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18화 (18/963)

18화. 무인의 가치관 (2)

“후우, 답답하구나.”

무릎을 모아 끌어안은 연지평의 얼굴은 몹시 우울해 보였다.

“내가 틀린 걸까?”

연지평은 답답했다.

평생 연가의 법도와 가르침대로 살아온 그는, 이틀 전 초성루에서 형이 벌인 행동에 큰 충격을 받았다.

‘형님.’

연지평은 그날의 연호정을 떠올렸다.

북풍한설도 화들짝 놀라 도망칠 만큼 차가운 눈빛. 악인과 싸우고 있는 사람이 위기에 처했는데도 아무런 내색 없던 형의 무심함.

결국 형은 제갈 남매를 도우러 갔지만, 그때까지는 도무지 백도인(白道人)이라 할 만한 행동을 보여 주지 않았다.

결과가 중요하지, 뭐가 문제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하지만 연지평 기준에서는 과정 역시 결과 못지않게 중요했다.

형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형의 행동은 분명 잘못이었다.

그래서 연지평은 혼란스러웠다. 한때나마 자신을 힘들게 한 형이지만, 그는 절대로 형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착하고 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형에게 좌절감을 준 자신의 생각 없는 행동에 후회도 많았었다.

‘그래, 그만한 사정이 있었을 거야. 악인에게 당하고 있었지만…… 나름의 사정이 없었다면 형이 그랬을 리 없어.’

그렇다. 당황스러웠지만 거기까지는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방화범, 마방을 죽일 때의 형의 모습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너무 끔찍했어.’

당시를 생각하자 연지평은 다시 한번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굉장한 무공으로 상대를 제압한 후, 멱살을 잡고 불길 앞까지 끌고 간 형.

무표정한 얼굴로 불 속으로 악인을 던져 버린 냉혹한 행동.

‘사람을 산 채로…….’

그리 잔인하게 죽이고도 형은 전혀 충격을 받지 않은 것 같았다.

차라리 통쾌하다는 기색이라도 있었다면 모르겠다. 죽어 가는 마방을 보는 형의 눈빛은 무감각의 극치였다.

길거리에서 나뒹구는 돌멩이를 봐도 그렇게 무정하게는 못 볼 것이다. 그 행동이, 눈빛이, 분위기가 연지평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형님. 정말 제가 아는 형님이 맞나요?’

이제는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다.

한참이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던 연지평이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바보 같구나.”

의문이 있다면 물어보면 될 일이고, 오해가 있다면 풀면 될 일이다. 어차피 고민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었다. 연지평은 연호정에게 찾아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렇게 일행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던 연지평은, 문득 멀어져 가는 두 남녀를 발견했다.

‘어? 형님?’

형님과 제갈세가의 자녀였다.

‘어디 가시는 거지?’

잠시 망설이던 연지평이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이 정도면 되겠군.”

“…….”

“물어볼 게 있다.”

“아, 네!”

물어볼 거?

연지평의 얼굴에 호기심이 깃들었다. 평소라면 남의 대화를 엿듣는 행동에 거부감을 느꼈겠지만, 지금은 왠지 홀린 듯 바라보게 되었다.

“너는 너희 가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네?”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어두운 숲속에서 새파랗게 빛나는 연호정의 눈빛은 인광(燐光)처럼 섬뜩했다. 제갈아연은 저도 모르게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때 방화범과 겨룰 때 네가 썼던 무공, 실로 범상치가 않았다.”

“그, 그건…….”

“무공의 수준을 보았을 때 일문의 비기라 해도 손색이 없었어. 네 연성 수준이 낮았을 뿐, 무학의 완성도는 매우 뛰어났단 말이다.”

“…….”

“차기 가주가 아니라면, 혈육이라도 그런 무공을 쉬이 전수해 줄 리가 없지.”

제갈아연의 목이 살짝 붉어졌다.

“연 공자의 말은, 제가 무공을 훔쳐 익히기라도 했다는 건가요?”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야.”

“그럼……?”

“제갈세가는 후계자가 아닌 사람에게도 비기를 전수할 만큼 여러 무공을 보유하고 있느냔 말이다.”

제갈아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여러 무공을 갖고 있냐니? 당연히 제갈세가 정도 되면 수백 종의 무공을 보유하고 있다.

“말을 더 쉽게 하지. 너희 가문은 이종(異種)의 무공도 보유하고 있나?”

“이종이라 함은……?”

“정공(正功)이지만 중원에서 선보인 적이 없는 무공이 있느냔 거다.”

설령 이런 질문을 해도 당사자가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연호정은 애초에 상대가 진실을 말할 거라는 기대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가 보는 것은 단 한 가지뿐이다.

상대의 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배신을 당하고, 수도 없이 죽을 뻔했던 흑도의 생활에서 단련된 그의 안목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연호정만이 아니라 흑도에서 오래 생존한 이들에게 그러한 안목은 기본 소양에 가까웠다.

눈을 보고 말 몇 마디만 섞어도 상대의 성향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날카로움.

이미 확인이 끝났음에도 몇 번이고 재확인을 하는 치밀함과 고집스러움.

연호정이 흑암제로 불릴 수 있었던, 흑도의 정점에 섰음에도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왜 그런 걸 물어보는지 모르겠지만…… 알고 있어도 본가의 사정을 연 공자에게 알려 줄 순 없어요.”

제갈아연은 침착하게 답변했다.

사적인 대화는 해 본 적이 없지만 이미 그녀는 연호정을 위험한 사람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사소한 것 하나라도 알려 줘선 안 될 사람이었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제갈아연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대체 이 사람 정체가 뭐지?’

정말 벽산연가의 대공자가 맞나?

칠대세가로 꼽히는 명문의 장자라면 뭐가 달라도 달라야 한다. 하지만 연호정은 그 정도를 심하게 벗어났다.

무공이 문제가 아니었다. 저 눈빛과 분위기는 그야말로 산전수전 다 겪어 본 무사의 그것이었다.

마치 수많은 적을 격파하고 유유히 황야를 걸어오는 야만스러운 전사를 보는 것 같다고 할까.

‘황 숙부님 같다.’

강함이 아니라 기질이 그렇다. 황 숙부님은 그녀가 아는 가장 거칠고 날카로우며 무서운 사람이었다.

말없이 제갈아연을 보던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네.”

“…….”

“네?”

“알겠다고 했다. 이만 가 봐.”

제갈아연은 또 한 번 당황했다.

‘뭐야, 이 사람?’

처음 불러서 얘기를 나눌 때는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흉흉한 눈빛이었더랬다. 한데 지금은 흥미를 잃었다는 듯 세상만사 귀찮다는 얼굴로 이만 가란다.

……자존심 상하는데? 내가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해?

“저기요.”

“왜?”

막상 물었는데 할 말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제갈아연은 주저하는 자신에게 세 번째로 당황했다. 언제 어디서나 당찼는데, 이상하게 연호정 앞에서는 주눅이 들었다.

‘내가 이 인간한테 뭘 잘못했다고 자꾸…….’

순간 제갈아연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해요.”

“뭘?”

“저희 남매, 정확히는 저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어요. 제 일로 괜한 위험에 처하게 했어요. 진심으로 사죄드려요.”

절도 있게 포권하며 허리를 숙인다.

진심이 묻어 나오는 행동이었다. 고개를 숙여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자책감이 가득한 표정임을 예상할 수 있었다.

“너와 원한이 있는 자들이었나?”

“원한이라기보다는…….”

제갈아연은 간단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사과할 것 없다.”

“네?”

“선의로 사람을 도왔다가 벌어진 일이다.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은 끝까지 널 쫓아온 그놈들이지 네가 아니야. 네 잘못이 없으니, 네가 사과할 필요도 없다.”

“그, 그래도…….”

“정 마음에 걸리면 피해를 본 주루와 사람들을 찾아가서 물질적인 지원이라도 해 줘. 그게 네가 해야 할 일이다.”

제갈아연은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선의로 사람을 도왔으니 죄가 아니다?

맞는 말이다. 제갈아연이 연호정이더라도 똑같이 말해 주었을 것이다.

다만 연호정이 이런 말을 했다는 게 신기했다. 그녀가 본 연호정은 냉혹한 실리주의자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건…… 반드시 그래야죠.”

“그래.”

“…….”

“뭐 해? 안 가나?”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뭔데?”

“미리 말하자면 추궁을 하는 게 아니에요. 제가 연 공자를 추궁할 자격도 없고요.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니까 너무 기분 나빠 하지 않았으면 해요.”

“그러니까 뭐냐고?”

“다소 잔인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음?”

“그 불에 타 죽은 놈이요. 스스로를 뇌화방주라고 했던 놈.”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왜 잔인하지?”

“보통 사람이 보기에 충분히 잔인할 수 있어요. 그 광경을 본 모두가 충격을 받았을걸요?”

“고작 그걸로?”

“……고작은 아니죠. 아무리 적이라도 사람을 산 채로 불에 태워 죽였는걸요?”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가볍게 넘겨 버린다. 제갈아연은 연호정의 무신경함에 혀를 내둘렀다.

“불을 질러 양민을 죽이려던 악인이지만 다소 지나쳤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정상적인 방법은 아니잖아요?”

“그럼 단칼에 목을 베어 죽이는 게 정상적인 방법인가?”

“……뭐어, 그건 아니지만 최소한 고통은 없으니까요.”

“그럼 안 되지. 그놈은 고통스럽게 죽어야 해.”

제갈아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놈이 너희 남매만 노렸다면 모르되, 쓸데없이 불까지 질러 가면서 수많은 양민을 죽이려 했다. 이는 당연히 죽을죄다.”

“그렇긴 하지만요.”

“죽음은 모두에게 공평해. 악인에게도, 선인에게도. 그렇다면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의 과정만이라도 고통스러워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스스로를 판관(判官)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판관이 아니니 뇌옥에 가두지 않고 죽여 버리는 거다.”

이런 무지막지한 사람을 봤나.

제갈아연은 연호정의 말에 놀랐지만, 동시에 묘한 부러움을 느꼈다.

얼마나 깊은 고찰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연호정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자신만의 확고한 기준이 있는 것이다.

때로는 복잡하게 사는 것보다 단순하게 사는 게 더 어렵다. 연호정의 사상은 단순했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고뇌가 동반된 단순함이었다.

여기까지 오니 더더욱 믿기지 않았다.

‘이 사람은 대체 나이가 어떻게 되는 거야?’

언행, 사상, 결단력, 무공 등등 도무지 그 나이대로 보이지 않았다.

물끄러미 연호정을 본 제갈아연이 풋! 하고 웃었다.

“고마워요.”

“인사 몇 번 하나?”

“제 내상을 다스려 주고 동생의 독을 뽑아 준 거, 연 공자 아니었나요?”

연호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제갈아연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연 공자는 저희 남매의 은인이에요. 이 은(恩), 어떻게든 갚을게요.”

“일없다.”

“그거 알아요? 말투가 왠지 나이 먹은 사람 말투예요.”

“시끄러워.”

“쳇, 딱딱하시긴.”

제갈아연이 투덜거리며 돌아섰다.

“일어나자마자 말을 많이 했더니 배고프네요. 뭐라도 주워 먹어야겠어요. 같이 갈래요?”

연호정이 수풀 쪽을 힐끔거렸다.

푸스스.

수풀의 움직임이 점점 멀어져 갔다. 두더지 같은 움직임이었다.

“그러지.”

“헤헷.”

“옆에 붙지 마.”

“아, 실례.”

“…….”

“근데요, 나이가 몇 살이에요?”

“마흔여섯.”

“거짓말하지 말고요, 아저씨.”

“열여덟.”

“어억?! 뭐야? 내가 누나였잖아! 야! 내가 너보다 한 살 많아!”

“…….”

“친구 할래?”

“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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