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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12화 (12/963)

12화. 사신(四神) 발동 (2)

한 달 후.

“와아! 형님! 저기 봐요! 저 마차 엄청 크지 않아요?”

“그러네.”

“세상에, 저렇게 크고 화려한 마차는 처음 봐요! 확실히 안휘성 쪽이 우리 강소보다 눈이 즐겁네요!”

“그러냐.”

“헉! 형님! 방금 보셨어요?! 저 마차는 엄청 작은데 엄청 빨라요! 어떻게 저런 마차가 있을 수 있지?”

“그러게.”

“우리도 나중에 저 마차 한번 타 봐요! 네?”

“그럴까.”

“헤헤, 꼭이에요! 약속했어요, 형님?”

“그러자.”

연지평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난생처음 외지 땅을 밟아 본 그였다. 안휘성은 연가가 있는 강소성과 인접한 곳이지만, 기후부터 문화까지 여러모로 다른 점이 많았다.

한참 신나 하는 동생을 보는 연호정의 얼굴은 떨떠름함 그 자체였다.

“좋으냐?”

“그럼요! 형님은 안 좋으세요? 형님도 안휘성에는 처음 와 보신 거 아니에요?”

백 번은 더 와 봤을걸.

“사실은요, 저는 온 천하를 다 돌아보고 싶어요.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거든요. 다른 지방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항상 궁금했어요.”

다 거기서 거기다.

풍토가 다르니 문화도 다르고, 생김새도 다르지만 결국 사람은 다 똑같다. 착한 놈은 뒤통수를 맞아도 웃으며 참고, 나쁜 놈은 대접을 받아도 성을 내기 마련이다.

연호정이 본 세상은, 사람은 그러했다.

“음…… 그리고요.”

“엉?”

“형님이랑 같이 나와서 더 좋아요, 헤헤.”

실없이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는 모습이 제법 귀엽다.

웃으며 연지평을 보던 연호정의 얼굴이 서서히 찌그러졌다. 갑자기 아버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진짜 모를 분이라니까.’

대숲에서 대답을 들은 아버지는 한참 자신을 노려보더니 그대로 가주실로 돌아가셨다.

말투가 거칠어서 화가 나셨나 싶었더니만, 다음날 가주실로 부르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생각을 달리해 보니, 지평만 보내기는 불안한 감이 있다. 물론 그것은 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네 나이가 벌써 열여덟이며, 충분히 제 몫을 할 나이라고 생각한다. 어떠한 분란도 일으키지 않겠다고 다짐한다면 지평과 함께 보내겠다.’

가기 싫은 자리지만 확실히 지평만 보내기에는 껄끄럽다. 게다가 두 가문의 분란의 핵심엔 자신이 있지 않은가. 동생에게 짐을 지우기가 싫기도 했다.

‘그쪽에서 분란을 일으킬 생각이 없다면, 저 역시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설령 그쪽에서 시비를 걸어 와도 참아라.’

‘그건 약속 못 드리겠습니다.’

‘다시 말한다. 모욕을 참는 건 인내가 아니라 비겁이다. 그러나 개가 짖는다고 사람이 따라 짖어서는 아니 되는 법. 상대가 사람인지 짐승인지부터 파악한 연후에 행동하거라. 알겠느냐?’

‘…….’

‘어찌 대답이 없느냐?’

‘뭐랄까…… 저도 사람이 덜된 놈이라 인내심이…….’

연호정은 사흘을 내리 마보 수련으로 보냈다. 인내심이 없었다면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고는 예정보다 훨씬 빨리 안휘로 와야 했다. 미리 가서 기후에 적응하고, 먼저 온 후기지수들과 연을 맺어 화합이 뭔지 배우라는 아버지의 엄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참 희한한 분이야.’

법도를 중시하는 딱딱한 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번 일은 뭔가 감정적으로 대처하신 것 같았다.

그래도 연호정은 아버지를 이해했다. 어찌 되었든, 자식 놈이 당신께서 바랐던 모습과 다른 길을 가려고 드니 화가 날 만도 했다.

‘뭐, 좋은 기회이기도 해.’

연호정의 눈이 활활 불타올랐다.

‘확인해 볼 수 있겠어.’

아버지와의 관계가 조금 어긋나는 한이 있더라도, 이 회합에서 얻을 게 없었다면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 시간에 다른 많은 걸 할 수 있으니까.

그가 순순히 회합에 참여한 이유는 하나.

‘적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을까?’

이번 후기지수 회합은, 차후 가문을 이끌 후계자들이 대거 참여하는 회합이기도 했다.

만약 적이 칠대세가 중에 있다면 후계자 또한 연가를 공격한다는 걸 알고 있을 공산이 컸다. 그게 아니더라도 진기(眞氣)와 무공에서 비슷한 점이 묻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일단 남궁과 모용, 당가는 제외한다.’

백도와 연수하며 사음교를 물리칠 적, 유독 많이 봐 왔던 이들이 그 세 가문이다. 그리고 그는 세 가문의 고수들에게서 적의 무공과 유사한 점을 한 번도 느끼지 못했다.

그렇다면 남은 가문은 셋.

‘팽가(彭家), 제갈가(諸葛家), 그리고 명가(明家). 이 셋을 주시해야 해.’

“형님?”

“응?”

연지평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불편하신가요?”

“불편하다니? 뭐가?”

“아뇨, 그냥…….”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멸문의 흉수를 떠올리니 표정이 좋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불편한 거 전혀 없다. 나도 두근두근해.”

여러 가지 의미로.

“헤헤, 그럼 일단 저희 숙소를 잡아 볼까요?”

“좋지.”

그때,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은 더 이동하지 않으십니까?”

연지평은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 낮고 묵직한 목소리에 복부가 우웅 하고 울리는 것 같았다.

연호정이 대답했다.

“그럴 생각이야.”

“알겠습니다. 하면, 숙소는 저희가 알아볼 터이니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포권으로 예의를 보여 주는 이는 이제 갓 사십이 되었을 법한 중년의 검사였다.

바로 창응대주(蒼鷹隊主) 신모(申摹)였다. 연가가 자랑하는 창응대의 수장이자 강동에서 손꼽히는 검사라 알려진 절정고수였다.

“그럴 것 없어. 갈 곳은 정해 놨으니까.”

“예?”

“초성루(楚聲樓)로 갈 거다.”

일행이 있는 곳은 안휘성 화현(和縣)이었다. 화현의 동북쪽을 오강(烏江)이라 불렀는데, 서초패왕(西楚霸王)의 사면초가(四面楚歌) 전설로 유명했다.

초성루는 오강 일대가 잘 보이는 주루였다. 안휘 사람이 아니면 잘 모르는 주루이기도 했다.

신모가 의외라는 듯 물었다.

“초성루를 알고 계십니까?”

“응.”

“안휘 사람이 아니면 잘 모르는 곳인데…….”

“그냥 들어 봤어. 그나저나 신 대주는 아는 곳인가 보지?”

“예, 강소성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몇 번 들렀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럼 길 잡자고.”

“알겠습니다.”

신모는 강윤과 여러모로 분위기가 달랐다.

무공은 강윤보다 높았고, 더 신중해 보이기도 했다. 연가의 무사답게 공사 구분에 철저했으며, 맡은 임무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그보다 무공이 강한 사람은 많지만, 그처럼 믿음직한 사람은 많지 않다. 연위가 그를 형제에게 딸려 보낸 이유였다.

그렇게 연씨 형제와 신모, 그리고 창응대 일 개조 스무 명이 초성루로 이동했다.

“와아!”

초성루는 제법 북적거렸다. 날이 쌀쌀해져도 초패왕의 전설에 젖기 위해 사시사철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충 방 잡고 쉬자. 시간도 남아도니까 사나흘 뒤에 출발하게.”

“예.”

초성루 후원에 여장을 푼 일행.

그러나 창응대는 철저하게 형제를 호위했다. 대주까지 총 스물한 명을 삼 교대로 나눠 번을 섰다.

철봉을 들고 나온 연호정이 혀를 찼다.

“자네들도 쉬지 그래?”

“괜찮습니다.”

딱딱하기는.

“그럼 고생들 해.”

어찌 되었든 가주의 명령을 받은 이들이다. 연호정은 굳이 그들을 설득하려 들지 않았다.

“음, 여기쯤이 좋겠군.”

부웅, 부웅.

철봉의 중심을 잡고 이리저리 돌리는 연호정.

그런 연호정을 보는 신모의 눈이 빛났다.

‘익숙하다.’

한 손으로 붕붕 돌리는 동작에서 능숙함이 묻어 나왔다. 마치 수 년간 봉술을 수련한 사람 같았다.

‘본래 검을 쓰시지 않았나?’

이곳까지 오면서도 연호정은 수련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수련이 운공조식과 느릿한 권형(拳形)이었을 뿐, 봉술 수련은 본 적이 없었다.

쿵!

철봉이 땅을 찍는 소리가 상당히 매서웠다.

“가 볼까.”

연호정이 발끝으로 철봉을 끊어쳤다.

투웅!

철봉이 회전하며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양손으로 철봉의 중심을 잡고 회오리를 일으키듯 휘두른다. 차갑고 건조한 공기가 철봉을 피해 달아났다.

“흡.”

쿵!

강한 진각과 함께, 연호정이 본격적으로 봉술을 펼쳐 냈다.

휘이이잉!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신모의 눈이 점점 커졌다.

부웅! 부우웅! 파바박!

시간이 지날수록 빠르고 정교해지는 봉술.

스무 근이 조금 안 되는 무거운 장병기를 어느새 능숙하게 다루는 그였다. 제때 원심력을 줘서 속도를 높이고, 필요한 부분을 끊어쳐서 내지르는데 놀라우리만치 부드럽고 아름다웠다.

연호정의 눈가에 웃음이 잡혔다.

‘역시 된다.’

이곳까지 오면서 봉술을 수련하지 않고 연가의 기초 권법인 연가십삼권(燕家十三拳)을 수련했다. 유연함과 신체의 무게 중심을 확실하게 심어 두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예상대로였다. 비로소 선풍봉법(旋風棒法)이 제힘을 내고 있었다. 조금만 더 몸에 붙이면 바로 실전에 써도 괜찮을 정도였다.

‘좋아, 내친걸음이다.’

파아악!

벽라진기가 신체를 안정적으로 잡아 주었다. 허공을 찌르는 봉첨(棒尖)은 날카로웠고, 내리누르는 봉대는 무거웠다. 회전하며 공기를 빨아들이는 봉술이 도도한 강물과 같았다.

생각보다 훨씬 좋은 실력에 감탄하던 신모는, 이내 깜짝 놀라고야 말았다.

파박! 팡! 파아앙!

끊이지 않는 강물처럼 부드럽게 이어지던 봉술이 딱딱해졌다.

철봉이 연신 허공을 끊어 치고 있었다. 아름다운 춤사위 같았던 봉술이 순식간에 투박해졌다.

“너무 딱딱하군요.”

신모가 옆을 바라보았다. 창응 일 조의 양흠(楊欽)이었다. 새벽에 번을 서야 할 그가 나와서 연호정의 수련을 구경하고 있었다.

“투로(套路)가 점차 무너지고 있어요. 지치신 것 같진 않은데, 아무래도 저 봉술이 익숙하지 않으신 듯합니다.”

“그래 보이느냐?”

“예? 아, 예. 물론 수준 높은 봉술 같기는 합니다만, 저래서야…….”

“대공자께서는 봉술을 제대로 이해하고 계신 것이다.”

“예?!”

“투박해 보이지만 쓸데없는 동작이 하나도 없지 않느냐?”

양흠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 이상한 동작이 말입니까?”

“넌 봉술의 투로만 보이고 철봉에 실린 진기(眞氣)는 보이지 않는단 말이냐?”

신모의 눈이 깊어졌다.

“대공자께서는 지금 적의 몸을 가장 효과적으로 파괴하는 봉술을 구사하고 계신 것이다. 진기의 특성까지 살려서. 그러니 투박해 보일 수밖에.”

“…….”

“아마 저 봉술은 본래 빠르고 격정적인 심법에서 파생된 무공일 것이다.”

내공심법의 특성에 맞게 봉술의 흐름을 조절한다?

양흠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일류인 자신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신모의 눈빛이 흔들렸다.

‘저런 재능을 갖고 계셨던가?’

정작 양흠에게 말한 자신도 믿기가 어려웠다. 현재 대공자의 수준으로는 감히 시도할 엄두도 못 낼 일을 자연스레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피는 어디 가지 않는 건가.’

잠시 후.

“후우, 후우.”

연호정이 수련을 멈추었다.

“좋아, 이 정도면 괜찮겠어.”

“대공자님.”

“엉?”

연호정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양흠이 있었다.

“창응 일 조, 양흠이라 합니다.”

“그런데?”

“실례가 안 된다면, 저와 내공을 제외한 투로 연마를 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당돌하기 짝이 없는 제시였다.

신모가 표정을 굳혔다.

“양흠! 대공자께 그 어인 무례란 말이더냐. 당장 거처로 돌아…….”

“그거 좋지.”

신모가 놀라서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이 웃으며 철봉을 붕붕 돌렸다.

“안 그래도 상대가 필요한 참이었는데, 나야 좋지.”

“영광이옵니다. 하면,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좋아.”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대공자랍시고 사정 봐주면 안 된다?”

* * *

다음 날.

초성루를 둘러보는 제갈아연(諸葛娥淵)의 얼굴에 감탄이 일었다.

“캬! 대단하구먼! 역시 미리 온 보람이 있다니까!”

“누, 누님.”

“엉?”

“사람이 많습니다. 부디 언사를 좀…….”

“내 언사가 뭐가 어때서? 좋은 걸 좋다고 말하는데 뭐가 어떻다고 그러냐?”

“휴, 그러니까 자꾸 사건에 휘말리시는 거 아닙니까. 당장 어제 그놈들만 해도…….”

“괜찮아. 내가 제갈가의 장녀인 줄 모르니까.”

“그래서 더 문제라고요! 차라리 확실히 매듭을 지었으면…….”

“사내놈의 자식이 염통 쫄깃쫄깃한 거 봐라. 좀 대담해져라, 엉?”

“누님은 너무 무신경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리고 그 일에 남녀를 왜 따지시는 건데요?”

“야, 그만 조잘거리고 얼른 밥이나 먹자.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것…….”

그때였다.

쿵!

“크아아악!”

살벌한 비명이 초성루의 후원에서 울려 퍼졌다.

제갈아연의 눈이 동그래졌다.

“너도 들었지?”

“……아, 아뇨.”

“들었잖아, 인마!”

“못 들었어요! 못 들었다고요!”

“어, 그럼 넌 여기 있어.”

“제발! 또 무슨 사고를 치시려고요!”

“이놈 자식이? 야! 저 비명을 듣고도 그래? 만약 저 비명의 주인공이 선량하고 아리따운 여인이면 어쩌려고? 엉?!”

“가래가 잔뜩 낀 소리구만 뭘…….”

“여하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것 같아! 협의(俠義)를 위해 직접 확인해 봐야겠어!”

“누님! 어? 진짜 가요? 누님! 누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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