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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16화 (16/963)

16화. 사신(四神) 발동 (6)

“이공자님! 남서쪽 대문을 뚫었습니다! 그쪽 불길은 잡혔습니다!”

“그, 그래요?”

신모가 의아한 눈으로 연지평을 보았다.

연지평의 표정이 이상했다. 뭔가를 무서워하는 것 같기도 했고, 놀라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공자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어서 사람들을 대피시켜요!”

연지평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저는 제갈세가 사람들을 데려올게요!”

“헉! 이공자님! 그쪽은 위험합니다! 적의 수괴가……!”

“괜찮아요! 형님이 처리했어요!”

형님? 대공자를 말하는 건가?

신모가 혼란스러운 눈으로 부서진 대문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한 줄기 강렬한 폭음이 울렸다.

퍼엉!

‘헉!’

거센 충돌 직후 마방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아프다?’

그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바닥이 빨갛게 부어 있었다. 내공을 싣지 않은 장(掌)으로 통나무도 분지르는 손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방이 연호정의 철봉을 바라보았다.

봉첨(棒尖) 끝에서 푸른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창(槍)?!’

봉술이 아니라 창술 같다.

생긴 건 철봉이지만, 방금 내지른 한 수는 분명 창격(槍擊)이었다. 일격에 상대의 가슴팍을 쑤셔 버리는 살기 넘치는 수법이었다.

“이놈…….”

“꺼내라.”

“뭐?”

연호정이 차갑게 말했다.

“음화홍류를 익히다 막힌 거 아니었나?”

“……!”

“받아 줄 테니까 와 봐.”

마방의 눈이 붉어졌다.

그간 잊고 있던 분노라는 감정이 서서히 차올랐다. 상대가 상상 이상의 실력자여서가 아니었다. 음화홍류를 알고 있는 상대에게 놀라서 그런 것이다.

“어떻게 아느냐 물어도 소용없겠지?”

파아앙!

연호정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대단할 것 없는 속도지만 짓쳐 드는 기세가 엄청나게 사나웠다. 그 사나운 기세만으로도 피하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흡사 야수다.’

파아앙!

쏘아 내는 철봉이 단숨에 목을 노렸다.

가슴이 아니라 목이다. 피격 면적이 작은 목을 노린다는 것은 그만큼 정교한 공격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다.

치이이잉!

양손의 비수로 철봉의 경로를 틀었다.

‘큭!’

비수를 쥔 양손에 강한 충격이 남았다.

다른 건 몰라도 완력 하나만큼은 자신보다 위였다. 저 호리호리한 몸으로 어찌 이런 힘을 내는지 알 수 없었다.

세 합을 나눈 게 전부였지만, 비로소 마방은 깨달았다. 이 상태로는 이놈을 이길 수 없다는 걸.

‘이놈!’

화르륵.

단전 안에서부터 시뻘건 불꽃이 뽑혀 올라오는 듯했다.

‘그렇게 보고 싶다면 보여 주마!’

마방의 눈에서 살기가 치솟았다.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바로 저게 문제였다.

음한백류든 음화홍류든, 음류의 무공을 익혔다면 절대 살기를 드러내지 않는다. 애초에 암살을 위해 만들어진 무공이기 때문이다.

마방은 누가 봐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제갈세가의 자녀를 앞에 두고도 겁을 먹지 않았고, 오히려 남매를 고문하고 팔아 버릴 생각까지 했다.

마방은 지금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져 광증(狂症)을 앓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연호정에게는 희대의 호재였다.

“개자식!”

파아악!

마방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음험하고 수동적이었던 보법이 순식간에 거칠고 능동적으로 변했다. 어느새 독 묻은 비수는 던져 두곤 맨손으로 연호정의 머리를 노렸다.

‘온다.’

파아아앙!

허공을 찢는 장법이 제법 사나웠다.

드러난 살기만큼이나 빠르고 과격한 장법이다. 그야말로 불같은 무공이었다.

펑! 퍼엉!

허공에서 북 터지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뇌화방도들을 상대할 때도, 방금까지 마방을 상대할 때도 연호정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애초에 방어와 회피를 모르는 사람 같았다.

지금은 아니었다.

마방의 불꽃 같은 무공에 맞서지 않고 철저하게 피하고 있었다. 움직임이 툭툭 끊어져서 자연스러워 보이진 않지만, 일격은 하나도 허용하지 않는다.

‘이놈?!’

연신 공격을 가하던 마방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음화신장(陰火神掌)의 특성도 알고 있나?’

음화신장은 침투경(浸透勁)에 특화가 된 암장(暗掌)이었다.

파괴력을 살린 무공이 아니라 침투하여 내부를 상케 하는 무공이란 말이다. 심지어 막아도 그 방어를 뚫고 들어가 상대의 내상을 유발한다.

상대하는 사람은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 피하거나 빈틈을 노리는 것 말고는 대응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내공을 더 끌어 올린 마방이 연호정의 가슴을 향해 장을 내질렀다.

쉬이이익! 퍼엉!

연호정의 몸이 회전하며 그대로 마방의 등 뒤로 넘어갔다.

마방의 눈이 흔들렸다.

가슴을 노린 일격은 허초였다. 음화신장으로 공격하는 척하고 발끝으로 중단을 노렸는데 그것마저 피해 낸 것이다.

‘이걸 읽었어?’

회심의 한 수마저 피해 냈다. 경이로운 회피 능력이었다.

연호정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철봉을 끊어 쳤다.

퍽!

“큭!”

마방이 비틀거렸다.

봉첨에 맞은 등판이 쪼개질 것 같았다. 내공이 실려 있었다면 갈비뼈와 견갑골 일부가 산산이 조각났을 것이다.

“어디서 훔쳐 익히기라도 했나? 왜 이렇게 어설퍼?”

“……!”

“제대로 해 보지 그래.”

마방의 눈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네놈의 내장을 완전히 익혀 주마.”

휘이이잉!

연호정이 철봉을 돌렸다. 봉의 중간을 잡고 돌리자 공기가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마방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연호정의 얼굴에는 표정이랄 게 없었다. 어떻게 보면 나른해 보이기도 하지만, 딱히 그럴듯한 감정이 드러나진 않았다.

‘나를 개무시해?!’

상대를 상대로 보지 않는다. 마방은 들끓는 내공이 정수리까지 치솟는 기분을 느꼈다.

“개자식이!”

파아앙!

이전보다 더 빠른 속도였다.

정교함은 사라졌지만 훨씬 더 위협적이었다. 특히나 마방의 양손에서 피어오르는 희미한 적광(赤光)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알 수 없는 불길함을 느끼게 했다.

순간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화기(火氣)!’

상대가 드디어 진짜 힘을 꺼내 들었다.

마방의 손이 연호정의 얼굴을 노렸다.

콰득!

음화신장에 맞은 나무가 중간부터 뚝 분질러졌다. 부러진 나무 표면은 검게 그을려 있었다.

‘상당하군.’

절묘하게 회피한 연호정은 상대의 수준에 만족했다.

마방이 이를 갈았다.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 짓는 연호정의 얼굴을 봤기 때문이었다.

“이 새끼야! 내가 바로 음신(陰神)의 후계자니라!”

펑! 퍼펑!

공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희미한 적색 광채가 점점 진해지더니, 어느새 불꽃과 유사한 형상을 피워 냈다.

‘조금 더.’

퍼퍼퍼펑! 화륵!

허공에서 작은 불꽃이 일다가 사라졌다.

무공을 펼치면 펼칠수록 화기가 상승하고 위력도 증가한다. 속도 역시 더 빨라졌다.

마방의 눈은 잔뜩 핏발이 섰다. 아무리 봐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반면 연호정의 눈은 냉정하게 가라앉았다.

‘더!’

“죽엇!!”

후욱!

마방의 동작이 일순 커졌다.

최대의 공격을 가하려는 듯 강력한 기운이 뻗어 나왔다. 화기와 살기가 최대치까지 상승했다.

연호정의 눈빛이 돌변했다.

‘여기!’

순간 일곱 걸음이나 떨어져 있던 연호정의 몸이 마방의 코앞까지 짓쳐 들었다.

당황한 마방이 장을 내쳤다.

퍼어어억!

연호정의 왼손이 마방의 오른손을 맞잡았다.

마방의 얼굴에 희열이 솟구쳤다.

“병신 같은 새끼! 네놈은 죽었어!”

우우우우웅!!

맞잡은 두 사람의 손에서 기이한 공명음이 울려 퍼졌다.

잔인한 웃음을 머금던 마방은 순간 어리둥절했다.

‘뭐야?’

상대의 손을 통해 들어간 장력이 순식간에 혈관과 내장을 불태워 버렸어야 한다.

한데 연호정은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투명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음화신장의 침투경에서도 멀쩡한 듯했다.

“……어?”

마방이 얼떨떨한 얼굴로 말했다.

“뭐야? 왜 멀쩡하지?”

그때였다.

보일 듯 말 듯 은은한 청색으로 빛나던 연호정의 눈에서 시커먼 무언가가 치솟았다.

그것은 어둠이되 보통의 어둠과는 달랐다.

어딘지 모르게 서늘하고도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흑색이었다. 출렁거리며 치솟은 흑색 기운은 범람하는 강물처럼 당장이라도 눈 밖으로 쏟아져 나와 마방을 휩쓸어 버릴 듯했다.

치이이이익!

맞잡은 손에서 희뿌연 수증기가 일었다.

마방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화기가?!’

음화홍류의 기운이 이 어린놈의 손바닥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마치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처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빨려 들어간다. 마치 그 자리가 본래 자신의 자리라는 듯, 마방의 통제를 벗어난 화기가 무서운 속도로 연호정에게로 향했다.

‘헉!’

마방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연호정이 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내쉬는 숨결에 진한 습기가 어렸다.

‘좋아, 끌어냈다.’

저 서초패왕(西楚霸王)과 얽힌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전설처럼, 초성루를 에워싼 화벽은 진퇴양난의 화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사신무(四神武)는 명백한 사람의 무공이라, 적의 살의(殺意)와 투기(鬪氣)를 받았을 때 제대로 발동한다. 경지가 깊다면 모르되, 입문(入門) 자체가 생사의 싸움터를 전제로 한다.

보다 더 수월하게, 보다 더 확실하게.

화기와 살기를 뿜는 적과 조우하며, 비로소 연호정은 영혼 속에 봉인된 사신(四神)의 전설을 일깨웠다.

연호정이 오른손에 들린 철봉을 휘둘렀다.

부우웅! 퍼어억!

“커억!”

마방이 신음을 토하며 앞으로 거꾸러졌다.

마치 엄청나게 굵은 채찍에 맞은 것만 같다. 좌측 쇄골이 쪼개질 것 같은 고통에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쿵!

땅에 철봉을 찍은 연호정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화르르르륵!

진압되고 있던 불이 일순 연호정 쪽을 향해 기울어졌다.

‘와라.’

마방의 화기로 자극받은 사신의 비기가 마침내 고개를 들자, 그보다 훨씬 더 강한 화염을 끌어내 수기(水氣)를 증폭시켰다.

증폭된 수기가 전신을 휘감으며 신체를 유연하게 만들었다. 음화신장의 경력으로 뜨거워진 경락이 순식간에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휘이이이잉!

바람이 불어왔다.

연호정이 뿜는 수기가 바람을 맞아 반투명한 신수(神獸)의 형상을 만들어 냈다. 그 신수는 뱀의 머리와 거북이의 몸통을 지닌 괴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계해(癸亥)의 수신(水神). 북방의 지배자.

사신무의 현무(玄武)가 모습을 드러냈다.

치이이이익!!

치솟은 수기가 철봉 전체에 맴돌았다.

왈칵 피를 토한 마방이 괴성을 질렀다.

“으아아! 이 개자식! 내 내공을 어떻게 한 거야!!”

마방이 피범벅이 된 얼굴로 주먹을 내질렀다. 얼마 남지 않은 내공으로 휘두른 주먹이지만 파괴력은 충분했다.

그때, 연호정이 철봉을 돌렸다.

쾅!

공격을 가한 마방이 엄청난 속도로 튕겨 나가 땅을 굴렀다.

땅을 구른 마방의 몸이 꿈틀거렸다. 내지른 오른팔은 흉측하게 부러져 있었다.

무지막지한 반탄력이었다.

위이이잉!

원형으로 돌아가는 철봉 앞에 희미한 막이 형성되었다.

현무의 무공이었다. 극에 이르면 화포와 공성추까지 막아 낼 수 있다는 절대방어의 비술이었다.

“고맙다. 덕분에 생각보다 빨리 뽑아낼 수 있었어.”

사신무의 입문을 통과했으니, 다른 삼신(三神)을 불러내는 것도 시간문제다.

고대 무림의 전설적인 절학 사신무는 천년이라는 시간을 내려오며 단 한 번도 패배한 적 없는 불패의 무공이었다.

한 번 일깨워진 이상, 마방 정도의 무공으로는 연호정의 옷깃 하나 건드릴 수 없다. 사신무 중 고작 하나를 일깨웠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어지간한 공격은 다 막아 낼 수 있다.

연호정이 쓰러진 마방의 멱살을 잡아 들어 올렸다.

“덕분에 시간을 단축했으니 나름의 답례가 있어야겠지?”

“쿨럭!”

“보아하니 불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적어도 네 마지막은 불 속에서 보내게 해 주지.”

힘을 잃은 마방의 눈이 커졌다.

“아, 안…….”

퍽!

철봉에 맞은 앞니가 모조리 부러졌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마방을 든 연호정은 타오르는 불길 앞으로 걸어갔다.

사람들의 얼굴에 설마 하는 기색이 어렸다. 그중에는 연지평과 신모, 제갈 남매도 있었다.

연호정이 마방의 목을 쥐고 높이 들어 올렸다.

“다시 태어나면 불장난은 혼자서 하도록.”

“크르륵!”

연호정이 화마(火魔)를 향해 마방을 던졌다.

화르르르륵!

거센 화염이 마방을 집어삼켰다. 지독한 내외상을 입은 마방은 불꽃에서 도망칠 수가 없었다.

섬뜩한 비명이 초성루 전체를 울렸다.

산 채로 불에 타는 사람을 보며 좌중은 끔찍함에 몸서리를 쳤다.

이각 뒤.

초성루의 불길이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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