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가법보다 우선시 되는 것 (4)
“휴, 형님. 조마조마했어요.”
“엉? 뭐가?”
연지평은 앓는 소리를 냈다.
“아버지께서 화내실 줄 알고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데요.”
아버지에게 서슴없이 대하는 형을 보며 잔뜩 긴장했던 모양이었다.
연호정이 저도 모르게 웃었다.
“인마, 아버지가 무슨 군인이냐? 우리 상관이라도 돼?”
“그건 아니지만요.”
“누가 뭐라 했든 아버지는 아버지고, 너와 난 자식이야. 자식이 아버지를 친근하게 대하겠다는데 뭐가 어떻다고.”
“헤에.”
연지평은 멍하니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한 번도 그런 식으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연호정이 동생의 볼을 당겼다.
“이놈.”
“으갸갸갸! 아파요!”
“아버지를 너무 무서워하지 마라.”
“네?”
동생을 보는 연호정의 미소는, 백도 무림의 공포라 불리던 흑암제답지 않게 무척 부드러웠다.
“아버지라고 자식 앞에서 딱딱함만을 고수하고 싶으시겠냐? 가법이 있고 가규가 있으니, 당신께서 모범을 보이고자 그러시는 거 아니겠냐.”
“아…….”
“뭐, 아무리 그래도 너무하신 감이 있다고 보지만.”
“컥!”
“아버지는 평생 저리 사신 분이고, 앞으로도 그렇게 사실 거다. 그리고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 역시 변함이 없을 거야.”
연호정이 몸을 돌렸다.
“애정을 기다리지 말고, 보상받으려고도 하지 마. 좀 힘들겠지만 그게 정신 건강에 좋다.”
“그, 그런가요?”
“부모만 자식을 기다리란 법은 없잖아?”
벌써 저 멀리 걸어간 연호정을 보며 연지평이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 보니 그러네요.”
형이 먼저 자신에 대한 증오를 풀었다. 그러나 그 결과를 확인한 것은 자신의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그와 조금 달랐지만, 큰 틀에서 보면 다를 것도 없었다.
“……그래도 무서운데요.”
* * *
다음 날 새벽.
“대공자님을 뵙습니다.”
예전과는 달리 수문쌍위는 절도 있게 인사를 올렸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를 뵈러 왔어.”
“예.”
미리 언질을 받은 모양이었다. 검위와 도위, 두 사람이 가주실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활짝 열린 문 안쪽으로 보이는 광경이 묘하게 새로웠다.
“가주님께선 현재 연무장에 계십니다. 그곳으로 가시면 됩니다.”
“알겠네.”
가주실 뒤, 조촐한 대나무숲을 지나자 탁 트인 연무장이 나왔다.
위잉.
연무장으로 향하는 연호정은 순간 단전에서 올라오는 기묘한 울림을 느꼈다. 내공에 의념을 집중하지도 않았는데 진기가 꿈틀거린다.
‘동조.’
비연기가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것 같았다. 진기 자체가 겁을 먹은 것 같기도 하고, 설레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것은 연위 때문이었다.
후우우웅.
연무장 중앙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연위의 몸에선 아름다운 서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익힌 적은 없지만 무슨 무공인지는 알겠다. 연무장 전체를 휘어잡는 압력 속, 날카롭고 고고한 분위기가 압권이었다.
‘검극사기(劍極思氣).’
검극사기 역시 오대신공 중 하나였다.
‘굉장하군.’
대성을 했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수없이 연마된 기(氣)가 포화 상태를 넘어 압축되고, 압축된 기가 다시 불어나 전신에 꽉 찬 상태였다.
진기에 대한 이해도가 여느 무인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이것이 바로 연가의 가주라고 외치는 듯했다.
우우웅. 우웅.
발산하는 기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왔느냐.”
운공 중에도 말을 한다.
무인이 가장 취약해지는 순간이 바로 운공조식을 할 때였다. 극한의 집중이 필요한지라 외부의 기에 둔감해지고, 작은 충격에도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날 수도 있다.
연위는 운공의 위험에서조차 자유로웠다. 연가주의 경지는 그렇게 대단했다.
‘적어도 남궁가주의 아래는 아니야.’
백도 무림과 부딪치며 구대문파, 칠대세가의 수준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된 그였다. 그런 연호정의 눈에, 아버지의 무공은 칠대세가에서도 선두를 다투는 것이었다.
“준비는 되었느냐?”
“예.”
“여기 앉거라.”
연호정이 연무장으로 올라섰다.
얼마 안 되는 높이지만, 엄청 높은 계단을 오르는 것만 같았다.
연호정이 연무장 중앙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방금까지 연위가 운공을 하던 그 자리였다.
“벽라진결의 구결을 읊어 봐라.”
연호정이 차분하게 구결을 읊었다.
연위가 눈을 빛냈다.
“확실히 잘 기억하고 있구나.”
“예.”
그가 연호정의 등 뒤에 앉아 명문혈(命門穴)에 손을 올렸다.
“비연기를 벽라진결의 구결에 따라 이동시켜라. 진기 변화는 내가 돕겠다.”
우우우웅.
연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연호정은 비연기를 끌어 올렸다.
연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역시나 급해.’
마음은 이해한다. 십 년 동안 비연심법에 얽매여 있었으니, 당장이라도 고급 무공을 익히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급한 성정으로는 신공을 대성하기 어렵다. 어제도 말한 부분이거늘,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모양이었다.
연위가 끓어오르는 비연기를 차분하게 인도해 주었다.
‘운기가 끝나면 다시 한번 따끔하게…….’
그때였다.
위이이이잉!
일순간에 비연기가 전력으로 달아올랐다.
연위의 의도에 따른 주천(周天)은 고작 한 번이었다. 한데도 비연기가 미친 듯이 끓어오르는 것이다.
‘위험!’
쿠르르릉!
기를 제어해 주려던 연위는 깜짝 놀랐다.
비연기가 엄청난 속도로 혈도를 누비고 있었다. 그 속도는 이제껏 그가 봐 왔던 누구보다도 빠르고 격정적이었다.
그리고 부드러웠다.
자연스럽고, 화려했다. 마치 격렬하지만 길목을 따라 흐르는 강물을 보는 것 같았다.
위이이잉!!
폭풍 같은 기세로 몇 번의 주천을 돈 비연기가, 서서히 변화를 맞이했다.
색으로 치면 연녹색 물결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처럼 푸른색으로 바뀌는 것 같았다. 청천(靑天)의 색, 푸른 그물이었다.
바뀐다. 진기가.
더 고차원적인 기로, 더욱 도도해진 기로.
‘벽라진기(碧羅眞氣)!’
비연기가 벽라진기로 탈바꿈하는 속도가 상상을 초월했다.
치이이이익!
단전의 형태와 크기도 바뀌었다. 마치 적당히 넉넉했던 집이 대궐처럼 넓어지는 것 같았다.
다시 없을 놀라움이었다. 연위 자신도 비연심법에서 검극사기로 넘어갈 때, 진기 변화에만 무려 보름을 투자했었다. 그것도 빠른 거라며 선친께서 드물게 칭찬을 해 주셨다.
아들은 달랐다.
반 시진도 채 되지 않은 운공에서, 아들은 거의 대부분의 비연기를 벽라진기로 탈바꿈시켰다.
‘어찌 이럴 수가.’
잠시 후.
“후웁.”
호흡을 다스리던 연호정이 서서히 기를 갈무리했다.
연위는 한 번 더 놀랐다.
‘기를 능숙하게 갈무리하고 있다. 마치 평생 해 왔던 것처럼 익숙해.’
한 번 툭 하고 민 것이 전부였는데, 마차는 이미 산을 내려가 목적지까지 도달해 버렸다.
‘대단하군.’
번쩍!
연호정이 눈을 떴다.
이전과는 다른 강렬한 안광이 두 눈에 깃들었다. 은은한 푸른빛을 띤 동공이 서서히 본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끝났습니다.”
“그렇구나.”
“인도에 감사드립니다.”
연위가 물끄러미 아들을 바라보았다.
아들은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저 한없이 담담하기만 했다.
마치 당연히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나의 도움이 필요 없었구나.”
“예.”
솔직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기(氣)를 느낄 수 있었기에 뜻깊은 순간이었습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번만큼은 연위도 알 수 없었다.
다시 한번 침묵하던 연위가 입을 연 것은 반 각이 지난 후였다.
“오대신공의 구결을 전부 알고 있다 했느냐?”
“예.”
“그중 굳이 벽라진결을 택한 이유는 필경 안정성 때문이겠지?”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습니다.”
오대신공은 하나같이 과함이나 모자람이 없는 무공이었다. 그러나 각자의 개성은 뚜렷했다.
그중 가장 웅혼하면서도 안정적인 무공이 바로 벽라진결이었다. 진기를 과격하게 운용해도 다른 신공보다 육체에 가해지는 부담도 적었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대신공 못지않은 출력도 겸비했다. 연호정의 성격을 생각하면, 벽라진결을 택한 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연위는 드물게 망설였다.
아들에게 뭔가 할 말이 생겼다. 하지만 그 할 말이 무엇인지는 자신도 알지 못했다.
잠시 후,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막히는 것이 있다면, 그때 찾아오너라.”
“알겠습니다.”
“고생했다.”
어제처럼 많은 대화는 없었다. 그러나 부자(父子)는 어제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나누었다.
고개를 숙이고 연무장을 내려가려던 연호정은, 문득 병기 진열대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수많은 병장기가 진열되어 있었다.
“여러 병기를 수련하시는군요?”
“무인이라면 무릇, 손에 나뭇가지만 쥐어져도 본래 무공과 같은 위력을 낼 수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러기 위해선 보다 많은 병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맞는 말이다.
언제, 누구에게 죽을지 모르는 게 강호다. 그러려면 최악의 순간에도 최선의 무공을 구현할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연호정은 그걸 싸우면서 배웠고, 연위는 스스로 체득하였다.
“혹시 몇 개 가져가도 됩니까?”
“음?”
연위는 이 놀라운 아들 녀석이 또 무엇을 요구할는지 궁금해졌다.
“상관없다. 무엇을 가져갈 테냐?”
“일단 철제 장봉(長棒)이요.”
“철봉?”
“예.”
“그리고?”
연호정의 입가는 미소를 그리고 있었지만, 그의 두 눈은 알 수 없는 흉포함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도끼입니다.”
* * *
“……해서, 전부 아물려면 대여섯 달은 걸릴 것으로 예상합니다.”
전신에 부목을 댄 어린 여인을 내려다보며, 중년 사내가 물었다.
“내상은?”
“생각보다 그리 심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문제라고 한다면, 내상보다는 심상(心傷)입니다.”
“심상?”
“예에, 뭔가 큰 충격을 받은 듯합니다. 내상은 곧 잡힐 것이고, 외상도 반년이면 치료가 끝나겠으나 정신적 충격만큼은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렇군.”
중년 사내, 남궁인(南宮仁)은 생각보다 훨씬 담담해 보였다.
그가 의원의 어깨를 두들겼다.
“천방지축으로 컸지만, 그래도 남궁의 아이일세. 마음의 상처 정도는 이겨 낼 수 있겠지. 부디 열과 성을 다해서 봐주게나.”
의원이 영광이라는 듯 허리를 굽혔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크게 잡아서 반년일 뿐, 그보다 빨리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네만 믿네.”
의원의 어깨를 몇 번이나 토닥여 준 남궁인이 의방을 나섰다.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는 남궁인.
그런 남궁인에게로 한 명의 청년이 다가왔다.
“아버지.”
“현(賢)이냐.”
수려함이 하늘에 닿은 미남자였다. 그럼에도 체격은 당당해서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남궁인의 둘째 아들, 남궁현이었다.
“상화는 어떻습니까?”
“꽤 심하게 당했다.”
아버지는 어떤 상황에서도 과장이나 허풍이 없는 분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심하게 당했다 한다면, 정말 크게 당한 것이리라.
남궁인이 고개를 저었다.
“사건의 경위를 살펴보니, 상화가 잘못하긴 했다. 더 많이 배우고 쌓으라고 보낸 길이었거늘, 되레 더 심해졌던 모양이야.”
“본래 허영심이 많고 오만했던 아이입니다. 오히려 이번 경험을 토대로 삼아 성장한다면 좋겠습니다.”
“나 역시 그리 생각한다.”
“하지만.”
남궁현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강도를 만나 삶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고, 강도 놈을 용서할 필요는 없지요.”
“상대는 연가다.”
“고작 오십 년밖에 안 된 가문입니다.”
“고작 오십 년 세월로 육대세가를 칠대세가로 만든 가문이니라. 무림인들은 바보가 아니야. 그만한 자격이 없었다면 감히 육대세가와 이름을 같이 놓지 않았을 것이다.”
“얼마나 대단하든 남궁을 건드렸습니다.”
“명분도 연가에 있다.”
남궁현은 잠시 침묵했다.
남궁인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이미 네 숙부가 사과까지 하였느니라.”
“사과를요?”
“그래.”
남궁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하면 연가도 이번 사건을 묻겠군요?”
“설령 사과하지 않더라도 그리할 것이다.”
“다만 사과를 했으니 안심을 할 것이고요.”
“그러겠지.”
“숙부가 실수는 했지만, 뒤처리는 빠르게 잘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연가를 괴롭힐 거라면, 그런 셈이다.”
남궁인이 남궁현을 바라보았다.
아들의 싸늘한 눈빛을 보고도 남궁인의 표정은 여전히 차분했다. 변화 없는 표정은 연위와 비슷했지만, 결이 달랐다.
“아버지께서는 참으실 생각이십니까?”
“물론이다. 고작 자식 하나 망가졌다고 그만한 세력과 드잡이질을 벌이는 악수를 둘 생각은 없다.”
선하고 차분한 얼굴로 냉혹한 발언을 한다.
남궁현은 그런 아버지의 말을 듣고도 미소를 지었다.
“그러셔야지요. 일문의 수장이 이런 일에 경거망동하면 안 되지요.”
남궁인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강소성으로 마실을 나갈 셈이더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명분도 저쪽에 있다는데, 급해서 좋을 것 없지요.”
“하면?”
남궁현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금년, 칠대세가 후기지수들의 회합이 언제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