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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13화 (13/963)

13화. 사신(四神) 발동 (3)

제갈아연과 제갈준(諸葛俊)이 초성루의 후원 인근에 도착했을 때.

부웅! 카아아앙!

공기를 뒤흔드는 묵직한 소리, 쇠와 쇠가 부딪쳐 공명하는 소리가 후원을 꽉 채웠다.

“크윽!”

답답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짤막한 소리에 어떻게든 버텨 보겠다는 의지가 묻어 나왔다.

“어허! 하단이 비었잖아!”

“이익!”

온몸에 붕대를 두른 양흠이 서둘러 왼발을 들었다.

그러나 묵직한 철봉은 하단이 아닌 그의 복부를 노렸다.

퉁!

“컥!”

신음을 흘린 양흠이 비틀거리다가 이내 푹 쓰러졌다. 어떻게든 버티려 했지만, 복부 전체로 퍼지는 충격에 다리가 풀려 버렸다.

“음.”

연호정의 얼굴에 누구도 보지 못한 흡족함이 어렸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철봉을 쥔 손에서 은은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본가의 심법이라면 더 강해질 수 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연가의 무공을 익혀 왔다. 그러나 가문이 멸문한 후, 스승을 만나 새로운 무공들을 익히며 신세계를 엿볼 수 있었다.

즉, 흑암제의 명성을 안겨다 준 내공심법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과감하게 연가의 무공을 익히기로 마음먹었다.

연호정은 스승의 말을 떠올렸다.

‘기실, 나와 만났을 적에 네 수준이 괜찮았다면 굳이 홍천기(洪天氣)를 전수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신무(四神武)의 진력(眞力)을 끌어낼 정도는 되지만, 그 이상을 볼 수는 없기 때문이야. 물론 홍천기와 사신무로도 능히 한 세대를 풍미할 만하겠다만.’

홍천기는 소위 깨달음을 배제한, 오로지 내력의 증강에만 초점이 맞춰진 심법이었다. 그래서 늦은 나이에 무공에 입문한 자에게 최고라 할 만한 심법이었다.

그러나 세상에는 홍천기 이상을 넘보는 심법들이 많았다.

당연히 연가의 신공들도 홍천기보다 수준이 높았다. 특히 오대신공을 극한까지 익혀야만 연성할 수 있다는 연가 최고의 신공(神功)은 무림사(武林史)에 한 획을 그을 만한 심법이라 하였다.

연호정이 연위에게 오대신공의 구결들을 다 외우고 있다 한 것은 그런 이유였다. 언제라도 준비가 되면 건드려야 하니까.

‘역시 홍천기보다 나아.’

당장 발경(發勁)의 증폭 정도만 봐도 벽라진결이 홍천기보다 한 수 위라는 걸 알겠다.

‘성취가 더 오르면 바로 사신무(四神武)를 익혀도 되겠어.’

흡족함에 자세를 푼 연호정의 귀로 양흠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이런 술수를…….”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술수라니? 거 말이 거슬리는구먼.”

배를 부여잡고 일어나는 양흠은 자세도 제대로 못 잡고 있었다. 치명상은 아니지만 제법 충격이 컸던 것이다.

“하단이라고 하셨잖습니까?”

연호정은 어이가 없었다.

“하단이 비었다고 하단만 공격해야 되나?”

“하, 하지만!”

“내가 철봉에 발경까지 실었으면 넌 그렇게 일어서지도 못했어. 죽고 나서도 치사하다고 따지고 들 거냐?”

양흠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도 연호정이 말하는 바를 모르는 게 아니었다. 사실 술수라고 깎아내리는 것도 창응대원씩이나 되어서 할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분했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총 스물세 번의 비무에서 그는 단 한 번도 연호정을 이기지 못했다.

양흠은 믿을 수 없었다.

대공자 연호정의 실력은 이미 연가 내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최근 남궁가의 여식을 상대로 이겼다곤 했지만, 연가의 무사들은 그것이 정정당당한 싸움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런 대공자와의 싸움에서 일 승도 챙기지 못하다니? 내공의 양과 질을 생각하면 더더욱 말도 안 되는 결과였다.

“뭐, 어쨌든 즐거웠다. 덕분에 사람을 상대로 어떻게 휘둘러야 하는지 확실하게 알았어.”

상대의 자존심을 왕창 깎아 먹는 발언이었다.

양흠이 다시 싸우자고 외치려 할 때.

“양흠.”

“……예, 대주님.”

“이만 물러나라.”

이를 악문 양흠이 고개를 숙였다.

“대공자님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나야말로.”

연호정이 신모를 보았다.

“나는 좀 씻어야겠네. 뒤를 부탁하지.”

신모의 눈이 반짝였다.

“알고 계셨습니까?”

“모를 건 또 뭔가.”

“……알겠습니다. 푹 쉬십시오.”

“엉, 수고.”

그 말을 끝으로 연호정은 거처로 걸음을 옮겼다.

한옆에서 비무를 구경하던 연지평이 쪼르르 따라붙었다.

“형님! 형님! 대단하세요!”

“뭐가?”

“세상에 창응대원을 상대로 일 패도 허용하지 않다니요? 굉장해요! 아니 그보다 봉술은 언제 훈련하신 거예요?”

“너 놀 때.”

“에잇!”

형제가 티격태격하면서 거처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사라질 때까지 그들을 바라보던 신모가 고개를 돌렸다.

“거기 두 사람, 이만 나오시오.”

스르륵.

제갈 남매가 머쓱한 얼굴로 나타났다.

신모가 냉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아하니 강호 명문의 자손 같은데, 타인의 연무와 비무를 엿보는 것은 예의가 아님을 모르시오?”

제갈준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분위기에 압도되어 멍하니 보게 되었습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잘못입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군더더기 없는 사과였다.

잘잘못을 떠나, 신모는 제갈준의 모습에 감탄했다. 아무리 많이 봐줘도 대공자보다 어린 나이인데 행동거지는 몹시 어른스러웠다.

진심으로 사과하는 와중에도 의연함이 있다. 그 모습만으로도 신모는 상대에 대한 경계가 제법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신모가 입을 열려 할 때였다.

딱!

“으헉!”

제갈준이 비틀거렸다.

“허이구! 이 밥통아!”

“아, 왜 또 그러세요!”

“저분이 누군지 알고는 있는 거야?”

“네? 무슨 말이에요?”

“세상에, 너 정말 제갈씨 맞냐? 그 머리로 어떻게 세가를 이끌래? 난 딱 보니까 기억나는구먼.”

“……에?”

몇 번 헛기침을 한 제갈아연이 신모에게 곱게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신 대협.”

신모의 눈이 커졌다.

“제갈씨? 하면 자네들은……?”

“헤헤, 오 년 만이던가요? 호북에서 뵈었죠?”

“아!”

놀랍게도 신모는 제갈 남매와 만난 적이 있었다.

오 년 전, 호북에서 온갖 범죄를 저지르던 악인이 있었다. 무공이 뛰어나고 용의주도하여 누구도 잡지 못했던 자였다.

그 악인을 처단한 것이 제갈세가였고, 신모는 강호행 중 어찌어찌하다가 참가했다. 신모는 바로 그때 제갈세가와 연을 맺었다.

제갈준도 그제야 떠올린 듯 놀라서 신모를 보았다.

“헉! 광풍검(狂風劍) 대협?!”

신모가 헛기침을 했다.

“낯간지러운 별호는 언급하지 않았으면 하네.”

“하면 그 봉술을 구사하던 사람이?”

“연가의 대공자이시네.”

“아!”

제갈준은 새삼스러운 얼굴로 연씨 형제가 들어간 거처를 바라보았다.

벽산연가의 이름은 같은 칠대세가 사이에서도 뜨거웠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중원에 알려진 지 오십 년도 안 되어 강호 최고 명문 반열에 올랐으니 그럴 만도 했다.

제갈아연이 웃으며 물었다.

“신 대협께서 연가의 가신(家臣)으로 들어가셨다는 걸 들었어요. 벽산연가라면 만인이 감탄하는 무가(武家)죠. 축하드려요.”

“고맙네.”

비록 함께 지낸 건 며칠에 불과했고 심지어 오 년 만에 만났지만, 신모와 제갈 남매 사이에는 어색함이 없었다.

강호의 삶이라는 것이 다 그렇다. 친분이 얕아도 좋게 좋게 지내는 게 도움이 된다. 신모는 물론 제갈 남매 역시 그것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자네들도 후기지수 회합에 참여하러 온 것인가?”

“네!”

“그래, 그때의 꼬마들이 벌써 이렇게 성장했구나.”

제갈아연이 음험한 얼굴로 속삭였다.

“혹시 시간 되시나요? 이렇게 뵌 것도 우연인데 술이라도 한잔?”

“누, 누님!”

신모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 자네들과 연은 있다만 지금은 연가의 창응대주일 뿐이네. 나는 이곳을 지켜야 하니 술은 나중에 마시도록 하세.”

“헷, 그럼 이건 어때요? 신 대협도 합비로 가시죠?”

“그렇다네.”

“저희와 함께 가요!”

“자네들과?”

“네! 어차피 연가 형제도 회합에 참여하잖아요?”

“그렇긴 하다만…….”

신모가 연호정의 거처를 힐끔거렸다.

“일단 대공자께 여쭤봐야겠네.”

“헤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둘이 왔는가? 호위는?”

제갈아연이 투덜거렸다.

“그게요, 그 고지식한 꼰대…….”

순간 제갈준이 뒤에서 제갈아연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하하하! 신 대협! 그럼 오늘 밤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반가웠어요, 대협!”

“으읍!”

“가요! 갑시다, 누님!”

“푸합! 이, 이 새끼가 씻지도 않은 손으로 입을……!”

“아, 좀!”

제갈준이 제갈아연을 끌고 후다닥 사라져 버렸다. 내공까지 쓰고 끌고 가는 기색을 보니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멀어진 남매를 보며 신모가 고개를 저었다.

“엄청나게 활기차게 성장했군.”

* * *

“하면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래.”

신모가 나가자 연지평이 머리를 긁적였다.

“정말 괜찮으세요?”

“뭐가 말이냐?”

“그…… 제갈 남매와 같이 가도요.”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 될 건 또 뭐냐? 어차피 회합 장소에서 볼 사람들인데.”

“그렇긴 하지만요.”

“게다가 신 대주와 연이 있다잖아? 그럼 적어도 뒤통수칠 위험도 많지 않다는 뜻이야. 얼마 남진 않았지만 한 명의 고수라도 함께하는 게 좋지.”

“에이, 형님. 저들은 제갈세가의 자녀들이에요. 당연히 뒤통수 같은 건 안 치죠.”

“남궁가의 썩을 년은 다 무너져 가는 집안 자식이라 그 지랄 떨었대?”

“……그건 아니지만요.”

“절간에서도 살인마가 나고 뒷골목에서도 성자(聖者)가 나는 게 강호다. 그런 고정 관념은 후딱후딱 버리도록 해.”

“네에.”

조금은 풀이 죽은 듯 연지평이 눈을 내리깔았다.

연호정이 그의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으아악!”

“그냥 그렇다는 말이야, 인마. 너도 이만 가서 쉬어라.”

“엇? 형님 식사 안 하세요? 곧 밥 먹을 땐데요?”

“좀 쉬다가 먹으마. 팔다리가 욱신거려서 말이야. 나 못 일어나면 그냥 먼저 먹어라.”

“아!”

하긴 아침부터 쉬지도 못하고 비무만 해 댔으니 피곤할 만도 하다.

연지평이 무안한 얼굴로 일어났다.

“쉬세요. 이따 올게요.”

“오냐.”

그렇게 연지평도 방을 나섰다.

미소 가득하던 연호정의 얼굴이 서서히 싸늘하게 식어 갔다.

“제갈이라?”

비무를 하던 와중 제갈 남매의 기(氣)를 느낀 그였다.

‘전혀 다르다. 진기의 성질도, 내공의 운용법도.’

진기의 성질은 그들의 존재를 알아챘을 때 보았고, 내공의 운용법은 제갈준이 제갈아연을 끌고 나갈 때 느꼈다.

‘확실히 습격자들의 기와는 달라. 하지만…… 합비까지 가면서 살펴봐야겠군.’

번잡스러운 걸 싫어하는 그가 제갈 남매와의 동행을 허락한 건 이런 이유에서였다. 눈치가 빠른 만큼 육감도 발달한 그였지만, 지금은 육감이 아니라고 해도 더 분석하려고 노력했다.

‘이왕이면 저 남매의 무공을 제대로 봤으면 좋겠는데.’

연호정의 바람은 생각보다 빨리 이뤄지게 되었다.

그날 밤, 초성루가 수많은 손님으로 한창 바글거릴 때였다.

콰아앙!

초성루의 외문 하나가 통째로 주저앉았다.

“개 같은 연놈들! 어디로 갔나 싶었더니 이곳에 숨어 있었구나! 당장 튀어나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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