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무인의 가치관 (1)
삼십 대 장한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마음고생이 심하셨겠습니다. 선대로부터 잘 물려받은 역사 깊은 가게인데요.”
초성루주가 답답한 한숨을 쏟아 냈다.
“그저 선조께 면목이 없을 뿐입니다. 나름 잘 가꿔 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일이…….”
“에이, 그게 왜 루주님 잘못입니까. 살다 보면 예상치 못하는 재앙이 떨어지기도 하는 법이잖아요? 다친 데 없이 이렇게 멀쩡하신 것만 해도 다행입니다.”
“허허.”
이렇게 와서 위로해 주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힘이 되는 줄 모른다. 게다가 생전 처음 본 이 장한은 수많은 인부를 동원해 피해 지역 복구에 힘을 써주고 있었다.
나이는 자신보다 어리지만 보통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다.
“자, 그리고 이거 받으십시오.”
“이게 무엇입니까?”
“많은 금액은 아닙니다만, 공사 비용에 조금은 보탬이 될 겁니다.”
“어이쿠! 이러지 마십시오! 저도 그간 모아 둔 공금이 있으니……!”
“에헤이, 알 만한 분이 이러십니까? 인심은 곳간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여기 다 보수하려면 많은 돈이 들어갈 텐데, 예전처럼 질 좋은 식자재를 구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허어…….”
“초성루는 안휘를 대표하는 주루 중 하나입니다. 사람들은 초성루의 입맛이 변하는 걸 원치 않을 거예요. 부디 앞으로도 안휘의 명소로 남아 주십시오.”
초성루주의 얼굴에 감격이 떠올랐다.
모아 둔 돈이 있다고는 했지만 사실 그 돈으로 초성루를 복구하면 남는 게 없었다.
게다가 방화 사건이 났다는 소문이 돌면 당분간 초성루를 찾는 손님들의 발길도 뜸할 것이다. 자칫하다간 사업이 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인고의 시간을 어떻게 버티나 막막했거늘, 이런 도움을 주다니.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그렇다고 입 싹 닦으실 생각은 마십시오. 나중에 저 오면 한 끼는 공짜로 주셔야 합니다?”
“어찌 은인에게 그런 푸대접을 하겠습니까. 언제든 찾아오십시오. 그날 가장 좋은 재료로 만든 요리를 대접하겠습니다.”
“하하, 제가 또 그 정도로 염치가 없지는 않아서요.”
장한이 은근슬쩍 물었다.
“그나저나 루주님의 진짜 은인은 따로 있지 않습니까?”
“예?”
“초성루를 구한 영웅들 말입니다.”
“아…… 그, 그렇지요.”
장한의 눈이 반짝였다.
‘두려움?’
말을 더듬는 초성루주의 얼굴에서 그는 감사함보다 두려움을 먼저 느꼈다.
“왜요? 그치들이 루주님에게 해코지라도 했나요?”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분들이 아니었다면 초성루의 별채까지 몽땅 불탔을 겁니다. 내 사십이 넘도록 살아오며, 그런 협사(俠士)들을 본 적이 없습니다.”
“오홋? 굉장한 평가로군요?”
장한이 너스레를 떨었다.
“듣기로 그들이 불길을 잡았다고 하더군요. 그 전에 가장 안전한 길로 사람들을 대피시켰고요.”
“예에.”
“나이도 어려 보인다고 들었는데?”
“아! 후개(後丐) 어른 또래로 보이는 무사들도 있었습니다. 제가 비록 무공을 익히진 않았지만 굉장한 실력자들처럼 보였습니다.”
“굉장한 실력자라…….”
장한, 개방(丐幇)의 후개(後丐)인 가득상(賈得想)의 눈이 샛별처럼 반짝였다.
‘필시 창응대(蒼鷹隊)겠지?’
창응대는 무림 칠대세가의 일익, 벽산연가의 무력 조직 중 하나였다. 창응대의 실력이야 워낙에 정평이 나 있으니 이런 평가를 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가득상이 남서쪽 문을 바라보았다.
‘화재는 컸지만 생각보다 피해가 적어. 이 정도 범위의 화재였다면 중앙 건물까지 불탔어야 정상인데, 외벽과 창고 몇 채가 손상되는 정도로 그쳤다. 이걸 창응대가 잡았다는 건가?’
놀라웠다.
제아무리 무림인이라도 화재가 발생하면 당황한다. 양민보다 더 강하고 빠를 뿐, 재해 앞에서는 결국 똑같은 사람이란 것이다.
한데 불에 탄 흔적과 피해 정도, 증언을 취합해 보니 순식간에 퇴로를 확보하여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고 불길을 빠르게 잡은 것 같았다.
이런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소방(消防) 훈련을 받는 정용도 화재를 이리 빨리 제압하긴 힘들 것이다.
게다가 뇌화방주 마방까지.
‘마방은 과거 흑도십삼걸(黑道十三傑)로 손꼽히는 인재였다. 하지만 십 년 전 돌연 자취를 감추었다가 작년에 다시 활동을 재개했어. 정확한 무위는 불명이지만, 적어도 후기지수가 감당하긴 어려울 거라고 했다.’
비록 흑도가 과거의 성세를 잃었다지만 흑도십삼걸은 사파 최고의 후기지수를 뜻한다. 거기에 십 년 동안 더 강해졌다고 했으니 어중간한 무공으로는 상대도 되지 않을 것이다.
실제 목격자의 증언을 들어 보면 제갈세가의 후기지수들도 시종일관 밀렸다고 하였다. 그나마 제갈아연이 분전했지만 우위를 점하진 못했다고 들었다.
그런 고수를 일대일 대결로 이긴 자가 있었다.
“연씨세가의 대공자와는 대화를 나눠 보셨습니까?”
초성루주가 흠칫했다.
가득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리 놀라시는지요?”
“아…… 아닙니다.”
말은 그리했지만 그 부분에 대해선 더 얘기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가득상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제가 괜한 얘기로 루주님의 심사를 복잡하게 만든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헉! 아닙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주루를 복구하는 데에 제법 시간이 걸리겠군요. 어려운 게 있으면 언제든 본방의 방도들에게 말해 주십시오. 그럼.”
가득상은 대충 인사를 마무리하곤 초성루를 빠져나왔다. 초성루주가 복잡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게 느껴졌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벽산연가의 대공자 연호정이라……?”
가득상이 턱을 쓰다듬었다.
“동생의 재능에 밀려 쓰러져 버린 견자(犬子)가 아니었단 말인가?”
흥미로웠다.
무림 정보계의 정점이자 백도 무림의 기둥 중 하나인 개방의 후계자로서 전에 없는 재미를 느끼는 그였다.
“흐음, 후기지수 모임이라? 뭐, 칠대세가가 아니더라도 상관없겠지? 어차피 난 거지니까 어디든 동냥 다닐 수 있는 거잖아?”
* * *
후웅!
철봉의 움직임이 한결 부드럽고 안정적으로 변했다.
양손으로 봉대를 쥔 연호정이 힘차게 앞으로 찔렀다.
퍼억!
제법 큰 나무가 흔들렸다.
철봉은 나무를 일곱 치나 파고들었다. 놀라운 것은 철봉에 꿰뚫린 나무의 표면이었다.
구멍 난 표피 주변이 갈라지고 깨져야 정상인데 멀쩡했다. 철봉의 힘이 봉첨으로 집중되어 송곳 같은 관통력을 갖게 된 것이다.
‘촘촘해졌군.’
나무에서 철봉을 뺀 연호정의 얼굴에 아쉬움이 어렸다.
‘촘촘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멀었어. 노력 좀 해야겠군.’
연호정이 그 자리에서 풀썩 주저앉았다. 여전히 손은 피투성이였고, 전신은 땀으로 푹 젖었다.
가부좌를 튼 그가 벽라진결으로 운공을 끝낸 후, 현무기를 끌어 올렸다.
츠츠츠.
연호정의 몸에서 은은한 습기가 일었다.
놀랍게도 그 습기는 전혀 텁텁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쾌하고 성(聖)스러웠다. 사신무는 불패의 전투 무공이지만, 그것을 이루는 기(氣)들은 하나같이 올곧았다.
‘그래도 생생하게 살아났어. 얼마 안 됐는데도 오랜만인 것 같군.’
현무(玄武).
사신(四神)의 현무는 계해(癸亥)의 수신(水神)으로, 겨울을 상징한다.
오장육부 중 신장(腎臟)을 담당하기도 한다. 신장은 체내 노폐물이 빠져나가는 최종 기관으로 현무기(玄武氣)가 성하면 몸에 탁기가 들지 않는다.
특히 현무의 무공은 철벽이라고까지 표현된다. 사신의 무공 중 가장 견고하기 때문에 현무부터 시작하면 무공의 섬세함이 전반적으로 상승한다.
철봉으로 손쉽게 나무를 관통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개선의 여지는 많았지만, 이 정도만 해도 공방(攻防)에서의 단점을 많이 지워 낼 수 있었다.
연호정이 눈을 떴다.
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너무 빨리 깨웠다 싶기도 하지만 어차피 내겐 시간이 별로 없어. 최대한 빨리 예전 무공을 되찾아야지.”
할 일이 많다고 징징댈 시간이 없다. 이 기세로 남은 삼신(三神)도 빠르게 깨워야 할 것이다.
수련을 끝낸 연호정이 일행이 쉬고 있는 숲으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대공자님.”
“음.”
신모가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연호정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평이는?”
“잠시 혼자 있고 싶다고…….”
“그런가?”
뭐, 그럴 수도 있지.
한참 감정이 들쭉날쭉할 나이 아니던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고개를 끄덕인 연호정은 문득 창응대원들을 바라보았다.
연호정과 눈을 마주친 대원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푹 숙였다. 예의 있게 인사를 하는 것 같았지만, 왠지 연호정을 어려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들 저래?’
나한테 뭐 죄지은 거라도 있나?
그전에는 마주쳐도 고개만 까딱이던 놈들이 오늘따라 영 이상했다.
“저, 대공자님.”
“응?”
“괜찮으십니까? 손에서 피가…….”
“어, 괜찮아. 수련 좀 했더니 상처가 터졌나 보네. 금방 나을 거야.”
“아, 예.”
그때였다.
“저기…….”
연호정이 옆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초췌한 얼굴의 제갈아연이 서 있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는 건 처음이죠. 제갈세가의 제갈아연이라고 해요.”
“연호정이다.”
신모의 얼굴이 굳어졌다.
제갈아연과는 달리 연호정의 말투는 무척이나 오만했다. 마치 한참 어린 후배를 대하는 듯한 어조였다.
하지만 제갈아연은 연호정의 말투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한데 여기는 어디죠?”
내상 때문에 정신을 잃었다가 이제야 깨어난 그녀였다. 제갈준은 아직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신모가 말했다.
“함산(含山)에서 제법 떨어진 숲일세. 당장 의원을 찾으려 했지만 쉽지 않더군. 다행히 두 사람의 상세가 그리 심각하진 않아서, 차라리 합비로 이동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네.”
언뜻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다.
사람이 다쳤으면 실력이 좋든 나쁘든 의원부터 찾는 게 정상이었다. 한데 합비로 가자니?
‘잠깐, 상세가 나쁘지 않다고?’
제갈아연은 눈을 감고 자신의 내부를 점검했다.
곧이어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신모의 말은 사실이었다.
현원전단신공의 무리한 사용과 적의 공격으로 인해 상당한 내상을 입은 그녀였다. 한데 지금은 내상 대부분이 바로잡힌 상태였다.
‘언제 이렇게 나았지?’
제갈아연이 제갈준을 바라보았다.
“동생은요? 동생 상태는……?!”
“걱정하지 말게. 독이 제거되었더군. 제갈세가의 내공심법이 그리도 뛰어날 줄 몰랐네.”
“아!”
제갈아연이 직접 제갈준의 맥문을 살폈다.
‘정말이야.’
맥이 일정했다. 독기로 인한 내상이 있기는 하지만, 이 또한 정신만 차리면 알아서 치료가 가능한 정도였다.
신모가 무안한 듯 말했다.
“미안하네. 사실 두 사람의 상태가 어떠하던 의원부터 찾는 게 좋았을 테지만, 괜스레 그런 사태를 겪고 나니 마음이 급해졌다네. 하루빨리 합비로 가는 것이 모두의 안전에 이롭다고 판단했네.”
“아, 아니에요! 여러분 모두가 생명의 은인인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나요.”
“허허, 민망할 뿐이네.”
그때, 연호정이 말했다.
“제갈아연이라고 했나?”
“네? 아, 네!”
“할 얘기가 있으니 따라와.”
연호정은 그 말만 던져 놓고는 어두운 곳으로 걸어가 버렸다.
제갈아연이 당황하여 신모를 보았다.
신모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별일은 아닐 걸세.”
“…….”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