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돌아온 탕아 (4)
이정학(李正鶴)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애들이 고양루를 그렇게 가 보라고 하더니만 이유가 있었네. 경치가 이렇게 좋을 줄이야.”
탄탄한 체격에 목소리도 상당히 굵직했다. 나이는 어린 듯했지만 본래 나이보다 더 어른스러워 보였다.
“저 멀리 보이는 저 호수는 뭐지? 태호(太湖)인가?”
“태호는 아니고, 그 옆에 딸린 자그마한 호수입니다.”
“작다니? 이렇게 멀리 떨어졌는데도 저 정도면 무척 큰 거 아냐?”
“하하, 태호에 비해서요.”
이정학 옆에서 제법 의젓하게 설명해 주는 소년은 연지평과 비슷한 연배로 보였다.
소년은 서원에서 연지평과 동문수학하는 양우(楊遇)였다. 연가만큼은 아니지만 지역에서 제법 유명한 무관(武館)의 후계자가 그였다.
“확실히 강소성도 괜찮은 곳이 많구나. 안휘보다는 못하지만 말이야.”
“안휘가 그렇게 굉장한가요?”
이정학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물론이지. 양 동생은 이 말도 모르나? 황산(黃山)을 한 번 보면 오악(五岳)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거 말이야.”
“아! 들어 봤습니다!”
“안휘의 경치가 어디 황산뿐일까. 내가 그 지방에 살아서가 아니라, 중원에 안휘만 한 곳도 없어.”
이정학이 뒤에 선 여인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렇지 않소, 소저?”
여인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표정한 얼굴에 심드렁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정학은 그녀의 표정을 못 본 척했다.
“어쨌거나 양 동생 말대로 오길 잘했어. 좋은 음식에 술 한잔 걸치면 그 맛이 일품일 것 같군.”
언뜻 봐도 아직 술의 참맛을 알 나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양우는 냉큼 손뼉을 치며 동조했다.
“정말 그럴 것 같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술도 한 병 시킬까요?”
“그거 좋지! 여기 생선 요리가 유명하다며? 같이 시키자고.”
“좋습니다.”
껄껄껄 웃음을 터트리던 이정학이 문득 연지평을 바라보았다.
어떻게든 표정 관리를 하고 있지만 누가 봐도 어색하고 불편해 보였다. 이정학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는가, 동생?”
“…….”
“연 동생.”
“네? 아, 네!”
“표정이 별로 안 좋은데?”
“아…….”
연지평은 누구에게나 예의가 바른 성격이었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진 않았다.
“형님부터 소개해 드려야 하지 않을까 해서요.”
이정학이 웃으며 말했다.
“아, 미안하네. 자네 형님이 계셨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어.”
크게 무례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괜찮은 것도 아닌 언행.
충분히 웃으며 넘길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연지평은 괜찮다고 말할 수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가족이 관련된 일이기 때문이다.
연지평이 재차 입을 열려 할 때.
“평아.”
“네, 형님!”
“모시고 와라.”
절묘한 순간이었다. 주춤한 연지평이 이남일녀에게 말했다.
“가시지요.”
“…….”
“이 형?”
“음? 아, 그래. 그러지.”
여전히 여유로운 이정학의 얼굴.
그러나 그의 눈빛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걸 주변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일행이 연호정이 앉은 탁자로 걸어갈 때였다.
“어? 남궁 소저?”
뜻밖에도 여인은 일행과 함께하지 않았다.
멀찍이 떨어진 자리로 가 차분하게 앉은 그녀는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일행의 대화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양우의 얼굴에 당황이 깃들고, 연지평의 턱에 굵은 힘줄이 돋아났다.
조금은 싸늘해진 분위기 속.
이정학이 돌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아직 기분이 풀리지 않으신 것 같군.”
그가 한 발 앞으로 나와 연호정에게 포권을 취했다.
“안휘이가(安徽李家)의 이정학입니다. 벽산연가의 대공자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간의 언행이 어떠했든, 나름의 예의를 차린 인사였다.
연호정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취했다.
“반갑소. 연호정이오.”
이정학이 멋쩍은 얼굴로 웃었다.
“제 일행에 대해서는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기분 상할 만한 일이 있어서.”
여인, 남궁상화(南宮想華)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소.”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심한 듯 이정학의 얼굴이 환해졌다.
“연 동생이 서원에서 그렇게 형을 칭찬하더군요. 형제간의 우의가 돈독하니 보기가 좋습니다.”
연호정이 힐끔 연지평을 바라보았다. 연지평의 얼굴이 조금 빨개졌다.
“나와는 달리 착하고 똑똑한 녀석이오. 잘 부탁드리겠소.”
“물론입니다. 워낙에 착한 아이 아닙니까.”
제법 화기애애한 대화.
그때,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경이나 하라고 날 여기에 데려온 건가요?”
모두의 시선이 남궁상화에게 향했다. 그녀의 얼굴에 은근한 짜증이 깃들어 있었다.
이정학이 서둘러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소? 연 형, 반가웠습니다. 일행이 있어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그러시오.”
후다닥 남궁상화에게 향하는 이정학.
그 뒤를 따르던 양우가 힐끔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을 보는 그의 눈살이 다소 찌푸려져 있었다. 그는 연지평과의 우애가 깊었지만, 연호정을 좋게 보지는 않았다.
소문이 워낙에 안 좋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연호정 때문에 연지평은 언제나 힘들어했다. 친한 친구를 힘들게 한 사람이니 곱게 볼 수가 없었다.
“지평. 너는 거기에 있을 거야?”
연지평이 인상을 썼다.
“거기라니?”
양우가 못 들은 척 몸을 돌렸다.
“아니야, 이따 보자.”
그 말을 끝으로 양우는 남궁상화와 이정학에게 걸어갔다.
양우의 등을 보며 입술을 깨문 연지평이 연호정의 맞은편에 앉았다.
“죄송해요, 형님.”
“뭐가?”
“그냥…… 괜히 제가 여길 오자고 해서…….”
어수선한 분위기가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게다가 저쪽 일행이 묘하게 형을 무시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자신도 기분이 좋지 않지만 형에 비할 바는 아닐 것이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신경 안 쓴다.”
진심이었다.
친분도 없는데 말이 많은 건 사절이지만, 웃으며 인사를 나누는 것 정도야 문제가 없다. 게다가 저들은 동생이 다니는 서원의 청강생들이었다.
서원에 얼마나 있을진 모르겠지만, 자신 때문에 동생이 난처해지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물론 동생에게 할 말은 있었다.
“예의가 있는 것과 소심한 것은 다르다. 나는 네가 그 차이를 알았으면 좋겠다.”
“네?”
“강호는 착한 사람의 말에 귀 기울여 주지 않아. 착한 것도 좋지만, 그보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애썼으면 한다.”
연지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뜻 이해가 되는 듯하면서도 아리송한 말이었던 것이다.
연호정이 웃으며 말했다.
“전낭은 아직 넉넉하더냐?”
“네? 아, 그럼요!”
“그럼 우리도 술 한잔할까?”
연지평의 표정이 밝아졌다.
“좋아요!”
두 사람이 곧바로 술을 시켰다.
형에게 말은 안 했지만 연지평은 술이 처음이었다. 나이도 나이거니와 무공과 학문을 단련하느라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형제는 처음으로 술잔을 나누었다. 둘 모두에게 감개무량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쾅!
싸늘한 정적이 일었다.
“빌어먹을!”
날카로운 고성이 정적을 찢었다.
“그만 좀 얘기해! 서원이든 잡것이든 내가 싫다잖아!”
찌르는 듯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남궁상화였다.
술 때문인지 분노 때문인지,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호흡은 거칠어졌고 눈은 잔뜩 충혈되었다.
가만히 있을 때는 무척이나 화사한 외모였지만, 화를 내니 나찰이 따로 없었다.
이정학이 서둘러 말했다.
“소저, 내 말을 곡해하지 마시오. 어찌 되었든 가주님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시끄러워! 내가 아버지 눈치나 보는 사람이라서 이 더러운 동네까지 기어들어 온 줄 알아?!”
“소, 소저!”
“서원에서 머리나 식히라고? 망할 노친네 같으니! 꼴에 자식이라고 내치기는 뭣하니 이런 촌구석에 박아 놓은 게 분명해! 제기랄, 나를 뭘로 보고!”
거칠기 짝이 없는 말투였다. 도무지 명문의 법도를 배운 사람 같지 않았다.
양우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소저. 조금만 진정을 하시지요.”
“뭐?”
“그…… 소저의 기분을 풀어 주려고 정학 형님이 만든 자리 아닙니까. 남이 볼까 무서우니 이만 화를…….”
짜아아악!
“큭!”
양우가 옆으로 벌러덩 넘어졌다.
남궁상화가 싸늘한 눈으로 쓰러진 양우를 내려다보았다.
“똥 마려운 강아지 새끼처럼 쫓아다니는 걸 내버려 뒀더니 감히 나한테 훈계를 해? 죽고 싶은 것이냐?”
양우가 얼떨떨한 눈으로 남궁상화를 올려다보았다.
이정학이 일어나서 남궁상화를 말렸다.
“소저, 그만하시구려. 충분히 소저를 이해하오.”
“이해? 네가 뭔데 나를 이해해!”
“물론 소저가 처한 상황은 나도 이해하기 어렵소. 내가 이해하는 부분은 양우가 선을 넘은 걸 말하는 것이오.”
양우가 충격받은 눈으로 이정학을 바라보았다.
이정학은 그를 못 본 척했다.
“그리고, 양우의 말에도 일리가 있는 부분이 있소.”
“뭐라?!”
“소저는 마땅히 남궁세가를 대표하는 자격으로 여기 온 것 아니겠소? 남들이 이 광경을 볼까 무섭소이다.”
남궁상화가 조소를 지었다.
“남? 너나 이 버러지를 말하는 거냐?”
“소저.”
“아니면 저놈들?”
남궁상화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연씨 형제가 있었다.
이정학의 얼굴이 굳어졌다.
남궁상화가 버럭 소리쳤다.
“같잖은 말로 날 이해시키려 하지 마! 나는 남궁의 여식이야! 쑥덕거리는 놈이 있으면 주둥이를 찢으면 그만이라고!”
그야말로 눈에 보이는 게 없다.
이정학은 난처함을 느꼈다. 남궁상화가 상당히 오만한 성격인 건 알았지만, 오늘은 심해도 너무 심했다.
금방 가라앉을 화가 아니다. 이정학은 머리를 굴렸다.
‘차라리 이 화를 다른 데에 돌리는 게 나으려나?’
순간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연호정은 등을 보이고 앉아서 모르겠지만, 연지평의 표정은 과히 좋지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모르는 사이도 아니거늘, 술에 취했다고 이놈 저놈 소리까지 들었다. 누구라도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
이정학의 눈이 빛났다.
“그래도 참아야 하오.”
“뭣이?”
“소저의 가문과 함께 칠대세가로 꼽히는 강소 최고의 명문가 자손들이 있는 자리외다. 나름의 격을 갖추어야 하지 않겠소?”
“칠대세가? 격?”
남궁상화가 코웃음을 쳤다.
“본가가 언제부터 연가 나부랭이를 칠대세가의 일원으로 인정했단 말이냐?”
위험한 발언이었다.
연씨 형제 쪽으로 화를 돌리려 했지만, 이 정도의 발언이 나올 줄은 몰랐다. 이정학은 저도 모르게 둘러댔다.
“그런 뜻이 아니었소. 나와 양우야 소저를 위한다지만…….”
말끝을 흐린다.
어조가 워낙 정중하고 예의가 있어 별다른 의도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고차원적이고 살벌한 경험이 많았던 이에게는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언사일 뿐이다.
연호정은 실소를 머금었다.
“귀엽게들 노는군.”
“……?!”
실소와 함께 튀어나온 말에 모두의 얼굴이 굳어져 버렸다.
이곳에서 가장 내공이 떨어지는 양우에게도 들릴 정도의 목소리였다. 남궁상화나 이정학이 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쾅!
탁자를 내리친 남궁상화가 날카롭게 외쳤다.
“네놈, 방금 뭐라고 했느냐?”
연호정은 대꾸 없이 잔을 비웠다.
일말의 당황도, 긴장도 없다. 그 모습이 남궁상화에게는 무시로 느껴졌다.
“뭐라 했냐고 묻잖아, 망할 자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