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사신(四神) 발동 (4)
왁자지껄 소란스러웠던 초성루가 일순간 잠잠해졌다.
“흥! 끝까지 숨어 계시겠다? 오냐! 튀어나오지 않고선 못 배기도록 만들어 주마!”
펑! 퍼퍼펑!
초성루 사방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으아아악!”
“부, 불이야!”
“헉! 무림인이다!”
초성루를 찾은 사람들은 공포에 질렸다.
기름이라도 뿌린 건지 불길이 이는 속도가 엄청나게 빨랐다. 나름의 역사와 인지도를 자랑하던 초성루가 순식간에 화벽(火壁)에 갇혀 버렸다.
쉬고 있던 제갈준이 재빨리 뛰쳐나왔다.
“누님?!”
제갈아연은 그보다 더 빨리 나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님! 이 불은 대체?!”
“그놈들이다.”
“예?”
제갈아연의 얼굴은 서슬 퍼런 분노로 물들어 있었다.
“어제 내 손에 박살 난 그놈들과 한패라고.”
“……!!”
제갈준이 이를 갈았다.
“대체 여길 어떻게 알고?!”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덜컹!
창을 열고 뛰쳐나간 제갈아연이 건각 하나를 건너뛰었다.
마치 한 마리 학처럼 고고한 신법이었다. 제갈세가를 대표하는 경신술 천기신행(天機身行)의 운신법이었다.
순식간에 중앙 건각 지붕 위에 올라선 제갈아연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많다!’
무려 일백이 훌쩍 넘는 수였다. 적게 잡아도 백오십은 되겠다.
‘대체 이 많은 수가 어떻게?!’
그녀는 길 가던 상인을 폭행하던 파락호들을 혼내 줬을 뿐이었다. 분위기를 보니 상인이 잘못한 것 같지도 않았고, 결정적으로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후, 파락호들의 뒤를 봐주던 흑도 문파가 쫓아왔다. 흑도 문파라고 해 봤자 삼류보다 조금 나은 수준에 숫자도 얼마 되지 않아 단숨에 쓰러트리곤 유유자적하게 초성루까지 온 것이다.
그걸로 끝인 줄 알았다.
한데 저기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놈은, 그때 쓰러트렸던 흑도 문파의 문주 놈이 아닌가?
“헉! 방주님! 저기 지붕 위에 보이십니까? 바로 저년입니다!”
“봤다, 나도.”
제갈아연이 방주라 불린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고수?’
마흔 정도 되었을까? 호리호리한 체격에 유순한 얼굴을 한 사내였다.
하지만 외양과 달리 사내의 눈빛은 보통이 아니었다. 먼 거리를 격하고 자신을 노려보는 사내의 눈빛은 맹수의 눈알처럼 섬뜩했다.
“방주님! 어서 저년을 잡아 족쳐……!”
빠각!
“컥!”
사내가 그대로 땅을 뒹굴었다. 코와 입에서 쏟아지는 피를 보니 극심한 내상을 입은 듯했다.
제갈아연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음장(陰掌)?’
체외로 힘을 방출하는 무공이 아니다. 경력을 체내로 침투시켜 골병을 들게 하는 음장류의 무공이었다.
방주가 손을 탁탁 털었다.
“병신 같은 새끼. 그러니까 네가 삼류 소리나 듣는 거다. 딱 봐도 저년, 명문에서 기른 고수가 아니더냐?”
제갈아연이 낭랑하게 외쳤다.
“네놈은 누구냐!”
“네놈? 흠, 나이도 어린 년이 말버릇 고약한 것 보게나. 하긴 백도 명문에서 배운 연놈들이 다 그렇지.”
“……!!”
“올려다보기 힘드니 내려와라. 통성명하려면 얼굴을 맞대야지.”
“싫다면?”
“뭐, 싫으면 어쩔 수 없고.”
대답은 장난스러웠지만, 그 직후 벌어진 일은 장난이 아니었다.
사방에서 가죽 주머니가 날아들었다.
펑! 퍼어엉! 퍼엉!
“끄아아악!”
“으아아! 사, 살려 줘!”
안 그래도 위협적인 화마가 종전보다 두 배는 더 크고 거칠어졌다. 가죽 주머니에 기름이 든 모양이었다.
제갈아연이 소리쳤다.
“그만! 내려가겠다!”
“진즉 그럴 것이지. 백도란 것들은 말이 안 통해요.”
사라라락!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제갈아연이 사내의 맞은편으로 내려섰다.
놀랍도록 유려한 신법이었다. 중년 사내 역시 상당히 놀란 듯 눈이 커졌다.
“허! 굉장한 경신술이군. 그래, 어느 문파의 자제분이지?”
“제갈세가의 제갈아연이다.”
가문의 이름값으로 타인을 억압하는 걸 싫어하는 그녀였다. 하지만 상황이 이러하니 별수 없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양민들의 피해가 커진다.
“신기제갈(神機諸葛)! 칠대세가의 자녀를 이렇게 보는구먼.”
사내는 신기한 동물 보듯 제갈아연의 요모조모를 뜯어보았다.
제갈아연의 얼굴이 굳어졌다.
‘뭐지?’
겁을 먹지 않았다.
파락호야 말할 것도 없고, 어지간한 흑도 문파도 칠대세가의 이름이면 그 즉시 도망부터 친다. 이기기는커녕 목숨이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한데도 사내는 전혀 그런 내색이 없었다.
‘응?’
제갈아연은 사내의 눈이 어딘지 모르게 탁하다는 걸 깨달았다.
기도는 분명 일류의 그것인데 눈빛은 혼탁하다?
‘뭐지? 괴이한 약물에 중독이라도 된 건가?’
파라라락!
어느새 제갈아연 옆으로 제갈준까지 나타났다.
사내가 보란 듯이 손뼉을 쳤다.
“호오! 다시 봐도 놀라운 신법이야! 혹시 내게 그 신법을 알려 주지 않겠나? 내가 운신법에 좀 약해서 말이지.”
괴상한 놈이다 싶었더니 갈수록 가관이다.
제갈준은 저도 모르게 욕설을 뱉었다.
“미친놈!”
“산 채로 힘줄을 뽑고 살점을 도려내 주랴? 그럼 말해 줄까? 응?”
섬뜩한 언사였다.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사내의 눈이 점점 광기로 물들어 갔다. 눈빛과 목소리를 보니 그런 짓을 한두 번 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네놈 정체가 뭐지?”
“아! 그러고 보니 내 소개도 안 했구먼? 이 몸은 뇌화방(雷火房)의 방주니라.”
들어본 적 없는 문파였다. 하기야 애초에 흑도 문파에는 별 관심이 없는 둘이었다.
“긴말 않겠어. 부하들을 시켜 당장 불을 꺼라.”
“내가 왜?”
“뭐?!”
“너희 연놈들이 있든 말든 한번 불 질렀으면 그걸로 끝이야.”
제갈 남매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뇌화방주가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소리에서 광기가 느껴졌다.
“순순히 기어 나왔으니 목숨만은 살려 주마! 자, 그럼 너희 연놈들을 어떻게 조리하면 될까?”
“이 악랄한 놈이!”
“사내놈은 건실하게 생겼으니 남색(男色)에 환장하는 늙은이들한테 팔면 되겠고, 계집년은 반반하니 실컷 즐기다가 홍루에 팔아 버리면 되겠구나!”
“이놈!”
파아앙!
더 들어 줄 수가 없었다. 제갈 남매가 땅을 박찼다.
뇌화방주의 얼굴에 사이한 기운이 어렸다.
“핫!”
그때, 좌우 멀찍이 떨어진 수풀에서 수십 개의 암기가 날아왔다.
대단할 것도 없는 암기술이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기습이었다. 한껏 분노한 상태에서 기습을 당하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합!”
촤르르륵!
제갈준의 손짓에 따라 허공을 날던 암기들이 방향을 틀었다.
제갈세가의 절기 소천성장법(小天星掌法)이었다. 비단 자락처럼 넓게 펴진 장력이 암기의 공격 방향을 흐트러트렸다. 약관에도 이르지 못한 청년의 무공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만큼 고차원적이었다.
퍽!
“큭!”
“준아!”
놀라운 무공이었지만 또 다른 기습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제갈준의 허벅지에 비수 세 자루가 박혔다.
뇌화방주가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의 손가락 마디 사이에 비수가 들려 있었다.
“애송이로군.”
제갈준이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무공은 고강했지만 경험이 부족했다. 그도, 제갈아연도 집단전과 난전의 경험은 전무했다.
“이 정도는…… 쿨럭!”
순간 제갈준이 피를 토했다.
붉은 선혈이지만 냄새가 고약했다. 제갈아연의 눈이 흔들렸다.
‘독?!’
그녀가 뇌화방주를 바라보았다.
“더러운 놈이!”
“왜 그래? 무림에서 이 정돈 기본이잖아?”
“당장 해약을 내놔!”
“걱정하지 마라. 내장은 좀 다치겠지만 죽지는 않을 테니까. 남색 즐기는 늙은이들에게 판다고 했지?”
머리끝까지 화가 난 와중에도 가슴이 철렁했다. 저 미친놈은 자신이 뱉은 말을 진짜로 실행할 생각인 것이다.
“다음은 네년 차례다.”
스르륵.
수풀에서 암기를 날렸던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본격적으로 제갈아연을 잡아 보겠다는 의지이리라.
혼자라면 모르겠지만 다친 동생 때문에 운신이 어렵다. 제갈아연의 얼굴이 난감함으로 물들었다.
* * *
쿵! 쿠구구궁!
초성루를 에워싼 담 곳곳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화마(火魔)가 얼마나 강하면 돌담까지 무너지는지 모르겠다. 어느새 초성루 본관 최상층으로 올라온 연지평이 외쳤다.
“신 대주님!”
“예, 이공자님!”
“일단 대원들을 시켜 불을 잡아주세요! 그, 그리고 저기! 제갈세가 분들을 도와줘야 해요!”
의연하기론 제갈준 못지않은 연지평도 느닷없는 사태에 당황한 건 마찬가지였다.
신모가 서둘러 대답했다.
“일단 사람들부터 대피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
“아! 그, 그렇지! 그럼 일단 제가 제갈세가분들을 도와줘야……!”
그때였다.
“기다려.”
두 사람이 재빨리 등을 돌렸다.
어느새 그곳에 연호정이 서 있었다. 화벽 근처를 거닐었던 것인지 얼굴 곳곳에 검댕이 묻었다.
“형님?!”
“괜찮냐?”
“네, 네! 한데 형님, 기다리라니요?”
연호정이 신모를 바라보았다.
“신 대주.”
“예, 대공자님.”
“초성루 후원과 북동, 남동 방향에 길을 뚫어 놓았다. 하지만 그걸로는 모자라. 남서향 대문 밖에 좌우로 토사가 쌓여 있어. 거기서 삼십 장만 더 가면 강가가 나올 거다.”
“예, 예?!”
“남서쪽 대문을 부수란 말이야. 최종 활로는 거기다.”
“그, 그걸 어찌…….”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순간 신모는 허리가 꼿꼿해지는 것을 느꼈다.
“대공자님의 명을 받듭니다!”
신모가 곧장 움직였다.
연호정이 연지평을 지나쳐 난간 끝에 섰다. 그의 눈에 제갈준을 끌어안은 제갈아연이 보였다.
‘자, 네 무공을 보여 줘라.’
제갈아연의 몸에서 희미하게 올라오는 기(氣)가 보였다. 전력을 다할 생각인 듯했다.
‘어서!’
연지평이 다급히 물었다.
“형님! 저기 제갈세가 사람들이 있는 곳도 길을 열어야 해요! 저쪽에도 사람들이 많아요!”
“괜찮아.”
“네?!”
“불은 더 번지지 않아. 바람의 방향도 역풍이라 연기를 마실 일도 없어. 당분간은 괜찮다.”
“그래도 사람들이 당황하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차피 승부가 끝나면 모두가 살아. 당황하지 마라.”
“그, 그러면 저희가 제갈세가를 도우러 가요! 한시라도 빨리 저들을 물리쳐야 문을……!”
“기다려.”
“……형님?”
“기다려라.”
연지평은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으려다가 순간 입을 다물었다.
높고 날카로운 콧대 위, 시퍼렇게 빛나는 눈빛은 그야말로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눈동자였다. 사람의 눈이 아니라 귀신의 눈을 보는 것 같았다.
턱!
저도 모르게 두어 걸음 물러난 연지평의 발에 탁자 다리가 걸렸다. 하지만 연지평은 그걸 인지하지도 못했다. 완전히 달라져 버린 형의 인상에 이질감과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연호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사방을 더듬던 그의 오감과 육감은 오로지 제갈아연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만약 너희 가문이 배후라면.’
창틀을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콰득!
목조 창틀이 부러져 버렸다. 저도 모르게 벽라진결이 운용된 것이다.
“……너희 연놈을 시작으로 호북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어 주마.”
펑!
수십 자루의 비수들이 제갈아연에게 쏟아졌다.
순간 제갈아연의 몸에서 하얀 기운이 솟구쳤다.
연호정이 눈을 부릅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