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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20화 (20/963)

20화. 무인의 가치관 (4)

사천당가.

독(毒)과 암기(暗器)를 주력으로 중원 전역에 명성을 떨친 독특한 무가다.

올곧은 정의와 도덕을 추구하는 백도의 특성상 독과 암기는 수용하기 어려운 무기였다. 정정당당함보다 암살(暗殺)에 특화된 무기이기 때문이다.

그 선입관을 깬 최초의 가문이 바로 당가였다. 그들은 주력 무기처럼 독하고 냉혹했지만 최소한의 선은 넘지 않았다.

물론 연호정의 입장에선 그따위 역사는 알 바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명치를 쓰다듬었다.

아직도 생생했다. 다 죽어 가는 자신의 가슴에 박힌 우모침(牛毛針)의 기분 나쁜 감각이.

‘당관.’

무림맹 부맹주 당관.

삼도천으로 향하는 자신의 육신을 완전히 저승으로 보내 버린 사갈(蛇蠍) 같은 놈.

움찔!

철봉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원한은 절대로 잊지 않는 흑암제의 본능이 깨어나고 있었다.

‘…….’

연호정은 마음을 다스렸다.

상대는 당관이 아니다. 설령 당관이라 한들 원한이 있다고 공격해선 안 된다.

지금의 그는 흑제성주가 아니라 연가의 대공자이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먼저 건드리지 않는 이상, 섣부른 행동은 금물이었다.

“그나저나 이분들은……?”

“본가의 연호정 대공자님과 연지평 이공자님이시오.”

한호명이 웃으며 인사했다.

“반갑소. 한호명이외다.”

담백하다 못해 짤막하기까지 한 인사였다.

신모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한호명에겐 타 가문의 자제일 뿐이지만 그래도 이 자리는 칠대세가 후기지수들의 회합장이었다. 말투야 그럴 수 있지만, 뒷짐까지 지고 아랫사람 대하듯 해선 안 되는 것이다.

신모가 따지고 들려 할 때였다.

“한 대협을 뵙습니다. 연가의 이공자 연지평입니다.”

연지평이 절도 있게 포권했다.

한호명의 오만한 인사와는 달리 연지평의 인사는 깍듯하고 예의가 있었다.

한호명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연 소협이구려. 벽산의 이공자가 그리 재능 넘치는 무재(武才)라 들었소. 직접 보니 소문이 거짓은 아닌 것 같소.”

연지평이 미소를 띠었다.

“과찬이십니다. 그만한 재능도 없거니와 형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연호정에게 향했다.

한호명의 얼굴에 흥미가 일었다.

“소협이…….”

“신 대주.”

신모가 고개를 숙였다.

“예, 대공자님.”

“배고프군. 자리 잡고 밥부터 먹지.”

“알겠습니다.”

“번은 교대로 서도록 해. 여기서까지 호위할 필요는 없으니 나머지는 쉬게 하게.”

“명을 받듭니다.”

신모가 한호명에게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먼저 가 보겠소. 편히 쉬시길.”

그렇게 연씨 형제가 창응대와 함께 장원 안으로 들어갔다.

한호명의 눈빛이 칙칙해졌다. 사람 좋은 미소는 어느새 자취를 감췄다.

“무딘 송곳니로도 물 수는 있단 말이지?”

그때였다.

“한 무사.”

“예, 대공자님.”

한호명의 깍듯한 인사를 받은 청년, 당양선(唐養宣)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방자한 놈이 연가의 대공자가 맞나?”

“그런 듯합니다.”

“흐음? 혹시 병이라도 있는 건가?”

“예?”

“제법 건실해 뵈기는 하는데, 품고 있는 기(氣)는 너무 평범한데? 수준이 영 별로야.”

한호명이 딱 잘라 말했다.

“저잣거리 소문에, 연가의 대공자는 전형적인 호부(虎父) 밑의 견자(犬子)라고 합니다.”

“오호?”

“그와는 달리 이공자는 당대 가주 이상의 재능을 가진 자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한 핏줄이지만 재능은 극과 극이라는 거지? 그거 재미있네.”

한호명이 고개를 숙였다.

“보아하니 대공자님께서 관심을 두실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무시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글쎄?”

“예?”

당양선이 어깨를 으쓱였다.

“최소한 배포는 있잖아? 당가인(唐家人)을 앞에 두고 저런 싸가지를 보여 주는 거, 그거 진짜 쉬운 거 아니거든.”

무림의 격언 중 이런 말이 있다. 당가의 독과 암기를 대비하면 십 년은 더 살 수 있다는.

무림맹에게 원한을 사면 발 뻗고 자기 힘들지만, 당가에게 원한을 샀다면 그 즉시 목숨을 끊으란 말도 있다. 그만큼 사람들은 당가의 무공과 냉혹한 성격을 두려워했다.

“그나저나 우리가 너무 빨리 와 버렸군. 짐 풀고 합비 구경이나 좀 하지.”

“알겠습니다.”

이미 두 사람의 머리속에서 연가는 사라져 버렸다.

일찍 와서 그런지 원하는 방을 마음대로 고를 수 있었다. 미리 장원으로 와서 일하고 있던 하인들이 일행을 안내해 주었다.

연지평이 연호정을 힐끔거렸다.

“저기…….”

“음? 왜? 할 말 있느냐?”

“괜찮을까요?”

“뭐가?”

“당가요.”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치들이 왜?”

연지평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그치들이라니? 옆에 당가 소속원이 형의 말을 들었다면 화를 냈을 것이다.

“뭐 잘못한 거라도 있었나?”

“예?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이봐, 신 대주. 혹시 나 뭐 실수했어?”

신모가 깍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절대로 없습니다.”

무려 절대로 없단다. 말이 웃겼지만 연지평은 웃지 못했다. 신모의 얼굴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연호정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한호명의 오만한 작태에 화가 난 것이었다.

화가 나도 단단히 났는지 신모가 한마디를 더 얹었다.

“오히려 잘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잘했나?”

“그렇습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지만, 가끔은 하나를 보고도 열을 알 수 있는 법입니다.”

“즉, 그치들하고는 상종하지 않는 게 좋다?”

“이곳은 칠대세가 후계자들의 회합장입니다. 본인이 속한 곳이 아니라고 하나, 상대 가문의 자제들에 대한 예의는 갖추어야 마땅합니다.”

연호정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뭐, 자세가 삐뚤어지긴 했다만 크게 실수한 것도 아니잖은가.”

“의도치 않은 언행이었다면 저 역시 이렇게까지 말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알고 있었나?”

신모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연지평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뭘요?”

“한호명이라고 했던가? 그놈이 그리 싸가지 없이 나온 건 마냥 본인 뜻이 아니야.”

“그럼요?”

“당가 놈이 시킨 거지.”

“예에?!”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호기심은 동하고, 자신이 나서긴 체면 상하는 것 같고. 그럴 때 아랫사람을 시켜 상대를 자극해 뭐라도 알아보고 싶어 하는 거다.”

“……!”

“하품이 나올 만큼 고전적인 작태 아니겠냐. 너무 뻔해서 지루해, 이제는.”

“그, 그럼 형님이 그들을 무시한 것도?”

“처음부터 말을 섞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 하지만 그렇게까지 나오는데 뭐 하러 휘말려 주겠어?”

연지평은 탄성을 질렀다.

동시에 부끄러웠다. 자신은 그런 줄도 모르고 괜스레 마음을 졸이고 있지 않았나.

연호정이 연지평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확실히 너는 올곧게 잘 크고 있어.”

“제가요?”

“그래. 나는 상대를 무시했지만, 너는 가문에서 배운 대로 예의로서 대했다. 그런 건 배운다고 다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특히나 네 나이 때면 더더욱.”

연지평이 얼굴을 붉혔다.

“저, 저는 그런 게 아니라…….”

“아버지가 그러시더구나. 모욕을 참는 건 인내가 아니라 비겁이라고. 하지만 개가 짖는다고 따라 짖지는 말라고 하셨더랬다.”

연지평이 헛기침을 뱉었다.

“저는 당가 사람들을…… 그, 그러니까 절대 개라고는…….”

“말이 그렇다는 거다. 나나 신 대주는 심사가 꼬여서 아버지나 너처럼 정석대로는 못 살거든.”

연호정이 신모를 보며 물었다.

“그렇지, 신 대주?”

신모가 작게 웃으며 답했다.

“그런 것 같습니다.”

“거봐. 오히려 상대를 무시하는 건 편해. 뭐든 정석이 어려운 거다.”

연지평의 얼굴에 혼란이 깃들었다.

“저는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어려울 것 없다. 너는 네가 배운 대로, 지금껏 해 왔던 대로 살면 돼. 보다 더 유연해졌으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네 모습을 버리지 않았으면 한다.”

“……제가 틀리지 않은 건가요?”

“절대로. 오히려 바르고 이상적이다. 그 모습을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비꼬는 멍청이들도 많겠지만, 그놈들은 이 세상의 토대가 이상(理想)으로 세워졌다는 걸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 못 할 바보들이지.”

“그럼 형님은요?”

“나?”

“네.”

연호정이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개와 사람을 구분하기 어려워하는 꼴통이지.”

* * *

이틀이라는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회합 당일까지 연호정은 두문불출했다. 그리고 그건 연지평도 마찬가지였다. 연호정은 무공을 돌아보고 미래를 계획했으며, 연지평은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다.

각 무가의 후기지수들도 회합 전날 밤까지는 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합비의 저잣거리를 둘러보는 모양이었다.

회합장에 들어온 첫날 약간의 신경전이 있었던 당가 측과도 더 부딪치진 않았다. 서로의 숙소가 워낙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틀이란 시간은 평온하게 흘렀다.

회합 당일 아침.

방 안에서 운기조식을 하던 연호정의 귀로 신모의 전음이 들려왔다.

[대공자님.]

[말해.]

[남궁(南宮)과 팽가(彭家) 측 후기지수들이 도착했습니다.]

번쩍!

연호정의 눈이 뜨였다.

조금 더 성숙해진 벽라진기가 두 눈에 맺혔다. 희미하기만 했던 동공에 제법 선명한 푸른빛이 맴돌다 사라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연호정이 탁 트인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경치도 좋고 장원 내부가 전부 보이는 방이었다.

그의 눈에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일단의 무리가 보였다.

‘남궁.’

훤칠한 키에 아주 잘생긴 미남이 보였다.

허리춤에는 범상치 않은 보검을 찼고, 표정은 자신만만했다. 이 먼 거리에서도 느껴질 만큼 정련된 기도를 세우고 있었다.

남궁세가의 후기지수가 분명했다. 생김새 이전에 풍기는 기(氣)가 남궁상화와 비슷했다.

하지만 그쪽은 연호정의 관심 밖이었다.

그가 시선을 돌려 두 명의 청년을 바라보았다. 키는 남궁의 후기지수와 비슷했지만 기골이 훨씬 장대했다.

‘팽가!’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우우우웅.

단전에 자리 잡았던 벽라진기가 순식간에 전신 혈도를 누볐다. 고고한 현무기가 요추를 타고 올라와 머리를 차게 식혀 주었다.

츠츠츠츠.

오감이 예민해졌다.

먼 거리에서 지저귀는 새소리와 방 안의 목향, 피부에 달라붙는 먼지 한 톨까지도 느껴졌다.

‘…….’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기질이 아예 다른데?’

정확히 보려면 내공 운용법까지도 봐야 한다. 내공 자체의 분위기도 더 자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런 게 무의미하다 싶을 정도로 기질이 독특했다. 팽가의 기(氣)는 당시 습격자들과 얽힐 구석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을 만큼 이질적이었다.

‘안 되겠군.’

이대로 창가에서 확인하는 건 한계가 있다. 연호정은 순식간에 거처에서 나와 외원의 대문까지 걸어갔다.

“음? 누구지?”

“글쎄…… 하인은 아닌 것 같은데?”

연호정을 본 팽가의 후기지수들은 그렇게 말했다. 애써 작게 말하는 듯했지만, 그 덩치만큼이나 목소리가 컸다.

덕분에 모든 사람의 시선이 연호정에게 집중되었다. 하지만 연호정은 그 시선에 신경 쓰지 않았다.

한 그루 나무 옆에 선 연호정은 팔짱을 끼고 팽가의 후기지수들 주시했다.

‘역시.’

연호정의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확인을 더 하긴 해야겠지만…….’

아무리 봐도 아니군.

혹시 모르니 계속 살펴봐야겠지만 육감이 말해 주고 있었다. 팽가는 아니라고.

팽가의 수뇌부들은 또 다를 수 있다?

머리는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가슴은 아니라고 확신을 내렸다. 신모가 말했듯 팽가는 하나를 보고 열을 알 수 있는 이들의 가문인 것 같았다.

‘…….’

어떻게 하지?

결국 연호정은 판단은 내렸다.

‘일단 명가(明家)까지 봐야겠어. 시간은 충분해. 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그때였다.

“……들리지 않소?”

아릿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연호정이 시선을 돌렸다.

바로 남궁현이었다.

“누군진 모르겠지만 초면에 사람을 그리 빤히 쳐다보다니, 실례라고 생각하지 않나?”

팽가의 후기지수들이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남궁 형, 너무 그럴 필요 없소. 우린 괜찮으니까. 그렇지, 동생?”

“닳는 것도 아닌데, 뭐.”

“거 보쇼.”

말투는 거칠었지만 왠지 모를 순박함이 묻어 나온다.

괜히 김이 샌 연호정이 포권했다.

“실례했소. 내가 아는 누구와 닮아서.”

“으허허허! 나 같은 호한(豪漢)이 또 있었소? 역시 세상은 넓구먼!”

“형님. 나 보고 그런 것 아닐까?”

“웃기고 있네. 너랑 닮았으면 도망부터 쳐야지, 미친놈아. 산적이 따로 없구먼.”

“잊었어? 우리 쌍둥이야.”

“쌍둥이라고 꼭 닮을 필요는 없잖아?”

“……그게 대체 뭔 말이야?”

이제 보니 그 덩치만큼이나 활발한 성격들인 것 같았다. 저런 성격은 꾸며 낼 수가 없다.

“그나저나 소협은 뉘셔?”

“연호정이라 하오.”

“연호정?”

“벽산연가에서 왔소.”

“어헉! 벽산연가!”

순간 연호정은 볼 수 있었다. 남궁현의 눈빛이 돌변하는 것을.

팽가의 소가주 팽대호(彭大虎)가 허겁지겁 달려와 연호정의 손을 잡았다.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그의 손가락이 자연스레 팽대호의 맥문 쪽으로 향했다.

“크하하핫! 연가 분이셨구먼? 이거 반갑소! 내가 연가 사람을 꼭 만나 보고 싶었거든!”

“음?”

“아하하! 그냥 개인적인 호기심이라고 알아 두쇼! 아, 난 팽대호요! 그리고 내 뒤에 서 있는 저 산적 놈은 팽만호(彭滿虎)라고, 부족하기가 한량이 없는 내 동생이외다!”

손을 잡고 마구 흔드는데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맥문을 통해 확인하고 싶어도 정신이 사나워서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도 손을 통해 기를 더 확실히 분석할 수 있었다.

‘일단 팽가는 가장 뒤로 미뤄 두는 게 좋겠군.’

그때였다.

대문이 또 한 차례 열렸다.

“오! 또 누가 오나 보구먼! 누굴까?”

덜컹!

문이 열리고 그곳에서 일단의 호위를 거느린 한 남매가 들어왔다.

남궁현의 눈이 커졌다. 팽씨 형제들은 넋을 놓았다.

청년도 청년이지만 여인의 아름다움이 실로 대단했던 것이다. 그리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게 아닌데도 주위를 환하게 밝혀 주는 미모가 압권이었다.

남궁현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연이?”

“어?!”

제갈아연이 손으로 일행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

남궁현이 살짝 웃으며 손을 들어 올릴 때였다.

“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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