

명호림의 눈이 빛났다.

그때, 당양선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쓰레기. 한 번만 더 쓸데없는 짓 하면 너부터 죽인다.”

이번에도 연호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당양선 역시 돌아오는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명호림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푸스스스.

그의 발밑에서 은은한 아지랑이가 올라왔다.

당문의 삼양공(三陽功)이었다. 대성하면 당문의 비기인 도반삼양귀원공(導反三陽歸元功)을 저절로 깨우치게 된다는 난도 높은 무공이기도 했다.

제아무리 명호림이라도 언제까지나 여유를 부릴 순 없었다. 실력 이전에 독(毒)이라는 특성 때문이라도 당양선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양선이 이를 갈았다.

“한 줌 핏물로…….”

그때, 다시 한번 파공성이 일었다.

피융! 펑!

가루가 된 잔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전과 달리 명호림은 주먹을 뻗고 있었다. 그의 주먹에 맞은 술잔이 가루가 된 것이다.

명호림의 눈이 깊어졌다.

‘상당하군.’

술잔을 부순 주먹이 은은하게 떨리고 있었다. 통증은 없었지만, 명가의 내공을 뒤흔들 정도의 위력이 있었다는 뜻이었다.

주먹을 푼 명호림이 웃으며 물었다.

“이번에도 실수인가, 친구?”

연호정이 빈손을 들어 보였다.

“실수라네.”

“하하! 실수가 잦은 친구로군. 그나저나 말일세.”

“…….”

“괜히 나서서 승냥이의 화만 돋운 건 아닌지 모르겠네.”

우우우웅!!

고개를 숙인 당양선의 몸에서 살기가 흘러나왔다.

독기가 아니라 살기다. 그리고 그 살기는 명호림이 아니라 연호정을 향하고 있었다.

“연가의 쓰레기.”

“…….”

“내가 우습냐?”

“…….”

“이 내가, 너 같은 쓰레기한테 능멸을 당해도 좋을 사람처럼 보이더냐?”

이번에도 연호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봐도 빈 잔이 없어서 제갈아연의 잔을 채워 들고 있었다.

멀리서 호위들을 진정시킨 남궁현이 그 모습을 보곤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한호명이 외쳤다.

“공자님! 화를 가라앉히십시오!”

당양선이 몸을 돌렸다.

제갈아연이 흠칫했다. 연호정을 노려보는 당양선의 눈은 광기로 물들어 있었다.

“날 무시한 대가를 치르게 해 주마.”

제갈아연이 움직였다.

“안……!”

퍼어어억!

살벌한 소리에 모두가 눈을 크게 떴다.

연호정이 손을 털었다. 잔은 어디로 갔는지 몇 방울 술만이 손에 묻어 있었다.

당양선의 표정이 멍해졌다.

주르륵.

찢어진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쿵!

이내 당양선이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연호정이 쏘아 낸 술잔에 맞고 정신을 잃은 것이다.

명호림의 얼굴이 굳어졌다.

손을 턴 연호정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자리에 독을 푸는 건 예의가 아니지.”

잠시 정적이 일었다.

느닷없는 사태에 이곳을 보는 모두가 경악했다. 당양선의 호위인 한호명은 더더욱 놀랐다.

당양선이 기절해 버렸다. 그것도 술잔을 맞고.

당가의 주무공은 독과 암기였다. 그런 당가의 장자인 당양선이 고작 술잔 하나 막지 못했다는 것은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제갈아연의 눈이 흔들렸다.

“너, 너 괜찮아?”

이번에도 연호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누군가의 말에 대답할 상황이 아니었다.

‘유사한가? 아닌가? 아직은 모르겠어. 하지만…….’

명호림의 정제된 기도에서 풍겨 나오는 기분 나쁜 전의(戰意).

뭐라 콕 집어 말할 수는 없는 위화감.

백도 무림 특유의 안정적인 내력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독특한 기질. 그리고 발경(發勁).

술잔을 깨부순 발경은 지금껏 본 적 없는 운용법을 따르고 있었다.

가문을 습격한 자들의 내공도, 발경도 아니다. 연호정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색깔이었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명호림과 습격자들의 내공과 발경은 색은 다를지언정 ‘어두움’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제갈세가와 팽가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접점이 있다는 것이다.

번쩍! 번쩍!

벽라진결이 운용되자 연호정의 동공이 연한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지이이잉! 지이이이잉!

머리 한구석에서 맞물린 톱니바퀴가 굴러가는 듯했다.

집중력이 무서운 속도로 향상되었다. 그의 기가 명호림의 기도를 타고 흘러가 단숨에 상대의 단전까지 치고 들어갔다.

‘……?!’

명호림의 목에 힘이 들어갔다.

‘읽고 있다?’

상대의 날카로운 눈빛이 수백 마리의 독사를 풀어 몸을 휘감는 듯했다.

‘흡!’

명호림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호흡을 멈추니, 기(氣)가 고정되고 내공이 단단하게 결합되었다.

샤아악!

몸 전체를 더듬던 독사들이 갈라진 혀를 날름거리며 고개를 쳐들었다.

반응이 즉각적이었다. 내공의 흐름을 강제로 멈추니 자신을 탐색하는 상대의 기도 주춤했다.

연호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츠츠츠츠.

넘실거리던 벽라진기가 요동쳤다. 상대의 대처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다.

‘헉!’

제갈아연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연호정의 변화는 가장 가까이 있는 그녀에게 확실하게 전달되고 있었던 것이다.

“형님!”

멀리서 연지평이 뛰어왔다.

제갈아연이 서둘러 연지평을 막았다.

“누님?”

“기다려.”

제갈아연이 떨리는 눈으로 연호정의 등을 바라보았다.

“가까이 가지 마.”

“하, 하지만 형님이!”

제갈아연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지금 연호정을 막을 수 없다는 걸.

연지평 역시 알고 있었다. 지금의 형님은 뭔가가 다르다는 걸.

‘지금 나나 지평의 실력으로는 호정을 막지 못해. 그렇다면…….’

막을 수 없다고 가만히 놔둔다?

그럴 수는 없다. 자칫 잘못하다간 칠대세가 회합 역사에 오점이 남겨질 수도 있었다. 단순히 누가 위험해지느냐를 떠나, 백도 무림의 체면 문제도 달려 있는 것이다.

물론 가장 걱정되는 것은 연호정이었다. 적당한 다툼이라면 모르되 사천당가와 척을 지는 것은 결코 현명한 행동이 아니었다.

제갈아연이 제갈준에게 말했다.

“남궁 오라버니한테 연회를 중단시키라고 전해! 각 호위무사들은 가문의 자제를 데리고 숙소로 돌아가라고 말해 줘!”

“예, 누님!”

그때, 끄응 하는 신음이 들려왔다.

놀랍게도 그는 당양선이었다. 일격에 정신을 잃었지만 깨는 시간은 빨랐다. 회복력 하나만큼은 뛰어나다는 뜻이었다.

파아악!

한호명이 재빨리 당양선 옆으로 다가왔다.

“공자님! 괜찮으십니까?”

당양선의 얼굴에 어리둥절한 기색이 어렸다. 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뭐야? 그 개자식 어디 갔어?”

“공자님, 지금 이러실 때가……!”

“이것 놔!”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던 당양선의 눈에 연호정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의 눈이 불을 뿜었다.

“너, 이 쓰레기! 죽여 주마!”

파아아악!

한호명을 밀치고 달려 나간 당양선이 연호정의 등판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제아무리 눈이 돌아갔다곤 해도 등을 돌린 사람을 공격하는 건 무사의 도리가 아니었다. 말리러 오던 사람들은 당양선의 무도함에 또 한 번 놀랐다.

삼양기(三陽氣)가 실린 주먹이 연호정의 명문혈 코앞까지 도달했다.

당양선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어렸다.

‘고통스럽게 죽여 주마!’

그때, 연호정의 몸이 움직였다.

타악!

“어?”

당양선의 눈이 커졌다.

그의 몸이 주먹을 뻗은 자세 그대로 멈추었다. 그리고 연호정이 그의 팔뚝을 잡고 있었다.

하지만 연호정의 눈은 여전히 명호림을 향해 있었다. 살기에 반응했을 뿐, 애초에 그는 당양선에게 흥미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본능은 달랐다.

벽산연가의 장자로서 참고 있던 최소한의 격식이, 흑도 역사상 최악의 고수라 불리던 흑암제의 본능 앞에 허물어졌다.

콰드득!!

“아악!”

당양선이 그 자리에서 허물어졌다. 엄청난 압력에 팔뼈가 부러졌다.

악력만으로 사람의 팔뼈를 부쉈다. 무지막지한 힘이었다.

하지만 이전처럼 마음 편하게 기절할 순 없었다. 연호정이 부러진 팔을 계속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끄으윽! 이, 이거 안 놔?!”

콰드드득!

“으아아악!”

당양선은 끔찍한 고통에 몸부림쳤다.

독공을 끌어 올릴 생각도 못 했다. 난생처음 겪어 본 골절이 그의 정신을 무너트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당가의 장자였다. 이런 고통은 처음이었지만, 십 년 동안 연마한 무공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치이이이익!

당양선의 몸에서 자줏빛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 고통에서 헤어 나올 방법은 상대를 떨치는 것밖에 없다는 걸 몸이 먼저 깨달은 것이다.

“이익!”

당양선이 멀쩡한 왼손으로 연호정의 어깨를 후려쳤다.

퍽! 콰득!

“크아아악!!”

놀랍게도 공격받은 연호정은 아무런 부상 없이 멀쩡했다.

오히려 공격을 가한 당양선의 왼손이 골절되었다. 강력한 반탄력으로 인해 우측 어깨뼈가 쑥 빠져 버리기까지 했다. 연호정이 그의 팔을 끝까지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우우웅.

모두가 숨을 죽였다.

연호정의 몸 주변으로 반투명한 육각 형태의 귀갑(龜甲)이 떠올랐다.

무의식적으로 발현된 사신(四神)의 무공. 절대방어로 이름 높은 현무공(玄武功)의 북천십이벽(北天十二壁)이었다.

“으으윽! 으흐흑!”

당양선의 눈과 코에서 분비물이 흘러나왔다.

번쩍!

연호정의 안광이 다시 한번 불을 뿜었다. 살기를 뿜던 적이 약세를 보이자 숨기고 있던 포악함이 자극받은 것이다.

그가 당양선을 내려보았다.

“허억!”

덜덜 떨던 당양선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뻣뻣하게 굳어졌다.

유리알처럼 투명한 연호정의 눈을 마주하자 순간적으로 심박수가 두 배로 치솟았다. 손발이 차가워지고, 목젖 양쪽이 뜨거워졌다.

온몸의 신경계가 엉망이 되는 기분이었다. 몸의 어느 부분은 뜨거웠고, 어느 부분은 차가웠다. 모공이 제멋대로 열렸다 닫히길 반복했다.

주르르륵.

당양선의 하의가 축축하게 젖었다. 방광이 풀린 것이다.

연호정의 미소에 포악한 살기가 담겼다.

과거로 전생한 이후 처음으로 보여 주는 흑암제의 진짜 살기다. 당양선 정도의 무공으로는 그 살기에 대항할 방법이 전무(全無)했다.

“끄르르륵!”

결국 당양선은 거품을 물고 기절해 버렸다. 이번에는 오랫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다.

연호정의 안광이 점점 진해졌다. 이 기세 그대로 상대의 정신을 부숴 버릴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안 돼.’

맹수의 본능 너머로 차가운 이성이 찾아왔다.

‘그 애송이에게 신경 쓸 때가 아닐 텐데?’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번쩍!

살기로 이글거리던 눈빛이 예전의 또렷함을 되찾았다.

스르륵.

그제야 당양선의 몸이 자유를 얻었다. 으스러진 팔은 죽은 뱀의 몸통처럼 기이하게 휘어져 있었다.

“고, 공자님!”

한호명은 당양선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그의 안위를 살피고, 공자님을 저리 만든 연호정에게 철편을 휘두르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먼발치에서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다. 제어하지 못한 살기의 일부분이 그에게도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입맛만 버렸군.”

우두둑.

연호정이 습관처럼 어깨를 움직였다.

명호림이 움찔했다.

“구주명가의 삼공자라 했었지?”

“……?!”

“나와 조금만 놀아 주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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