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사신(四神) 발동 (1)
“네? 후기지수 회합이요?”
“그렇다.”
연위는 연지평을 쳐다도 보고 있지 않았다. 몇 장의 문서를 휙휙 넘기며 빠르게 읽어 내리는 모습이 무척 익숙해 보였다.
“본래 칠대세가의 후기지수들끼리의 회합은 매해 있었다. 다만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하는 해가 오 년에 한 번씩 있지. 그게 바로 이번 해다.”
연지평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어렸다.
“제, 제가 가는 건가요?”
“문제라도 있느냐?”
“아, 아뇨! 그런 건 아닌데요.”
연위가 접어 둔 종이를 건넸다. 연지평이 공손하게 그것을 받았다.
“회합 허가증이다. 사십오 일 뒤, 안휘성 합비(合肥)에서 열린다. 제시간에 도착하려면 넉넉잡아 회합 보름 전에는 출발해야 할 게다.”
신법의 고수가 무리한다면 닷새 만에도 주파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대강(大江)을 넘어야 하고, 지리도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회합인 만큼 멀쩡한 신색으로 가려면 보름 전에는 출발해야 마땅했다.
“창응대(蒼鷹隊)가 너를 호위할 것이다. 잘 다녀오너라.”
연지평의 눈이 동그래졌다.
“창응대요?”
“전부는 아니다. 일 개 조를 붙여 줄 것이되, 창응대주(蒼鷹隊主)가 함께한다.”
창응대는 연가의 무력 조직 중에서도 정예라 평가받는 부대였다. 연가 특성상 조직원들은 많지 않지만 한 명, 한 명이 뛰어난 고수로 구성되어 있었다.
어지간해서는 강호에 내보내지 않는 부대를 딸려 보내 준다는 것은, 그만큼 후기지수 회합이 중요하다는 걸 뜻한다.
“저…… 아버지.”
“말해라.”
연지평이 난색을 보였다.
“후기지수의 회합이라면, 마땅히 형님을 보내야 하지 않습니까?”
문서를 뒤적거리던 연위가 고개를 들어 연지평을 보았다.
연지평은 움찔했다.
수도 없이 봐 왔지만 역시나 아버지의 눈빛은 무서웠다. 투명하기가 서역에서 들여온 초자(硝子, 유리) 같았다.
‘형님…… 저는 아직 아버지가 무서워요.’
침을 꼴깍 삼켜 가며 기다리길 한참.
“네 형은 위험하다.”
“네?”
형이 위험하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연위가 연지평 쪽으로 자세를 돌렸다.
“근래 네 형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연지평은 당황했다.
항상 무공, 학문, 가법, 예절에 관한 내용을 제외하면 말수가 극도로 적은 분이 아버지다. 이렇게 사적인 질문을 받은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조금, 조금 달라진 것 같아요.”
“조금이 아니다.”
“…….”
“성격도, 무공의 성취도 내가 봐 왔던 호정이 아니야. 마치 사람이 바뀐 것 같더구나.”
연지평 역시 연호정의 변화를 크게 느끼고 있었다.
무공도 무공이지만 성격에서의 변화를 유독 크게 느꼈다. 근래 형을 보고 있자면 정말 어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형님이 위험하다는 말씀은…….”
“회합에는 당연히 남궁가 측의 후기지수들도 올 것이다.”
“아!”
“지금 호정의 성격을 볼 때, 녀석은 분란을 피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참을 수 있는 분란도, 참을 수 없는 분란도.”
연지평은 입술을 깨물었다.
왜 아버지가 자신더러 회합에 가라고 하는지는 알겠다. 어떻게 보면 아버지는 형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보내려는 것이다.
“형님께…… 한 번만 의사를 물어 주세요.”
“…….”
“부탁드립니다, 아버지.”
연위의 눈이 깊어졌다.
물끄러미 둘째를 보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겠다.”
“감사합니다.”
“이만 나가 보거라.”
연지평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가주실을 나갔다. 닫힌 문을 주시하던 연위가 다시 문서들을 뒤적거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문서에서 손을 뗀 연위가 의자에 등을 묻었다. 허공을 올려다보는 무심한 눈동자에 약간의 혼란이 느껴졌다.
“……변화라.”
* * *
부우웅!
묵직한 철봉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는 살벌하기만 했다.
“헉헉!”
전신이 뻐근하다. 하체는 물론 허리와 등, 어깨까지 안 쑤시는 데가 없었다.
철봉의 길이는 연호정의 키만 했고, 무게는 스무 근에 가까웠다. 저녁을 먹고 자정이 넘도록 휘둘러 댔으니 쓰러지지 않는 게 용했다.
투둑.
철봉을 쥔 손에서 핏방울이 떨어졌다.
더는 무리였다. 연호정이 철봉을 힘차게 찔렀다.
쿵!
봉 끝이 때린 바위가 살짝 흔들렸다.
철봉을 쥔 손에 강한 진동이 전해졌다. 손목, 팔꿈치, 어깨는 물론 척추까지, 상체 관절 전부가 삐걱대는 것 같았다. 아귀힘도 없어서 피에 젖은 손이 주르륵 밀렸다.
“크윽.”
철컹!
철봉이 땅으로 떨어졌다.
숨을 몰아쉬며 양손을 내려다본 연호정의 얼굴에 떨떠름한 기색이 어렸다.
“아직은 이 정도인가?”
본래 연호정이 수련하던 병기는 검(劍)이었다.
그러나 그는 체질적으로 검이 맞지 않았다. 차라리 검보다는 맨손 육장(肉掌)으로 싸우는 게 더 나을 정도였다.
그렇게 싸우고 또 싸우다가 마침내 자신에게 맞는 병기를 찾았다.
그것은 바로 육 척 창대에 달린 거대한 도끼였다. 수십 근 무게의 중병(重兵)이었지만, 그의 성정과 무공에 딱 어울리는 병기였다.
나중에는 도끼에 쇠사슬까지 걸어서, 반경 십여 장을 도끼가 일으키는 폭풍으로 가득 채웠더랬다.
‘한낱 철봉도 제대로 다루지 못해서야.’
길고 무거운 도끼를 쓰기 위해선 곤봉술(棍棒術)과 창술(槍術), 수부(手斧)의 달인이 되어야 한다. 한데 아직 스무 근이 채 안 되는 철봉조차 날 새도록 휘두르지 못하고 있다.
마보 수련 때도 느꼈지만, 앞길이 제법 험난할 것 같았다.
연호정은 나무 밑에 놓아 둔 손도끼 하나를 들었다.
찢어진 손바닥이 아릿했다. 그는 몇 번 도끼를 만지작거리다가 제법 굵은 나무를 향해 던졌다.
휘리릭! 퍼억!
도끼가 그대로 나무에 박혔다.
‘감은 괜찮군.’
도끼가 박힌 나무에 등을 대고 앉은 연호정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강해지는 길은 알아. 그에 따른 노력도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거야.’
가문의 멸문을 막아야 한다. 멸문을 막기 위해선, 일단 자신부터 강해져야 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모자라다.
‘언제까지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어.’
그러긴 힘들겠지만, 설령 자신이 일 년 반 만에 과거의 무공을 되찾아도 문제다.
흑암제의 무력에 온갖 전술, 전략을 이용하면 멸문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희생자가 없을 수는 없으며, 그 희생자에 아버지나 동생이 속할 수도 있다.
그것은…… 정말이지 버티기 힘든 일이리라.
‘나 자신의 무력 외에 본가를 지킬 수 있는 대비책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정보든 무력이든 뭐든.’
전술과 전략이 필요 없을 정도의 힘을 쌓아야 한다. 그런 힘이 있어도 아차 하면 당하는 게 세상일이다.
‘문제는.’
연호정의 얼굴이 구겨졌다.
“대체 어떤 놈들인지 모르겠다는 건데.”
스승에게 무공을 배운 후, 세상에 나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이 흉수를 찾는 일이었다.
당연히 혼자의 힘으로 찾을 순 없었다. 그래서 정보력만큼은 백도 무림보다 한 수 위라는 흑도에 뛰어들어 흉수의 뒤를 쫓았다.
그러나, 역시 흉수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흑도 놈들은 아니었다는 거지.”
백도, 정파의 무공이 확실했다. 연원을 알기 힘들 정도로 뒤틀렸지만, 진기(眞氣)와 발경법(發勁法)의 특색은 분명한 백도 무공의 그것이었다.
“그 정도 고수들을 대량으로 쏟아부으려면 최소한 구대문파(九大門派), 칠대세가 정도가 아니면 불가능해.”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부에 배신자가 있을 확률이 높아.”
확실한 건 아니었다. 물증도 없고, 배신자를 허용할 정도로 아버지가 만만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나 만약, 정말로 연가 내에 배신자가 있다면?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연호정이 툴툴거렸다.
“됐어, 당장 알 수 없는 것까지 고민할 필요 없겠지. 나도 참 웃기는 놈이로군. 원래 생각이 많은 놈이 아닌데.”
죽은 적도, 회귀한 적도 처음이어서 그렇다. 그리고 그가 지켜야 할 대상이 가문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럴 것이다.
‘어쨌든 정보, 무력의 확대가 필요해.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세(勢)를 불리려면…….’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역시 그 수밖에 없나?’
본래는 가문의 일을 처리하고 나서 접근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그’를 이용해서 일거양득의 기회를 얻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실질적인 도움이 되진 않더라도, 이름만 빌려도 큰 도움이 되겠지.’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결정했어.”
“무엇을 말이냐?”
깜짝이야.
연호정이 숲 너머를 바라보았다. 거처로 이어지는 대숲 입구에서 연위가 팔짱을 끼고 있었다.
“아버지.”
“수련 중이었더냐.”
연호정은 내심 당황했다. 워낙 고민이 많아서 저도 모르게 이런저런 말을 뱉어 버렸는데, 그걸 아버지가 들었나 싶어서였다.
“언제 오셨습니까?”
“방금 왔다.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더구나.”
‘휴.’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기색을 보아하니 아버지는 자신의 말을 듣지 못하신 것 같았다.
“어쩐 일로 예까지 오셨습니까?”
연위가 연호정의 손을 바라보았다.
“피딱지가 앉았구나.”
“예? 아, 이것 말입니까.”
“손이 그 지경이 될 때까지 휘둘렀느냐?”
“별것 아닙니다.”
정말 그렇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털어 낸다. 아플 만도 할 텐데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검(劍)은 수련하지 않는 게냐?”
“예.”
“본가에는 우수한 무공들이 많다. 그러나 봉술과 창술에 관한 무공서는 부족하다.”
“괜찮습니다.”
수준 높은 곤봉술과 창술이라면 자신이 알고 있다. 게다가 그의 진정한 무공은 봉이나 창이 아니기도 했다.
“전혀 괜찮지 않다. 너는 연가의 대공자다. 마땅히 그에 합당한 무공을 연련(硏鍊)해야 함이 옳다.”
“제 몸에 맞지 않는 무공을 억지로 익히는 것은 바르지 않습니다.”
“뭐라?”
연위는 상당히 놀랐다.
“하면, 검이 네게 맞지 않는다는 뜻이냐?”
“그렇습니다.”
“어찌하여 그리 생각하느냐?”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게 있겠습니까.”
“무슨 뜻인지 설명해 보거라.”
“무(武)는 머리보다 몸으로 먼저 느끼는 공부입니다. 내 몸에 집중하고, 내 몸이 더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길을 찾았다면, 그 길을 걸어야지요.”
“그것이 너에게는 봉술이란 말이냐?”
“정확히는 다른 것이지만, 창봉부터 제대로 익혀야 할 겁니다.”
“창봉술을 제대로 익힌다…… 언월도(偃月刀)나 군용전부(軍用戰斧)라도 쓸 생각이더냐?”
이번에는 연호정이 놀랄 차례였다.
‘박학다식하시구나.’
당대 무림인들은 각자가 지닌 병장기의 달인들이되, 타 병장기에 대한 이해도가 대체로 낮았다.
아버지는 그렇지 않았다. 말 몇 마디만 듣고는 중병을 떠올리시는 걸 보면, 확실히 병기에 대한 조예가 깊은 분이다.
여러 병장기를 쥐어도 본래의 기량을 발휘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실제로 사용해 보지 않았다면 쉽게 나올 말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것저것 익혀 볼 생각이지요. 그나저나, 어인 일로 예까지 오셨습니까?”
연위는 아들이 말을 돌리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았다.
그는 아들의 장단에 맞춰 주었다. 아니, 어쩌면 더 궁금한 쪽을 택한 것일는지도 모르겠다.
“이번 해, 칠대세가 후기지수들의 회합은 모두가 모이는 자리다.”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그랬었지?’
많은 부분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후기지수 회합에 관한 건은 기억이 났다. 그 회합에 동생과 함께 참석했지만, 바닥을 치는 자존감 때문에 타인과 말도 섞지 않았던 기억이 났다.
오갈 때 동생과 대화 한마디 안 했던 것도.
잠시 뜸을 들인 연위가 재차 입을 열었다.
“나는 그 회합에, 네가 아닌 지평이 갔으면 한다.”
“그렇습니까?”
“그렇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연위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그래도 되겠느냐?”
“아버지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받아들이겠습니다. 그저 걱정되는 것은 남궁세가 측에서 지평을 건드리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다만 당사자도 아니고 많은 이들이 모인 자리니, 섣불리 체면 상하는 짓은 안 하겠지요.”
“진심이냐?”
“물론입니다. 대신 가기 전까지 지평에게 조금 더 신경을 써 주십시오. 바보 같은 형 때문에 가는 길이 부담스러울 것입니다.”
물끄러미 연호정을 보던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질문을 다시 하마.”
“예?”
“회합에 참여하고 싶진 않으냐?”
연호정이 소름 끼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당연히 싫죠.”
“…….”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애새끼들이 저마다 잘난 척하는 꼬락서니를 누가 보고 싶어 한답니까? 어우, 생각만 해도 쏠리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