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돌풍 (2)
한참 재미나던 중에 대화가 뚝 끊어져 버렸다.
제갈아연은 당황했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그녀가 웃으며 맞은편을 가리켰다.
“좋…….”
그때, 제갈아연은 괜스레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의 사회성이 썩 좋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뜻밖에도 연호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누가 됐든 자리가 커지면 자연스레 주변을 살필 기회가 많아지기 때문이었다.
“앉으세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당양선은 자리에 앉고 있었다. 상대가 거절하지 않을 걸 안 것인지, 상대 의사에 상관없이 앉으려 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제갈아연이 웃으며 물었다.
“당가에서 오셨나요?”
“그렇지.”
서슴없이 말을 놓는다. 평생 몸에 밴 말투인 걸 알 수 있었다.
“반가워요. 제갈세가의 아연이라고 해요.”
“제갈아연?”
“네.”
“이름도 예쁘군.”
상당히 솔직 과감한 발언이었다. 제갈아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가요?”
“응, 부모님이 이름 잘 지으셨네.”
“칭찬 감사해요.”
제갈아연이 손으로 연호정을 가리켰다.
“아, 소개해 드릴게요. 이 사람은…….”
“됐어.”
“네?”
“누구인지 알아. 소개할 필요 없어.”
제갈아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이미 만난 적이 있나 보군요?”
“연가의 대공자잖아?”
“맞아요. 그럼 인사라도…….”
“괜찮아.”
“괜찮다니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당양선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이 친구 보러 온 게 아니야.”
제갈아연은 살짝 당황했다.
눈치 빠른 그녀는 당양선의 목적이 자신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당양선이 빈 잔을 내밀었다.
“한 잔 따라 봐.”
거침없는 행동이었다.
술 한 잔 따라 주는 게 어렵진 않지만, 처음부터 아랫사람 대하듯 나오니 상대는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다. 자리가 자리인 만큼 최대한 예의 있게 대응하려던 제갈아연도 심사가 뒤틀릴 말투였다.
“여기 있어요.”
제갈아연이 그의 앞에 술병을 가져다 두었다.
당양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따라 보라니까?”
제갈아연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따라 주고 싶지 않네요.”
“따라 주고 싶지 않다고?”
“네.”
“이놈은 좋다고 따라 주더니만 왜?”
대놓고 이놈이다.
연호정은 상대의 호칭에 신경 쓰지 않았다. 당양선이 자리에 앉은 즉시 그의 기감은 연회장에 모인 후기지수들을 훑고 있었다. 일일이 반응해 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제갈아연은 아니었다.
“이놈은 제 친구거든요. 좀 까칠하긴 해도요.”
당양선이 웃으며 물었다.
“나도 친구가 될 수 있잖아?”
“누구라도 친구가 될 수 있죠. 싸가지만 있으면요.”
“오호?”
“혹시 사천 지역 풍습인가요? 초면에 타인에게 술이나 따라 보라는 식의 인사 말이에요. 그렇다고 하면 제 오해이니 사과하죠. 그래도 친분을 갖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요.”
웃으면서 얘기하는 목소리에 칼이 담겼다.
묘한 눈으로 제갈아연을 보던 당양선이 피식 웃었다.
“제법 귀여운데?”
“반반하다는 소리는 종종 듣지만 귀엽다는 소리는 아홉 살 때 이후로 처음이네요. 칭찬으로 듣겠어요.”
“사천에는 항상 고분고분한 애들밖에 없었거든. 그 계집이 그 계집이라 심심했는데, 신선해서 좋다.”
제갈아연은 이 말 한마디로 당양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사천에서 당가의 이름은 절대적이다. 구파일방 중 청성파(靑城派)와 아미파(蛾眉派)도 사천에 있지만, 그 두 곳은 무림 문파이면서도 도관(道館)이자 불당(佛堂)인지라 속세의 일에 잘 간섭하지 않았다.
즉, 실질적으로 사천제일의 문파는 당가다. 그런 곳에서 가주의 적장자로 태어나 누릴 것은 다 누리고 살았을 것이다.
실제로 지난 후기지수 회합 때까지 당양선은 참석한 적이 없었다. 어쩌면 이번에 처음으로 세상에 나왔을지도 모른다.
제갈아연이 쓰게 웃었다.
“당가의 장기가 독과 암기만이 아니로군요.”
“음?”
“이만 가 주실래요? 불편하네요.”
“그럼 안 되지.”
당양선이 잔을 까딱였다.
“아직 술을 따라 주지 않았잖아? 받을 건 받고 가야지.”
“…….”
“얼른 따라 봐. 금전이라도 던져 줘야 하는 건 아니지?”
홍루의 기녀 취급이 따로 없었다.
이 정도가 되자 제갈아연도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건 멀리서 지켜보던 제갈준도 마찬가지였다.
제갈준이 성큼성큼 자리로 다가왔다.
“이보…….”
그때였다.
“자네.”
한 줄기 어두운 그림자가 당양선을 가렸다.
당양선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허락도 없이 당가인(唐家人)의 뒤에 서는 게 아니야. 날 보고 싶으면 앞으로 와서 예의를 갖춰.”
남궁현이 웃으며 말했다.
“인성 안 된 자를 들일 만큼 칠대세가의 회합이 가벼운 자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뭐?”
“괜한 민폐 끼치지 말고 이만 일어나라는 걸세.”
“민폐라?”
“설마 본인의 행동이 얼마나 무례한지조차 모를 만큼 멍청한 머리로 당문의 섬세한 무공을 연성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진 않네.”
“허!”
“긴말 필요 없겠지. 쓸데없는 분란 만들지 말고 조용히 일어나게.”
당양선이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주제 모르는 놈들이 그렇게 많다고들 하더니만, 아버지 말씀이 맞았어.”
점입가경이었다.
쿵!
거칠게 술잔을 내려놓은 당양선이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그의 눈에 남궁현이 보였다.
“계집애처럼 허여멀겋게 생겼군. 넌 이름이 뭐냐?”
“남궁현이다.”
당양선의 눈이 반짝였다.
“호오, 기세가 제법 괜찮다 싶었더니 남궁이었어?”
아버지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칠대세가에는 말을 섞을 가치도 없는 놈들투성이지만, 적어도 남궁과 모용만큼은 진짜라고.
당양선은 아버지의 말을 전부 믿지 않았다. 존경은 하지만 그 자신이 보고 느꼈던 경험도 만만치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가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공포였다.
그것은 사천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당가는 사천에 있지만 동시에 천하에 있었다. 무림에서 당가를 건드리고도 발 뻗고 자는 놈은 단 하나도 없었다.
힘은 곧 공포다. 무림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집단은 당가다.
고로 당가야말로 진정한 천하제일가(天下第一家)인 것이다. 당장 조부님만 봐도 무림 최고수라는 성천십삼좌(聖天十三座)에서 가장 두려운 고수로 불리시지 않는가.
“검중제일(劍中第一)이라는 남궁세가의 자손이라면 제법 건방을 떨 만하지.”
“갈수록 가관이군.”
“하지만 검중제일이라도 천하제일 앞에서 그 난리를 치면 쓰겠나.”
남궁현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천하제일? 누가 천하제일이란 말이냐?”
“당연히 본가가 천하제일이지.”
“세상 물정 모르는 놈이군.”
당양선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여유롭던 얼굴이 무표정으로 바뀌니 그것만으로도 서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꿇어라.”
“뭐?”
“기회를 주마. 무릎을 꿇고 사죄해라. 하면 네놈의 오만방자함은 없던 것으로 해 주마.”
남궁현의 눈빛도 싸늘해졌다.
“뭣도 모르는 놈인 줄로만 알았거늘 이제 보니 미친놈이었구나.”
그때였다.
“천하제일이라고?”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연회장 전체에 감돌았다.
당양선이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반면 남궁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굉장한 내공!’
목소리에서 울려 퍼지는 내공이 실로 대단했다.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몸통이 울리는 기분이었다.
번쩍!
연호정의 눈이 불타올랐다.
“본가 앞에서 천하제일을 논해? 그것도 당가가?”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는 한 청년이 있었다.
나이는 남궁현보다 족히 대여섯은 많은 것 같았다. 귀티 나는 외모지만 연호정이나 남궁현처럼 잘생겼다고 말하긴 어려운 인상이었다.
얼굴만큼 체격도 평범했다. 걸치고 있는 옷도 딱히 고급스러워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그가 뿜어내는 존재감만큼은 남달랐다.
우웅! 우우웅!
공기가 부르르 떠는 것만 같았다.
이 자리에 내공이 약한 사람은 없었지만, 그들 대부분은 이명(耳鳴)이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을 받았다.
“그래, 남궁이나 모용이라면 그리 말할 법도 하지. 하지만 당가라? 나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군.”
당양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갈수록 커지는 목소리가 자꾸만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 감각이 몹시 불쾌했다.
“하긴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지. 당가 사람 중에는 괴짜가 많다고 말이야. 이제 보니, 자네가 그 괴짜 중 한 명이었구먼?”
당양선은 저도 모르게 외쳤다.
“네놈은 또 뭐냐!”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생각보다 훨씬 더 컸다. 당양선 스스로도 당황할 정도였다.
괜히 과민 반응을 한 것처럼 보인다. 당양선의 목이 살짝 벌게졌다.
“어려서 그런가? 말이며 행동이며 서투르지 않은 게 없는데?”
“너!”
“새겨듣게, 세상 물정 모르는 당가의 어린 친구. 이 무림에서는 말이야, 천하제일이라는 말을 함부로 가져다 붙이는 게 아니야.”
“네놈은 뭐냐고 물었다!”
“한 가지 더. 그렇게 있는 짜증, 없는 짜증 부리지 말게.”
청년이 미소를 지었다.
외양은 평범했지만 그의 미소는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약해 보이잖아?”
당양선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우우우웅!
남궁현은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물러났다. 당양선에게서 풍기는 독한 기운 때문이었다.
‘독(毒)?!’
독기(毒氣)였다. 독을 풀어 낸 것이 아니라 내공의 성질 자체가 독(毒)인 것이다.
제갈아연이 외쳤다.
“당 공자!”
파라라락!
저 멀리서 일단의 무리가 달려왔다. 느닷없이 퍼져 나오는 독기에 놀란 각 가문의 호위무사들이 달려오는 것이다.
청년이 남궁현을 바라보았다.
“남궁 동생.”
“…….”
“별일 아니잖나? 그렇지?”
남궁현은 마뜩잖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철없는 젊은이들 때문에 불철주야 고생하는 호위들에게 사정을 설명해 줘야 하지 않겠어? 따로 술자리도 좀 마련해 주고. 이번 회합은 남궁 측에서 열지 않았나?”
“…….”
“내 이리 부탁함세.”
“알겠소, 명 형.”
잔뜩 화가 난 와중에도 용케 명 형이라는 호칭을 들은 모양이었다.
당양선이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네놈, 명가(明家)냐?”
“그렇다네.”
청년, 명호림(明湖臨)이 말했다.
“내가 바로 당대 천하제일가, 구주명가(九州明家)의 삼공자 명호림이라네.”
당양선이 코웃음을 쳤다.
제갈아연 앞에서는 굉장한 여유를 보여 주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특유의 폭급한 성정이 명호림의 강한 기도에 자극받고 있었다.
“명호림?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이야.”
“그러니까 세상 물정 모른다는 거다. 적어도 같은 세대를 살아갈 강자의 이름 정도는 외워 두어야 실수를 안 하지.”
“실수? 미안하지만 난 실수 따위 하지 않아. 실수 같은 걸 할 신분이 아니거든.”
명호림이 측은한 눈으로 당양선을 바라보았다.
당양선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차라리 화를 내고 욕을 했다면 모를까, 저따위 건방진 눈빛은 참을 수가 없었다.
“……너,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마라.”
“고, 공자님!”
멀리서 한호명의 외침이 들렸지만, 당양선은 참지 않았다.
츠츠츠츠.
당양선에서 몸에서 희미한 자색 기운이 넘실거렸다. 본격적으로 독공(毒功)을 발산하는 것이다.
깜짝 놀란 제갈아연은 뒤로 물러서다가 문득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은 아직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심지어 손에 든 잔도 그대로였다.
제갈아연이 다급하게 외쳤다.
“당 공자! 옆에 사람이……!!”
그때였다.
피이이잉! 퍼어억!
날카로운 파공성이 긴장 가득하던 연회장의 분위기를 그대로 쪼개 버렸다.
명호림은 어느새 어깨 어림까지 든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는 부서진 술잔이 들려 있었다.
그가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이 무심한 얼굴로 손을 들었다.
“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