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돌아온 탕아 (3)
바람이 제법 서늘했다.
하지만 차가운 가을바람도 저잣거리의 활기를 식히지는 못했다.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점포에 들어오라며 호객 행위를 하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막상 밖에 나오니 벽라진결에 관한 생각이 쏙 들어갔다.
과거로 돌아온 뒤 처음으로 저잣거리로 나온 것이다. 감회가 새로웠다.
‘여전해.’
어린 시절 참 많이도 돌아다녔던 이 거리.
가문이 멸문한 이후로는 한 번도 찾아온 적 없던 거리였다. 이곳을 올 때마다 죽은 가족이 생각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좋구만.”
“헤헤, 그렇죠?”
연지평의 얼굴은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형과 단둘이 저잣거리에 나온 게 처음이기 때문이다.
“형님, 근데 어디 불편하세요?”
“음?”
“걸음이 조금 이상하신데요?”
“아, 그냥 좀.”
갑작스레 내공의 질이 두 단계나 상승해 버렸다.
게다가 막혀 있던 혈도도 제법 많이 뚫었다. 그곳으로 진기가 오가길 반복하니 자연 몸에 힘이 들어갔다.
몸과 진기의 어긋남. 천천히 걸으려 해도 저절로 속도가 붙었다. 근골이 완벽하게 다듬어지지 않았기에 생기는 괴리였다.
‘앞으로 고생 좀 하겠어.’
내공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신체의 강건함이다. 아직 여물지 않은 몸을 흑암제 수준으로 단련시키기 위해선 지옥 같은 수련이 필요하리라.
연호정이 한참 어깨를 빙빙 돌릴 때.
“앗, 저기! 저기로 가요!”
연지평이 가리킨 곳은 외관이 깔끔한 주루였다.
“고양루(古陽樓)구나.”
고양루는 강소성 남부에서도 상당한 유명세를 자랑하는 주루였다. 가격이 제법 되는 편이지만 음식의 맛과 경치가 좋기로 유명했다.
“아, 형님도 가 보셨어요?”
“몇 번.”
별로 좋은 기억이 있는 곳은 아니었다.
연가가 멸문되기 반년 전쯤일까?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어 술을 제법 많이 마셨다. 그중 고양루에서 마신 횟수가 제법 된다.
‘참 멍청하게 살았지.’
만취해서 기물도 많이 부쉈고, 시비가 붙어 엄청나게 두들겨 맞기도 했다.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된 곳이었다.
“저기 생선 요리가 엄청 유명하대요. 가서 생선 먹어요, 생선.”
“좋지.”
“어? 근데 형님 생선도 드시나요? 별로 안 좋아하시지 않았어요?”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였다.
“먹을 수 있을 때 먹어 둬야지. 그나저나 너는 처음 가 보는 거냐?”
“헤헤, 사실 한 번 가 봤어요. 친구들이랑요.”
“친구라…… 청강서원(聽康書院)의?”
“네! 다들 좋은 친구들이에요.”
벽산연가는 여타 무림 문파보다 문무(文武)를 강조했다. 뛰어난 석학이 되는 것은 바라지 않았지만, 최소한 남들 이상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선조들의 생각이었다.
그 가르침은 칠대세가의 반열에 오른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연지평이 청강서원에 다니면서 글을 배우는 것도 그런 연유였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잘 배워 두도록 해라. 배워서 나쁠 거 없으니까.”
연지평이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물었다.
“한데 형님은 앞으로도 안 나오실 거예요?”
“청강서원에?”
“네!”
“안 나간다.”
청강서원에는 연호정이 먼저 나가서 배웠다. 하지만 이 년 전, 무공에 집중하기 위해 글도 끊어 버렸다.
연지평의 얼굴에 옅은 실망이 드리워졌다.
“그, 그러시구나.”
참 솔직한 녀석이야.
안쓰럽지만 역시나 나갈 생각은 없다. 글이 싫어서가 아니라 더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친구들이랑은 잘 지내는 모양이지?”
“그럼요. 아! 그러고 보니 이번에 서원으로 단기 청강생들이 왔어요!”
“단기 청강생?”
“네! 안휘의 유명한 무가 출신들이에요. 그중에 남궁세가(南宮世家)의 자제도 있어요!”
언제 그랬냐는 듯 밝아진 표정으로 얘기한다.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남궁에서?”
“네! 놀랍죠?”
그랬던가?
그 부분에 대해서는 기억이 안 난다. 애초에 이 시기에는 자기 자신밖에 관심이 없었다.
‘남궁…… 남궁이라.’
강소와 인접한 안휘 최고의 명가.
연가와 함께 칠대세가로 꼽히는 가문이지만 연가보다 훨씬 역사가 오래된 가문이었다.
남궁하면 검(劍)이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검가(劍家)로 최고로 유명한 것이 바로 남궁세가였다.
그것은 모용세가에서 불세출의 검인(劍人)이 등장한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형님?”
“음?”
“왜 그러세요? 표정이 안 좋으신데요?”
“아니다. 어서 가자.”
“네!”
두 사람이 마침내 고양루로 들어갔다.
고양루는 생각 외로 한적했다. 총 사 층 짜리 주루에 열 명도 없는 것 같았다.
“운이 좋네요, 형님. 사 층으로 가요!”
“그래.”
사 층에 오르니 경치가 무척 좋았다. 창가가 탁 트여 있어서 바람은 차도 춥다기보다는 상쾌했다.
“좋죠? 좋죠?”
“그래, 잘 온 것 같다.”
과거 많이 와 봤던 곳이지만 처음 온 것처럼 기분이 새로웠다.
창가 자리에 앉자 연지평은 신이 나서 음식을 시켰다. 생선 요리 하나와 채소볶음 두어 개를 시키니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너무 비싼 거 아냐?”
“용돈 많이 모아 놨어요!”
“네가 사려고?”
“그럼요! 제가 사 드리겠다고 했잖아요!”
하긴, 돈도 안 챙겨 왔구나.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잘 얻어먹으마.”
“얼마든지요!”
고양루의 요리란 요리는 다 살 기세였다. 눈이 초롱초롱한 것이 잔뜩 신이 난 강아지가 따로 없었다.
연호정은 그런 동생이 귀여웠다. 그리고 동시에 부담스럽기도 했다.
‘참 밝은 아인데.’
이런 아이를 질투하고 못되게 굴었다. 폭언이나 폭행을 행사한 건 아니지만, 때로는 무관심이 훨씬 더 잔혹할 때가 있다.
그래서 부담스러워도, 연지평 앞에서는 유독 웃으려고 애를 썼다. 지난 잘못이 주는 후회가 그만큼 컸다.
싱글벙글 웃으며 연호정을 보던 연지평이 일순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응?”
“기분 상하고 그런 일은 없으시죠?”
“뭐가?”
“아니요. 그냥…… 괜히 신경 쓰이는 일이 있다던가, 그런 거요.”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다? 그런 일은 없었다만.”
“그러시구나.”
“왜? 얼굴이 그렇게 안 좋아 보이냐?”
“아니에요! 혹시나 해서요.”
“싱거운 녀석.”
연호정이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경치를 구경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형을 보며 연지평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괜찮으신가 보다.’
당시의 비응대주 강윤의 처사는 연가의 사람으로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생이 보는 앞이지 않았나. 누구라도 민망해할 만하다.
다행히도 형은 크게 개의치 않아 하는 것 같았다. 오히려 자신 때문에 그런 일을 겪은 것 같아서 연지평은 너무나 미안했다.
웃으며 연호정을 보던 연지평이 일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형님.”
“응?”
“어…… 제가 이런 말씀 드려도 되는지 모르겠는데요.”
“뭔데?”
“비연기(飛燕氣)가 활발해지셨네요?”
호오?
“알아보겠느냐?”
“네? 아, 네. 긴가민가했는데 확실히 예전하고 달라지신 것 같아서요.”
연호정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연지평을 보았다.
‘그걸 느꼈다고?’
단전이 활성화되고 비연심법도 대성했지만, 그건 맥을 짚어 보지 않고서는 알아채기 힘든 변화다.
연호정이 끊임없이 기를 갈무리하는 데에 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연심법 자체가 수준 높은 무학이 아닌 만큼 변화의 폭도 크지 않다. 겉으로 보면 진기(眞氣)의 변화를 알아채기 힘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걸 동생이 꿰뚫어 본 것이다. 아직 일류라 할 만한 실력이 아님에도.
“비연심법을 대성했다.”
연지평이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저, 정말요?!”
“그래.”
너무 느닷없는 말이라서 안 믿기려나?
“축하드려요! 정말 축하드려요, 형님!”
믿네.
연지평은 마치 자기 일처럼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마구 흔드는 모습이 엄청 신이 나 보였다.
그런 동생이 고마웠지만, 고마움보다 놀라움이 더 컸다.
‘재능이 뛰어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연호정의 얼굴에 은은한 감탄이 일었다.
‘이 녀석, 완전히 괴물이었잖아?’
보통 무공에 재능이 있다고 보는 경우는 두 가지로 나뉜다. 신체가 뛰어난 경우와 머리가 뛰어난 경우.
하지만 연지평의 재능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감이 좋아.’
육체의 우월함, 뛰어난 안목보다도 더 갖기 어려운 것이 바로 감(感)이다.
논리와 이성을 압도하는 힘. 말하자면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난 능력이다. 다른 분야에서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무공에 한해서 연지평의 감각은 누구보다도 뛰어난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육체의 재능 역시 연가 최고라 불리고 있잖은가.
‘제대로 연마하면 멀지 않은 시기에 이름 좀 날리겠군.’
연지평이 잔뜩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형님은 금방 강해지실 거예요! 분명히요!”
“그래, 그래야지.”
어찌 되었든 서로에게 놀라움을 안겨 준 순간이었다.
잠시 후, 요리가 나왔다.
두 사람은 식사를 하는 와중에도 웃고 떠들었다. 대개 연지평이 말을 하는 쪽이었지만, 연호정도 말수가 적진 않았다.
순식간에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차도 시켰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에서 좋은 향이 났다.
“형님, 심법도 대성하신 김에 우리 같이 수련해요!”
“안 돼.”
생각보다 단호한 거절이었다. 연지평이 목을 움츠렸다.
“왜요?”
“너와 난 수련하는 방법이 다르거든. 나중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각자가 따로 하는 게…… 음?”
연호정이 계단으로 시선을 돌렸다.
“왜 그러세요, 형님?”
“…….”
“형님?”
“상당한데?”
상당하다니? 뭐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연지평은 문득 저 멀리 일 층에서부터 올라오는 은은한 기도를 느꼈다.
연지평의 눈이 커졌다.
“고수?!”
아니, 고수는 아니다.
진짜 고수는 이룬 경지를 실전에서 구 할 이상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고수라 불릴 자격이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일 층에서 올라오는 이 중 고수는 없었다. 적어도 연호정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룩한 경지만큼은 상당했다.
‘나이에 비해 말이지.’
기(氣)에서 묻어 나오는 활력이 무척 싱그러웠다. 약관(弱冠)도 안 된 나이가 분명했다.
“아!”
연지평이 탄성을 질렀다.
“왜? 아는 사람이냐?”
“네! 고수는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익숙한 기도가 느껴져요. 서원 친구일 거예요.”
서원 친구라?
“인사라도 하고 오거라.”
“앗?! 그래도 될까요?”
“몰랐다면 몰라도, 아는데 인사도 없이 지나칠 순 없잖냐. 갔다 와.”
연지평이 슬그머니 일어났다.
“그럼 형님, 금방 갔다 올게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천천히 얘기하다 와.”
연지평이 후다닥 계단을 내려갔다.
연호정은 웃으며 턱을 괴었다.
‘쾌활하군.’
워낙 어둡게 자라서 그런 걸까.
흑도를 규합하며 어느 정도 사회성은 길렀지만, 연지평만큼 밝지는 않았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게 귀찮을 때도 많았다.
그래서 동생의 저런 모습이 좋았다. 자신한테는 없는 성격이니까.
‘밝게 커라. 세상이 험하다고 매 순간 진지해질 필요는 없어.’
누구보다도 멋지게 컸으면 좋겠다. 이제 와 연호정이 동생에게 바라는 것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차를 마시고 창밖의 경치를 구경하는 연호정.
이런 여유를 즐길 때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처음으로 동생과 외식하러 온 것 아닌가.
멸문에 대비하는 게 가장 중요하지만, 놓쳐선 안 되는 것도 있는 법이었다.
그렇게 연호정이 짧은 여유를 즐기고 있을 때였다.
“여기야?”
“오! 삼 층만 해도 확실히 다르네!”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삼 층에서부터 들려왔다.
그리고 당황한 연지평의 목소리도.
“자, 잠깐만요. 일단 저희 형님한테 말을…….”
“어허! 그냥 인사만 하겠다는데 왜 그래? 게다가 너희가 사 층을 전세 낸 것도 아니잖느냐. 우리도 구경 좀 하자고.”
“아…….”
연지평의 목소리에서 알 수 없는 당혹감이 묻어 나왔다.
잠시 후.
“히야, 경치 죽이네!”
“올라오길 잘했다!”
연호정이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처음 보는 이남일녀(二男一女) 사이에 끼어 있는 연지평의 얼굴은 무척이나 난처해 보였다.