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돌아온 탕아 (5)
덜컹!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사람은 의외로 연지평이었다.
“듣자 듣자 하니,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뭣이?!”
“아무리 남궁가의 여식이라도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습니다!”
연지평이 호통치듯 외쳤다.
“양우에게 사과하십시오!”
욕이라도 한 사발 뱉으려던 남궁상화는 순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에게 사과하라는 소린 줄 알았다. 한데 쓰러진 버러지한테 사과를 하란다.
이게 무슨 말이지?
“죄 없는 사람의 뺨을 때리다니, 그게 명문의 법도입니까? 남궁세가 가인들의 예법은 그리도 무례했습니까?”
“……뭐?”
“예법에 어긋난 언사에 이유 없는 폭력까지! 명백한 소저의 잘못입니다! 당장 양우에게 사과하십시오!”
당당했다.
허리를 꼿꼿하게 펴며 소리치는 연지평의 모습은, 조금은 어설플지언정 한 그루의 대나무를 연상케 했다.
양우가 떨리는 눈으로 연지평을 보았다. 연지평을 보는 이정학의 눈빛도 묘해졌다.
남궁상화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뭐라는 거야, 저 머저리 자식.”
그녀에게 있어 양우는 강호에 흔하디흔한 천민이나 다를 바 없었다.
차라리 키우는 개는 꼬리라도 흔든다. 한데 이놈은 꼬리를 흔들긴커녕 주제넘게 짖어 대고 있지 않았나.
다리몽둥이를 부러트리지 않은 것만 해도 충분히 아량을 베푼 셈이었다.
“사과하지 않으면 망신을 당하게 될 겁니다. 마지막으로 말하지요. 사과하십시오.”
“망신?”
남궁상화는 깔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높고 날카로운 웃음소리에 가소롭다는 기색이 어렸다. 물론 웃는다고 그녀의 화가 풀린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칠대세가라고 치켜세워 주니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오기라도 한 것이냐?”
“다 무너져 가는 무관의 자식이라도 배움이 확실했다면 나처럼 행동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르다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연지평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당신은 바르게 배우지 못한 모양이군요.”
남궁상화의 웃음이 멈추었다.
우우우웅!
“주제도 모르는 놈!”
그녀의 눈가에 살기가 일렁였다.
주루 사 층의 분위기가 이전보다 배는 더 차가워졌다.
격한 언쟁이 오가는 거야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지만 살기까지 뿜었으면 얘기가 다르다.
연지평의 얼굴도 굳어졌다.
“못난 사람 같으니.”
“닥치지 못해!”
더 이상 말을 섞어 봤자 울화만 쌓일 뿐이다.
숨을 격하게 몰아쉬던 남궁상화가 이정학에게 외쳤다.
“당장 저놈을 내 앞에 꿇려!”
“내, 내가 말이오?”
이정학의 눈이 부릅 뜨였다.
남궁상화의 볼이 씰룩였다.
“네놈 가문이 안휘 땅에서 발도 못 붙이게 만들어 주랴?”
이정학은 진짜로 당황해 버렸다.
화를 받아 주기 싫어서 연가 쪽으로 전가해 버린 그였다. 하지만 상황이 이런 식으로 흘러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뭐 해? 당장 움직이지 않고!”
“소, 소저! 아무리 그래도 연가의 자제와 싸우는 것은 문제가……!”
짜아아악!
주르륵.
이정학의 입가에서 피가 흘렀다. 양우를 후려칠 때보다 훨씬 매서운 따귀였다.
“한 번만 더 내 신경을 건드리면 네놈과 네놈 가문 모두 지옥을 맛보게 될 거야.”
“…….”
“꿇려.”
양우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조금 저자세이긴 했어도 이정학이 남궁상화에게 이런 꼴을 당할 줄은 몰랐다. 안휘이가라면 남궁세가보단 못할지언정 나름대로 안휘의 명문이 아니던가.
세상에 따귀를 맞고도 아무 말 못 할 정도라니.
이정학이 몸을 돌렸다.
연지평을 바라보는 이정학의 눈이 수치심과 분노로 일그러졌다.
저벅저벅.
천천히 연지평을 향해 걷는 이정학.
연지평이 한숨을 쉬었다.
할 말은 많았지만, 그 역시 입을 다물었다.
남궁상화가 다시 한번 외쳤다.
“어기적거리지 말고 빨리 그놈을 내 앞에 데려와!”
그때였다.
“술맛 떨어지는군.”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궁상화가 으르렁거렸다.
“오냐, 안 그래도 네놈 역시……!”
퍼어어억!
순간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커허억!”
이정학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아무런 방비 없이 주먹으로 복부를 맞았다. 속이 뒤집히고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연호정의 왼손이 이정학의 머리로 향했다.
꽈드득!
“크윽!”
머리채를 잡혔다.
뒷골목에서 싸움박질이나 하는 파락호들이나 할 행동이었다. 적어도 백도의 무공을 익힌 무인이 보여 줄 법한 모습은 아니었다.
당황한 이정학이 연호정의 손목을 틀어잡았다.
“이, 이거 놓지 못해?!”
그때, 연호정이 손목을 돌렸다.
허공을 한 번 돈 이정학의 몸이 등부터 바닥에 처박혔다.
부우웅! 쾅!
“컥!”
연호정이 냉정하게 발을 들었다.
고통으로 일그러졌던 이정학의 얼굴에 설마 하는 기색이 어렸다.
콰직!
“크아아아악!”
이정학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코뼈가 부러지고 앞니가 나가 버렸다.
연호정이 바짓단에 튄 피를 털어 내며 말했다.
“네놈이 감당해야 할 일을 이쪽으로 전가하려 들면 안 되지.”
“쿨럭! 커헉!”
“네놈의 죄는 이걸로 다 물은 셈 치겠다.”
모두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그것은 연지평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뒤에서 빤히 보고 있었음에도 연호정이 무슨 수법을 썼는지 알 수 없었다.
빤히 본 무공의 원리를 이해 못 한 적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당황했고, 형의 독한 공격에 놀랐다.
“혀, 형님!”
“평아.”
“네?”
“앞으로 이런 일이 있을 시, 반드시 그래야 할 상황이 아니라면 쓸데없는 대화로 시간 끌지 말거라.”
“……?”
“말이 통할 놈들이 사람 보는 앞에서 그따위 언행을 일삼을 것 같으냐? 이놈들은 이미 그른 놈들이야.”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정히 교정을 해 주고 싶거나 훈계를 내리고 싶다면, 일단 쓰러트리고 나서 해도 늦지 않아.”
거칠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연호정은 남궁상화를 향해 걸었다. 중간에 양우와 눈이 마주쳤지만, 그의 무심한 눈빛은 양우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음을 증명했다.
남궁상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네놈이 지금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연호정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저 마실이라도 나온 듯 같은 속도, 같은 보폭으로 남궁상화에게 향하고 있었다.
철저한 무시였다. 남궁상화의 눈이 뒤집혔다.
“빌어먹을 놈! 감히 날 무시해?!”
치이익!
남궁상화의 몸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번져 나왔다.
이정학이 품고 있는 힘과는 질적으로 다른 기운이었다.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창궁기(蒼穹氣)로군.’
남궁세가가 자랑하는 내공심법 중 하나, 창궁심법의 기운이었다. 심법 자체의 수준도 높으며, 남궁세가의 모든 무공을 망라할 수 있다는 일류의 심법이었다.
‘확실히 재능이 있어.’
이제 열여덟이나 되었을까?
그 나이에 뿜어내기 힘든 훌륭한 진기였다. 능히 일류라 불릴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남궁상화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당장 무릎을 꿇어라! 그렇다면 정성을 봐서라도 개망신은 면케…….”
훅!
“헉!”
남궁상화는 깜짝 놀랐다.
일정한 속도로 걸어오던 연호정이 순간적으로 속도를 올렸던 것이다. 미리 대비하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 이러한 움직임은 당황을 선물하기 마련이다.
남궁상화의 오른손이 본능적으로 휘둘러졌다.
파라라락!
공기를 찢어발기는 손짓이 무척이나 매서웠다. 비록 오만한 성정이지만 무공만큼은 제대로 배운 것이다.
연호정의 손이 마주 움직였다.
남궁상화의 얼굴에 득의양양한 빛이 어렸다.
‘병신!’
감히 천풍장(天風掌)과 마주하려 들다니,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녀는 천풍장 일격으로 통나무도 분질러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천풍장을 맨손으로 받아치려 들다니? 손부터 어깨까지 박살이 나고야 말 것이다.
남궁상화는 손에 창궁기를 더욱 강하게 실었다.
그때였다.
휘리리릭!
‘어?!’
연호정의 손이 뱀처럼 유연하게 휘더니 남궁상화의 손목을 타고 올랐다.
마치 관절이 없는 것 같았다. 속도는 천풍장보다 느렸지만, 너무나도 시기적절해서 팔을 뺄 수가 없었다.
연호정의 손가락이 남궁상화의 팔꿈치, 곡지혈(曲池穴)을 강하게 눌렀다.
콰득!
“아아악!”
비명을 지른 남궁상화가 뒷걸음질 쳤다.
손까지 이어진 창궁기가 뚝 끊어져 버렸다. 천풍장을 뻗은 오른팔 전체에 감각이 없었다.
“이, 이게 무슨 사술……!”
빠가각!
“……응?”
남궁상화가 멍하니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왼쪽 다리가 안쪽으로 확 꺾여 있었다. 인체 관절 구조상 도무지 꺾일 수 없는 위치였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의 다리가 부러졌다는 걸 깨달았다.
“끄아아아악!”
덜컹!
남궁상화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렸다.
이건 방심도 뭣도 아니었다.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음에도 남궁상화는 연호정의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물러나면 상대방도 기다려 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간 그녀가 배웠던 비무가 바로 그러했다.
하지만 연호정의 싸움은 그리 말랑말랑하지 않았다.
한 번 붙으면, 한쪽이 패배를 인정하거나 죽을 때까지 몰아치는 것. 그게 바로 흑도의 싸움이었다.
“크흑! 개, 개자식! 내 다리를 부러트려?! 이제 네놈과 네놈 가문은 다 죽었어!”
빠각!
“크아악!”
남궁상화가 다시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왼팔도 부러진 것이다.
다시 한번 욕을 뱉으려던 남궁상화는 순간 몸이 싹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어떠한 감정도 엿보이지 않는 서늘한 눈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갖고 있어야 할 감정이라는 게 하나도 섞이지 않은 눈빛이었다.
마치 사물을 보는 것 같다. 남궁상화를 보는 연호정의 시선은, 마음은 그러했다.
“어떻게 할 거냐?”
“으으윽! 뭐, 뭐라고?”
“나와 내 가문을 어떻게 죽일 셈이냐?”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본 남궁상화와 양우는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재미있는 아이야. 귀신이 돼서라도 찾아오겠다는 건가?”
미소보다도 섬뜩한 말이었다.
귀신이 된다? 그 말은 곧 남궁상화를 죽이겠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제야 남궁상화는 깨달았다. 자신이 감당키 힘든 놈을 건드렸다는 것을.
그녀가 더듬대며 말했다.
“나, 날 이리 만든 게 알려지면 본가가 너흴 용서치 않을 것이다!”
“그래?”
“그렇다! 그러니 당장 날……!”
쾅!
발길질로 의자를 부순 연호정이 부서진 의자 다리 하나를 들었다.
“그럼 더더욱 널 죽여서 묻어야겠군. 그래야 남궁도 모를 거 아닌가?”
남궁상화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네놈이……!”
퍼어억!
이번엔 비명도 없었다. 머리통을 맞은 남궁상화가 옆으로 쓰러졌다.
기절을 해도 모자랄 상황인데 신기하게 정신은 더욱 맑아졌다. 그래서 고통이 더 극심했다.
남궁상화의 얼굴에 공포가 깃들었다.
이 미친놈이 진짜로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츠츠츠츠.
공포를 자아내는 그 얼굴 뒤로 흑암의 전설을 만들어 낸 대종사의 살의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먼저 웃어 주면 이쪽은 한 번 더 웃어 준다.
하지만 먼저 건드리면 다시는 못 건드리도록 박살을 낸다.
손으로 밀쳤든 칼로 찔렀든, 정도는 따지지 않는다. 일단 피해를 봤다면, 끝까지 달려들어서 갈기갈기 물어뜯는다.
그것이 흑암제였고, 흑제성주였으며, 흑도대종사에게 모든 사파인들이 고개를 조아린 이유였다.
“이제 네가 하고 싶은 말 말고,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해 봐.”
연호정이 웃으며 몽둥이를 들었다.
그리고 사정없이 휘둘렀다.
퍼버버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